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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정부” 유적지-3호선 경복궁 역, 7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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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수립 준비위원회는 1919년 3월 17일경 서울 내수동(內需洞)의 한성오(韓聖五) 선생댁에서 모였고, 이때 세 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첫째는 4월 2일 인천만국공원(仁川萬國公園)에서 전국 13도(道) 대표자 회의를 열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민대회(國民大會)를 개최하여 국민과 세계에 공포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임시정부의 명칭을 “한성정부”(漢城政府)로 하고 초대 각원(閣員) 선정하여 13도 대표회의에서 승인을 얻어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때 선출된 초대각원(初代閣員) 13명과 평정관(評政官) 18명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을 이루며 임시정부 성립에 중추역할 하였다.
<초대각원(初代閣員) 13명>-집정관 총재;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외무부총장; 박용만(朴容萬), 내무부총장; 이동령(李東寧), 군무부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부총장; 이시영(李始榮), 법무부총장; 신규식(申奎植, 학무부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부총장; 문창범(文昌範,) 참모부총장; 유동열(柳東說), 노동국총장; 안창호(安昌浩).
<평정관(評政官) 18명>-조정구(趙鼎九) 박은식(朴殷植) 현상건(玄尙健), 한남수(漢南洙), 손보형(孫晉衡), 신채호(申采浩), 정량필(鄭良弼), 현순(玄楯), 손정도(孫貞道), 정현식(鄭鉉湜), 金晋鏞), 조성환(曺成煥), 이규풍(李奎豐), 박경종(朴景鍾), 박찬익(朴瓚翊), 이범윤(李範允), 이규갑(李奎甲), 윤해(尹解)
셋째는 이동욱(李東旭)으로 하여금 “국민대회취지서”(國民大會趣旨書)와 임시정부 선포문(臨時政府 宣布文)과 약법(約法)을 작성토록 하였다. 또한 이규갑(李奎甲), 홍면희(洪冕憙), 민강(閔橿)은 전국(全國) 13도대표(道代表)를 인천(仁川)에 도착토록 연락하는 임무를 맡았다. 현석칠(玄錫七)은 선언서(宣言書)와 취지서(趣旨書) 등을 조각공 두 사람에게 맡겨 비밀히 6천매를 인쇄 준비토록 하였다.
국민대회 전국(全國) 13도대표(道代表)는 다음과 같다.
조만식(曺萬植), 이용규(李容珪), 강훈(康勳), 김탁(金鐸), 최전구(崔詮九), 이동수(李東秀), 유식(柳植), 김명선(金明善), 박한영(朴漢永), 이종욱(李種郁), 유근(柳瑾), 주익(朱翼), 김현준(金顯峻), 박장호(朴章浩), 송지헌(宋之憲), 강지성(姜芝聲), 홍성욱(洪性郁), 이용준(李容俊), 이동욱(李東旭), 장근(張根), 박택(朴鐸), 장정(張 檉), 정택교(鄭澤敎), 기식(奇寔), 김유(金瑬)
2. 인천만국공원에서 전국 13도 대표 모여,국민대회 개최키로 결의(1919.4.2.)
1919년 4월 2일 인천만국공원(仁川萬國公園)에 각 도(道) 대표 20여명이 오후 3시 일경(日警)의 감시를 피해 음식점 방을 빌려 비밀회의(秘密會談)로 모였다. 여기서 임시정부 의 조직과 각원명단, 국민대회 취지서 및 선포문 등을 통과시키고, 정부수립(政府樹立) 한성임시정부선포(漢城臨時政府宣布)는 4월 23일 서울 보신각(普信閣)에서 국민대회(國民大會)를 개최하고 선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이규갑(李奎甲), 강대원(姜大鉉)을 상해(上海)로 파견하여 정부수립을 독립지사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 國民大會趣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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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 내수동(內需洞) 64번지 한성오(韓聖五) 댁에서 한남수, 홍면희, 이규갑, 김은국, 김규, 민강 등이 준비회의(準備會議)를 갖고 임시정부 및 국민대회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토의하여, 이동욱(李東旭)으로 하여금 국민대회취지서(國民大會趣旨書,) 선포문(宣布文) 및 약법(約法) 등을 기초토록 하였고, 현석칠(玄錫七)은 목판(木刻)으로 6000매(枚) 인쇄를 맡았다.
3. 국민대회 열려-한성정부 설립 공포(종로 보신각, 1919년 4월 23일)
1919년 4월 23일 13도 국민대표들이 서울 서린동(瑞麟洞) 중국요리점 봉춘관(奉春館) 에 “국민대회”라 써 붙히고 정부수립을 선포하였으며, 동시에 종로 보신각(普信閣 )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시민들에게 국민대회 선언문(國民大會宣言文) 및 약법(約法) 등을 뿌렸다. 이 사실이 연합통신(UPI)의 전파를 타고 전 세계(全世界)에 알려졌다.
