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계시록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은 교회가 세속 정치와 경제에 대하여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일곱 재앙은 7의 수로 지으신 창조질서와 7의 수로 제정하신 경제질서를 어긴 것에 대한 사회적 재앙이고, 심판으로 봅니다(백보좌 심판은 제외). 사회적 심판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는 징계이며, 그리스도인들도 이를 감당해서 이겨내어야 합니다.
**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기초 이해가 있으신 분들은 -일반 이해- 부분은 읽지 않고, -일곱 도시의 특성, 일곱 경제와 일곱 재앙- 부분만 읽으셔도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반 이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계 1:1)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계 1:1). 사도 요한이 천사의 지시를 받아서 보게 된 계시를 그가 본대로 기록했다. 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 중에 이 책을 기록했고. 요한은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삼대 제자에 속한다. 이 당시는 교회가 로마에 의하여 박해를 받고, 황제숭배를 강요당하던 시기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황제 가운데 가장 난폭했던, 11대 도미티안 황제(주후 81~96년)의 박해 아래에서 쓴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 현재의 튀르키예 서부 지역 일곱 도시, 일곱 교회의 성도들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의 내용은 모든 교회,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교회가 읽고, 살펴야 할 내용이다. 그 당시 교회들은 니골라 당의 가르침과 같은 거짓 가르침(2:6, 15), 로마 황제의 박해(계 2:10, 13), 우상숭배와 음행, 이방 종교와의 타협(2:14, 20~21), 영적인 부패(3:1~3, 15~17) 등으로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지금도 세상은 악한 음모가 반복되고 있고, 이런 양상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탄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려는 주의 뜻에 대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된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계시록을 쓰게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을 강건케 하여 짐승 같은 위협과 폭력, 거짓 선지자의 기만, 탐욕적인 부의 추구, 음녀의 악행과 마귀의 궤계에 맞서 싸우라고 요한에게 계시를 주셨다. 이 악한 세력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라를 세우시고, 그 악의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종말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죄악들과의 싸움은, 영광스러운 백보좌 앞에서 서게 될 마지막 심판과 새 예루살렘의 도래로 끝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환란에서도 위로를 받고, 승리를 약속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악의 세력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늘 그리스도께 충성하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이해 방식
계시록은 묵시적 내용을 상징적 기법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 이해(해석)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 상세한 설명은 할 수가 없지만, 해석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하여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① 과거 해석법 : 계시록의 예언이 이미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
② 부분적 과거 해석법 : 계시록의 예언이 사도 요한의 때부터 마지막 때까지 이루어질 교회사로 보는 견해
③ 미래 해석법 : 계시록의 대부분의 내용이 미래에 성취되어야 할 사건으로 보는 견해
④ 영적 해석법 : 계시록의 내용은 실제 사건과는 관련 없이 영적인 원리들이 이 세상과 대항하여 전개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
계시록 이해에서 연구자들은 ①, ②, ③, ④ 중에 어느 하나의 방법만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4가지는 해석에서 있을 수 있는 방법상의 구분이고, 실제 해석에서는 하나만 고수하기보다 여러 해석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며, 그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한 해석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시록의 구조
계시록의 사건이 기록된 순서대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견해와 사건이 주제별로 반복하는 병행적 사건 구조로 보는 견해로 나누게 된다. 이렇게 나누면 전천년설은 주로 기록 순서대로 사건이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고,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을 병행 구조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일반 이해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10)
일곱 교회의 범위(관련 대상)
계시록 2장, 3장에서 소개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그 당시 소아시아에 실재했던 일곱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일곱 교회는 문자적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역사적으로 보아도 소아시아 지역에 실제로 존재하던 교회라는 뜻이다.
둘째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전 세계 모든 교회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교회별로 보낸 서신의 말미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여 "교회들"이라는 복수 후렴구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교회별로 보낸 서신의 수신자가 특정 교회나 개인이 대상이기보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 전체를 대상자로 삼은 것이다.
셋째는 일곱 교회를 신약시대의 일곱 시대로 구분하여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예언서이므로 신약시대를 일곱 시대의 교회사로 나누고, 그 근거를 계시록 일곱 교회를 예로 들어서 알려준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견해는 스코필드(C. I. Scofield)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위의 세 가지 해석을 다 받아들여 ㄱ. 요한 당시의 일곱 교회, ㄴ. 전 세계 모든 교회, ㄷ. 그리고 신약시대의 일곱 구분을 모두 설명한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셋째가 말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신약시대를 이렇게 구분하여 보고 있다.
에베소 교회 : A.D. 30~100년 사도 시대
서머나 교회 : A.D. 100~313년 순교 시대
버가모 교회 : A.D. 314~590년 타협 시대
두아디라 교회 : A.D. 590~1517년 로마 교황 시대
사데 교회 : A.D. 1517~1700년 종교 개혁주의 시대
빌라델비아 교회 : A.D. 1700~1900년 선교 시대
라오디게아 교회 : A.D. 1900~미래, 세상주의 시대
일곱 교회에 대한 일반적 이해
일곱 교회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필자의 사견보다 옥스포드 성경 주석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아래 『 』 안의 내용은 일곱 교회에 대한 옥스포드 성경 주석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요체는 예수의 재림을 분기점으로 말세에 폭발적으로 연속될 대종말 사건의 전개 과정이다. 이는 본서의 본론부 중 1:19에서 말하는 ‘장차 될 일’에 해당하는 4:1~22:5 사이에서 제시된다.
이에 앞서 2, 3장은 본서의 형식적 수신자인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일종의 모델로 하여 각각에게 보내는 다양한 메시지를 통하여 대종말 시대를 살아갈 여러 교회가 보일 모습을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진정한 교회의 원형을 추구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본서의 일차적 수신자들인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the Seven Churches of the Asia Minor)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교회들로서, 본서의 기록자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이 유대 전쟁 발발(A.D. 66~70년)을 계기로 에베소로 이주한 후 그곳을 중심으로 숨질 때까지 약 30년간을 사역했던 교회들이다.
그러나 한편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사도 요한 당시 그의 사역 대상 교회들 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교회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 서신들의 말미에 있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후렴구들(계 2:7,11, 17, 29 ; 3:6, 13, 22)이 각 서신들의 내용이 특정 교회 하나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 교회들을 향한 편지는 대체로 송신자와 수신자의 표기 → 칭찬과 격려 → 책망과 권면 → 성령의 말씀 청종 촉구 및 약속이라는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으나 각 수신 교회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즉 칭찬과 책망이 모두 있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칭찬만 있고 책망은 없는 교회가 있고, 반대로 칭찬은 없고 책망과 경고만 있는 교회도 있다.
