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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趾源, <孔雀舘文稿自序>(공작관문고자서), <<燕巖集>> 권3
박지원, <글쓰기>
원문:
文以寫意則止而已矣 彼臨題操毫 忽思古語 强覓經旨 假意謹嚴 逐字矜莊者 譬如招工寫眞 更容貌而前也 目視不轉 衣紋如拭 失其常度 雖良畵史 難得其眞。爲文者 亦何異於是哉 語不必大 道分毫釐 所可道也 瓦礫何棄 故 檮杌惡獸 楚史取名 椎埋劇盜 遷固是叙
爲文者 惟其眞而已矣 以是觀之 得失在我 毁譽在人 譬如 耳鳴而鼻鼾
小兒嬉庭 其耳忽鳴 啞然而喜 潛謂鄰兒曰 爾聽此聲 我耳其嚶 奏鞸吹笙 其團如星 鄰兒傾耳相接 竟無所聽 閔然叫號 恨人之不知也
甞與鄕人宿 鼾息磊磊 如哇如嘯 如嘆如噓 如吹火 如鼎之沸 如空車之頓轍 引者鋸吼 噴者豕豞 被人提醒 勃然而怒曰 我無是矣
嗟乎 己所獨知者 常患人之不知 己所未悟者 惡人先覺 豈獨鼻耳有是病哉 文章亦有甚焉耳 耳鳴 病也 閔人之不知 况其不病者乎 鼻鼾非病也 怒人之提醒 况其病者乎
故 覽斯卷者 不棄瓦礫 則 畵史之渲墨 可得劇盜之突髩 毋聽耳鳴醒我鼻鼾 則 庶乎 作者之意也
읽기:
文以寫意(문이사의)면 則(즉) 止而已矣(지이이의)니라. 彼臨題操毫(피임제조호)하고 忽思古語(홀사고어)하고 强覓經旨(강멱경지)하여 假意謹嚴(가의근엄) 逐字矜莊者(축자긍장자)는 譬如(비여)하건대 招工寫眞(초공사진)할새 更容貌而前也(갱용모이전야)라. 目視不轉(목시부전)하고 衣紋如拭(의문여식)하며 失其常度(실기상도)면 雖良畵史(수양화사)라도 難得其眞(난득기진)이니라. 爲文者(위문자)가 亦何異於是哉(역하이어시재)리오.
語不必大(어불필대)하고, 道分毫釐(도분호리)면 所可道也(소가도야)니 瓦礫何棄(와력하기)리오. 故(고)로 檮杌惡獸(도올악수)나 楚史取名(초사취명)하고, 椎埋劇盜(추매극도)를 遷固是叙(천고시서)하니라.
爲文者(위문자)는 惟其眞而已矣(유기진이이의)니라. 以是觀之(이시관지)하면 得失在我(득실재아)하고 毁譽在人(훼예재인)이라. 譬如(비여)하되, 耳鳴而鼻鼾(이명이비한)이니라.
小兒嬉庭(소아희정)하다가 其耳忽鳴(기이홀명)하니 啞然而喜(아연이희)하고 潛謂鄰兒曰(잠위인아왈) 爾聽此聲(이청차성)하는가, 我耳其嚶(아이기앵)하고 奏鞸吹笙(주필취생)이 其團如星(기단여성)하다. 鄰兒傾耳相接(인아경이상접)하나 竟無所聽(경무소청)이라 하니, 閔然叫號(민연규호)하며 恨人之不知也(한인지부지야)라.
甞與鄕人宿(상여향인숙)한데 鼾息磊磊(한식뢰뢰)하여 如哇如嘯(여와여소)하고 如嘆如噓(여탄여허)하고 如吹火(여취화)하고 如鼎之沸(여정지불)하고, 如空車之頓轍(여공거지돈철)하고, 引者鋸吼(인자거후) 噴者豕豞(분자시후)하였도다. 被人提醒(피인제성)하고 勃然而怒曰(발연이노왈)하되 我無是矣(아무시의)라.
嗟乎(차호)라, 己所獨知者(기소독지자)는 常患人之不知(상환인지부지)하고 己所未悟者(기소미오자)는 惡人先覺(오인선각)하나니, 豈獨鼻耳有是病哉(기독비이유시병재)리오. 文章亦有甚焉耳(문장역유심언이)니라. 耳鳴(이명)은 病也(병야)인데 閔人之不知(민인지부지)하거늘, 况其不病者乎(황기불병자호)아. 鼻鼾(비한)은 非病也(비병야)인데 怒人之提醒(노인지제성)하거늘, 况其病者乎(황기병자호)아.
