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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지파(9) - 스불론 지파 / 창 49:13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행복을 원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어려서는 더욱 모릅니다. 자기에게 아무 일만 없으면 행복인 줄 압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일단 결혼하면 행복이란 것을 조금 실감하게 되고, 행복을 특별히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이를 먹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과정에서도 행복이란 개념이 자꾸만 변합니다.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처럼, 행복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해질 수 있고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만족과 감사를 갖고 사는 사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며, 불만과 비교의식을 갖고 사는 가정이 불행한 것입니다. 양주동씨의 국어사전을 보면, 행복의 정의를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고,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갖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웹스터 영어사전에는, 행복을 좀 더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족’이나 ‘기쁨’이란 것입니다. 곧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돈이나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나쁘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고, 세상의 모든 박해와 고난과 질병과 고독함이 있어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어디서든지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레아와 라헬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요?
온 국민이 가난에 허덕이던 1960년대,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라는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3‧3‧35운동”도 벌였습니다. 3명 자녀를 3년 터울로 낳고, 35세까지 단산하자는 뜻입니다. 1970년대에도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은 계속됐습니다. 자녀를 적게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아선호 사상으로 아들을 낳기 위해 출산을 계속하는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나온 표어가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두 자녀에서 한 자녀로 변화됐습니다. 특히 이 시기 표어에서는, 남아선호 사상에 대한 반대 메시지가 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 낳아 젊게 살고, 좁은 땅 넓게 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사랑으로 낳은 자식, 아들딸로 판단 말자” 등입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출산정책은 전면적으로 수정됐습니다. 정부는 1989년 피임사업을 중단하고 사실상 산아제한 정책을 중단했습니다. “아이가 미래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 미래의 희망소리” “가가호호 둘셋 출산, 하하호호 희망한국” “허전한 한 자녀, 흐뭇한 두 자녀, 든든한 세 자녀” 등 적극적인 출산장려 정책으로 급선회했습니다. 1.5명 내외에서 머물던 출산율은 극적으로 떨어져, 급기야 2022년 0.78명의 최저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출산율 하락 속도가 유례없이 빠르고, 초저출산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급기야 지난해 총인구가 정부 수립 이후 72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습니다.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넘어서는 인구 자연감소는 2020년부터 시작됐지만, 총인구가 감소하는 시기는 2029년으로 예상됐었습니다. 2016년 추계 때는 2032년이었는데 10년이나 앞당겨졌습니다. 학계에선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일하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2030년에 ‘인구절벽’을 넘어 ‘인구재앙’을 체감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구 부족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는, 영국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의 전망이 허황되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남북한의 출산율을 보면 한국 0,78명, 북한 1.9명입니다. 외국의 인구학자들이 말하길, 한국의 출산율 감소는 북한과 통일하면 자연스레 해소된다고 합니다. 그럼 합계출산율이 1,4명으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일되면 출산율도 같이 올라가서, 몇 년 안에 2명이 넘는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예로 들어보면 이스라엘 2.9명, 아프리카는 3-6.9명까지로 통게가 나와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2018년(0.98명)부터 4년 연속 1명 미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OECD 회원국 중 출산율이 0명대인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이미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의 보고서에 따르면, 앞으로 ‘부산’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없어질 도시라고 예측했습니다. 2400년이 되면 도시 기능이 상실되어가는 부산에서는, 도시 기능이 남아있는 수도권으로 인구 탈출 행렬이 일어날 것이며, 2413년에는 부산에서 마지막 출생자가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레아와 라헬의 출산 경쟁이 부럽게 다가왔습니다. 결혼 전부터 사랑을 받았던 라헬과 달리, 레아는 출산에 목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아는 외모에서 라헬에게 밀려, 야곱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버지와 짜고 야곱과 먼저 첫 날 밤을 보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정식 아내의 위치를 선점하게 된 것입니다. 선점했다는 건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선 것입니다. 경제용어 중 ‘선점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장에 새로운 카테고리의 제품을 먼저 출시함으로써, 손쉽게 큰 폭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마케팅 전략을 말합니다. 소비자들은 선점된 제품에 익숙해짐으로써, 더욱 개선된 후속 제품이 나와도 이를 외면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선점 효과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라헬 바라기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눈에는 오직 라헬밖에 안 보였습니다. 삼촌 라반도 어쩔 수 없어서 라헬까지 아내로 주었습니다. 