먼저 각 편지의 첫머리에는 편지의 송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있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이 편지들을 기록하기는 하였으나 편지들의 송신자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각각의 수신 교회마다 자신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계시는데, 이는 아마도 수신 교회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각각의 수신 교회가 그리스도의 특정한 측면을 깊이 인식하도록 하시기 위한 목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칭찬 혹은 책망의 내용에 따라 일곱 교회들의 특정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에베소 교회(the church in Ephesus)는 인내로써 정통 신앙을 유지하며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열매들도 있었으나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다. 즉 교리나 행위에 있어서는 바르고 성숙한 교회였으나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와 성도 간의 교제 면에서 소원(疏遠)해져 버린 교회였던 것이다.
서머나 교회(the church in Smyrna)는 환난과 궁핍이라는 힘든 처지에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부요하여 칭찬을 듣는 교회였다.
버가모 교회(the church in Pergamum)는 핍박의 때에 순교자를 배출하기까지 하는 등 귀한 영적 유산과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으나 일부 교인들이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름으로써 세속화될 위기를 맞고 있는 교회였다.
두아디라 교회(the church in Thyatira)는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많은 교회이지만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를 용납한 교회였다. 즉 활발한 활통을 펼치며 성장을 거듭하는 교회이지만, 이단(異端)을 용납하고 타협함으로써 진리를 훼손시키는 교회였다.
사데 교회(the church in Sardis)는 사람들의 평가와 주님의 평가가 대조되는 교회로서, 즉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교회’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주님에게는 ‘죽은 교회’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은 교회인 것이다. 한마디로 사데 교회는 인본주의적인 교회였다.
빌라델비아 교회(the church in Philadelphia)는 적은 능력으로도 믿음을 지킨 교회, 즉 교회의 외적인 규모나 힘은 미약했지만, 그 믿음은 진실하여 교회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잘 감당한 교회였다.
라오디게아 교회(the church in Laodicea)는 한마디로 미지근한 교회였다. 즉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아무런 환난도 없으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신앙적으로는 열의를 상실하고 영적 곤고와 헐벗음에 처한 교회였던 것이다.
이상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도 요한 당시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교회들일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다양한 유형의 교회들을 대표하는 교회들이다. 즉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대상으로 한 편지의 내용은 바로 오늘날 각 유형의 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를 깊이 살펴보면, 각 교회 및 지도자나 성도 개개인은 스스로의 영적 모습을 진단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진단에 따른 우리 주님의 처방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각 교회 및 성도 개개인은 주께서 오늘도 일곱 영을 가지시고(계 3:1) 일곱 촛대 사이로 다니심을(계 1:13, 20 ; 2:1) 인식하고서 주 앞에 바르고 충성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출처 ; 옥스포드 주석. pp. 121~123. (재인용: https://blog.naver.com/lim9217/223257988161)
일곱 교회의 특징과 구분
아래 표는 소아시아 일곱교회의 특징을 요약하여 비교한 것이며, 톰슨성경 주제별 성경 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교회 구분 | 칭찬 | 책망 | 상징 |
에베소(2:1~7) 전통적인 교회 | 인내, 교리의 확고함 악을 미워함 | 사랑을 잃고, 퇴보함 | 정통보수, 영적 열정은 부족함 |
서머나(2:8~11) 가난하나 부요한 교회 | 영적 인내, 하늘 보화 | 책망이 없음 | 전도의 열심과 핍박을 참는 교회들 |
버가모(2:12~17) 환경이 나쁜 교회 | 나쁜 환경에서 굳건함 | 부패한 교리, 이단자의 용납함 | 외부 지원을 받음, 실리를 추구하는 약한 믿음 |
두아디라(2:18~29) 악한 여선지자 교회 | 사랑, 신령한 봉사, 믿음, 회개 | 질서 해이, 부패한 여선지자를 용납 | 현대적 이단 종파들 |
사데(3ㅣ1~6) 죽어가는 교회 | 소수의 순결이 잔존 | 형식주의, 영적인 죽음 | 영적 침체와 형식주의 |
빌라델비아(3:7~13) 충성스러운 교회 | 말씀을 지키는 증인 생활 | 기록 없음 | 열심 있는 모든 교회 |
라오디게아(3:14~22) 부유하나 가난한 교회 | 칭찬 기록 없음 | 미지근함, 영적 자만 영적 가난과 수치 | 세속적, 자기 만족의 추구 |
일곱 도시와 일곱 교회
일곱 도시의 종교와 경제적 특징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이해하려면, 그 교회가 있던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특성을 알아야 한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던 일곱 교회다. 이곳은 아시아의 유럽이라고 할만큼 지리적으로 유럽과 가까워서 인적, 물적 교류가 많은 곳이다. 이곳은 지중해와 에게해 주변으로 항구 도시 에베소와 서머나가 있다. 에베소가 지형이 변하여 지금은 항구가 아니지만, 그 당시는 항구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들도 주변의 지리적 여건으로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하고, 몰약, 안약 등의 의료 기술과 문화가 발달한 전형적인 도시들이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이며, 로마의 행정과 교통상의 중심지다. 항구 도시로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사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곳이다. 에베소는 고대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도 에베소에 있었다. 기원전 550년경에 지었으나 기원전 356년 방화로 소실되었다. 새로운 지은 신전은 뜰까지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이 있고, 내부는 그리스의 여신 아르테미스(아데미)의 신상을 세웠다.
서머나는 현대의 지명이 이즈미르이다. 주전 3,000년부터 형성된 항구 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주둔하였고, 산 위에 성채를 건설하였다. 서머나는 주전 3~2세기 희랍 시대에 크게 번성하였고 항구 상업 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다. 이곳은 아크로폴리스(SERAPIS)를 위한 신전이 아직 남아 있다.
버가모는 이교의 신전이 많이 있으며 특히 제우스 상은 높이 12m나 되는 거대한 것으로 "사탄의 위"는 이 신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계 2:13). 로마 "황제의 예배 신전"이 세워져 기독교에 있어서는 초대교회부터 싸움의 도시였다. 초기에 순교자 안디바가 여기서 순교했다. 이곳은 제우스 신의 태생지라는 것과 연관되어 지어진 제우스 신전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과 로마 황제숭배를 위한 3개의 거대한 신당 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이 가득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 루디아 도에 있는 성읍으로 빌립보의 여성 신도 루디아의 고향이다(행16:14). 이곳은 지형상 훌륭한 요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 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유대인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히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으며, 이때 이미 상인조합(길드, Guild)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업도시의 경제구조에서 두아디라 교회는 제2의 이세벨이 등장하게 된다(계 2:20).
