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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 희 자 서 전
서울 와서 고생 좀 했슈
이젠 다 잊고 행복해요
박정희가 이야기하고
김승미가 받아 적다
엄하면서도 인자했던 아버지
고생만 하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내 콧날을 납작하게 만든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시골에서 살면서 자식들에게 너무 엄하게 한 분이었다.
낮에는 다 같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 밖으로 절대 못 나가게 하셨다. 그래도 우리 마을은 읍과 가까워 저녁에 영화가 들어오는 날에는 노래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 설거지하면서부터 마음이 설레곤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조용히 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문 앞에 신발은 그대로 둔 채, 다른 신발을 신고 뒷문으로 살짝 나가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그럴 때면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는 길모퉁이에서 작대기를 들고 나를 기다리셨다. 그러나 나는 다른 길로 동네로 들어왔었다. 마침 남편이 군대에 간 새댁이 있어 그 집에서 조금 놀다 왔다. 아버지가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면 나는 누구의 이름을 대며 거기서 놀다 왔다고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못이기는 척 속아주셨다.
아~, 그런 생각을 하면 그 때가 참 좋은 때였다.
내가 6살 때쯤인가 나에게는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손위 오빠와 식전에 방에서 서로 장난을 치다 방문이 잠긴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방문이 잠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오시려 하다 방문이 잠겨있어 들어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방문을 열라고 소리쳤지만 나와 오빠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참 만에 문을 열자 아버지는 크게 노하시며, “누가 문을 잠갔냐?” 고 물었다. 오빠는 아버지께 “정희가 잠갔어요.”라고 대답하니 단단히 화가 난 아버지는 나를 앞들에 밀쳐버렸다. 그때 내 콧등 뼈가 부러졌다. 당시에는 병원에 쉽게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그대로 두었더니 아직도 내 콧등에는 흉터가 남아 있다. 그래서 내 콧날이 서지 않고 납작한가 보다.
사고뭉치 사촌오빠와 함께 살아
나에게는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작은 아버지가 계시다.
아들 하나 두고 일본으로 징용된 작은 아버지는 소식이 끊겼다. 삼년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작은 어머니는 그 아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다. 남겨진 아들은 우리 어머니가 우리들과 함께 키웠다. 고등학교 진학은 물론, 오빠가 경찰관으로 직장을 잡고,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우리 어머니의 힘이셨다.
오빠들이 있어서인지 우리 집에는 항상 오빠 친구들이 모였다. 여름에는 감자와 옥수수, 과일을 따 먹고, 가을에는 고구마와 호박을 캐어 삶아 먹었다. 옛날 우리 동네에는 사탕수수가 많았다. 오빠들은 그걸 잘라다 잎은 소먹이로 주고 대는 껍질을 볏겨 질겅질겅 씹으며 놀았다.
그런 다음 날에는 어김없어 아버지와 밭주인들께 야단을 맞곤 했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좋은 분들이라고 인정받았는데, 우리 사촌오빠는 아주 사고뭉치였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다 하듯이
예전에는 어머니들이 서로 품앗이로 이집 저집 다니며 명주로 실을 뽑으러 다니셨다. 물레로 실을 지을 때 쓰는 판돌을 항상 갖고 다니셨는데, 품앗이가 끝나면 나는 어머니를 기다리다 그 돌을 받아 오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우리 딸~” 이라며 칭찬했고, 그것을 본 동네 아주머니들은 못난이가 뭐가 예쁘냐고 놀리곤 했다. 마치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다 하듯이 말이다.
장교로 근무하던 큰 오빠가 가져온 추억의 간식
내가 태어난 진도는 섬이라서 6.25 전쟁 때 인민군의 수탈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살 많은 사촌오빠와 어린 나는 낮에는 뒷산으로 피신했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와 잠을 자곤 했다.
내가 군서초등(국민)학교 입학하고 큰오빠는 군에 입대했다. 6.25 전쟁 당시 자원입대한 큰오빠는 6.25 전쟁 휴전협정이 이뤄진 후, 휴가를 나왔다. 오빠는 나와 동생들을 위해 군에서 건빵과 미제 껌, 과자 등 간식거리를 잔뜩 갖고 휴가를 나왔다.
