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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강제일초등학교 친목여행으로 실시되었다.
교직에 들어와서 40여년 가까이 친목여행을 다녔지만, '진주와 순천' 방면은 처음으로 경험한 여행코스였다.
☞ 2011년 11월 11(금) ~ 12(토) 진주와 순천일원
♣ [탐방코스]
8시 학교 출발 ⇒ 경주실내체육관 앞에서 경주팀 승차 ⇒ 북대구 IC에서 행정실장 승차 ⇒ 진주성과 촉석루 체험(처음 가 본 곳) ⇒ 순천만 체험 ⇒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구례군 [송원리조트]에서 1박⇒ 선암사 ⇒ 낙안읍성 ⇒ 벌교 ‘꼬막정식’ ⇒ 경주 ‘고구려가는길’ 석식
▶ 1일차 : 11일(금)
교직에 들어오고 나서 한해 한번 씩은 친목행사로 직원여행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녀 올 ‘진주와 순천방면’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코스다.
8시에 학교를 출발한 관광버스는 ‘경주실내체육관’ 앞에서 경주팀들이 승차를 하였다.
북대구 IC에서는 대구에 거주하는 행정실장이 승차를 하였다.
드디어 [진주성]에 도착하다.
[진주성]과 [촉석루]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다.
♣ [진주성]은?
진주성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으로 불렸다.
현재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 의기사 · 창렬사 ·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다.
고려 말기인 1377년 빈번한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토성으로 쌓았는데, 2년 뒤(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돌로 다시 쌓았다.
1591년 경상관찰사 김수가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개축하고 취약한 동쪽 부분을 확장하여 쌓았다.
1593년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성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듦으로써 진주성의 흔적을 지웠다.
1604년 우병사 이수일이 합포(지금의 마산)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온 이래 경상도 우병영이 설치되어 있었고, 1618년에는 병사 남이흥이 촉석루 · 북장대 · 서장대 · 동장대 등을 중건했다.
이곳에는 1895년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1896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이 있었고,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었다.
- 제1차 진주성 전투 -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한동안 육상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먼저 확보한 후 호남지역을 공략하고자 했다.
1592년 10월 5일 [김시민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으로 일본군 2만여 명의 공격을 받았지만 6일간 싸워 이를 물리쳤다.
일본군은 수적 우세와 조총 등 신식 장비를 앞세워 공격했으나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육상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던 조선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고, 결과적으로 곡창지대 호남지방을 지킬 수 있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남해에서 일본 수군을 격퇴하고 있었고, 충청도 금산 지역에서는 조헌이 분발하고 있었다.
- 제2차 진주성 전투 -
왜군은 1592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593년에 7만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다시 공격해 왔다.
1593년 5월 20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공격을 위해 장수 및 부대 배치를 확정했다.
왜군은 1593년 6월 18일 진주 동북쪽 마현봉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에워쌌다.
우리는 창의사 김천일의 지휘 하에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서예원,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 김해부사 이종인이 각각 담당구역을 정해 일본군과 맞섰다.
조선군 지원부대가 올 것에 대비하여 2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6월 22일 공격을 시작했다.
이후 8일간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7만 명의 일본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제2차 진주성 전투라고 부른다.
당시 교전 중에 충청병사 황진이 전사하자 진주목사 서예원이 그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았는데,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고 한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하여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그를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에게 대신 맡겼다.
그런데 장윤도 곧 조총에 맞아 전사했기에 김해부사 이종인 혼자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에게 응수했다.
6월 29일 왜군이 진주성으로 진입하자, 서예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 숨어 있다가 붙잡혀 참수되었다.
그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
그의 처와 맏며느리, 시집가지 않은 딸은 모두 남강에서 투신했다.
‘귀갑거’와 양민 학살
전투 사흘째 되던 날 일본군은 튼튼한 나무궤짝을 바퀴가 네 개 달린 수레 위에 올려놓고 궤짝 속에 군사들이 들어가 손으로 수레를 앞으로 굴려 전진하고 후퇴할 때에는 밧줄을 뒤에서 당기는 무기를 사용했다.
이 무기는 궤짝의 윗부분이 거북의 등같이 생겼다 하여 ‘귀갑거’라고 불렀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묻힌 뒤 불을 붙여 귀갑거 위로 던져 불태우자 일본군은 일단 퇴각했다.
그리고는 귀갑거 위에 물기가 도는 쇠가죽을 씌워 화공에 대비한 다음 돌격대를 동문 성 밑으로 다시 투입했다.
6월 29일 성벽의 기초석 몇 개를 뽑아내자 성벽은 힘없이 무너지고 일본군 몇 명이 성벽 위로 올라섰다.
뒤이어 일본군이 몰려왔고 곧이어 서문과 북문 방어도 무너졌다.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쫓긴 나머지 조선군은 촉석루 밑 남강 바위에 모였다.
장수들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무기를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이 차례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의 손을 잡고 투신했고, 이종인은 적군과 격투하다가 양쪽 팔에 적군을 하나씩 끼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될 무렵 왜군은 이리 쫒기고 저리 몰려다니며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에게 창고로 들어가면 죽이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이에 살아남아 있던 군졸과 백성들이 창고로 들어가자 그대로 불을 질러 불태워 죽였다.
이렇게 8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은 6월 29일 함락되었다.
♣ [촉석루]는?
진주성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2층 높이의 촉석루이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장수의 공간이었고, 평시에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공간이었다.
‘촉석루’라는 명칭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며,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1241년에 세워진 촉석루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
1618년에 예전의 것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다시 불탔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을 거두어 중건한 것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대이다.