사데는 서쪽 해안에 있던 루디아의 수도이다. 상업 도시로 번영하였으며 직물과 귀금속 생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상업이 발달하여 부요한 도시이고, 교회는 부를 가진 사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죽은 교회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명의로 건축된 유적 아르테미스 신전은 B.C 6세기와 3세기 두 차례에 걸쳐 파괴되었다. 이곳에는 여신 시빌리의 신전이 있었고,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었다.
빌리델비아는 ‘소 아테네’로 불려질 만큼 우상이 넘쳐났고, 로마의 황제숭배가 극심하여 많은 순교자가 있었다. 특히 사단의 회인 유대교 회당을 중심으로 한 박해도 심했으나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이를 잘 이겨 내었다(계 3:9~11). 이곳은 주후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대파되어 이 도시에는 아무런 고대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hia, 성서상의 부르기아)의 수도로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발전했다. 라오디게아는 근처의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이라 불리우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여 의료 도시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수가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수는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다는 것은, 이 온천수를 예로 들어서 책망한 것이다(계 3:15,16).
소아시아 도시구조와 일곱 교회
교회와 사회 구조(교회와 정치·종교·경제의 위상 관계)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1:23, 골 1:18).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마 2:2, 27:11).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조직과 권력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 아래에 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의 정치, 경제, 그리고 이방 종교보다는 상위에 있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세상 풍조를 가진 정치, 경제, 그리고 특히 이방 종교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세상의 정치와 경제를 지도하는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이러한 시대에 세상의 정치와 경제, 종교와 문화가 교회에 끼친 영향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세상 풍조에 교회가 처한 영적 상태를 깨우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본분을 지키고,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야 할 길을 안내하고 있다.
소아시아 일곱 도시의 시대적 배경 및 사회구조
소아시아 지역의 시대적 배경은 자주 언급하였으므로 요점만 추려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소아시아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속하였고, 그 지역의 정치와 경제, 종교와 문화가 모두 로마 황제의 철권 통치에 지배되어 있었다.
② 그 중에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주후 81~96년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에서 겪게 되는 시대적, 사회적 압력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인 대응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로마의 11대 황제인 도미티안의 통치는 역대의 황제들 가운데 정치적 억압이 가장 심했고, 그에 따른 황제숭배와 혼합주의 종교와 문화로 인한 우상숭배가 심각한 상태이었다.
③ 일곱 교회는 도시를 생활 터전으로 삼은 성도들로 구성된 도시형 교회들이다. 농촌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도시형 산업과 문화에서 빚어지는 교회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인구가 집중된 도시에 있으므로 환경적인 여건은 일곱 교회와 비슷하다.
④ 소아시아 일곱 도시의 경제생활은 농업보다 상업과 수공업 등으로 생업을 꾸리고 있다. 여기서 황제숭배를 내세우며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조합(길드, guild)이 생겼다. 계시록이 말하는 짐승의 표와 매매 행위는 이런 시대적 상황과 경제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⑤ 이 지역은 외국 무역,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지역 주민은 부유한 편이며(계 3:7), 따라서 생활은 사치, 향략이 물들어 있는 사회다.
⑥ 계시록 전체로 보여주는 여러 가지 재앙들, 특히 계시록 후반부에 나타나는 바벨론의 패망과 상인들의 몰락은 일곱 교회가 처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과 그에 따른 신앙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⑦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계시록 서신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사회, 경제적 환경에 흡수될 수 있는 위험을 강도 높게 경고하고, 그러한 위험에서 피할 길을 안내하고 있다.
소아시아의 사회 구조와 상인조합
** 소아시아 사회 구조와 상인조합에 대한 내용은 계시록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룬 김성목 목사님의 연구 자료를 기초하여 필자가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일곱 교회 성도들이 받는 고통의 진원지는 황제숭배다. 황제숭배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고통이었다. 신실한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하면, 지중해 전역의 세계가 황제숭배에 참여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유대 회당에서도 분리되거나 추방을 당했다. 계시록 2:9, 3:9에서 유대인들을 가리켜 “사탄의 회”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족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황제숭배는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었다. 소아시아의 각 도시에 있는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들은 그 당시 경제의 중심장소였다. 그 당시 소아시아는 대도시마다 로마 황제의 신격화를 위해 황제의 신전과 동상들을 세웠다. 황제의 신격화는 주화 발행에도 나타났다. 로마 제국시대의 주화는 정치적 선전을 위한 도구이었다.
신전에서 소아시아의 의회를 개최했고, 거기에서 결정된 법령이 바로 그 신전에서 공포되었다. 로마가 보낸 공문서도 신전에서 접수되었고, 상인단체인 길드의 모임도 신전에서 열렸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와 상업 길드를 비롯한 로마의 경제생활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상업 길드는 우상을 숭배하는 축제와 제의들을 포함하고 있다. 계시록 2:14,15의 “발람의 교훈” 또는 “니골라 당”은 이러한 압력에 굴복한 것을 뜻한다.
각 도시의 신전에는 은행의 역할을 하는 환전소가 있었으며, 신전에 있는 환전소에서 사람들은 돈을 빌리고 이자를 냈으며, 큰 금액의 대차는 신전에 있는 환전소의 신용보증이 필요했다. 거의 모든 상거래는 신전에 있는 시장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정치경제의 중심이 되어버린 신전의 역할 때문에,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없어서 자연스럽게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상업조합인 길드를 비롯한 경제활동에 참여하면서 어쩔 수 없이 황제숭배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에게 계시록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신앙적으로 타협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황제숭배 제의뿐만 아니라 로마 권력의 정치적 억압(계 13장)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경제적 착취 구조(계 18장)도 비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데 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하는 것은(계 3:1,2) 교회가 우상숭배가 만연한 로마 제국의 경제구조에 흡수되어 불의를 묵인한 행위를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인조합 관련 자료 출처 ; 김성목 목사 Youtube : 은혜와진리·성경연구원 온라인교회
https://www.youtube.com/@gracetruthbible
두아디라 교회와 여성 이세벨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두아디라 교회에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이 있었다. 그런데 이세벨이라는 여성을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 질서를 어지럽힌 거짓 선지자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행음이라는 용어도 육체적 음란으로 국한해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님이 두아디라 교회를 말하면서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면서 경고를 하는 것은,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구약시대 북이스라엘에서 이세벨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우상을 끌어드리는 행위(계 2:14,15)를 할 수 있을만큼 영량력을 가진 여성이다. 버가모 교회의 니골라 당과 발람의 교훈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에 북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가 이세벨 여성, 하나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합왕 때, 왕녀 이세벨은 시돈에서 섬기던 바알 신을 끌어들여서 이스라엘 전역(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을 오염시켰다.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기 위하여 그를 반역자로 몰아서 죽이는 사악한 여성이다(왕상 21:11~16). 북이스라엘과 남왕국 다윗 왕조가 무너진 것도 이세벨이 끌어들인 바알 숭배와 바알이 알려준 이방제도를 따른 것에 있었다.