큰오빠의 휴가 소식에 우리 집 마당은 동네 사람들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모두들 큰오빠의 군 생활을 들으며 연신 고생했다, 애썼다고 했고, 오빠는 군에서 갖고 온 건빵, 미제 껌, 과자, 사탕 등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나눠먹겠다며 오빠가 갖고 온 간식들을 몇 개 챙겨 갔다. 그 때는 간식거리, 특히 과자라는 것은 참으로 빈약한 시기였다. 한국전쟁으로 입을 것 먹을 것이 모두 부족했던 시절, 간식거리라고는 자연에서 얻는 먹을거리가 다였다. 그것도 양껏 먹기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항상 배가 고팠다.
그런 때에 내가 건빵과 미제 껌, 사탕을 갖고 갔으니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반 친구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그것을 조금 얻어먹겠다고 모여들었다. 하나의 건빵과 과자는 부셔서 나눠먹었다. 사탕은 오랫동안 단맛을 즐기려고 혓바닥으로 요리조리 살살 굴리며 단물을 빨아먹었다. 몇몇 친구들은 하나의 사탕으로 여럿이 돌려가며 먹기도 했다. 사탕을 맛보았다는 것 하나가 큰 자랑거리였다.
그런 사탕보다 더한 동경의 대상은 껌이다. 변변한 과자가 없던 때라 향긋한 껌의 향기는 마약보다 더 진한 유혹이었다. 그 시절의 껌은 소나무 송진을 불에 녹여 산에 있는 까만 열매나, 밀 한 움큼을 함께 씹는 것이 다였다. 송진을 불에 녹여 씹던 껌과 오빠가 군에서 가지고 온 껌의 향은 차원이 달랐다.
어린 우리들에게 너무나 귀하고 소중했던 껌이었기에 단물이 다 빠지도록 씹어도 버릴 수가 없었다. 씹던 껌은 버리지 않고 적당한 곳 여기저기에 붙여 놨다. 그리고 다음날, 또 다음날 다시 떼어내 씹곤 했다.
우리 가족, 동네 사람들,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게 해 준 우리 오빠는 군 생활 중에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입대 한지 9년 만에 대위로 제대했다.
중학교도 못가고 죽도록 일만 했던 어린 시절
내가 군서국민학교를 졸업하자 부모님은 중학교 입학을 반대하셨다. 당시에는 큰오빠는 군에 있고, 작은오빠는 서울 농대에, 언니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게다가 사촌 오빠도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는 상황이라 집안 형편상 나의 중학교 진학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에 가고 싶었던 나는 부모님 몰래 중학교 입학원서를 내고, 입학하고 나서야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다. 결국 집안 형편상 중학교 1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그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일만 죽도록 했다.
소에게 먹일 풀을 매고, 돼지에게 먹일 풀매고, 봄에는 풀이 많지 않으니 소를 끌고나와 풀을 먹이고, 여름에는 소를 산에다 두고, 남의 밭에 있는 감자, 옥수수, 보리를 따서 구워먹고, 가을에는 고구마, 콩 따위를 구워먹곤 했다. 또 논에 거름 한다고 여기저기 다니며 메꾸리(짚으로 둥글고 울이 깊게 엮어 만든 바구니)에 풀을 뿌리째 캐서 집 마당에다 말려 논에 거름으로 주거나 풀을 베어 살짝 말려 논에 뿌려주곤 했다. 어린 나로서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수확을 바로 한 벼는 수분이 많아 어느 정도 말린 후 찧어야 한다. 이때 벼를 쌀로 찧기 위해 말리는 벼를 ‘우케’라고 한다. 집 마당에 우케를 널어놓을 때면 닭이나 새가 쪼아 먹지 못하게 간줏대(긴대나무)를 들고 쫒는 것이 항상 내 몫이었다. 가끔 군것질이 하고 싶을 때면 오빠와 둘이서 솥에 불을 떼서 보리와 밀을 볶아서 먹기도 했다.
또 친구들과는 진도 앞바다에서 꼬막을 캐기도 하고, 게도 잡고, 굴도 캐고, 파래도 뜯으며 여러 가지 반찬거리를 구했다. 진도가 워낙 섬이라 과자 같은 간식거리는 꿈도 못 꾸고,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산에 가서 칡 순을 꺾어먹고, 찔레 순도 꺾어먹고, 소나무 껍질도 벗겨 먹다 보면 어느새 목마름도 가시고 배도 채우고 했다.