시인 [변영로]의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는 진주 관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학설에 의하면 논개는 최경회의 첩이다.
논개는 원래 전라도 지역 양반가의 딸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삼촌 주달무의 집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도박 빛으로 논개를 마을부자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나자 논개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이에 격분한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당시 현감 최경회가 재판을 맡았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죄 방면했으며 모녀가 살 길이 막막하자 관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게 하였다.
장성한 논개는 최경회의 첩으로 들어갔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뒷바라지하였다.
그리고 1차 진주대첩에서 공을 쌓아 경상도우병사가 된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되었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리고 왜장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남강 변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들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중의 한명을 꾀어내어 촉석루앞을 유유히 흘러가는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를 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였다.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나는 이곳에는 처음 가본 곳이라서 아주 의미 있게 [진주성과 촉석루]를 둘러보았다.
이어서 들린 곳은 [순천만]이다.
이곳은 지난해 [정원박람회]가 열린 곳이다.
체험 중에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귀는 아가씨(연말에 며느리가 됨)와 함께, ‘토지’의 무대 ‘하동 평사리’를 구경한 후 다음방문지인 이곳으로 온다는 연락이었다.
'순천만전망대'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아들을 잠시 만났다.
아직 상견례를 하지 않은 관계로 며느리를 처음 보는 아주 의미가 깊은 만남이었는데 갑자기 만나는 바람에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다가 보니 나중에 후회가 되었다.
맛있는 저녁이라도 사 먹으라고 얼마간의 용돈이라도 줄 것 하고 후회가 되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순천만에는 [갈대밭]과 생태체험, 그리고 석양이 일품이었다.
연구부장의 시댁이 이 부근인 관계로 석식장소로 아주 멋진 ‘연잎 정식집’을 소개하고는 본인은 시댁으로 향하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는 친목여행의 필수코스인 ‘노래방’으로 향하다.
오늘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구례군 [송원리조트]에서 1박을 하다.
우리학교 친목회장은 자그마한 체구에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사람이다.
낮에 버스로 이동중이었다.
밀폐된 관광버스에서 ‘방귀사건’으로 범인을 색출한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여서 재미있는 추억거리를 만든 후 저녁이 되었다.
노래방에서 벌어진 일이다.
흥에 겨운 친목회장은 춤을 추려고 테이블에 올라갔다.
그런데 균형을 잃은 바람에 테이블을 통째로 엎어 버리고 말았다.
▶ 2일차 : 12일(토)
어제 밤의 잔잔한 에피소드를 뒤로하고 오늘은 아침 일찍 ‘선암사’ 주차장 부근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하다.
이곳에서 산채정식으로 아침을 해결하였다.
그런데 생각 외로 실속이 있었다.
관광지 부근 음식이 가격에 비하여 그렇고 그런 곳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그렇지가 않았다.
조식 후 선암사로 향하다.
예전 방문 시에 비하여 연등이 너무 많아서 절 풍경이 고즈넉한 멋이 사라져 무척 아쉬웠다.
석가탄신일이 지난지가 한참인데 이 시기에 왜 저렇게 연등을 많이 달아 두었을까?
선암사 부근에 위치한 [낙안읍성]은 이전에도 몇 번 찾았다.
이번에는 젊은 후배들을 따라 코스를 달리하여 성루를 따라 일주를 하였다.
높은 곳에서 성안을 바라볼 수가 있어서 이전과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가 있어서 무척 좋은 경험이었다.
다시 이동을 한 일행들은 중식을 먹기 위하여 미리 예약해둔 보성 벌교로 찾아갔다.
이곳에 위치한 [꼬막 요리]집은 화려한 광고로 유명하다.
그런데 ‘맛집 소개’와 TV 맛 자랑 프로그램에 안내된 명성에 비하여 정말로 실망이었다.
예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손님들로 인하여 예약시스템이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
부근에 다른 꼬막집도 마찬가지였다.
맛 집으로 많이 소개가 된 탓에 밀려드는 관광객에 비하여 음식점이 너무 부족하여 예약한 손님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음식의 질도 별로였다.’고 입맛에 일가견이 있는 여선생님들이 야단이었다.
1시간을 기다려도 예약해둔 음식점에 입장을 못하고 결국엔 다른 꼬막 집을 찾았는데 그 집도 맛이 별로였다.
보성 벌교에 위치한 꼬막 집은 다시는 찾지 말자고 안강제일 친목여행팀을 굳은 맹세를 하였다.
벌교 꼬막집이 별로인 반면 친목회 관계자 젊은 선생님들이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그 외의 다른 맛 집들은 무척 인상적이고 실속이 있었다.
특히 가는 날 저녁을 먹은 ‘연잎정식’과 선암사주차장 ‘산채정식’ 그리고 오늘 저녁을 먹은 경주초등부근에 위치한 ‘고구려 가는길’에 6천 원짜리 동태 탕은 양푼에 가득 담아 양도 풍부하고 맛도 일품이었다.
첫댓글 상세한 설명으로 함께 다녀온듯 하답니다.
꼬막정식은 요즘도 인산인햅디다.
진주의 아세아 호텔은 잊지 못할 추억이 있는곳이며 배타고 들어가 민물고기 회 좋다고 선전하는통에 몇점먹고 디스토마 걸렸던 기억은 잊고싶은 추억이 되었답니다.
이 아침 잘읽고 잠시나마 행복해 봅니다.
'세월이 유수!'라더니 어제일 같은데 벌써 10년전 일이 되었네요!
잘 계시죠?
깊어가는 겨울과 함께 코로나가 없는 날을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