원래 바알 신은 가나안 토속 신으로 농경 신이었다.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음란한 신이었다. 그러나 이세벨이 끌고 들어온 바알 신은 항구 도시 페니키아에서 터득한 상술을 가지고, 사람을 유혹하던 간교한 신이다. 가나안 농경 신의 사악함에 간교한 상술까지 동원하여 사람의 탐욕을 부추겨 악행을 저지르게 하는 신이다.
에베소와 서머나는 원래 항구 도시로 무역과 상업이 발달했었다. 이 상업이 내륙으로 들어와서 소아시아 도시 전체가 상업과 수공업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발달한 무역이나 상업이 사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상업활동을 위해서는 권력을 잡은 로마 황제의 통치를 따라야먄 했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하기 어려운 황제숭배와 우상숭배가 등장하게 된다.
에베소는 아사이의 수도이며, 아데미 신전이 있는 무역과 문명의 중심 도시다. 서머나는 과학과 의술이 발달하고 부유한 도시로 황제숭배의 중심지다. 버가모는 내륙 도시로 도서관이 있는 문화 도시다. 사데는 무역의 요충지, 양모 산업으로 부를 누리고 생활은 사치했다. 라오디게아도 교통의 요충지, 모직 공업의 중심지로 의술이 발달하여 부를 누린 도시다.
두아디라는 상업의 요충지이고, 공업도시다, 자주 옷 장사를 한 루디아의 고향(행 16:14)이며, 태양신 아폴로가 자리 잡은 도시다. 소아사아 일곱 교회를 시계 방향으로 돌려보면, 두아디라 교회는 그 일곱 교회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두아디라의 교회를 말하면서 바알 신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패망하게 한 시돈의 왕녀,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을 비유로 들어서 깨우치고 있다(왕상 16:31, 왕하 9:7).
계시록이 수차례 언급하고 있는 우상숭배와 짐승의 표는 이러한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가 가진 시대적, 경제적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곧 이런 경제적 배경이 깔린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성도들이 지켜야 할 영적, 경제적 깨우침이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소아시아 일곱 도시의 경제구조와 그 도시에 세워진 일곱 교회가 처해 있는 환경적인 배경을 두아디라 도시를 기준하여 나타내면 다음 그림과 같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조와 내용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조는 앞에서 다루었다. 계시록의 내용을 기록의 순서대로 사건이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시간적 구조와 계시록의 내용이 기록 순서와는 별개로 사건이 병행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록했다는 병행적 구조로 보는 것이다. 전천년설의 입장은 대체로 계시록을 시간적 구조로 보고 있고,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은 병행적 구조로 보고 있다.
계시록의 구조를 앞에서 살펴본 이승구 교수의 병행적 구조로 보고, 이를 다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일곱 촛대 사이의 그리스도(1:3~3:22)
(2) 하늘과 일곱 인(印)에 대한 이상(4:1~7:17)
(3) 일곱 나팔에 대한 이상(8:1~11:19)
(4) 핍박하는 용에 대한 이상(12:1~14:20)
(5) 일곱 대접의 재앙에 대한 이상(15:1~16:21)
(6)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이상(17:1~19:21)
(7) 극치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이상(20:1~22:21)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사건의 병행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시각에서 요한계시록 전체의 내용을 요지만 뽑아서 정리한 것이 아래의 표다. 아래 표에서 일곱 인(A), 일곱 나팔(B), 일곱 대접(C)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고, A, B, C가 서로 반복 또는 병행하여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다. 그러나 A, B, C 간에 나타나는 각각의 재앙과 사건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반복되는지 아직 그 연결 고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표에서 A, B, C의 7단계 구분은 사건에 대한 상호 유기적인 관련성과 반복성을 말하고, 같은 시간대의 사건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1단계에 속하는 A의 ①흰말, B의 ㉠우박, C의 ⓐ헌데가 생기는 재앙들이 모두 같은 시간대(1단계)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건의 내용을 살펴서 종합하여 보면, A는 사건의 시작(원인, 등장 주체)을, B는 사건의 진행 과정(현상)을, C는 사건의 결과와 결과에 따른 반응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필자가 보는 사회적 현상(D)은 A, B, C의 일곱 재앙과 사건에 관련하여 나타나는 사회 현상을 뜻한다. (가)는 교회와 세상을 유혹하고 파괴하는 사탄(용)의 활동을, (나)는 이러한 사탄이 권력의 심장부 역할을 하는 바벨론의 멸망을, (다)는 사탄이 제거되거나 결박되어 활동이 멈추어진 상태로 임하게 될 시한부 천년왕국이며, (라)는 최후의 심판과 그 이후 있을 새 예루살렘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가 계시록을 보면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아래 표에서 A, B, C라는 일곱 재앙이나 사건의 내용보다, 그 사건의 결과로 나타나는 (가), (나), (다), (라)의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말이다.
