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느티나무
강성희(리디아)
‘젊은 느티나무’는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 되는 강신재 작가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국어책에 수록된 이 단편 소설 속에서 나는 느티나무라는 이름의 나무를 처음 만나게 된다. 아니다, 내가 중학생 때였었나? ‘젊은 느티나무’라는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긴 했었다. 학교와 집을 오고 가며 가게 유리창 마다 붙어 있던 반절 정도 크기의 영화 프로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신성일과 문희가 주인공인 듯 마주보고 있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어 있고 멀리 배경처럼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던가? 어쨌든 그 영화 프로에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하는 도장이 ‘중학생은 안돼’ 하고 경고하듯이 완강하게 찍혀 있었다. ‘젊은 느티나무’라는 제목은 당대의 최고 미남 미녀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의 제목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로맨틱하지도 않고 생뚱맞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젊은 느티나무가 뭐람?’
그 ‘젊은 느티나무’ 소설이 대학교 국어책에 실려 있었다. 단편이라 순식간에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더구나 영화 프로에서 본 신성일과 문희의 모습이 저절로 소설 주인공의 모습으로 대입되어 몰입감도 높았다. 재혼한 엄마의 딸인 여주인공과 의붓아버지의 아들인 남자 주인공 사이에서 일어나는 순수하고 로맨틱한,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였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계속 왜 제목이 ‘젊은 느티나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왔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 젊은 느티나무의 그루 사이로 들장미의 엷은 훈향이 흩어지곤 하였다.’하고 처음 등장한 느티나무의 이름은 몇 번이나 더 언급이 되다가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하는 문장으로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제서야 나는 이해했다. ‘젊은 느티나무’는 이 이야기가 새드 엔딩이 아니고 해피 엔딩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다. 왜 그냥 느티나무가 아니고 젊은 느티나무였는지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느티나무라는 이름은 스무살의 나에게 설렘과 감동을 주며 나의 관심 속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나이 들어가며 나무가 좋고 꽃이 좋아 의식적으로 꽃과 나무를 찾아보며 이름을 외우곤 하지만 대학교 다닐 그 당시만 해도 나무 이름 따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나마 알고 있는 나무 이름도 이름 따로 樹型따로, 이름과 樹型을 연관시켜 알고 있는 나무는 열손가락도 채울 수 없을 만큼 나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을 때이다.
느티나무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 왔다. 시골마다 마을의 한 가운데나 마을 입구에 마을의 수호신처럼 서 있는 정자나무나 당산나무도 대부분 느티나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큰집이 있는 시골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 무렵에 이 당산나무에서 동제를 올린다. 마을 부녀회에서 함께 동제 준비를 하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해마다 한 집 씩, 마을의 집집마다 돌아가며 동제를 준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당산나무는 거의가 수령이 몇 백년 씩 되는 고목이며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많다. 이렇게 잘생긴 나무로 자라기까지는 수백년이 걸린다. 마을 보호수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수령이 100년은 넘어야 하고, 읍면의 보호수는 200년 이상, 시군의 보호수는 300년 이상, 500년이 넘으면 시도의 보호수로 지정이 된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가고 없다’는 옛시조의 구절이 생각난다. 환갑을 넘기는 사람이 귀했을 정도로 수명이 짧았던 옛날에는 더 더욱 마을의 주인이 당산 느티나무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성 싶다. 사람은 태어 나서 죽고, 태어 나서 죽고, 수십 세대가 바뀌도록, 몇 백년을 묵묵히 마을의 한자리에 서서 마을을 지킨다. 마을의 문패처럼 마을의 표지목이 되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의 사랑 마루가 되고 쉼터가 되어 준다. 마을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지켜보며 수백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 왔을 느티나무에게 마을 사람들이 조상을 대하듯, 신을 대하듯 제사를 올리고 경외감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에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있다. 그야 말로 젊은 느티나무들이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오고 처음 맞은 가을 어느 날, 비가 오는 가로수 길을 운전해서 출근을 하는데 비에 젖은 나무들이 너무 운치있고 예뻤다. 어떤 나무는 노란 단풍, 어떤 나무는 붉은 색 단풍, 또 어떤 나무는 갈색으로 단풍이 들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한 나무에서도 그 여러 가지 색깔의 단풍잎을 다 달고 있는 나무도 있었다. 단풍나무나 은행의 단풍 빛깔이 원색적이고 노골적이이서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면 느티나무의 단풍 빛깔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하는 그러나, 설레게 하는 은은함이 있어 좋았다. 출근길만 아니었으면 그 가로수가 끝나는 길까지 가보고 싶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그 나무들이 느티나무인줄은 몰랐다. 나중에 동료에게 물으니 느티나무라고 했다. 매일 운전을 하며 휙휙 지나치니 자세히 볼 겨를도 없었거니와 내가 알고 있는 느티나무와는 수형도 조금 달랐다.