故(고)로 覽斯卷者(남사권자)는 不棄瓦礫(불기와력) 則(즉) 畵史之渲墨(화사지선묵)으로 可得劇盜之突髩(가득극도지돌빈)이리라. 毋聽耳鳴(무청이명)하고 醒我鼻鼾(성아비한)이면, 則(즉) 庶乎(서호) 作者之意也(작자지의야)하리라.
풀이:
“文以寫意”(문이사의)는 “글로 뜻을 그려내다”이다. “則”(즉)은 “곧”이다. “止而已矣”(지이이의)는 “그칠 따름이다”이다. “彼臨題操毫”(피임제조호)는 “저 글제를 앞에 두고 붓을 잡다”이다. “忽思古語”(홀사고어)는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다”이다. “强覓經旨”(강멱경지)는 “억지로 경전의 뜻을 찾다”이다. “假意謹嚴”(가의근엄)은 “뜻을 거짓되게 꾸며 근엄하다”이다. “逐字矜莊者”(축자긍장자)는 “글자마다 장엄함을 자랑하는 것”이다. “譬如”(비여)는 “견주어 말하면 이와 같다”이다. “招工寫眞”(초공사진)은 "화공을 불러 초상을 그리다“이다. “更容貌而前也”(갱용모이전야)는 “용모를 고치고 나오다”이다. “目視不轉”(목시부전)은 “눈이나 시선을 굴리지 앓다”이다. “衣紋如拭”(의문여식)은 "옷이나 무늬가 씻어놓은 듯하다”이다. “失其常度”(실기상도)는 “평상시의 태도를 잃다”이다. “雖良畵史”(수양화사)는 “비록 잘 그리는 화가라도”이다. “難得其眞”(난득기진)은 “참된 모습을 얻어내기 어렵다”이다. “爲文者”(위문자)는 “글을 마련하는 사람”이다. “亦何異於是哉”(역하이어시재)는 “또한 이와 어떻게 다르겠는가”이다.
“語不必大”(어불필대)는 “말은 반드시 클 필요가 없다”이다. “道分毫釐”(도분호리)는 “도(道)는 작은 터럭에서도 나누어지다”이다. “所可道也”(소가도야)는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바이다"이다. “瓦礫何棄”(와력하기)는 “기와나 자갈 같은 것인들 왜 버리리”이다. “故”(고)는 “그러므로”이다. “檮杌惡獸”(도올악수)는 “도올(檮杌)은 나쁜 짐승이다”이다. “楚史取名”(초사취명)는 “초(楚)나라 역사서의 이름으로 삼다”이다. “椎埋劇盜”(추매극도)는 “때려죽이기도 하고 암매장하기도 하는 극악한 도적”이다. “遷固是叙”(천고시서)는 “사마천(司馬遷)이나 반고(班固)가 이것을 서술하다”이다.
“爲文者”(위문자)는 “글을 마련하는 사람”이다. “惟其眞而已矣”(유기진이이의)는 “오직 진실하면 된다”이다. “以是觀之”(이시관지)는 “이 점을 근거로 살피다”이다. “得失在我”(득실재아)는 “얻고 잃는 것은 내게 달려 있다”이다. “毁譽在人”(훼예재인)은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소관이다”이다. “譬如”(비여)는 “비유하면 이렇다”이다. “耳鳴而鼻鼾”(이명이비한)은 “귀에서 소리가 들리거나 코를 고는 것”이다.
“小兒嬉庭”(소아희정)은 “아이가 뜰에서 놀다”이다. “其耳忽鳴”(기이홀명)은 “귀에서 갑자기 소리가 울리다”이다. “啞然而喜”(아연이희)는 “아주 기뻐하다”이다. “潛謂鄰兒曰”(잠위인아왈)은 “곁에 있는 아이에게 가만히 말하다”이다. “爾聽此聲”(이청차성)은 “너도 이 소리가 들리나?”이다. “我耳其嚶”(아이기앵)은 “내 귀에서 새 소리가 나다”이다. “奏鞸吹笙”(주필취생)은 “피리 불고 생황을 켜다”이다. “其團如星”(기단여성)은 "둥그런 것이 별과 같다”이다. “鄰兒傾耳相接”(인아경이상접)은 “곁에 있는 아이가 귀 기울이며 맞대다”이다. “竟無所聽”(경무소청)은 “끝내 들리는 것이 없다”이다. “閔然叫號”(민연규호)는 “가엾다고 소리 지르다”이다. “恨人之不知也”(한인지부지야)는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을 한탄하다”이다.