병행적 구조로 본 계시록의 내용 정리
7교회 |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 책망무 : 2, 책망 : 5 | ||
주제 단계 | A : 일곱 인 | B : 일곱 나팔 | C : 일곱 대접 | D : 사회 현상 |
계 4:1~7:17 | 8:1~11:19 | 15:1~16:21 | 12,13,14, 20,21,22장 | |
등장 | 네 생물(계 6:1) | 천사(8:2) | 천사(16:1,21:9) | 용과 바벨론, 왕과 천사 |
1 | ①흰말 | ㉠우박 | ⓐ독한 헌데 | 가. 용의 출현과 활동 (계 12:1~14:20) 나. 바벨론의 멸망 (계 17:1~19:21) 다. 천년왕국 (계 20:1~10) 라. 새하늘 새땅 (계 21:1,9~22:21) |
2 | ②붉은말 | ㉡불 붙는 산 | ⓑ바다 생물 | |
3 | ③검은말 | ㉢쑥별과 쓴 물 | ⓒ강,샘,피 | |
4 | ④청황색말 | ㉣밤낮의 흑암 | ⓓ태양 태움 | |
5 | ⑤순교자 | ㉤황충의 떼 | ⓔ어둠과 질병 | |
6 | ⑥천재지변 | ㉥네 천사와 마병대 | ⓕ귀신의 영 | |
7 | ⑦일곱인과 나팔 ↗ | ㉦일곱나팔과 대접↗ | ⓖ지진, 우박 | |
이해 | ①~⑦은 시간적 또는 종류별 사건, A~D는 반복적 또는 병형적 사건들 (D : 계 6:1~16:21의 반복적 사건 안에 들어있는 사회적 현상들) | D는 A~C의 일곱 사건과 병행함 |
7의 경제와 계시록 일곱 재앙의 상관관계
7일간의 천지창조와 창조의 경제질서
7의 경제는 성경이 알려주는 구속사와 경제활동은 7의 수나 시간 구조로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일곱 재앙은 이 7의 구조로 된 성경의 경제활동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7(일)의 순서로 창조했다. 첫날은 빛, 이튿날은 궁창, 사흘째는 땅이 내는 식물, 나흘째는 해와 달, 5일째는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 나는 새, 여섯째는 동물과 사람을 창조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이다(창 2:2).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아니한 것이 아니고, 지으신 천지 만물과 생명체가 쉴 수 있도록 안식제도를 창시하신 날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특별하게 사람을 창조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계의 관리를 맡기셨다(창 1:26,28). 그리고 사람에게 씨 가진 열매를, 동물들에게는 푸른 풀을 식물로 주셨다. 그리고 7일이 되자 하나님은 이날을 거룩한 날로 삼아서 안식하시고, 복이 되게 하신다(창 2:3).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7의 주기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세상 구조는 이 안식의 기간인 7의 주기로 자연계의 창조질서와 인간계의 경제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족장시대 말기에도 하나님은 7년 주기로 기상 이변이 생기는 것을 사례로 보여주신다(창 41:29,30). 그런 기상 이변에도 요셉에게 경제적 지혜를 주어서 풍년에 곡물을 저축하여 기근이 오면 동족을 구원하게 하신다. 계시록에도 셋째 인을 뗄 때에도 식량의 기근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1데나리온에 밀 한 되 또는 겉보리가 석 되밖에 되지 않은 것이 그러하다(계 6:6). 우리는 계시록이 말하는 재앙을 보면, 이런 시대적 상황과 요셉의 지혜와 준비를 염두에 두면서 성경을 대하고 읽어야 한다.
7의 순서를 따른 3대 절기와 7대 절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는 종교활동과 경제활동이 7의 수와 절기를 따르고 있다. 먼저 3대 절기는 유월절(1/14), 칠칠절(49일, 50일째), 그리고 초막절(7/15)이다. 이 3대 절기에서 유월절은 1월 절기로 무교절과 초실절이라는 부속 절기를 가지고 있고, 초막절을 7월 절기로 나팔절과 속죄일이라는 절기가 있다.
이 3대 절기와 7대 절기는 농사철과 관련이 있는 자연 계절과 추수 절기에 맞추어져 있다. 1월 절기인 초실절은 토지 소산의 첫 수확을 할 수 있도록 보릿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다. 칠칠절은 보리와 밀 추수를 다 마치고 맥추절로 지키는 날이다. 초막절은 열매까지 포함한 모든 추수를 다 마치고 가지는 감사와 축제의 절기다. 그러므로 이러한 3대 절기는 농삿철과 추수기에 맞춘 생활력이며, 경제 달력이다.
그리고 7월 절기 중 7월 10일은 죄만 속하는 속죄일이 아니다. 이날은 1년 중 경제적 결산을 행하는 큰 날이다. 속죄일은 “욤 키프림”으로 원래의 뜻은 값을 치러서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속전일”이다. 이날은 빚을 없애고, 노동계약이 만료되어 몸값이 소멸하며, 토지를 무르기로 토지가 자유를 찾는 날이다. 안식년, 면제년, 희년이 선포되는 날로 전국 거민에게 자유가 선언되는 날이다.
7대 절기 : 유월절 -> 무교절 ->초실절 -> 칠칠절(맥주절, 오순절) -> 나팔절 -> 속죄일(속전일) -> 초말절
3대 절기 : 유월절(보리 추수 시작기) -> 칠칠절(밀 추수 종결기) -> 초막절(모든 추수 종결기)
속죄일(7월 10일) : 재산 거래, 부채, 몸값, 토지 등의 무르기로 자유가 도래하는 날
7의 주기를 갖는 안식일 경제
7의 주기로 이루어지는 경제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제도화되었다. 먼저 십계명에서 7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을 먼저 정하신다(출 20:8~11). 안식일은 남종과 여종이 쉬는 날이며, 가축도 쉬어야 한다(출 20:10).
그리고 레위기 희년법을 통하여 7년마다 반복하는 안식년을 만들고, 다시 7 안식년 다음에는 희년이 오게 했다. 희년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과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경제활동에서 생존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토지거래에 관한 법이다.
먼저, 하나님은 자연 생태계 보호를 위하여 토지 경작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신다. 6년은 땅을 경작하여 거두고, 7년째는 쉬게 해야 한다(레 25:4). 이때는 경작지를 쉬게 하고, 땅이 내는 토지 산물은 자연의 들짐승들에게도 먹을 것이 있도록 배려해야 했다(레 25:7). 땅의 청지기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생명체와 피조물을 동반하거나 보호, 보존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희년법의 다른 하나는 토지거래에 대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땅의 소유나 매매를 금지한다(레 25:23). 그래서 하나님은 토지거래는 희년이라는 특정 연도를 정하여 희년까지만 팔고 사는 시한부 거래를 하라고 하신다(레 25:15,16). 이러한 시한부 거래도 친족들이 무르기를 하여서 경작권을 되찾아 주게 되어 있다(레 25:24,25).
