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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는 남강 자락을 따라 난 이름난 벼리(벼랑, 절벽)가 세 군데 있다. 그 하나가 남쪽 관문인 개양에서 넘어오는 길 아래위로 깎아지른 벼리가 있으니, 이른바 '새벼리'다.
새벼리 고개에 올라서면 비봉산 자락을 비롯 진주 원도심과 강남, 오른쪽으로 도동들판, 그 사이로 강물이 굽이쳐 선학산 '뒤벼리'에서 꺾이고 오리 안팎을 남녘으로 흘러온다.
새벼리에 부딪쳐 다시 굽이를 동으로 돌리고, 이윽고 달음산(월아산)에 막혀 북녘으로 흐름을 꺾는다. 그 어름에 혁신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또하나의 벼리는 망진산 북쪽 기슭에서 비롯돼 서녘 진양호에 이르는 십리가 넘는 벼랑이다. 이름하여 '저벼리'다. 저벼리는 진주성 북장대에 올라야 제모습을 볼 수 있다.
진주를 조망하는 데는 새벼리 고개만한 데가 드물지만, 바쁜 차량들이 꼬리를 무는 까닭에 차를 타고서는 머물러 구경할 자리나 겨를이 마땅찮다.
진주 출신 국문학자 김수업님은 문학을 말꽃, 예술을 삶꽃이라 일컬었다. 소설이면 이야기말꽃, 시나 시조면 노래말꽃이 되는 셈이다.
새벼리 중턱에 몇 해 전 말꽃집이 들어서더니 얼마 전엔 삶꽃을 가다듬은 집이 들어섰다. 한국시조문학관, 김희혜미술관이 그것이다.
이에 딸린 보문산방과 살림집 또는 곳간으로 쓸 집채를 아우르면 동산이라 할 만하겠다. 문학도 예술의 한 갈래로 삼으니 삶꽃동네, 삶꽃동산이라고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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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이 맞아준 김정희 관장과 부군 김상철 선생
지난 4월11일 오후 새벼리 한국시조문학관을 찾았을 때 김정희 관장과 부군 김상철 선생이 반가이 맞아주셨다. 문학관 전문요원 이희규님은 마침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워서 만나지 못했다.
김상철 선생은 올해 아흔셋으로 진주농림전문대학 학장 출신이자 현재 과학기술대학 명예총장 직함을 가지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시조문학관 대표이기도 하여, 이따금 칠암동에 있는 집과 새벼리 문학관을 자전거로 오간다고 한다.
시조를 쓰는 부인 김정희 여사를 아껴 늙마에는 오로지 부인의 뜻을 따르고 돕는 데서 보람을 찾으시는 모양이었다.
◇새벼리 산자락 동녘 자리잡아 주변 풍광과 조화이뤄
새벼리 산자락에 동녘으로 자리잡은 시조문학관과 미술관은 산세에 맞춰 한옥으로 지은 까닭에 땅을 누르지 않으면서 주변 풍광과 썩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김정희 관장은 <시조문학> 출신으로 1974년 시조집 <소심> 을 낸 뒤 최근 <구름운필> (2017, 고요아침)까지 시조집을 모두 열세권 내었다. 지난해에는 고산 윤선도 선생을 기리는 '고산문학상'을 받기까지 숱한 상을 받은 바 있다.
문학관과 미술관을 둘러보고 동산을 이렇게 가꾸기에까지 이른 과정을 여쭈어 봤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오래도록 글(시조)을 쓰는 일만도 어려운데, 시조문학관을 세우셨다. 우리나라에 시조문학관이 몇 곳이나 있는가?
-제가 알기로는 집을 제대로 지어 시조문학관이란 이름을 내건 곳은 한 곳도 없는 줄 안다. 김천의 '백수문학관'은 시조시인 백수 정완영 선생과 문학을 기리는 곳이다. 익산의 '가람문학관'은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조와 업적을 기리는 곳인데, 역시 문학관이란 이름을 붙였다. 화천의 '월하문학관'도 시조시인이자 학자 월하 이태극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저는 시조 그 자체를 내세우고 싶었다. 겨레의 얼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자 자랑거리기 때문이다. 진주를 넣으면 지역에 한정되는 느낌을 주고, 제 이름을 넣으면 격이 떨어지는 느낌을 줘서 이름이 좀 크지만 '한국시조문학관'으로 했다. 그만큼 이름값을 하도록 꾸리는 게 숙제이기도 하다.
▲시조가 예스러운 틀이어서 현대인의 심성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요즘 우리나라 시조시단이나 젊은 시조시인들의 생각이나 작품은 어떤가?
-대표적인 시조 전문지를 들추는 게 간략한 설명이 되겠다. <시조문학> 과 <현대시조>가 있다. <시조문학> 이 제일 오래됐고, 전통을 강조하는 편이다. 그밖에 <좋은시조>, <정형시학>, <시조시학>, <열린시학>들처럼 숱한 전문지가 있는데, 아무래도 파격이 많고 때로는 현대시의 아류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시조는 시조다워야 하며, 우리 얼을 담는 우리 노래여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본디 시조란 '시절가조'라 했는데 그만큼 당대의 현실을 담는 게 본디몫이 아닌가 한다. 세상은 달라지고 바뀌기 마련 아닌가. 시조란 그릇에 그 시절의 현실과 정서를 담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일본 비행기를 타면 <문예춘추>를 비치하는데, 거기에는 와카(和歌)를 앞에 싣고 뒤에 현대시를 둔다며, 자기 것과 전통을 무척 아끼는 그들의 자세가 무섭다고 덧붙였다.)