분명히 레아가 야곱과 먼저 결혼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야곱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라헬은 사랑하는 사람을 언니한테 눈뜨고 빼앗길 뻔했는데, 천신만고 끝에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일주일 사이에 결혼을 두 번하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그래도 다행인 게, 어떻게든 라헬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음엔 야곱도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한 남자와 두 여자가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으니,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있었습니다. 거기다 야곱이 라헬을 표나게 편애했습니다. 레아는 결혼을 하고 더 불행해진 거 같았습니다. 차라리 결혼하지 않았으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결혼하여 남편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신 하나님이 레아를 편들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남편 사랑을 덜 받는 레아가, 라헬을 제치고 첫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들 중에서도, 장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레아가 장자 르우벤을 낳고, 연달아서 시므온, 레위, 유다를 낳았습니다. 네 아들을 얻은 야곱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표정관리를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라헬의 초조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습니다. 이러다 남편 사랑을 빼앗기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엄습했습니다. 계속 쌓여가던 스트레스가 어느 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말 같지도 않은 투정을 부렸습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은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라헬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어 순간 욱하고 말았습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그렇게 나오는 야곱에게, 라헬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 여종 빌하와 동침해서라도, 자기 아들을 낳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아들을 갖고 싶어하는 라헬의 절실한 심정을 알았기에, 야곱은 그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 낳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하는 아내에게, “우리 더 기도하면서 기다려보자”고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야곱도 라헬이 낳은 아들을 얻고자, 자기로선 할 만큼 해왔습니다. 그런데도 감감무소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임신을 못하게 하신 거다’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망설임 끝에 라헬의 제안을 수용하고 말았습니다. 빌하는 주인과 달리 너무나 쉽게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헬은 드디어 단과 납달리를 자기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라헬은 자기가 직접 낳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많이 풀렸습니다.
이번에는 레아가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쓴 수법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자기 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한 것입니다. 실바를 통해 아들을 낳아달라는 말은 안 했지만, 사실상 그런 의미였습니다. 실바 역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아는 갓과 아셀을 안고는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4:2로 앞서고 있던 차에, 두 명의 아들을 더하게 됐으니, 라헬과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레아는 라헬의 추격에서 벗어나, 이제 한시름 놓게 되었습니다.
1. 스불론 지파의 기원
그러던 어느 날 르우벤이 밭에 따라갔다가 합환채를 발견했고, 그걸 갖고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봐도 기특한 르우벤입니다. 레아는 합환채를 보며, 희망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디서 봤는지, 라헬이 득달 같이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합환채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는 순간 끓어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보통 때 같으면 절대 지지 않았을 라헬인데, 이번에는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며, 은밀한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레아는 라헬의 나쁘지 않은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날 밤 레아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인들의 은밀한 거래를 알 리가 없는 야곱입니다. 야곱이 들에서 돌아올 때면, 늘 상 라헬이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레아가 자기를 영접하러 왔습니다. 야곱은 속으로 ‘이상하다. 왜 레아가 나왔지? 혹시 라헬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생각할 때, 레아가 야곱의 팔짱을 끼었습니다.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말을 듣고, 야곱이 얼마나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을까요? “이게 진짜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며, 남편으로서 자괴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레아는 동생의 수법을 따라 종을 통해 아들을 얻었지만, 마음은 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원을 올렸습니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어주심으로, 레아는 다섯째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값을 지불했다는 의미를 담아서, 아들의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지었습니다. 값을 지불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거듭난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냥 거듭난 게 아닙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려고, 예수님의 목숨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엄청난 값을 지불함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됐으니, 우리는 값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싸구려 인생이 아닌 값어치 있는 인생, 비품 인생이 아닌 정품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레아에게 또 임했습니다. 