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그리워하며 / 이임순
교실 앞 꽃밭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경준이가 핸드폰을 내민다. 화장실에 다녀오다 신발장에서 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화면에 낯익은 번호가 뜬다. 잘 계셨는지 안부를 여쭈니 “이제 자네 말대로 하려고. 우리 선자 외롭지 않게 보살펴 주게. 염치없이 부탁해.” 하고 말끝을 흐리더니 뚝 끊긴다. 올해 92세인 선자 어머니시다. 가시나무를 스친 듯 마음이 쓰리다. 힘들게 결정을 하신 것 같아 괜한 말을 했나 싶기도 하다.
한 달 전에 그분을 뵈었다. 선자한테 다녀오시는 중이었다. 차에 태우고 오신 길을 되짚어 다시 선자 앞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엄니, 오늘 나랑 같이 선자 많이 보고 앞으로는 오지 마소.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오신 엄니를 보는 선자 마음이 편하겠는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펴볼게. 언니 생일과 같은 날이라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을 거고.”했다. 그때 대답은 하지 않고 눈가를 훔치셨는데 오늘 그 답을 한 것이다.
이른 아침을 먹고 걸어서 딸한테 가셨다. 점심때가 지나서 도착하여 빈 가슴 만지듯 마른 풀만 쓰다듬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가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부모 잘못 만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고생만 했는데 피 같은 그 돈을 제대로 관리 못한 어미를 용서해 달라고 딸에게 빌었다. 미안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떠난 날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휘청거린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걸어도 그렇게라도 선자를 보고 와야 당신 마음이 놓였다.
선자는 내 중학교 때의 친구였다. 아버지의 날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3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학비를 대어준 친척의 소개로 신발공장에 다니며 동생들 학비를 벌었다. 교복 입은 또래들을 만나면 저절로 부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어느 봄날 퇴근하는데 학생들이 살랑이는 바람에 벚꽃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친구는 벚꽃은 안중에도 없고 교복 입은 또래가 멋져 보였다. 새벽녘으로 자신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 날은 이를 앙다물었다. 동생들 학년이 올라갈수록 배움의 열망이 더 했다. 그즈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회사에 퍼졌다. 귀가 활짝 열렸다. 눈을 부릅뜨고 귀를 세워 들었다. 동생들 학비 보태고 자신도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다면 어떤 힘든 일도 할 자신이 있었다.
주말에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파독간호사'로 가는 뜻을 밝혔다. 누구 한 사람 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았다. 내심 서운했다. 그 마음을 감추고 내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뜻밖에 동네 어귀에서 그녀를 만나 집으로 데려와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우리나라에서도 돈 벌면서 학교에 다닐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독일행을 말렸다. 그때 친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그랬다. 학교 다닐 생각으로 3년만 꾹 참겠다고. 배우고 싶어 미치겠다는 친구를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호주머니에 있는 얼마 되지 않은 용돈과 그동안 틈틈이 배를 불린 돼지 저금통을 손에 들려주며 열심히 해보라고 등을 두드렸다. 이튿날 나는 학교에 등교하고 친구는 자기 집으로 갔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출국하기 전 친구는 간호조무사 교육을 받았다. 신발공장에서 만난 친구 세 명과 함께 열아홉 살에 ‘파독간호사’란 이름을 달고 비행기를 탔다. 기내에는 연령대가 다양한 외화벌이 여자들로 꽉 찼다. 두려운 마음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공항에 도착하니 병원측에서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이름을 찾아 줄을 서면 인원을 확인하고 데리고 갔다. 선자는 친구 세 명과 함께 같은 병원에 배정되었다. 그들은 기숙사에서 함께 살면서 친자매처럼 서로 의지했다. 월급 7백 마르크를 받으면 최소한의 생활비 80마르크만 남기고 모두 외환은행을 통해 고향으로 보냈다. 외화를 벌려고 수출된 ‘여성 노동자’한테 현지인은 냉담하게 반응했다. 정신적으로 지친 친구의 유일한 즐거움은 고향 소식을 듣는 것이라 했다.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편지를 자주 썼다. 어느 날은 성격 괴팍한 환자를 만나 오물을 뒤집어썼다는 하소연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번 돈을 보내면 어머니가 잘 관리해줄 것으로 알았다.
1966년부터 10년간 한국정부가 독일에 파견한 간호여성들 대부분은 3년 뒤 귀국할 생각으로 출국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계약기간을 채우고 예정대로 돌아왔고 더러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제3국으로 다시 떠나기도 했으며 독일에 그대로 남았다. 계약기간이 다가올수록 온몸에 힘이 없으면서 나른함을 느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럴 것이라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간호조무사에서 간호사가 되면서 월급도 올라 그 재미로 아픈 것도 견뎠다. 김치가 먹고 싶어도 눈을 질끈 감고 참았으며,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 답답한 속이 풀릴 것 같았으나 이를 악물고 돈을 아꼈다.
친구가 사는 G시(졸링겐)에는 한국 식료품을 파는 가게가 없었다. 한국인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프랑크푸르트에서 배추며 장, 젓갈 같은 것을 파는 트럭이 오는 날이면 잊지 않고 나가 식료품을 샀다. 친구는 시장에서 떨이로 파는 무른 산딸기나 살구를 사서 쨈을 만들어 먹으며 향수를 달랬다. 그렇게 절약하며 모은 돈을 보내면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술병으로 나팔을 불고, 동생들은 옷이며 신발에 상표 타령을 했다. 속이 타들어 가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건강에 적신호를 느낀 것은 체류 기간을 3년 연장한 후였다.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귀국하겠다고 가족에게 알렸다. 이 무슨 조화던가. 편지 한 번 보낸 적 없던 막내동생까지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 두려하느냐며 법석이었다. 식구들은 누이의 꿈이나 건강보다 고정적인 수입을 더 챙겼다. 건강이 악화 되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왔건만 현실은 비정했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그토록 고생했나 싶었다. 씀씀이가 헤퍼진 동생들은 더 이상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누이를 짐짝 취급했다. 시난고난하던 그녀는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학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요양병원을 전전하다 한창 젊은 나이에 한 줌 재가 된 내 친구 선자야,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영면에 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