산에서 땔감도 해 왔다. 내가 아침 일찍 산에 가서 고사리를 꺾을 동안, 어머니는 미나리 논에서 미나리를 캐어 장에 팔러 가곤 했다. 그러면 나도 어머니를 함께 따라나섰다. 밥을 해 배추와 무, 미나리에 쌈을 싸 먹으며 그 시절을 지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때론 힘들어도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곡식을 팔아 수 놓는 실을 샀다. 낮에는 어머니와 들에서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배게 수, 방석 수, 옷걸이 수를 놓았다. 그러다 어머니는 과로로 돌아가셨다.
진도 섬 아가씨 서울에서 55년을 살다
끝없는 고생…고생이라 느낄 틈도 없어
수려한 외모에 반했나, 인품에 반했나
동네 사람의 중매로 나는 서울에 사는 남편과 혼인했다. 집안 어른끼리 맺은 약속으로 나는 얼굴 딱 한번 본 남편과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도 없는 얘기지만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연애를 하고 결혼한 사람이 드물었다. 수려한 외모 탓에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의 남편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지금껏 집안에서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던 것을 보면, 우리 남편의 인품은 으뜸이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안목도 최고라 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예나 지금이나 안 좋을 때가 없다.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은 서울에, 나는 시골에 한 3개월가량 떨어져 있었다. 남편이 먼저 서울로 가고 나 혼자 시댁에 남았는데 2명의 동서들이 본인의 혼수가 좋다며 말다툼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니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친정엄마 없이 변변찮은 혼수 없이 시집을 온 것이 너무 서러웠다. 그런 나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시 아주버님이 들었는지 와서 울지 말라며 나를 달랬다. 시댁에서 몇 달 산 뒤 신접살림을 인천 부평 소사에서 꾸렸다. 남편은 친구와 사업(동업)을 한다고 서울에 있고, 나는 소사에 살다 서울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 옆으로 이사해 남편과 함께 살게 되었다.
서울운동장 옆에 살면서 너무 서러워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저녁이 되면 동업하는 남편의 친구가 우리 방에서 바둑을 두며 놀다 가셨다. 추운 겨울 방이 너무 추워서 잠깐 밖에 나가 연탄을 갈았다. 방으로 들어오려니 남편 친구가 너무 문 앞에 앉아있어서 내가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분에게 몸을 조금 기우려 달라고 했다. 내가 들어가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남편은 친구에게 몸을 기우려 달라고 했냐고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느냐며 야단을 쳤다.
당시 임신을 한 상태라 배가 남산만한데 그런 나에게 남편은 당장 시골로 내려가라고 했다. 나는 너무 서러워서 집을 나갔다. 한참을 방황하며 서성였더니 남편이 걱정이 됐는지 나를 찾으러 나왔다. 나는 못이기는 척 남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하루는 저녁에 남편이 집에 들어왔는데 다음날 아침밥 할 쌀이 없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렵게 남편에게 말을 하니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속 깊은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결혼할 때 했던 금반지와 한복 한 벌을 꺼냈다. 그것을 본 남편은 왜 그것을 꺼내나며 의아해 했고, 나는 그것이라도 전당포에 가져가 보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어렵게 전당포에 가서 말을 하니 전당포 주인은 고맙게도 금반지와 한복을 담보로 300원을 줬다. 그 돈으로 쌀 한 대박과 연탄 3장을 샀다.
그 후 전당포에 맡긴 한복은 찾아왔지만 금반지는 끝내 찾지 못했다. 남편은 지금도 그것을 잊지 못하고 안타까워한다. 나는 실장갑 공장에서 실장갑을 가져다 꿰매기도 하고 전자제품 부품을 조립하기도 하고, 한약 재료를 가져다 작은 작두로 썰어 한약방에 가져다주며 생활비에 보태기도 했다.
얼마 후, 나는 용두동 시립병원에서 첫 아들을 낳았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는데 집에는 양식이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일주일 만에 나와 밥을 해 먹었다. 산후조리라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다행이도 시댁에서 보리쌀 한가마를 보내줬다. 아이 낳고 100일 동안 보리밥만 먹었다. 그래서 보리쌀이라고 하면 지금도 지긋지긋하다.
