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7일 화요일
앙크루 와트
김미순
린다크는 우리 파인애플 농장의 일꾼이다. 매사에 성실하고 착한 각시다. 세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다. 남편은 우리 마을의 늙은 총각인 영진이다. 포크레인 기사라 한 달에 한 번 집에 온다. 성격은 착하고 말이 없다.
시어머니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며느리를 몹시 아낀다.
나는 농장에 이런 일꾼이 있다는 게 무척 댜행이라 생각한다, 항상 웃고 말없이 척척 해내는 게 대견해서 다른 시설하우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친다.
점심도 직접 만들어서 차리고 설거지까지 말끔히 해치운다. 오후 다섯 시에 같이 마을로 몬다. 일당 7만원을 주머니에 꼭꼭 챙기고 내일 다섯 시에 마을회관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가방에는 새참으로 준 카스테라와 바나나맛 우유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기후이상으로 파인애플이 무럭무럭 자랐다. 수확이 배이상 빨라지고 수입도 많아졌다. 욕심이 생겼다. 나는 애플망고를 시도했다. 진주에서 애플망고를 성공시킨 사람을 찾아 열심히 배웠다. 육개 월만에 기술자가 되었다.
파인애플 농장 옆에 유휴지가 있어서 면사무소에 문의해서 내가 시설로 쓸 수 있게 했다.
발빠르게 자제를 사고 공사를 벌여 한달만에 그럴싸한 하우스가 되었다. 그러나 일꾼이 없었다. 비닐을 덮고 모종을 심었으나 매일 정기적으로일할 사람이 없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힘든 일은 고액을 줘야 일하려고 했다. 그것도 점심에 새참, 저녁 회식을 요구할 때가 많다. 조금만 큰소리쳐도 갑질이라 외치고 고발한다고 위협했다.
그래서 린다크한테 도움을 청했다. 캄보디아 현지의 괜찮은 사람이 있냐고. 린다크는 활짝 웃으며 친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딸아이가 하나 딸린 과부라고 했다. 캄보디아에서 양장을 한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농삿일을 할 수 있을지 물어봐 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가을이 오고 황금빛 들녁이 노랗게 물들었다. 파인애플은 무럭무럭 자라고 애플 망고도 제법 무릎 크기로 자랐다. 열매가 맺히려연 두 달쯤 기다리면 되었다.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공무원 시험이 곧 있을 거라고, 이번에는 꼭 합격할거라고 믿어달라는 말을 하였다. 동생은 서울 삼류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세 번의 실패를 했다. 벌써 서른의 나이다.
나는 동생의 말을 굳게 믿으며, 파인이애플 숙과를 땄다. 그날 린다크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여동상이 오케이를 했다고 한다.
나는 린다크에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번 하고 저녁에는 삼겹살을 쏘기로 했다.
린다크의 동생 마윙지가 온 것은 애플망고 화분에 맺힌 열매에 망을 쒸울 때였다. 바쁠 때에 착 맞춰왔다.
나는 린다크와 다르게 엄청 예쁜 마윙지의 외모에 반했다. 아이는 친정집에 맡기고 홀로 찾아왔다. 신풍공항에 내려 우리집까지 찾아왔을 때 나는 내가 인복이 있다고 장담했다.
나는 참으로 만족했다. 가난해도 묵묵히 참아 온 아내와 미래를 헤쳐나가는데 최선을 다하는 동생, 우리나라 사라은 아니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한 란다크, 그리고 새루운 일에 달려드는 예쁜 마윙자ㆍㆍㆍ
아무일이 없었다. 내가 두 하우스를 오가며 무척 바쁘기만 했지 달리 할 일은 없었다. 점심 때는 자리만 하나 늘어났지 기존에 하던 그대로였다. 더 기쁜 것은 란다크와 마윙지가 제 나라말로 웃으며 얘기하는 게 좋아보였다.친자매라 더 애뜻해 보이고 서로 외로움
을 달래는 게 무척 순수해 보였다. 옆마을에 베트남 가시는 너무 위로워서 읍내를 헤매다가 급기야 운전기사와 눈이 맞았다고도 하고 어떤 외국인 노동자는 아예 자기 나라로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애기만 달랑 시어머니께 던지고ㆍㆍㆍ
그런데 11월이 되어서 동생이 안 좋은 소식을 갖고 왔다. 1차 필기시험에서 딸어졌다는 것이다. 벌써 네 번째인데 또 떨어지다니, 공부는 그럭저럭 잘했는데, 그래서 먼 서울까지 진학을 했는데,. 나는 실망하지 말고 내년에 다시 시도하자고 달래고, 그동안 애플망고 하우스를 책임지고 운영하라고 두어 달 내 일을 도뫄달라고 했다. 동생은 고맙다는 말로 덩치가 아주 작은 나에게 깊이 안겼다.
동생이 애플망고 하우스에 온 날 나에게 저 여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일 모자를 깊이 쓰고 마른 잎을 떼는 마윙지가 궁금했나 보았다. 이따 점심 때 얘기할거라고 정신없이 일하는 마윙지를 그대로 두었다. 나는 동생이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하우스를 나왔다.
점심때 이젠 자리가 또 늘었다. 동생 자리까지 생기니 제법 식탁이 좁았다. 나와 아내가 가깝게 앉고 린만크와 마윙지가 붙어 앉았다.
그제야 자초지종을 파악한 동생이 환하게 웃으며 마윙지를 똟이지게 보았다. 마윙지는 부끄러운 듯 눈을깔고 밥만 줄곧 먹었다. 린만크가 갈치토막을 가시가 없게 벌려 스윙지의 밥 위에 놓아주었다.