7의 경제 주기를 지키지 않는 유대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희년법과 계명을 지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유언과도 같은 모세의 신명기 설교(신 27:1, 28:1~68)와 여호수아의 유언인 '세겜 언약(수 24:1,20)' 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은 바알 신과 바알이 알려준 이방제도를 받아들이고, 기업을 지키고 이어야 하는 희년법은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았다(창 38:9, 신 25:9, 룻 4:6). 그래도 듣지를 않으니 하나님은 기름을 부어 세웠던 왕과 제사장들은 제쳐두고, 비공식 지도자, 선지자를 불러서 계명을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탄원에도 희년법 준수만은 따르지를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이하게 벌칙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솔로몬 성전의 파괴, 나라의 패망, 70년 기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2,000년 가깝게 지속된 세계의 유랑생활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희년법, 곧 토지의 휴경법과 토지의 시장 거래법을 지켰으면, 나라가 부흥하고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이유가 없고, 2,000년 간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아야(디아스포라, 유랑생활)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일곱 경제와 일곱 재앙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렘 14:12)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대하 20:20,21)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계 6:8)
요한계시록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재앙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있다. 일곱 인에는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등장하고, 일곱 나팔에는 우박, 불의 산, 쑥별, 황충이 나오고, 일곱 대접에는 독한 종기, 생물 사망, 강과 샘이 피가 되고 어둠과 질병 등으로 당하는 각종 재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각종 재앙은 하나하나의 사건에 구체적 의미를 두기보다 그 재앙을 일곱 순서로 나누어 보여주는 이유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재앙의 강도는 점점 세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처음은 1/4이 피해를 입지만(계 6:8), 그다음은 1/3(계 8:2)이 피해를 입는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경고한 것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었다(렘 21:7,8,13, 34:17, 38:2). 예레미야는 이러한 재앙을 약 30회 반복하면서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런 경고를 듣지 않는다. 지금 계시록이 보여주는 반복되는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등은 모두 예레미야가 알려준 각종 재앙들과 비슷하다. 계시록이 말하는 일곱 재앙들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 여러 차례 예고된 재앙들을 7의 수로 세분하여 상세하게 그리고 반복적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 뿐이다. 그렇게 내릴 재앙에 대하여 강도를 높여가며, 재앙의 긴박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이 말하는 하나하나의 재앙과 사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왜 그런 재앙을 일곱이라는 숫자로 알려주고 있는지, 그 의미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전쟁은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고, 지진, 기근, 전염병 등은 자연계가 일으키는 것이다(겔 14:21). 모두 하나님이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어긴 것에 대한 대가로 내려지는 사회적 재앙이고, 심판이다.
하나님은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의 주기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반복하는 희년법 경제제도를 제정하셨다. 그리고 이 제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지킬 수 있는 법이었다(신 30:11~14). 그래서 하나님은 이 계명들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지킬 수 있는 법을 주었어도, 끝내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본성이 가진 탐욕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는 패망하고, 백성들은 70년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대하 36:20,21).
백성들이 경제와 희년법에 대한 그런 수준의 영성을 가졌으니,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는 곁에 와서도 보지 못했다. 메시아를 30년 간 곁에 두고 있었고, 3년간이나 메시아가 가르치는 탁월한 교훈을 직접 듣고서도 메시아를 식별하지 못한다 메시아를 십자가형을 받게 하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된다. 그래서 주후 70년에는 헤롯 성전까지 무너지고, 2,000년이나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계시록이 내리는 각종의 재앙들은 일곱이라는 수를 특별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일곱 영, 일곱 별, 일곱 촛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그리고 일곱 눈으로(계 4:5, 슥 4:10) 7을 유별나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7의 수로 지으신 창조질서를 어긴 것과 7의 주기로 제정한 경제생활, 곧 성경 희년법과 그 부수적인 규례들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벌칙임을 7의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지금의 경제구조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을까? 물론, 영적 또는 신앙적으로 보면 다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지만,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영접으로 유대인들과는 달리 구원을 받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제생활은 어떤가? 7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있고, 7의 주기로 정해놓은 생활 경제법을 지키고 있을까? 전혀 아니다. 이스라엘이 지키지 않은 7의 창조질서와 7의 경제질서를 그리스도인들도 지키지 않는다. 7의 주기로 된 경제법으로만 보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오히려 더 심한 강도로 어기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땅과 천지만물, 그리고 사람까지 7(일)의 순서로 지어서, 그 땅의 관리를 사람에게 맡기셨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청지기의 위상 관계다. 그러므로 사람은 청지기로서의 신분을 따라서 맞겨주신 땅을 관리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은 청지기의 신분을 떠나서 맡겨주신 땅에 대하여 주인 형세를 하고 있다. 맡겨놓은 천지 만물과 각종 생명체를 보호하기보다 훼손하고, 파괴한다. 땅과 피조세계를 소유와 독점으로, 노예처럼 부리고, 팔고 산다. 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이런 탐욕적인 행동은 첫 사람 아담부터 있었고, 아담이 금지한 열매를 취하여 7의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위반했다(창 3:6).
사람과 사람들 간에도 피조물답게, 청지기답게 창조주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아담의 첫 아들은 형제간에 살육이 벌어지고(창 4:8), 지구상에 사람이 늘어나자 세상은 음행과 죄악으로 더럽혔다(창 6:5,6). 하나님은 노아에게 7일의 말미를 준 후, 40일 동안 쏟아부은 비와 홍수심판은 이런 세상 죄악에 대한 심판이었다(창 7:4,10). 요셉이 총리가 된 때에 중동지방에 내린 7년 기근도 그 지역 사람들의 범죄로 인한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재앙에서도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일가족을 구원하게 하시고(창 45:7), 요셉이 제정한 토지법으로 애굽까지 부국이 되게 하셨다(창 47:26). 요셉이 애굽에서 취한 기근의 대비책과 토지법의 제정은 계시록이 알려주는 일곱 재앙을 이겨내는 처방책이며,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었다. 요셉의 때에 있었던 재앙은 족장시대에 있었던 세상의 종말적 현상이었으며, 그 때 가진 요셉의 지혜와 세상 통치법이 바로 그 시대의 세상 구원을 위한 성경적 경제법이고 해법이었다는 뜻이다.
7의 주기로 제정한 안식년법과 희년법 위반에는, 70년 포로생활, 나라 없는 떠돌이 백성들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아가는 유랑생활을 하게 했었다. 세계인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시 79:4, 겔 22:4). 계시록이 보여주는 각종의 재앙들은 이렇게 7의 주기로 되어있는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위반한 데에 대한 징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곱 재앙이라는 7의 숫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그 수를 강조하며 사람이 세속적이고 죄악된 경제생활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소아시아의 경제구조와 지금의 경제구조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계 18:15)
계시록에서 말하는 각종 재앙 중에서도 특별하게 경제적인 재앙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셋째 인을 뗄 때 나오는 경제 기근(계 6:5,6), 용이 등장하여 우상을 섬기고, 표를 받게 하여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계 13:17), 그리고 바벨론의 패망과 함께 무너지는 상인들의 모습이 그러하다(계 18:5,11,15).