보리쌀이 떨어지니 하는 수없이 시댁으로 아이를 업고 내려갔다. 시댁에서 동서와 함께 일을 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남편에게는 곧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연락하고는 무작정 올라왔다. 막상 서울로 오니 우리 집은 금호동 산꼭대기에 수도도 없는 집이었다. 물동이를 이고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
그 후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사업을 위해 이사를 갔지만 그 집 또한 수도가 없었다. 여기서도 물지게를 이고 물을 길러다 직원들 밥을 해 주며 살았다. 돈이 없어서 집 근처 구멍가게에 외상을 하고 생필품을 구입하고 월급을 받으면 갚곤 했다.
간혹 구멍가게에 외상값을 갚고 여윳돈이 생기면 그것을 조금씩 모았다. 그런 여윳돈이 5만원이 되면 나는 그것으로 이자를 받고 지인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당시 직장인들의 평균 월급이 8,000원 이었으니 5만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번은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하루, 이틀 지나 2년이 지나도 돈을 주지 않았다. 그 돈을 받을 요령으로 아침 일찍 어린 아이와 이불 하나를 머리에 이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부터 돈을 줄 때까지 살겠다고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지인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저녁때가 되자 돈을 빌린 것을 남편이 알면 안 된다며 이틀 뒤 반드시 돈을 줄 테니 돌아가라고 사정사정 했다. 그 말을 믿고 돌아왔지만 아직도 그 5만원은 받지 못했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1년 후, 성동구 금호동 논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갔고, 그해 겨울에 딸을 출산했다. 때마침 잠깐 함께 있었던 큰집 조카딸이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러다 산간(출산뒷바라지)을 해 주었다. 15일 동안 고생한 우리 조카딸이 지금도 너무 고맙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고무장갑도 없이 김장을 하려고 배추를 씻어 놓으면 배추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릴 정도였다. 또 아이 기저귀를 빨아 놓으면 기저귀가 꽁꽁 얼어 솥뚜껑에 말려 쓰곤 했다.
나와 3개월 차이로 안집 주인아주머니가 아이를 출산했다. 산간해 줄 사람이 없다며 주인아주머니는 나에게 부탁했다.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주인아주머니를 대신해 나는 반찬도 하고, 각종 옷가지, 아이 기저귀, 심지어 그 집 남편 속옷까지 빨아주고, 죽까지 끓어서 챙겨줬다. 집 없는 서러움을 톡톡히 치렀다. 추운 날씨의 서러움은 물론 당연하다는 듯이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들었다. 그 때 고맙다는 말 한마다만 있었어도 참 좋았을 것 같다.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잃어버렸던 아들 하루 만에 되찾아
하루는 집에만 있으려니 너무 답답해서 5개월 된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5개월이 되니 날씨도 따뜻해 이웃 아주머니와 축대(돌로 쌓은 담벼락) 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이웃 아주머니가 자기 집으로 가서 편하게 있자고 했다.
나는 돌을 집고 일어나려는 순간, 손을 집은 돌이 빠져버리는 바람에 집한 채 높이 아래로 아이를 안고 떨어졌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 높은 곳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아이는 다친 곳 하나 없었고, 나는 발뒤꿈치를 다쳐 집에서 물리치료만 했다. 내가 발을 다쳐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 직원들이 물을 길러다 밥도 해주며 도왔다. 이런 것이 바로 상부상조가 아닐까. 내가 평소에 직원들 식사에 신경을 썼더니 내가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우리 직원들이 나를 위해 애써줬다. 너무 고마웠다.
또 한 번은 큰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당시 5살이었던 큰아들이 점심 먹고 1원을 달라고 했다. 1원을 손에 쥐어 줬더니 아이는 그 길로 나가서 저녁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도 잊은 채 밤새 아이를 찾으러 여기저기를 다녀도 아이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창 유괴범들이 많았던 때여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유괴범들이 ‘돈을 요구하면 어쩌나, 우리에게는 가진 돈이 없는데’ 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남에게 피해가지 않게 착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한탄하며 아이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던 와중에 친정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친정아버지의 사망소식보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데 신경을 쓰느라 장례식에 가보지도 못했다.
그 다음날 기적적으로 남편 회사로 연락이 왔다. 아이가 아빠의 회사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아이는 자동차를 따라 하염없이 가다보니 모르는 곳이 나왔고, 집을 찾아올 수 없었다고 했다. 아이를 찾은 기쁨에 얼마나 감사한지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 감사합니다’를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우리 큰아들을 지켜준 것이 아닐까 싶다.