“甞與鄕人宿”(상여향인숙)은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잠을 자다”이다. “鼾息磊磊”(한식뢰뢰)는 “코 골며 숨 쉬는 소리 쌓이고 쌓이다”이다. “如哇如嘯”(여와여소)는 “토하는 것 같고 울부짖는 것 같다”이다. “如嘆如噓”(여탄여허)는 “탄식하는 것 같고 흐느끼는 것 같다”이다. “如吹火”(여취화)는 “불을 불어대는 것 같다”이다. “如鼎之沸”(여정지불)은 “솥에서 물이 끓는 것 같다”이다. “如空車之頓轍”(여공거지돈철)은 “빈 수레가 갑자기 덜컹거리는 것 같다”이다. “引者鋸吼”(인자거후)는 “끌어당기는 것은 톱을 켬이다”이다. “噴者豕豞”(분자시후)는 “내뿜는 것은 돼지 꿀꿀거림이다”이다. “被人提醒”(피인제성)은 “그 사람을 깨우다”이다. “勃然而怒曰”(발연이노왈)은 “발끈 화를 내면서 말하다”이다. “我無是矣”(아무시의)는 “나는 그러지 않았다”이다.
“嗟乎”(차호)는 탄식하는 말이다. “己所獨知者”(기소독지자)는 “자기 혼자 아는 사람”이다. “常患人之不知”(상환인지부지)는 “늘 다른 사람이 몰라준다고 근심하다”이다. “己所未悟者”(기소미오자)는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惡人先覺”(오인선각)은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차리는 것을 싫어하다”이다. “豈獨鼻耳有是病哉”(기독비이유시병재)는 “어찌 코나 귀에만 이런 병이 있으리”이다. “文章亦有甚焉耳”(문장역유심언이)는 “글에도 심한 증세가 있다”이다. “耳鳴”(이명)은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病也”(병야)는 “병이다”이다. “閔人之不知”(민인지부지)는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다”이다. “况其不病者乎”(황기불병자호)는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겠는가?”이다. “鼻鼾”(비한)은 “코골이”이다. “非病也”(비병야)는 “병이 아니다”이다. “怒人之提醒”(노인지제성)는 “다른 사람이 깨워주면 노하다”이다. “况其病者乎”(황기병자호)는 “하물며 병인 것이야”이다.
“故”(고)는 “그러므로”이다. “覽斯卷者”(남사권자)는 “이 책을 보는 사람”이다. “不棄瓦礫”(불기와력)은 “기와나 자갈 같은 것들을 버리지 않다”이다. “則”(즉)은 “곧”이다. “畵史之渲墨”(화사지선묵)은 “화가가 먹을 짙게도 얕게도 칠하다”이다. “可得劇盜之突髩”(가득극도지돌빈)은 “극악한 도적 귀밑에 갑자기 돋은 털을 얻어내다”이다. “毋聽耳鳴”(무청이명)은 “귀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않다”이다. “醒我鼻鼾”(성아비한)은 “내가 코 고는 것을 깨닫다”이다. “則”(즉)은 “곧”이다. “庶乎”(서호)는 “가깝다”이다. “作者之意也”(작자지의야)는 “작자가 의도하다”이다.
번역:
글은 뜻을 그려내고 그칠 따름이다. 글제를 앞에 두고 붓을 잡으면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고, 억지로 경전의 뜻을 찾으며, 뜻을 거짓되게 꾸며 근엄한 체하고, 글자마다 장엄함을 자랑하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비유하자면, 화공을 불러 초상을 그리라고 하고, 용모를 고치고 나와 시선을 고정시키고, 옷이나 무늬를 씻어놓은 듯이 꾸며 평상시의 태도를 잃으면, 비록 잘 그리는 화가라도 참된 모습을 얻어내기 어렵다. 글을 마련하는 사람이 또한 이와 어떻게 다르겠는가?
말은 반드시 클 필요가 없다. 도(道)는 작은 터럭에서도 나누어지니, 도라고 할 수 있다면 기와나 자갈 같은 것인들 왜 버리겠는가? 이런 까닭에 도올(檮杌)은 나쁜 짐승인데, 초(楚)나라에서 역사서의 이름으로 삼았다. 때려죽이기도 하고 암매장하기고 하는 극악한 도적을 사마천(司馬遷)이나 반고(班固)가 글에 올렸다.