이러한 경제적 재앙은 소아시아 일곱 도시에서 자행된 경제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바로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궁핍이다. 이 당시 소아시아 도시민들은 상업과 수공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생업인 상업과 수공업의 경제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인조합(guild) 가입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해야 하고, 현실적으로는 상인조합에 가입해서 상거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아야 했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예외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에 대한 반감 정서로 더 가혹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일제의 강점기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본 천황을 숭배하고, 신사참배를 해야 했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죽기도 했고, 끝까지 반대한 교단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 신사참배를 국가의 의식이라는 변명으로 허용하였다. 아마도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황제숭배와 한국인 성도들이 일제 강점기에 해야 했던 신사참배는 비슷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계시록에서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에게 표를 받지 말라는 반복적 경고는, 바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처한 경제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계 13:17, 14:11, 15:2, 19:20, 20:4).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받은 책망의 원인도 대부분이 로마 황제에 정치적 탄압에 따른 경제적 궁핍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면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늘날의 교회는 로마시대와 같은 정치적 탄압이 없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상인조합과 같은 조직도 필요가 없다. 그러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계시록이 경고하는 우상숭배와 짐승의 표를 받는 행위와 관련이 없을까?
지금은 로마의 황제숭배도 없고, 일제 강점기처럼 신사참배의 강요도 없다. 그러면 지금은 짐승에게 경배하는 것과 같은 우상숭배가 없으며, 표를 받아야만 상거래를 할 수 있는 제도가 사라졌을까? 계시록에서 거듭거듭 강조하는 짐승의 표에 대한 경고는, 과연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때에만 잠시 있을 수 있는 사건일까? 그런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과연 있을까?
아니면 이런 경고는 불신자들에게만 해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관련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계시록에 나타난 관련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경고는 불신자든, 그리스도인이든 구분이 없이 해당하는 경고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특별한 의미를 주어서 강조하고 있다. 이런 경고를 담은 계시록의 수신자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청중들이므로, 소아시아 교회들 모두가 경고의 대상인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7의 창조질서와 7의 주기로 제정된 경제법을 어겨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칙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7이라는 숫자를 특정하여 내리는 재앙들이 모두 이 7의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위반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계시록 일곱 교회에 대한 경고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모든 교회가 대상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오늘날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거나 대표하고 있다. 계시록이 말하는 바벨론은 상징적 표현이다. 그렇지만, 그 바벨론은 어느 한 시대를 말하기보다 포로시대는 바벨론을, 로마시대는 로마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바벨론은 오늘날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세상의 통치 권력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고 보아야 한다.
짐승이 주는 표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청소
그러므로 계시록이 말하는 권력자가 주는 짐승의 표와 그 표가 있어야 매매가 가능한 경제적 행위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7의 수로 제정하여 놓은 안식법과 희년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경제적 행위들이다. 신약시대 역시 희년법이 거래하지 못하게 한 것을 어기고, 오히려 이를 악용하고 있다. 생산 없는 부, 생산은 없고 부의 수평 이전만 적극적으로 취하는 상행위들을 말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면 품꾼이 네것 내것도 식별하지 못하고, 주인의 것을 탐욕을 품고 있다(마 20:14~16).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를 보면 경작권자가 주인의 포도원을 점유하여 세를 내지 않으며, 그 포도원을 소유하려고 상속자까지 죽이는 행위를 스슴지 않는다(마 21:33,34). 일곱 교회 시대는 생존권이 걸려 있어서 짐승의 표를 받았지만, 지금은 생존권 문제보다 생산 없는 부를 쉽게 취하기 위하여 받지 않아도 될 표를 적극적으로 쟁취하고 있다.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어려우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성전청소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성전청소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의 신분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킨 사역을 말한다. 이스라엘 남성들은 20세 이상이면, 모두 1년에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어야 했다(출 30:13). 출애굽 당시 성전세 납부 의무자는 603,550명이었으므로(출 38:26) 예수님 당시는 그 수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전세를 내려면 세겔화가 있어야 한다. 그때는 로마의 식민 통치시대이므로 생활에서는 로마가 발행한 로마화폐 데나리온화를 사용했다. 백성들이 성전세를 낼 때에는 유대화폐인 세겔화로 내어야 한다.
그래서 유월절을 맞는 순례객들은 로마화폐를 세겔화로 바꾸어 줄 환전상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당시 환전상들은 성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환전 업무를 할 수가 있다. 그래서 허가를 받은 환전상들은 환전거래를 독점하였다. 여기서 환전상들은 세겔화 교환에서 정당한 수수료보다 높은 웃돈을 붙이게 된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은 로마화폐와 세겔화폐에 들어있는 은의 순도 차이를 이유로 들어서 가격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그래서 로마화폐와 세겔화는 액면가격(명목가격)이 같아도 동전에 들어있는 은의 순도가 다르면, 순도가 높은 화폐에 프리미엄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는 교환을 위한 가격를 증명하는 도구(증서)다. 그래서 화폐는 액면가격을 대변하고 실물가치(소재가치)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진 화폐에 순도가 높다고 화폐에 프리미엄을 붙이게 되면, 화폐거래는 부당한 가격이 발생한다. 여기서 부당한 가격이란 새 돈 1만원권과 헌 돈 1만원권을 교환하면서 새 돈 1만원권에서 프리미엄을 붙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1만원 가치의 노동을 제공하고 받은 돈 1만원권은 새 돈이든, 헌 돈이든 가치가 같아야 한다. 이것이 화폐가 가진 본래의 기능이다.
그런데도 환전상들은 성전에서 시장을 독점하고, 이렇게 순도 차이를 이용하여 부당한 웃돈을 붙여서 부를 취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환전거래를 “강도의 소굴(마 21:13)”이라고 꾸짖으며, 환전대를 둘러엎어 버렸다. 그리고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았다. 성전에서 제물을 팔고 있는 상인들도 가난한 자가 유월절 제물로 드리는 비둘기에 비싼 값을 매겨서 폭리를 취하다가 함께 내어 쫓겼다.
이 성전세를 내어야 하는 제도가 잘못이 아니며, 돈을 바꾸는 순례객들이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강도의 소굴이라고 꾸중을 듣는 것은 환전상의 부당한 거래 방식에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정부가 세겔화를 두고, 순도가 낮은 로마화폐를 무분별하게 유통시킨 제도에도 문제가 있다. 또 유대 종교가 부당이득이 발생하는 세겔화로만 세를 내게 하는 제도와 그 제도의 율법적 운용에도 문제가 있다.
