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산행일시 : 2023.07.22.토.00:02~15:28
동서울터미널에서 청명님과 포근한빛님 만나
영주행(21:10) 버스 탑승
영주터미널에서 다덕현 택시(39,300원)이동
다덕현에서 산행출발
조금지나자 마자 산사태 흔적이 있네요
산사태 흔적을 보고지나 능선길 잡아 가다보니
잡목에 등로가 보이지않아 흔적찾아 진행 시간이 지연되어 철탑있는 곳에 풀이 크게자라 등로가 잘보이지않는다
바로 좌틀 옛고개 내려섰다가 지맥길 산속에 들렀다가 미륵고개 도착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을 알현하고 돌아와 산길로 접어들어서 보니 역시나 좋지않음
918도로 지용호 호국공원으로 내려섬
새벽녘 진행하다보니 잡목에 숲이 우거지고 비가 온직후 인지 이슬이 내려서인지 신발과 바지를 적시네
시간이 지연되어 가골길로 내려섰다가 안부 갈림길 지나 410고지 넘고 고람리 임도길 지나고 지맥길 지나고 일부 도로지나 긴재지나고 만리산 갈림길에서 행동식 빵하나 섭취합니다
만리산 넘고 늘못지나 월오현에 내려섰다가
용두산넘고 굴티로 내려와 근처 민가에서 시원한물 한잔에 목을 축이고 세면까지 합니다
주인아주머니 감사인사 드립니다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가파르게 산을 오르다보니 복두산 정상 볼것도 없고해서 지나갑니다
그물망 따라가다 요성산 지나 방아재 내려섰다가
초소 폐헬기장지나 박달산 봉수산 넘고
옛고개 기사식당에서 식사 후 산행을 종료합니다
옛고개 삼거리에서 영주역 택시(16,100원) 이동
영주역 16:50 청량리행으로 귀경
KTX가 1시간이상 연착됨
산사태 흔적 세굴나고 나무가 서로 엉켜 넘어져 있네요
잡목이 많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음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 입상
1979년 1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거대한 바위를 부조(浮彫)로 새겨 바위가 그대로 불상이 된 것인데, 머리부분은 다른 바위로 조각하여 이 위에 얹어 놓았다.
바위 자체의 테두리가 자연스레 광배(光背)를 이루고 있지만, 현재는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다. 머리높이가 127cm나 되는 우람한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무척 토속적이다. 굵은 눈썹이 좁은 이마에 바싹 붙어 있고, 눈 역시 재미나게 웃는 모양이다. 뺨이 유난히 부풀려져 있고, 코는 너무 길어 턱 가까이까지 내려와서 입이 간신히 들어날 정도이다.
약간 움츠린 듯한 거구(巨軀)의 상체는 우람스럽기만 하다. 가슴에 들어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으로 지은 아미타(阿彌陀)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의 손은 비교적 세련된 조각기법으로 처리되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선조(線條)로 U자 모양의 둥근 옷주름을 크게 새긴 것이다.
하체는 땅에 묻혀 있어 옷무늬들이 판별되지 않는다. 현재 3m가 넘는 거구의 이 불상은 우람한 대석불로 토속미가 풍기지만 세련된 수법도 보이며, 아미타 중풍중생인 희귀한 수인(手印)을 나타내는 귀중한 예로 평가된다.
만리산 넘고 늘못 지나 월오현 내려섰다가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양리 산 50번지에 있다. 비의 높이는 3.1m이며 둘레는 1.4m×1.4m이다.
1949년 6월 17일 당시 봉화경찰서장 지용호 경감은 봉화군 재산면에 공산당원들이 출현하여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전투경찰과 청년단원들, 봉화군청 직원 등 46명을 인솔하고 재산(才山)으로 출동했으나, 미륵재 능선에 잠복한 무장공산당원들의 기관총 난사와 포위망에 걸려 전원이 몰살될 위기에 처하였다. 지용호 서장은 적 앞에 나아가 자기 신분을 밝힌 후 자기를 죽이고 딴 사람은 살려 보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생존자 30여 명은 살아 돌아가고 지용호 서장은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부하를 구출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지용호 서장의 충용(忠勇)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0년 10월 15일 이 비를 세웠다.
