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을 불사르면(월간문학`19.11월호)
丘在勉 勉힘쓸 면
늙마에 이게 무슨 마음고생일꼬! 남 하는 일이 못마땅해서 낯빛을 흐리기 일쑤니 하는 말이다. 신문의 헤드라인 읽기도 짜증스럽고 방송의 메인 뉴스도 듣기 거북하다. 서로 생각이 다르니까 그러려니 하면 되련만, 왠지 그게 쉽지 않다. 까닭 모를 미움을 숨기기 어렵다.
이런 저런 모임에서 함부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마뜩찮은 말을 그대로 들어주는 이는 드물어서, 중뿔(불쑥 말 참견하는 것이 주제넘거나 엉뚱한 데가 있다)난 의견을 말하다 그 자리에서 망신당하면서도 그런다. 물론 섣불리 정치판 얘기를 꺼내도 본전을 찾기 어렵다. 적잖은 이들이 날카로운 증오의 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학과 동기 예닐곱이 만나는 걷기 모임에서도 패가 갈린 적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가 기우뚱거리느냐 아니냐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던 것이다. 그때 중립을 지키려던 나는 카카오 채팅에서 댓글을 전혀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주먹(주먹을 쥐고 으르며 들이대다. ‘종주먹’은 쥐어지르며 을러대는 주먹) 대는 친구한테 질타의 화살을 받았다.
작년 이맘 때던가, 한 계간지에 시 한 편을 보냈지만 실어주지 않았다. ‘팔팔 육십육’이라 붙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 싶다. 제목이 9할인 줄도 모르는 시인이라고 깔봤거나, 예순여섯 먹은 이가 구구단도 못 외운다고 비꼰 행간이 좀 거시기해서 그랬거니 여긴다. 그 편집장은 시 속의 누군가(?)를 겨냥한 미움을 용케도 집어 낸 셈이다.
어떤 이는 우리가 삼불(三不)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에 불신 불만 불안이 찌들었다는 말이다. 세계에서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 행복도 최하인 나라에 이런 것들이 넘실대면 아무리 애써도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바로 풍요의 역설이다. 그러니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달가울 리 없고, 걸핏하면 누구든 미움의 올무에 걸리기 십상이다.
손에 잡히는 기쁨이 없으면 마음 또한 넉넉지 못해서, 남을 너그럽게 대하기는커녕 살가운 모습도 밉상으로 보기 마련이다. 티 같은 화도 삭이지 못하고 뉘 같은 미움도 감추지 못하면 다툼이 잦을 게 뻔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진흙탕에서 싸우며 심화의 독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채근담의 대인춘풍대기추상(待人春風待己秋霜남을 때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차겁게 하라는 뜻)이나 퇴계의 박기후인(薄己厚人남에게는 후하고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는 선비정신) 같은 말은 묻힐 수밖에 없겠다. 모든 게 다 네 까닭인 줄 알라는 가르침 또한 그렇고. 薄엶을 박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은 제 보고 싶은 것만 본다’했다. 자기 생각과 같은 정보만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무시하는 확증편향(confinmationbias)을 일찌감치 꿰뚫었던 눈이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그도 황제를 꿈꾸며 공화정보다 제정(帝政)이 최선이라는 고집을 버리지 못해 연인이 낳은 양자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비뚤어진 확신도 함께 암살되었다.
요즘 부쩍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사회가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서로 물어뜯다 보니 생긴 일일 게다. 힘을 거머쥩 패든 아니든 자신들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갈기를 세우고 덤빈다. 정의도 진리도 다 자기네 맘대로 정한다. 이와 다른 어떤 말도 생각도 행동도 불의로 본다. 오직 저희만 올곧고 선하고 의롭다 하면서 진리와 정의를 독점한다. 결코 과으는 있을 수 없다 믿고 무모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미움을 사리란 생각도 없이.
기가 막혀 이건 아니지 하는 언론이 따끔하게 나무라면 무조건 가짜뉴스라 하거나, 유체이탈(幽體離脫:사람이 육체 밖의 세상을 인지하는 경험이다.) 화법의 야릇한 말로 초점을 흐리거나, 얼토당토않은 비논리로 전혀 동이 닿지 않게 변명하거나, 제격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말로 듣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말을 본 뜻과 다르게 둔갑시키는 건 이념 투쟁의 전술로 사용되었기에 그리 낯설진 않지만,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사람들이 자신의 태도와 행동 따위가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 해소 심리려니 하다가도 어쩐지 그냥 지나치기엔 좀 뭣하다. 이렇게 해체된 언어는 부조리극대사에나 쓰여 이데올로기의 허황됨을 전할 뿐이련만.
나라가 흔들려도 대중은 말이 없다. 지성인들도 입 열기를 꺼린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다수의 침묵을 묵인이나 굴종(屈從)이나 절망이 라고 잘라 말하긴 어렵다. 설명하기 힘든 에너지가 거기에 쌓인다. 갑자기 느상티망(ressentirment)이란 말이 생각난다. 예부터 강자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은 늘 존재하지 않았던가? 종들이 숨죽이며 그 주인을 미워했듯이.
하지만 성경엔 증오가 영적 살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형지(이웃)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 받고, 라가(raca)라 하는 자는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 하였다(마태복음 5장22절 참조). 이럴진대 도대체 누가 누굴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조선왕조 중기 이후 인간 심성에 대한 이기론(理氣論) 다툼인 사칠논쟁(四七論爭)이 당파 싸움에 원용(어떤 사실을 다른 곳에서 인용하여 법률상 자기에게 유리하게 주장 또는 항변하는 일.)되는 오점을 남겼지만, 사람이 짐승으로 떨어질 낭떠러지 넷을 정립한 맹자(孟子)의 사단(四端) 중에서도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제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그걸 미워해야 사람답다는 것이어서 우릴 더욱 숙연하게 한다. 알몸으로도 낯을 붉히지 않는 이들은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흉악범들마저도 죄를 뉘우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조리 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한 알베르 까뮈의 일침(一針)이 찌르르하다. 그래서 혼자만 의롭다고 우겨대는 이는 이미 의인이 아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그는 의인을 자처하는 조인일 뿐이다.
로마제국의 국시(國是)는 관용이었다. 정복한 땅의 모든 신까지 모신 판테온(pantheon118∼128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건축되었으며 다신교였던 로마의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이다.) 신전이 이를 입증한다. 역사적으로만 살펴보면, 천 년을 이어온 다신교의 다양성을 버리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뒤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예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미워하지 않은 곳에 열린 흥왕(興旺)의 길을 본다. “타인은 지옥이다.”란 사르트르의 어깃장을 얼마든지 풀어 갈 열쇠도 보인다. 미움을 불사르면 인간성의 풍화(風化)는 분명코 멈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