화상 입은 딸 업고, 한 명은 걸리고 병원까지 내달아
우리는 다시 또 이사를 했다. 옥수동 미타사 절 뒤편으로 방 세 칸짜리 독채를 얻었다. 남편은 사업이 잘 되지 않자 회사에 취업했다. 워낙 남편의 인품이나 성품이 훌륭해 회사 돈 관리도 전적으로 맡게 됐다.
나는 집에서 생활비를 타서 쓰는 형편이었기에 한푼 두푼 아끼는 재미가 쏠쏠했다. 겨울이 되면 연탄을 다라이(대야)에 담고 머리에 이어 날려 사용하곤 했다. 그러다 셋째 아들을 낳았다. 저녁이 되어 슬슬 진통이 왔다. 나는 먼저 밥을 해 놓고, 미역국을 끓이고, 가위와 실을 챙겨 아이 낳을 준비를 했다. 새벽녘이 되자 본격적인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하던 남편은 내가 진통에 소리를 내니 소리를 못 내게 했다. 나는 진통을 조용히 참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다음날 옆집 아주머니는 나에게 출산 했냐고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아이를 낳을 수 있냐며 대단해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난 조금 대단한 것 같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셋째 아들의 출산은 나에게 상당한 긴장감을 안겨줬던 것 같다. 내 몸도 내 몸 같지가 않았다. 간난 아이를 눕히고 잠시 앉아있었다. 4살 된 딸아이가 과자를 사달라기에 부엌 찬장에서 돈을 꺼내 사 먹으라고 했다. 같이 과자 사러 나갈 힘도 없었다. 부엌 찬장에서 돈을 꺼내던 딸이 발을 헛디뎌 뜨거운 물솥에 발이 빠져 발 등을 데었다. 당시 찬장 옆에는 온돌에 불을 때기 위해 아궁이 위에 가마솥을 걸어 물을 끓였다. 그 끓는 물에 아이 발이 빠진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 우는 아이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한 명은 엎고, 또 한 명은 걸리고, 또 한 명은 옆집에 맡기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다행히 아이는 치료를 잘 받았지만 지금도 아이 발등에는 흉터가 있다. 그 흉터를 보고 있노라면 그때의 사고가 생각이나 아이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정말 아이들 사고는 한순간이라더니 아이들은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오는 길에 시장을 봤다. 그것을 머리에 이고 아이 한 명은 안고, 또 한 명은 걸리고 그 힘든 언덕길을 올라왔다. 집에 도착하니 옆집 미장원에 맡긴 막내는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힘든 나날을 보냈던 그 시절 옆집 미장원 원장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추울 때는 아이와 놀아주고, 일하는 틈틈이 아이도 챙겨주고 봐주곤 했다. 그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그 당시 헤어져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나에게 은인이었던 그분이 그립고 보고 싶다. 언젠가는 꼭 만나서 옛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다시 지하 단칸방으로…집 없는 설움은 언제까지
직장에 다니던 남편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포천에 땅을 사서 공장을 늘렸다. 옥수동 방이 좀처럼 세가 나가지 않아 그때 돈으로 전세금 13만원을 포기하고 아는 사람 집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이일 저일 부업을 했다. 다행히도 광희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 아이들 공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당시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무서울 정도였는데 나는 생활이 바빠 학교에 한번 가지 못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아이를 너무 예뻐해 주셔서 지금도 감사하다. 아마 진정한 교육자였던 것 같다.
우리 식구가 서울에 있다 보니, 시아버지가 갑자기 오실 때가 있다. 다행히 근처에 큰조카들이 있었다. 조카들이 우리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우리 집에서 매 끼니를 해결하고 저녁에 집으로 가고 아침이 되면 공장으로 출근했다. 시아버지도 조카들을 따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조카 집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오셔서 하루 종일 함께 지내시곤 했다.
방 하나, 부엌 하나이니 세수하기도 불편했다. 매일 아침 세수하려면 세숫대야를 들고 밖에 있는 공동수도로 나가야 했다. 어느 날 겨울이었다.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솥에다 물을 끓여서 그 물을 대야에 받아 찬물과 섞어 씻어야 했다. 미지근하게 데운 물로 손을 씻어도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손은 트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추운 날씨 탓에 피부가 건조해져서 그런가보다. 물이 식기 전에 우리 가족이 씻으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빨리 나가서 먼저 씻어야 했다.
