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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제물 / 창 4:1-7, 행 15:12-21
예수께서 마 6:21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한가지 방법은 우리의 헌금생활을 점검해 보는 것이다. 막 12:41-44절에는 자신의 전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과부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게서 그를 칭찬하셧다. 과부가 드리는 헌금에 주목하셨던 주님은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어떤 이의 헌금은 주께서 열납하실 것이고, 또 어떤 이의 헌금은 주께서 받지 않으실 것이다.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은 어떠하리라고 생각하나?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인지라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라고 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므로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주님 앞에 드렸다’라고 말한다. 농부가 곡식을 제물로 드리고, 목자가 양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거절하셨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이 수세기에 걸쳐 분분하게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널리 알려진 바로는 하나님께서는 피 흘린 제사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었기 때문에 속죄의 근거로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에는 피가 없었기 때문에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저는 이 해석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서에 근거해 두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 하나님은 피의 제사 뿐만 아니라 곡물로 드리는 제사도 열납하셨다. 레 2:1절에 보면 소제가 나오는데 이것은 곡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 둘째, 가인과 아벨 시대에 과연 피흘리는 속죄 제사가 제도로 장착되어 있었느냐는 역사성이 의심스럽다. 본문에 쓰인 ‘제물’이라는 단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민카’는 본래 동물이나 곡식을 따지지 않고 모든 제물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농부가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양치기의 제사만 받으셨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단히 편협하게 아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이유가 무엇이겠나? 본문에서는 답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신약 히브리서에 그 해답이 나와 있다. 히 11:4절상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가 가인의 제사에 나타난 본질적인 차이는 믿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비교하면서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떤 자세로 헌금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지 다음 세가지로 살펴보겠다.
1. 가장 좋은 것을 바쳐야 한다.
가인이 바친 제물은 단순히 땅의 소산‘이엇다. 그러나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있다. 아벨의 베물에 나타난 특징은 두가지이다.
첫째, 첫 번재 것은 구약의 전통에서 항상 최고로 간주된다. 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그 보기를 들 수 있다. 출 13:2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출 13:12-13절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잠 3:9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간에 처음 것은 여호와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 구약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또한 흠이 없는 것도 제물의 필수조건이었다. 레 22:17-2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거류하는 자가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하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둘째, 기름을 바쳤다. 오늘날처럼 영양을 과다로 섭취하는 시대에는 기름을 피하는 것이 정상이다. 콜레스테롤이 많아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 옛날에는 명절에만 살코기가 적은 소고기 기름을 먹었다. 하지만 옛날에는 기름이 대단히 귀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삼상 2:16절에서도 먼저 기름을 태워 주 앞에 바쳤다고 했다. 하나님께는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바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유치한 것 같지만 월급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 드릴 것을 먼저 떼어 놓고, 또 가장 깨끗한 돈으로 구별하여(깨끗한 것이 없으면 구겨진 돈에 물을 뿌리고 다리미 질을 해서) 헌금을 드리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이, 바로 구약 시대에 처음 것과 흠없는 것을 제물로 바쳤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분께 최선의 것을 바치고 싶어하는 것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나이마라는 곳에 스텐리 팜이라는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을 위해서 회사를 경영하고 싶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최상의 것을 주께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그 방법을 가르처 주옵소서.’ 기도를 하던 중에 스텐리의 머리에 한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회사 설립 신고를 하면서 회사의 사주를 ‘하나님’이라고 써 넣었다. 그는 기도 가운데 이런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이 사업을 나를 위해 하고 나에게 영광을 돌리기 원한다면, 너는 단순히 중업원이 되어라. 끝까지 종업원으로 일하여라.’ 스텐리는 주님의 말씀에 생애를 걸고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의 사업에도 여러번이 굴곡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놀랍게 발전해 나갔으며, 그는 은퇴할 때까지 월급을 받는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언제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주께 드리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 우리의 믿음이 순전하고 주 앞에 열심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장 좋은 것을 그분께 드릴 것이다.