느티나무는 모두 시골 마을의 정자나무처럼 한 두 그루 외따로 떨어져서 자라는 고목만 생각했었다. 젊은 느티나무의 모습은 몇백년 풍상을 견뎌온 정자나무나 당산나무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노령의 느티나무들은 아름드리 樹間에서 굵고 튼실한 가지가 뻗어 있고 다시 어린 가지를 내어 그 가지 가지 마다 풍성한 잎을 달아 몇 그루의 나무들이 어울린 듯한 큰 그늘을 만들어 낸다. 그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품을 듯 아래로 드리운 가지들이 마음마저 푸근하게 한다.
그에 비하면 젊은 느티나무는 樹間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모두 하늘을 향해 뻗쳐 있다. 아직도 더 자라야 하겠다는 듯 힘차게 뻗쳐 나온 가지에서 에너지가 느껴진다. 정자나무 고목과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피워낸 잎들이 길가는 사람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기에는 충분하다.
‘아, 너도 느티나무였구나, 느티나무 단풍이 저렇게 아름다웠구나.’ 생각하며 잊고 있었던 ‘젊은 느티나무’ 이야기가 다시 생각나 친근감이 더해졌다.
최근 나무 수업에서 들은 느티나무 이름의 유래를 생각해본다. 늦게 티가 나는 나무라서 느티나무란다. 세월을 더할수록, 나이들어 갈수록 그 고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느티나무처럼 나도 그렇게 나이들어 가고 싶다. (끝) 2019.05.02.
첫댓글 느티나무의 단풍, 요란한 단풍나무나 은행나무의 색과는 다른 다양하고 소탈한 그 색깔을 보면서 우리 이웃의 모든 사람들 얼굴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늦게 티가나는 나무, 나이가 들수록 더 다양하고 아름다운 느티나무 단풍들이 그려집니다. 잠시 늦가을로 다녀온 아침입니다. 잘읽었습니다.
늧게 티가나는 느티나무, 모든 나무는 어리고 젊은 나무보다 고목이 되어 갈수록 의젓하고 든든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사람들도 세월을 탓하지 말고 늙은 느티나무 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티가 나는 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무에 대한 성찰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느티나무는 내가 좋아하는 나무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나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나무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새삼스레 잊혀져 가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오늘은 시원하게 뻥 뚫린 동호지구 느티나무 가로수 길을 다녀와야 될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엇습니다.
요란하지도 않고 은은한 느티나무의 단풍을 좋아합니다. 느티나무 "늦게 티가 나는 나무"의 유래는 오늘날 인간들의 조급증을 경계하는 듯 합니다. 우리 고향 마을에도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나무는 보존되어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대. 잘 읽었습니다.
제 고향 마을 동네 어귀에도 늦게 티가나는(위 글에서 인용) 수백년된 큰 느티나무가 수호신 처럼 서서 위용을 자랑하며 마을 사람들을 품었지요. 단오면 집집마다 볏집을 추렴해서 동아줄을 꼬아 잘 뻗은 튼실한 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고 누나, 젊은 엄마들이 그네 뛰는 경연 장소로, 농사 철 지친 부모님에 에너지 충전소로, 마을 잔치(풋구)며, 숨박곡질하는 동네 개구쟁이 뱃속에(나무 속에 여러 명이 들어 갈 수 있음) 품어주던 엄마 나무였는데, 어느 해 나무 속 보릿짚에 불나서 속이 타고 태풍에 맞서 싸우다 결국 쓰러져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우리동네 수호신을 강성희님에 글을 통해 추억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느티나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당당하고 귀티나는 나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노거수가 아니더라도 젊은 느티나무들은 도심의 사계를 아름답게 꾸며줍니다. '늦게 티가 나는 느티나무'의 뜻을 새기며 잘 읽었습니다.
가로수 느티나무, 마을 어귀에서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 ~ 우리의 추억과 사연들을 많이 품고있는 나무라 생각됩니다. 큰 그늘로 늘 묵묵히 보듬어주는 그런 나무인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시골동네 어귀에는 한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지요. 당산나무라고 불리며 마을 지켜주는 나무라고 여겨 해마다 재를 지니곤 했습니다. 그런 느티나무는 수령이 오래될 수록 넓게 뻗어난 가지들은 정말 티가나든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