그렇게 아무일 없이 해를 넘겼다. 동생이 노량진으로 가기로 한 날 미적미적 대던 동생이 새벽에 나를 깨웠다.
"형, 자요?"
"무슨 일이냐?"
"저"
" 몇 시 기차냐?"
마루에 나와 나는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동생의 말을 기다렸다.
"저, 형. 저 공무원 시험 안 볼래요. 형이랑 하우스 농사 지을래요."
"뭐?"
"저 능력으로 공무원은 정말 안 될것 같아요. 차라리 몸으로 돈 버는 게 나을 것 같다고요"
동생은 어안이벙벙한 나를 아랫눈으로 보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안 돼, 그동안 고생한 게 얼만데 ㆍㆍㆍ 끝을 봐야지 "
"형"
그렇게 말을 마치고 다시 점심 시간에 만났다. 기차를 타지 않았나 보다. 그 날따라 아내도 린만크도 아무말이 없었다.
"
이 고등어도 묵은지에 싸서 먹어봐. 정말 맛있어."
나는 아내의 숟가락에 한점 떼서 올려 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고등어를 먹기는 억는데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긴 있어'
퇴근을 하려고 하우스 문을 잠그고 있는데 동생이 욌다.
"형"
"집에 가자."
"형, 오늘 형이랑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요앞 삼거리에 삼겹살 집에 갑시다."
그래서 나와 동생만 외식을 하기로 하고 다른 식구들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가기로 하였다.
동생의 말을 듣고 나는 인정이 되지 않았다. 마윙지 몸에 동생의 아이기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외국인 몸에 내 핏줄이 자란다니 ㆍㆍㆍ
나는 동생더러 지우라고 했다. 동생은 다문화 가정이 흠되지 않는 세상이고, 우리나라에서 키우니까 호적이며 언어 문제도 문제 될 게 없단다. 게다가 엄마들이 성실하고 싹싹하니 얼마나 좋냐고 설득했다. 캄보디아에 있다는 마윙지의 딸도 데려와 같이 키운다면 아주 다복한 집이 될거라고.
나는 점점 동생의 말에 설득당하였다. 역시 많이 배운 사람은 말도 잘해 하고 삼겹살 지지거리는 소리에 시간 가는 줄 모랐다. 마윙지는 누구보다 예쁘고 초등하교 방과후 수업에 영어와 프랑스도 가르칠 계획이라고 자랑까지 했다. 양장도 잘하니 뭐든 돈 되는 일이면 척척 해낼 것이라고 몇 번이나 목소리 키우며 초저녁을 죽였다.
신년 기녕으로 초특가 세일을 한다고 했다. 작목반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함께 했던 황가이드 말이었다. 고등학생 내 아들만 빼고 총 여덟 명, 여기에 시설 하우스를 하는 친구들 여덟 명 총 열 여섯이었다. 친구들은 결혼 축하객이었다. 자금은 모두 내가 대기로 했다. 린만크와 마윙지의 어머니께 한복을 준비하고 마윙지의 드레스와 한복도 맞춱갔다. 마웅지의 딸 옷도 당연히 여행 케이스에 넣었다.
캄보디아에 도착해서 시엡리에 갔다. 70년대 내전으로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해골이 전시되었다는 곳에 갔다.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입구 앞에서 코를 흘리는 꼬마 애들이 조악한 팔치를 팔고 있었다, 나는안 보던 광경이라 외면했으나 아내는 이 천원을 주고 두개를 샀다.내 것도 사서 주었다.
저녁 밥은 북한 식당에서 먹었다. 정말 친절하고 다들 예뻤다. 한참 밥을 먹는데 무대에서 공연이 있었다. 처음 본 공연이라 신기하고 대단했다.
다음 날은 앙크루 와트. 나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유적이라고 가이드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해자라는 곳에 연꽃이 가득 피었다. 아침 햇살에 앙콜루 와트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모두 단체 사진을 찍었다.
먼 길을 걸어 앙크루 와트 내부를 구경했다. 나는 가슴을 치면 소리가 들린다는 곳을 통과하면서 내게 쌓인 원한이 이렇거 많은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후에도 여러 사원을 찾아보고 나무 뿌리와 줄기가 바위를 덟혀버린 신기한 광경도 보았다.
나는 전쟁 때 묻은 지뢰가 터져 다리른 다친 애들이 구걸하는 모습을 아주 많이 보았다. 이번에는 만 원이나 깡통에 넣었다.
다음에 간 곳은 톤레샵 호수였다. 동그란 양동이를 타고 애들이 바나나를 팔았다. 나는 배에서 한 묶음을 샀다. 동료들에게 나누어췄다. 린만크의 시어머니가 맛있다7며 두 개나 드셨다. 저녁엔 우리 밥상을 준비해 주는 식당에 갔다.된장찌게와 두부 반찬이 그렇게 앗있었다. 하루 종일 구경해서ㅈ그런지 꿀장을 잤다. 내일은 동생의 결혼식이 있으니 어느 때보다 푹 자야 했다.
동생의 결혼은 마윙지의 동네 결혼식장에서 열렸다. 그렇게 많은 손닝은 아니었다. 친척들 몇, 마윙지의 학교 때 친구들 몇이 다였다. 마윙지의 어머니는 줄곧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린만크가 안고 달랬다. 린만크의 남편도 장모의 등을 어루 만졌다.
나는 내 자식의 결혼인 듯 마음이 착잡했다. 고 2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형인 내게 의지해 어려운 공부를 했으니 얼마나 원통했으랴~
나는 동생에게 마윙지 주라고 실반지를 주고 동생에게는싸디 싼 시계를 주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안 갔으니 다음에 형편이 풀리면 다시 앙크루 외트에 오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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