▲ 한성정부 선포한 곳-표지석(종로 보신각 앞) |
한성임시정부를 주도한 이규갑(李奎甲) 목사는 충남 아산 출생(1888.11.5.)으로 의병출신이다. 한성사범학교(1906)을 졸업하고,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수학한 전도 인이었으며,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공주 영명학교(교감), 평양 등지에서 애국계몽교육운동을 하시던 분이시다. 이분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상해한인청년단 간부로 활동하였고, 1922년 목사안수를 받기도 하였다. 해방 후 건준 재무부장, 제2대 국회위원으로 당선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받은 분으로,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큰 공로자이시다.
현석칠(玄錫七) 목사는 평남 용강 출생(1880.1.23.)으로 18세 때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1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 제1회 졸업생으로 최병헌, 현순, 정춘수 등이 그의 동기이다. 졸업 후 서울 동대문, 평양 남산현, 공주읍교회 목회하였다. 3.1운동 당시 공주읍교회에서 목회하며, 공주영명학교 교사, 학생, 졸업생들과 4월 1일 공주읍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현석칠 목사는 3월 중순부터 공주영명학교 교감 출신인 이규갑과 한성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는 국민대회 간부로 한남수, 이규갑, 이동욱 등과 임시정부국민대회 취지문, 선포문, 결의문, 약법을 목판으로 6,000여 매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만세운동 등으로 1919년 5월 20일 경 안창호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갇혔고, 8월 29일 석방되었다.
1919년 11월 연회에서 평양 남산현 교회로 파송 받았으며,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항일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였다.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애국부인회”와 “애국단” 활동으로 독립군 자금모금에 주도하여 일경에 다시 체포되어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1920년 여름까지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이후 강서, 수원, 영변, 평양 신양리, 유정교회에서 1933년까지 목회하고, 자원은퇴(1935년) 후 만주로 건너가 하얼빈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내고, 만주 사평가교회에서 은퇴(1941년)하여, 용정감리교회를 지원하다가 1943년 별세한 후 용정 공원묘지에 윤동주와 함께 안장되었다. 현석칠 목사는 2004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대전 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또한 이동욱(李東旭) 선생은 서울 죽청동의 경성부인학교 교사로 봉직하던 분으로 국민대회에 서울대표로 참가하여 임시정부 선포문과 약법 및 국민대회 취지서를 작성한 분이다.
4. 한성임시정부 약법(略法), ‘민주제“, ”대의제“로 ”민주공화국“ 임을 선포
임시정부 약법(略法)에서, 국민대회 취지로는 “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독립의 기초를 견고케 하며, 인간필연의 요구에 보응하기 위하여 본회를 조직하고 세계에 선포하노라” 하였다. 또한 “자유평등을 신장하며 정의인도를 옹호하여 동방평화를 보전하고, 세계공안을 존중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 한다”하였고, 이것은 “신의 명령이며 진리의 발동”이라 선포하였다.
약법(略法)에서, 결의사항으로는 임시정부조직, 일본정부의 조선통치권 철거, 조선인으로 일본관청에 재직금지, 퇴직 등을 결의하였다.
약법(略法)은 임시정부령도 선포하였다. 제1호 명령은 “조세를 거부하라”이고, 제2호 명령은 “적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는 것이며, 조선국민의 의무로 ”납세“와 ”병역“의 의무라 선포하였다. 독립군 양성, 독립투쟁을 선포하였다.
특히 임시정부 약법(略法)의 내용은 “민주제”(民主制)를 채택하였고 정치는 “대의제”(代議制)를 채택하여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임을 천명한 점에서 주요한 의의가 있다.
5. 한국기독교는 굽힘없이 신앙의 가치 지키고 실현해 나가야
이상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서, "한성임시정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한성임시정부"는 국내와 국외에 설립된 "임시정부"들의 근거가 되고, "상해임시정부"로 통합하여 역사적 정통을 이어, "대한민국 건국"을 이루고 완수를 향해 투쟁하였다. 3.1독립운동 직후 국내에서 설립 된 "한성임시정부"는 "국민대표"를 선출하여, "민주주의 법령"을 선포하고 국민주권의 "대한민국"을 건립하였고,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기독교인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고, 전국 교회가 통로가 되고, 참여하였음을 잊지 말라야 한다. 건국 논란에서 "한성정부"에 대한 조명과 연구, 주시가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민족의 과제를 가슴에 안고, "대한민국"의 독립투쟁과 건국, 역사에 참여하며 이끌어 온 중심임을 잊지 말고, 신앙의 가치를 굳게 지키며, 굽힘없이 삶속에 실현해 나가야 한다. 조국독립과 정의, 자유, 평등의 민주화를 실현하고, 남.북한 민족통일 완수와 세계평화와 안정, 구원 위해 참여해야 할 것이다.(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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