▲곳곳에 문학관이나 기념관이 있지만 대개 지자체에서 주민이 낸 세금으로 세운 줄 안다. 사비로 시조문학관을 세우셨는데, 그 동기와 내용은?
-혼인하기 전 숙명여대 국문과를 다녔는데, 가람 이병기 선생한테서 시조를 배운 적이 있다. 육이오 전쟁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마산에서 진주로 시집을 왔다. 칠암동에 셋방살이를 하면서 작은 밭뙈기를 얻어 어렵사리 채소 촉성재배를 시작했고, 그게 잘돼 서울에서 유명한 조선호텔에 납품까지 하게 됐다. 밭을 사서 나무농사(묘목기르기)도 했다. 당시 온나라에서 조림사업이 크게 벌어져 재미를 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칠암벌 논밭을 거의 사들일 정도로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에 육남매를 길렀다. 그렇게 살림을 하느라 1970년대 초반 시모상 치른 뒤에야 시조를 다시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시집온 지 20년 만이다. 그 즈음 칠암동 논밭을 처분하고 여기 새벼리 산자락을 사들였다. 처음엔 남편이 학교를 세울까 생각했으나 허가가 나지 않았다. 과수원과 찻집, 선방을 경영하다 뜻있는 일을 해보자고 한 게 오늘에 이르렀다. 시조문학관은 2013년에 열었다. (선생은 시조를 다시 공부하며 쓴 계기를 국문학자 정병욱님이 신구문화사에서 낸 <시조문학사전>을 구해 읽게 된 일을 꼽았다. 시조문학관엔 시조와 관련된 이론서, 시조집, 대표적인 시조시인들의 육필, 희귀한 사진과 족자, 숱한 유품과 본인의 시조집, 발표 잡지, 상패들 수천점 전시돼 있다. 시조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김희혜미술관 작품들과 김희혜 님의 유품들 미술관은 어떻게 세웠나?
-김희혜는 내 딸이다. 결혼 뒤 뒤늦게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몇차례 개인전도 열었고, 호평도 받았다. 동양화 가운데 채색화를 주로 그렸다. 그림이 좋고 아깝기도 하고 공간도 있고 해서 남긴 그림을 모아 미술관을 열었다. 딸은 몇 해 전 교통사고로 저세상 사람이 됐다. 어미 유품을 가다듬어야 걸맞을 일인데, 딸의 유품을 어미가 가다듬게 됐다. 첫아들도 사법시험을 치르고 집에 와서 발표를 기다리다 갑자기 저세상 사람이 됐다. 며칠 뒤 나온 합격자 발표명단에 들어있었다. 저로서는 그런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게 한 게 시조이기도 하다. 유미관(미술관 당호) 1층은 세미나실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소박하나마 복합문화 공간으로 내세울 만하게 됐다. (미술관엔 파꽃, 당귀꽃, 연꽃과 연잎 그림을 비롯해 크고 작은 그림들이 걸렸는데, 문외한이 보기에도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깊은 뜻이 담긴 그림들로 보였다.)
▲보문산방 앞에서 김정희 관장과 부군 김상철 선생 아픔이 크셨겠다. 시조문학관 활용 방식, 벌이는 행사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시경루(시조문관학 당호) 아래 '보문산방'은 문학인들의 공간이다. 여러 문학, 학술 동아리 모임을 한다. 숙박을 하는 경우는 조촐하지만 아침을 한끼 대접한다. 대관료는 받지 않는다. 지난해부터는 '토박이말 바라기' 모임과 같이 학생들에게 우리말 찾아쓰기 운동도 벌이고 있다. 어린 학생들에게 시조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해마다 '전국 초·중·고 학생 시조공모전' 사업을 벌여왔는데 올해가 4회째다. 시조 부흥운동의 한 갈래로 벌이는 사업이다. 해가 갈수록 반응이 좋다.
▲시조문학관 운영과 관련하여 지방정부나 당국에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지 않을지?
-당국에서 시조문학관에 전문요원을 두는 일을 협조해줬다. 일시적인 도움이지만 고맙게 여기고 있다. 바라는 바는 시조를 부흥시키는 데도 힘을 기울여줬으면 하는 것이다. 시조가 부흥해야 나라도 부흥하리라는 월하 선생의 말씀에 공감한다.
돌아오는 길에 김정희 관장이 택시를 잡아줬다. 문학관 동네 들머리가 벼랑 자락에 자리잡은 탓인지 시내버스 정류장도 두지 않았다. 교통당국의 배려가 필요해 보였다. 사재를 털어 문학관과 미술관을 짓고 시조 부흥운동을 벌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다. 모처럼 진정한 '베풂'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하는 걸음이었다. <제공=경남문화예술진흥원> 정리=구정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