성전세나 헌금을 달러로만 내어야 하거나 한국 화폐와 같이 특정 화폐로만 내어야 한다면, 그게 율법이고, 제도적 허점이라 뜻이다. 여기서 더 나쁜 것은 환전상들이 성전 당국과 결탁하여 환전제도를 악용했다는 점이다. 세겔화가 순도가 높다면서 고율의 프리미엄을 붙여가면서 부당거래를 한 것이다. 여기서 부당거래란 불법은 아니지만, 부의 생산활동이 아니고, 부의 수평 이전 행위에 불과한 방식으로 치부를 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부당한 거래나 경제행위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만 있던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 환거래로 배운 웃돈 붙이기를 이자 금지법을 시행했던 중세 유럽에서도 적용하여 큰돈을 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웃돈 거래가 주로 유대인들의 손을 거쳐서 오늘날의 주식과 선물 등으로 시장이 커지고 있다. 그래서 금융거래가 순수한 금융수단을 넘어서 환 투기, 주식 투기와 같은 머니게임이 이렇게 자행되고 있다.
여기서도 필자가 말하는 금융거래는 정당한 이자를 수취하는 순수한 상거래를 죄악시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금융거래는 실물 상품의 거래처럼 선한 것이며, 경제활동에서 있어야 할 필수 거래 수단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문제시하는 금융거래는 정당한 금융이자나 실물거래의 결제 수단과는 별개로 부의 이전에 불과한 원금차익만을 노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생산 없이 부만 취하는 가증스러운 경제행위다.
이러한 권력과 권리를 이용한 상거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영향을 받았던 로마의 황제시대부터 있었다. 허가를 받아서 권리가 있어야 화폐를 교환했던 성전세 납부제도와 오늘날의 금융거래에서 발생하는 머니게임(생산 없는 부의 수평이전)의 조직 체계와 상호관계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소아시아 일곱 도시 -> 짐승의 표와 수 -> 일곱 교회
성전청소와 강도의 소굴 -> 세겔화의 교환 -> 성전과 유대교
바벨론과 같은 세상 권력 -> 부당한 차익거래와 금융 투기 -> 세상의 음녀들
계시록의 재앙들은 사회적으로 받게 될 재앙과 심판이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3)
본문은 음행의 결과로 세상 권력을 상징하는 바벨론이 멸망하는 현상을 말한다. 바벨론 멸망의 윈인은 음행, 곧 종교적 타락, 권력을 가진 왕들의 실정, 곧 정치와 사회의 부패, 그리고 탐욕이 초래한 부당한 거래와 경제구조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인들은 상품을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일반 상인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 희년법을 어긴 세상의 권력이나 우상이 만든 제도를 따라서 부당한 거래로 치부하는 특정 상인들이 대상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시록 17장과 18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말하고 있다. 17장은 우상숭배의 결과인 종교적 멸망, 18장은 정치, 경제 등의 현실 사회의 멸망을 말하고 있다. 17장은 바벨론을 음녀, 여자, 어미등으로 사람을 묘사하고, 18장은 처소, 큰 성, 시장 등으로 장소나 제도를 묘사한다. 계시록 초반의 일곱 인의 재앙부터 계속되었던 여러 재앙들은 바벨론의 멸망으로 사실상 큰 단계 하나를 마친 것이다. 왜냐하면 19장부터는 구속사의 종결 부문인 천년왕국, 예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의 마지막 순서만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일곱 인을 떼면서 내린 재앙들은, 7의 창조질서와 7의 경제질서를 어긴 벌칙과 가장 관련이 깊다. 이 벌칙에서 구원을 받을 수는 하나님의 수인 777이고, 심판을 받을 수는 짐승의 표에 들어있는 666이다. 그래서 경제적 심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17장과 18장의 바벨론과 상인들의 몰락으로 경제적 심판은 종결되고 있다. 그다음의 재앙들은 결박된 사탄이 풀린 후(계 20:2,7) 있을 마지막 재앙으로 최후의 심판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단계인 최후의 심판(백보좌 심판)은 생명책의 기록 유무, 또 믿음과 불신으로 갈라지는 개개인의 죄와 관련된 심판이다(계 20:15).
그러나 최후의 심판이 아닌 일곱 재앙의 대부분은 7의 숫자로 이루어진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어긴 사회 공동의 죄악으로 받게 될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 요셉의 때에 닥친 중동과 애굽 지역의 기근은 선택받은 야곱의 족속들도 피할 수가 없었다. 광야에서 약속의 땅을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40년 징계(광야의 유랑생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당했다. 약속의 땅을 호평하고, 계명의 신실한 순종자이었던 갈렙과 여호수아도 함께 당하는 경제적 고통이었다.
그런데 계시록의 일곱 재앙을 개개인의 믿음을 심판하거나 사람을 구원하는 영적인 문제로만 보면, 하나님이 계시록을 통하여 알려주고자 하는 재앙이나 심판에 대한 이해가 빗나갈 수 있다. 우리가 흔히들 하는 실수처럼 계시록이 일곱 교회의 서신과 일곱 재앙의 내용마저 그리스도인 개개인 대한 신앙문제만 염두에 두는 약점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계시록이 일곱 교회를 통하여 보여주는 각종의 사회문제나 경제생활에마저도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7의 순서로 사람을 지으신 창조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고, 모세오경에서 7의 순서로 제정된 각종 생활 규례와 희년법도 놓치게 된다. 그래서 성경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 내용까지도 희년법이 알려준 경제 구원은 제외하고, 종말을 대비하는 실책을 저지를 수가 있다. 이것이 지나치면 천국에 대한 희생 없는 진입과 재앙에 대한 현실 도피적 종말관이 나오게 된다. 성경에도 없는 휴거와 공중 재림 등을 말한다. 그리고 무천년설 입장도 경제와 희년이 들어 있지 않으면, 영적인 세상과 재림만을 드러내어 강조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희년과 기업은 순종자로 살아남은 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계시록이 보여주는 일곱 재앙에서 7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수, 완전수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 일곱 재앙이 말하는 7의 수를 하나님이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수로 묘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계시록이 보여주는 일곱 재앙에서 7의 숫자가 원래 7의 수로 시작한 창조질서와 경제질서를 위반한 것에 대한 엄중한 징계이며, 이 7의 질서를 회복하는 사회구원의 절차라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계시록이 일곱 교회를 통하여 알려주는 소식은 재앙과 심판을 넘어선다. 계시록이 알려주는 7의 숫자는 구속사의 완성을 위하여 필요한 창조질서와 경제질서의 회복 수단이 들어있다. 그리고 창조질서와 경제질서의 회복은 구속사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게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마지막 준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