918도로 지용호 호국공원
봉화 응봉산 617m
높이는 792m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에 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청량산(淸凉山: 870m)과 문명산(文明山: 894m)을 마주하고 있다. 화전민 이주 지역으로 개간했으나 지금은 고랭지 채소 단지로 더 유명하다. 이무기가 살았다고 전하는 분화구같이 생긴 큰 못이 있다. 만리산 아래에는 관창폭포와 갈골계곡의 맑고 깨끗한 물과 청석바위와 자연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리산 삼각점
만리산 늘못
월오현
경상북도 안동시의 도산면 태자리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 북쪽은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이다. 예전에 예안에서 봉화로 갈 때 이용하였던 고개였다. 『해동지도』(봉화)를 비롯한 여러 봉화의 옛 지도들에서 '월현(月峴)'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 월현 바로 위에 신라현(지금의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 신라재)도 함께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월오현은 『조선지지자료』에서 나온다. 즉 봉화군 하남면(下南面) 태자산리 월오현(月午峴)과 그 한글 명칭 '달애재'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높은 재란 뜻으로 우리말 달애재 혹은 다랫재라고 부르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월현, 월오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월오현 대신에 다랫재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용두산은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국망봉을 거느리고 서남으로 위치한 새지산과 함께 안동호를 바라보고 있다. 국망봉 산자락에 온혜온천이 개발되어 있고, 남쪽으로 안동호변에는 도산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에 솟아있는 청량산과 이웃하고 있으며 해발 4백81m 국망봉 정상엔 세개의 바위에 ‘국’‘망’‘봉’이란 글자가 한자씩 새겨져 있다. 이 봉우리에 얽힌 사연은 조선 중기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은 단종이 왕위를 찬탈 당하자 봉화의 훈도 벼슬을 버리고 온혜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는 산 봉우리에 단을 쌓고 단종이 승하한 날(1457년 10월 24일) 북쪽 영월을 향해 절하며 30여년을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곳엔 국망봉 ‘단비(檀碑)’가 세워졌다.
용두산 지명유래를 안동시 녹전면 매정리 쪽에서는 약350년전에 이퇴계 선생 조부가 온혜에 마을터를 정할 때 산 모양이 용처럼 생겼으며 산봉이 용의 머리 같다고 하여 용두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하고,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쪽에서는 신라시대에 이 산에 용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절 뒤에 있는 산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잡목 덩굴이 많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음
문수지맥 593.9m
문수지맥 523.1m
박달산 일대의 산지는 해발고도 500~600m 사이의 비교적 낮은 구릉성 산지의 특성을 보이며 주능선 방향은 북북동-남남서 방향이다. 박달산 주변의 지질 분포는 선캄브리아기의 안구상 편마암과 혼성화강 편마암을 기반으로 선캄브리아기의 석회 규산염암과 흑색 점판암, 대리암 등이 협재 하여 나타난다. 중생대 쥐라기의 편마상 화강암이 관입하여 섞여 있다. 이러한 기반암들은 대체로 북동-남서 방향으로 발달하여 있으며 띠 형태로 나타난다.
한편 박달산의 서쪽에는 북북동-남남서 방향의 구조선이 지나가 이를 따라 구조곡이 형성되어 있으며 지방도제915호선이 놓여 있다. 이처럼 복잡한 지질 분포는 지형 기복에도 반영되어 있다. 북북동-남남서 주향의 능선에 솟은 박달산과 봉수산[570m], 용암산 중간중간에는 고개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지질 경계에서 발생한 빠른 침식 및 풍화 작용의 결과이다. 박달산에서 남서쪽으로 발달한 골짜기에는 먹골저수지라 불리는 소류지(沼溜地)가 조성되어 있으며 남동쪽의 소규모 분지는 마을과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높이 569.6m의 산으로 안동시(安東市) 녹전면(祿轉面) 녹래리(祿來里)와 영주시(榮州市) 평은면(平恩面)의 경계에 있다. 조선시대에 개목산으로부터 봉화를 전달 받던 봉수대가 있어 봉수산(烽燧山)이라 하였으며,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산이라고도 한다. 능선 위에는 주로 소나무가 많으며, 조망이 좋아 해마다 새해 첫날에는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구룡골 서편 일출봉에는 신라시대에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일출사가 있다.
영주역에서 셀카 인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