창 30:19-20절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여섯째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레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섯째 아들까지 낳았으니, 후한 선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레아에게는 항상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거하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지금도 한 집에서 함께 살기는 한데, 함께 사는 거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오늘날 한 집에 살면서, 남남 같은 부부가 제법 있습니다.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레아의 경우를 보더라도, 자식 숫자와, 자식 유무와 크게 상관없습니다. 부부의 행복을, 자식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부의 행복을 더해줄 수는 있어도, 부부 행복 자체는 아닙니다. 부부 행복의 핵심은 같이 거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도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요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요 15:4-5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사람입니다. 매일 매주 매월 매년이,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스불론에 대한 야곱의 축복
창 49:13절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야곱은 죽기 전 스불론을 축복했습니다. 스불론이 해변에 거주하리라고 했는데, 실제로 훗날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사이에 거주한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입니다. 야곱이 예언했는데, 400년이 더 지나 여호수아의 땅 분배 때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알아서 나눠준 게 아니라, 제비 뽑기를 했는데도 말입니다. 창 49:1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야곱이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축복 예언기도를 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자녀들에게 축복기도하면 안 됩니다. 부모의 축복기도가 자녀의 인생, 자식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스불론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스불론이 배로 시돈까지 다니며 무역을 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스불론이 형인 잇사갈에 비해 활동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야곱이 각 사람의 성향에 맞게 축복했던 거 같습니다. 물론 야곱이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창 49:28절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각 사람의 분량에 성향, 기질도 다 포함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자기에게 맞는 옷이 있습니다. 그 옷을 찾아야 하는데, 어릴 때는 부모가 도와줄 수 있지만, 자라면서 자기가 찾아가야 합니다. 아직 자기에게 맞는 옷을 찾지 못한 청년들은, 그 옷을 찾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3. 스불론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신 33:18-19절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모세도 죽기 전 열두지파를 축복했습니다. 스불론은 밖으로 나갈 때 기쁨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의 형인 잇사갈에 대해서는 장막에 있을 때 즐거움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스불론 지파는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많이 불러와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게 하고,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지파가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스불론 지파를 ‘선교사 지파’라고 합니다. 나가서 사람을 만날 때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가는 것이 기쁩니다. 어떻게든 건수를 만들어서 나가려고 합니다. 반대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오면, 힘이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가는 것이 꺼려집니다. 웬만하면 안 나가려고 합니다. 타고난 성격과 기질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어떤 이들은 은혜를 받고 자꾸 바깥으로 나가 전도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들은 안에서 청소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가졌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지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교회 안에서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사역이 힘들어도, 정말 잘 감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참 귀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그리스도인들이라도, 교회 밖에서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사역은 별로인데, 교회 바깥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칭찬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시 귀한 분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교회의 본질을 예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의 존재 이유가 예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가 예배를 위해서 재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본질을 선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선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가 선교를 위해서 재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옳은 생각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 존재하고, 또한 선교를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서 재정을 써야 하고, 또한 선교를 위해서 재정을 써야 합니다. 우리교회 안에 스불론 같은 사람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한 잇사갈 같은 사람도,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4. 스불론 지파의 지리적 위치