항상 아이들에게 ‘추우니 얼른 씻자’라고 해서인지 큰 아들은 대야 담당이었다. 끓인 물이 담긴 대야를 조심스럽게 들고 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아이가 한번은 발을 헛디뎌 물을 허벅지에 쏟고 말았다. 엉엉 우는 아이는 자신이 아픈 것 보다 물을 쏟았다는 죄책감에 더 마음 아파했다. 나는 그런 아이의 마음이 안쓰러워 약을 발라주며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도 흉터가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장성한 아들이라 허벅지도 내 마음대로 보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다 1년 후, 우리는 방 2칸짜리 옥상 집으로 이사했다. 옥상이다 보니 겨울이 되면 수도가 얼기 일상이었다. 수도가 얼면 아래층에서 물을 길러 먹었다. 날은 춥고,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챙기는 것이 내 일이었다. 명절 때면 나와 같이 섬이 고향인 직원들과 고향에 가지 못한 직원들을 우리 집에 데려다 떡과 한과, 인절미 등 이것저것을 해 먹였다.
가끔 시댁, 친정 조카들이 서울로 오면 모두 우리 집에 묵었다. 서울에 온 15명의 조카들을 챙겨주고, 그 중에는 대여섯 명의 조카들을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러면 그 손님들까지 다 챙기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 적도 있다. 또 예비군 훈련을 받는 조카들이 있으면 도시락도 싸주고, 직장을 그만둔 조카에게는 우리 집에 머물게 하며 용돈까지 쥐어졌다. 그 뿐만 아니다. 시골이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조카들에게는 차비까지 모두 대줬다. 하물며 8촌 조카가 장사를 하겠다, 해서 집문서까지 내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내 손을 거치지 않은 조카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는 우리도 살기 팍팍했는데, 왜 그렇게도 손을 벌리는 조카들이 많은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든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가끔 공장에서 밥을 해 주는 아주머니의 집에 일이 생기면 나는 공장 일을 도우러 가곤 했다. 당시 공장은 포천(현재 대진대학교 밑)에 있었다. 공장으로 가려면 터미널에 가서 포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려 또 택시를 타고 가야했다. 족히 2시간은 넘게 걸렸다. 새벽 5시에 출발하면 7시가 넘어야 도착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시간은 배가 더 걸렸다.
한 번은 공장 일을 도우러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 사고나 난 적이 있었다. 택시기사가 맞은편 차를 피하려다 그만 논두렁 밑으로 차가 굴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뒤집힌 택시 안에서 나오려고 애쓰고 있는데 택시기사는 어느새 나갔는지, 꺼내줄 생각은 않고 밖에서 나오라고 손만 흔들고 있었다. 참 얄미웠다.
일손이 모자라면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공장에 와서 10시까지 일을 했다. 일 마치고 집에 가면 밤 12시. 그렇게 열심히 우리가족은 살았다. 지금은 우리 아들, 딸이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리 잡고 부자는 아니지만 편안히 살고 있다. 손녀들도 각자 회사생활을 잘 하고 손자들은 중학교, 초등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남편 또한 서화에 깊은 뜻을 품고 열심히 공부해 지금은 한국서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 역시 건강을 위해 운동하고 복지관에서 공부하고 봉사도 하니 이것이 우리가족의 행복이 아닌가 싶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내 집을 장만하다
신당동 옥상 집에서 살면서 연탄가스를 마셔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껏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니 명은 타고났다는 어른들의 말이 진짜인가보다.
그리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우리 집을 장만했다. 우리 부부는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집 장만하는데 성공했다. 그 날의 기쁨과 설렘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는데, 마음이 너무 예쁜 우리 큰조카가 시어버지를 모시겠다고 했다. 조카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샘이지만, 우리 부부는 조카가 기특해 적당한 집을 구해주려고 했다. 처음에는 전셋집을 구해줬다. 그러던 어느 날 성북구 도봉구에 적당한 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집을 보러 갔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조카 가족이 함께 살기에 적당한 집이었다.