글을 마련하는 사람은 오직 진실하면 된다. 이 점을 근거로 살피면, 얻고 잃는 것은 내게 달려 있고,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소관이다. 귀에서 소리가 들리거나 코를 고는 것을 비유로 들어 말해보자.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귀에서 갑자기 소리가 울리니 아주 기뻐했다. 곁에 있는 아이에게 가만히 말했다. “너도 이 소리가 들리나? 내 귀에서 새 소리가 난다. 피리 불고 생황을 켠다. 둥그런 것이 별과 같다.” 곁에 있는 아이가 귀 기울이며 맞대도 끝내 들리는 것이 없다고 하니, 가엾다고 소리 지르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을 한탄했다.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잠을 잔 적 있었다. 코 골며 숨 쉬는 소리 쌓이고 쌓여, 토하는 것 같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탄식하는 것 같고 흐느끼는 것 같고, 불을 불어대는 것 같고, 솥에서 물이 끓는 것 같고, 빈 수레가 갑자기 덜컹거리는 것 같았다. 끌어당기는 것은 톱을 켬이고, 내뿜는 것은 돼지 꿀꿀거림이었다. 그 사람을 깨우니, 발끈 화를 내면서 말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 그렇다. 자기 혼자 안다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이 몰라준다고 근심한다.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차리는 것을 싫어한다. 어찌 코나 귀에만 이런 병이 있으리오. 글에도 심한 증세가 있다.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은 병인데,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한다.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할 것이 있는가? 코골이는 병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 깨워주면 노한다. 하물며 병인 것이야 말할 것이 있는가?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사람도 기와나 자갈 같은 것들을 버리지 않고, 화가가 먹을 짙게도 얕게도 칠하듯 하며, 극악한 도적 귀밑에 갑자기 돋은 털까지 얻어낼 것이다. 귀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가 코 고는 것을 깨달으면, 작자가 의도한 데 가까워지리라.
논의:
글은 위신을 차리고 행세를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삶의 실상을 그려내야 한다. 삶의 실상을 그려내려면 괴이한 짓까지 비속한 말을 사용해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 이런 요지를 흥미롭게 구체화해 글에 관한 글을 썼다.
잘못된 글은 어떤 것인지 납득할 수 있게 말하려고 충격을 주는 예증을 둘 들었다. 자기 귀에서 나는 소리를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아이와 같은 글도 있다고 했다. 코를 심하게 골아 피해를 끼치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는 촌사람 같은 글도 있다고 했다.
자기 귀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은 병이다. 혼자 환상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병을 앓으면서 남들이 몰라준다고 나무라기까지 하니, 병이 아닌 정도의 이상증세까지 구태여 시비할 것은 없다고 했다. 코를 골아 시끄럽게 하는 짓이야 병이라고 할 것까지 없다. 그런 글을 자기 좋은 대로 마구 써내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병이 분명한 일탈행위를 제어하는 것은 더욱 난감하다고 했다.
오늘날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글을 다시 읽어보자. “새 소리가 난다. 피리 불고 생황을 켠다. 둥그런 것이 별과 같다.” 이런 서정시가 넘치듯이 많다. 오묘한 것을 발견을 했다고 흥분하면서 자기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나무란다. 착각은 진실성이 없다고, 지금은 누가 어떻게 일러주는가?
“토하는 것 같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탄식하는 것 같고 흐느끼는 것 같고, 불을 불어대는 것 같고, 솥에서 물이 끓는 것 같고, 빈 수레가 갑자기 덜컹거리는 것 같았다. 끌어당기는 것은 톱을 켬이고, 내뿜는 것은 돼지 꿀꿀거림이었다.” 이런 수작을 쏟아 붓는 소설도 흔해빠졌다. 소리가 요란하면 시끄럽기만 하다고, 어떤 이론을 갖추고 충고할 것인가?
이 글을 책 서문으로 삼고, 독자를 깨우쳐주려고 했다.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거나 코를 골아 시끄럽게 하는 것 같은 글을 쓰지 말라고 끝으로 당부하기 전에, “기와나 자갈 같은 것들”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다시 했다. “극악한 도적 귀밑에 갑자기 돋은 털까지” 그려야 한다고 하기까지 했다.
전거로 장식된 글을 격조 높게 쓰려고 허세를 부리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고 한 것만이 아니다. 전후의 연결을 차단하고 충격을 추는 예증을 느닷없이 제시해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것을 관념 타파를 위한 충격 작전으로 삼았다. 이것이 글을 잘 쓰는 최상의 비결임을 알아차리도록 했다.
*<고정불망(古情不忘)>
*<잔년생광(殘年生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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