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낭만 나들이/ 박혜숙
대관령의 단풍은 짧게 끝난다. 사반세기 동안 산속에 집이 있는데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지기까지 세세히 지켜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추석 특집에 나훈아가수가 나와 요즘 별별 꼴을 다 본다고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추석을 지내고도 산속에 갇혀 있다 보니 단풍 드는 과정을 지켜본다.
산속에 오래 있으면 수감된 기분이라 이곳에 혼자 와 있는 다섯 남자들은 서로 맛 집을 찾아내 식사하는 게 큰 이벤트다. 포모도로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하여 남편과 갔다. 돈까스를 먹으러 간다고 하여 애들도 아니고 그런 걸 먹느냐고 난 집에 있겠다고 했더니 분위기 좋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피자와 파스타도 나온다고 하여 마음을 바꿨다. 도시에서 내려온 인파가 많을까봐 걱정했는데 고즈넉했다.
여름 동안 가득 차 있던 캠핑카도 많이 사라지고 몇 대 안 남았다. 대관령 옛길로 들어가기 전 왼쪽에 도열해 선 자작나무가 산 두 굽이를 돌도록 시선을 잡는다. 빨간 단풍나무 위로 하얗게 죽죽 뻗은 나무가 귀족적이다.
긴 줄기가 곧게 올라가 하늘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는 군락지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보다 규모는 작아도 도로를 따라 몇 백 미터를 자작나무 사열을 받으며 동해바다로 향했다.
대관령 정상에서 강릉 시가지를 바라본다. 고등학교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가는 길 조망하던 동해바다는 한 장의 사진처럼 생생한데, 달려들며 반갑다 안기는 모습이 여전하다. 해풍이 싣고 온 짭조름한 바다를 한 사발 들이키니 여고 친구들이 그립다. 그 때 헤어지고 한 번도 못 만난 친구는 캐나다 하늘 아래 아직도 사는지.
난 충청도 산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바다를 늘 그리워한다. 남편이 부산 광안리 현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어이없어하며 보초를 서는 사람한테 파도소리가 그렇게 좋은 거냐고 물었더니, 처음 한 달 정도는 좋았는데 지금은 누가 그런 소리하면 귀퉁배기를 올려 부치고 싶다다는 말을 전하며, 가끔 내려와 회나 먹고 가라고 먹는 거 좋아하는 나를 달랬다.
친구가 운전하며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간다. 건설 일을 하던 두 남자는 도로 닦기가 정말 힘들었을 거라며 70도 각도는 되어 보이는 백두대간의 도로 품평회를 한다. 그래도 대관령 길이 가장 완만하게 내려갔고, 진부령 내리막길은 더욱 가파르다. 다음이 한계령, 오색형의 급경사는 못 말려 운전하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다리를 세워 직선으로 난 고속도로를 세워 안전성을 높이고 길이를 줄인다. 도로보상 부담도 더는 효과를 보는데 여기저기 세워진 다리 모양새는 멋쩍어 옛길을 찾는다. 아직 천수답 논도 있어 벼가 익어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계곡 물이 내려오는 곳마다 사람들이 놀고 있다.
옛날엔 바닷가 사람들은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지어 영동지방 사람들 생활이 넉넉하니 영서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나무나 산나물 버섯 등을 채취해 지게에 지고 이 고개를 걸어가 팔아 연명을 했는데 지금은 고랭지 농법이 성공하며 생활이 역전되었다. 지금은 한집에 차 몇 대씩은 있고, 올해 같이 무 배추 값이 폭등할 때 수해 입은 것 없이 팔게 되는 때면 5천 평 이상의 밭에서 억대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이곳은 평창동계 올림픽을 치르며 인프라가 100년은 앞서 형성 되었다. KTX가 들어왔고 도로가 넓혀졌으며 알펜시아와 강릉을 중심으로 고급 편의시설이 들어와 살기가 쾌적해졌다.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다.
긴 장마와 태풍으로 절개지 토사가 내려왔는지 공사를 하고 있다. 곧 겨울이 오고 눈에 덮일 테니 서두르나보다. 일 년에 반은 겨울인 이곳은 추위가 매섭고 눈이라도 오면 눈 치우는 고역을 치른다. 다 좋을 수만은 없는 법.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줘야 하는 세상사를 짚어보며, 가을이 짧고 아름다워 더욱 소중하다.
레스토랑에 오니 2층 집을 황금물결이 이는 논을 배경으로 운치 있게 지었다. 창가에 앉아 바라보니 논 가장자리를 따라 감이 노랗게 달려 있다. 포모도르가 ‘황금빛 사과’를 뜻하는 이탈리아 말인데 실제론 노란 토마토를 이용해 만든 요리에서 시작되었다.
이집의 대표 메뉴인 타페 까르보나라 파스타, 돈까스, 피자를 주문했다. 기대 이상으로 스프에 풍미가 넘쳤다. 빵을 펴놓고 파스타를 담아 양이 엄청나서 다 못 먹었다. 남편은 진돗개 풍산개 생각이 나는지 남은 것을 싸오는 게 정례화 되어있다.
트럼펫을 부는 아저씨는 커피는 믹스가 제일 맛있다며 산통을 깼고, 빵 한 접시를 더 달라고 하여 메인음식을 다 남기게 했다. 난 추가 빵을 먹지 않았는데도 먹을 수 없었는데, 은근히 맛있는 피자와 디저트를 못 먹고 후회하는 표정들이다. 돌아오는 길 차주는 트럼펫 소리를 잘 들으라며 블루트스 오디오를 켰다.
‘숨어 우는 바람소리’가 하얀 갈대가 손짓하는 나들이와 잘 맞았다. 요즘도 트럼펫을 부냐고 물으니 파 이상은 숨이 차서 못 분다 한다. 노래 부르는 것만 고음이 힘든지 알았더니 관악기도 호흡으로 불어 힘든 것을 알게 되었다. 김인순의 ‘자주색 가방’, 이선희 ‘사랑의 마음’에 감성이 돋는다. 음악은 그 노래를 즐겨 부르던 시절을 소환하여 감상에 젖게 하는 마력이 있다.
돌아오는 길 ‘카샤의 언덕’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북유럽 풍의 빨간 지붕과 데크로 멋지게 지은 전원마을이 한 폭의 그림이다. 카페 이름이 좋고, 바람 부는 높은 언덕에 있어 마음을 끌었다. 단풍 길을 따라 분위기 있는 곳에서 칼질을 하고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지나간 추억을 소환해 보는 가을 낭만에 푹 빠진 외출이었다.
커피향이 좋고 이야기도 맛깔스러웠다. 세상은 멋진 곳도 많은데 언제까지 이런 여유를 누릴 수 있을지 세월은 쉬지 않고 흐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