수 19:10-16절 ‘셋째로 스불론 자손을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의 경계는 사릿까지이며, 서쪽으로 올라가서 마랄라에 이르러 답베셋을 만나 욕느암 앞 시내를 만나고, 사릿에서부터 동쪽으로 돌아 해 뜨는 쪽을 향하여, 기슬롯 다볼의 경계에 이르고, 다브랏으로 나가서 야비아로 올라가고, 또 거기서부터 동쪽으로 가드 헤벨을 지나 엣 가신에 이르고, 네아까지 연결된 림몬으로 나아가서, 북쪽으로 돌아 한나돈에 이르고, 입다엘 골짜기에 이르러 끝이 되며, 또 갓닷과 나할랄과 시므론과 이달라와 베들레헴이니, 모두 열두 성읍과 그 마을들이라. 스불론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마을들이었더라.’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는, 형제 지파로서 인접한 지역의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가나안 최대 곡창지대인 이스르엘 평원이, 잇사갈과 스불론까지 연결되어 있었기에, 적들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스불론 지파는 기름진 땅을 분배 받은 대신, 출중한 인물도, 변변한 도시도 남겨 놓지 못했습니다. 대개 큰 인물은 억센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불론 지파는 앗수르의 침공 때 많은 사람들이 변방으로 끌려 갔고, 그곳에 이방인들이 들어와 혼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스불론 지파의 땅이, 후에 예수님의 사역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마 4:12-17절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흑암에 앉은 백성이 돼버린 그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인 그들에게, 예수님이 복음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앞서 스불론 지파는 변변한 도시도 남겨놓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가장 유명한 곳은 나사렛입니다. 그 유명한 나사렛이라고 할지 몰라도, 사실 나사렛은 구약에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나사렛은 스불론 지파에 속한 열두 개의 도시와 여섯 개의 마을 명단에도 빠졌습니다. 신약에 와서 나사렛이라는 마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으로 말입니다. 나사렛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30여년 동안 목수 일을 하시며, 어머니를 모신 동네입니다. 유대학자 요셉 하레비는, 1세기의 나사렛 동네에 목수를 중심으로, 몇 십 가구가 몰려 살았음을 고고학적으로 밝혀냈습니다.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것이, 이 고고학적인 진술과 정확히 맞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 당시에도 작은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갈릴리 지리에 탁월한 나다나엘이 뭐라고 했습니까? 요 1: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그랬던 나사렛이 오늘날 북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순전히 예수님 덕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5. 스불론 지파의 상징 보석
출 28:15-21절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스불론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첫째줄 세 번째 위치한 녹주옥입니다. 녹주옥의 히브리어 본래의 뜻은, ‘반짝 반짝 빛난다’는 뜻입니다. 등대 불빛과 같은 보석입니다. 영어성경은 카벙클(carbuncle)로 번역했습니다. 카벙클이란 보석은 어두운 내부에 자체 조명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딱 등대입니다. 해변에 거주하게 되리라는 야곱의 축복과,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는 모세의 축복과, 등대 불빛 같은 카벙클은 일맥상통합니다. 등대는 장막에 거하는 잇사갈 지파와는 무관합니다. 등대는 해변에 거주하며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는 스불론 지파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해변에 거주하는 스불론 지파를, 등대 불빛으로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는 스불론 지파를, 카벙클로 비춰주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누리기 위해, 주의 장막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감을 기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좋으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받으며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히 10:38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거대한 세상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 것처럼, 우리들도 오직 예수를 향한 믿음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 앞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은총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차별하지 않고, 가슴에 안은 보석처럼 기름부어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 속에는 구원 받은 여러분의 이름이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열두지파의 이야기를 지금 9번째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이제 그만 하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이야기는 별로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한 다리 건너면 이런 이야기와 비슷한 사연을 다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사실들을 성경은 숨기지 않습니다. 제가 단점, 모자란 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우리 가정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친척들을 한 다리 건너서 바라보면, 다 비슷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흠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복잡하고 허물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출생과 삶을 연결시키지 않고 복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보석처럼 여겨주십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가 바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복을 누리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나온 과거가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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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믿음의 유산을 주셔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시고, 예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간구하오니, 물려받은 신앙도 소중하지마는, 그 물려받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수용할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지게 하옵소서. 그리고 소중한 믿음의 유산을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그런 가정들이 되고, 주의 자녀들이 되고, 가문들이 되어서, 우리 가정과 이 민족 앞에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임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는 야곱과 모세의 축복기도를 보면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축복하시겠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의 가치를 높이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