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신적자 이자겸의 난으로 보는 영광굴비 유래
이 사람의 이름 앞에 어김없이 붙는 단어가 亂臣賊子입니다.
신하가 된 자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은혜를 모르는 자로서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이라는 말을
어지러울 난과 신하 신을 써서 난신이라 하고
해칠 적과 아들 자자를 써서 적자라 하는데
이 말을 합하면 나라와 어버이를 해하는 자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집안에 공신이 있거나 높은 공직에 있는 사람의 힘을 얻어
공직에 진출하는 것을 음서라 하는데
지금 말하면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공직에 진출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왕권을 농단하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주요 인물이 되었으니
고려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서슴치 않았던 유일무이한 인물입니다.
고려는 왕권을 중심으로 호족들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 서로 견제를 하면서도
협력을 하는 조화를 이루는 국가였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자였기에 혼란을 틈타 권력을 손에 쥐는데
딸들을 이용하여 성공을 합니다.
여기에 같은 집안인 인주 이씨 가문까지 합세를 하니 힘은 더 커졌을 겁니다.
같은 집안의 이허겸은 문종에게 손녀딸 셋을 모두 바치기까지 합니다.
이런 인주 이씨 집안의 농단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태를 지속하게 됩니다.
이 정도의 권력으로도 만족을 하지 못하고 왕권까지 넘보면서
모종의 계획을 세워 난을 일으키지만 실패를 하게 됨으로서
전라도 서해의 영광으로 유배를 떠나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유배지가 법성포라는 곳이었는데 참조기를 소금에 절여
해풍에 말려 맛의 일품을 만들어낸 굴비를
맛보면서 그 맛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먹어본 음식 중 최고라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왕에게 굴비를 진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이러한 행위가 비굴한 모습으로 비춰져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해 비굴한 모습으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허언을 합니다.
이 말이 전해지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바로
영광굴비 유래로 난신적자 이자겸의 난이 만들어낸
흥미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라 할 수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하직하는 운명을 맞게 되지만
유배를 간 상황에서도 입맛을 자극한
굴비의 맛은 오늘날에도 최고의 상품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비굴하게 굴하는 못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만들어낸
굴비라는 이름은 오랜 세월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지만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비참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