2. 의무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믿음으로 드리는 행위는 의무를 뛰어넘는 일이다. 한 성서학자는 본문 말씀을 해석하기를 ‘가인이 제물을 드린 행위는 의무에 불과했다. 반면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을 드림으로써 의무를 넘어서 주께 헌납했다’라고 했다. 물론 우리 시대에는 자기의 기본 의무도 수행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어떤 모임에 가입하더라도 그 모임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의무를 준행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아 천국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소한의 의무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그런 점에서 가인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다만 의무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별 의미가 없다. 구약시대의 율법에 따라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외부에 충실한 교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드릴 수 있다면 여러분은 주님 앞에 사랑을 바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가 의무 관계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 덕분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빚진 자이다.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태도로 주께 예물을 드려야 할지 깨닫게 된다.
A.A. 하츠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사업을 하다 실패하여 십만불의 빚을 졌다. 그가 파산하던 날 아침, 기도시간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 깊이 말씀하시는 바가 있었다. 하츠는 그날 저녁에 재산을 정리하면서 상당 액수를 교회에 헌금했다. 친구와 친척은 물론 아내까지도 그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때 하츠는 이런 간증을 했다고 한다. ‘나는 사업이 잘될 때 늘 이 사업이 조금만 잘되면 주님께 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공언했다. 오늘 새벽 우연히 말라기 말씀을 읽었는데, 그 말씀을 읽는 가운데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지만 정작 내가 빚을 지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분의 빚부터 갚기로 결심했다.’ 그뒤 사업 재기에 성공한 그는 신화적인 백만장자가 되었고, 복음 사역을 위해 힘쓰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16살된 한 소년이 청운의 꿈을 안고 뉴욕을 찾아왔다. 그는 뉴욕의 바닷가를 거닐다가 만난 어떤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 그 사람은 소년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삶을 사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너 무슨 재주있니?’ ‘시골에 있을 때 아버지와 함께 비누나 양초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비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해 보렴. 그리고 하나님께서 네게 복주시는 대로 십일조를 드리거라. 하나님이 너에게 계속 복주시거든 십일조만 드리지 말고, 십의 이조, 십의 삼조, 십의 사조...까지 드려서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멋있는 삶을 살아보렴.’ ‘아저씨, 그렇게 해 볼께요.’ 그 그리스도인은 소년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 드디어 소년은 비누공장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조그만 공장을 인수하였고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비누공장으로 시작한 그는 양초와 치약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이 사람이 바로 콜게이트 치약을 만든 윌리암 콜게이트이다. 의무를 넘어서는 사랑으로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채워주신다. 우리의 헌금생활은 의무인가, 사랑의 표현인가?
3.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4절 말씀을 자히 살펴보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다. 정확히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5절상에 보면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라고 되어 있다. 곧 제물을 통해서 자신을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까지 하나님 앞에 거절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헌금은 돈이 아니다. 헌금은 우리의 일부이다.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교회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웃을 위해서 헌금했을 때 그 정신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후 8:5절중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헌금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땀을 흘려 번 돈을 주 앞에 드릴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삶과 인생을 주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다. 헌금을 드릴 때마다 이 점을 마음 깊이 새겨라. 혹시 여러분은 주님 앞에 내놓지 못하고 있는 어떤 영역이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 보라. ‘진실로 이 헌금을 통해서 저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립니다. 받아 주옵소서’라는 진정한 헌신이 주님 앞에 드려져야 한다.
리빙스턴은 어릴 때 어떤 선교사의 간증을 듣고 선교에 대한 꿈을 가졌다. 간증이 끝나고 선교사역을 위해 헌금을 하는데 헌금 바구니가 리빙스턴 앞에 왔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헌금 바구니를 따라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목사님께 ‘목사님, 저 자신을 선교의 제물로 주님 앞에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 헌금은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버리신 주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 여러분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림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7-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