그 집을 사려하니, 1가주 2주택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당시 1980년도에는 1가구 2주택을 하면 비거주주택의 경우 양도세가 실거래가로 부과됐다. 집 2채가 있으면 1채는 그냥 세금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논의 끝에 조카 이름으로 집을 마련했고,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집에서 시아버지는 조카 가족과 편한 여생을 보냈고, 100수 잔치도 크게 열었다. 시아버지는 102세에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5년 후, 마음 착한 큰조카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나는 성북구 도봉구 집을 우리 아이들 앞으로 명의를 변경할까 하고 조카며느리를 불러 얘기했다. 조카며느리는 벌써 그 집을 본인 명의로 하고 생활비가 없어 융자까지 쓴 상태였다. 나는 조카며느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아직 돌려받지 못한 4억2천만 원
80년대부터는 어음교환이 가능했다. 어음이란 일정액을 지급할 것을 목적으로 발행하는 지금의 유가증권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음을 교환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금전의 원활한 흐름이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공장에서 나오는 어음을 교환하곤 했다. 어느 날 남편은 남편 친구에게도 어음을 교환해 주라고 했다.
그러다 1998년 우리나라의 경제 최대 위기 IMF가 왔다. 수많은 대기업은 구조조정에 나서 실업자가 늘고, 고금리 정책으로 환율과 금리는 점점 높아졌다. 당연히 기업들은 보유한 자산을 팔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도 은행 대출금과 이자를 갚지 못한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아마 국가로서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경제 위기였다.
우리가 어음을 교환했던 남편 친구도 IMF 위기에 부도가 났다. 어음을 갚지 않고 부도가 난 상황이라 그 액수가 4억2천만 원 정도이다. 그래도 아파트 한 채가 있으니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아직까지 해결해주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아파트 명의를 우리 앞으로 하고 사는 날까지 계속 살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 잠도 오지 않는다. 남편은 내가 어음을 교환했으니 나보고 해결하라고 한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말을 하면 더 죽는 소리를 한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나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바로 이 돌려받지 못한 4억2천만 원을 받는 일이다. 이 돈을 받으면 더 이상의 소원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처럼 우리가족 건강 유지할 수 있도록 운동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 먹으며 영화도 보고 죽는 날까지 즐겁게 사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박정희 만화
울퉁불퉁… 덜컹덜컹
단맛보다 쓴만, 나의 해외여행
그림1: 제목
그림2: 나는 지금까지 8번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자서전을 쓰면서 내가 겪었던 신나는(?) 해외 여행기를 담아보기로 했다.
그림3: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미국이었다. 1995년이었으니, 지금처럼 전자비자가 아니었다. 비자를 받기 위해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그림4: 남편이 다니는 대학원 동기들이 배우자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다. 모두 00명이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오랜만에 만나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그림5: 첫 행사는 자매학교인 버클리 대학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호텔에 집을 풀지도 못하고 대학으로 직행했다.
그림6: 대학식당(뷔페식)에서 밥을 먹는데 익숙하지 않은 식단에 당황했다. 뭘 먹어야 할지도 몰랐지만 우선 맛이 없었다. 빵만 먹었다.
그림7: 하루를 푹 쉬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시내 구경을 했다. 공원에서 물개들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가까이 보았다. 신기했다.
그림8: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하와이로 갔다. 하와이에선 와이키키 해변과 바람동산, 화산 분화구를 들러보았다.
그림9: 7박8일의 내 첫 해외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처음엔 설렜고 다음엔 지쳤고 그 다음엔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림10: 두 번째 해외여행은 대만으로 갔다. 서화작가인 남편이 대만에서 열리는 국제휘호교류전에 참가하는데 부부동반으로 함께 갔다.
그림11: 2010년에는 동네 아주머니 8명과 함께 서유럽을 6박7일로 다녀왔다.
그림12: 72살이 되던 2012년엔 러시아와 북유럽 4국을 여행했다. 복지관에서 영어를 함께 배우는 친구와 함께 단 둘이 가는 여행이었다.
그림13: 인천에서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준 도시락이 참 맛있었다.
그림14: 모스크바에선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크렘린궁을 보았다. 붉은 광장도 보았는데 엄청난 규모에 기가 질리기도 했다. 바실리 성당도 가보았다.
그림15: 옛 러시아 황제의 여름 궁전이 있었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분수공원을 보았다. 분수들이 즐비한 정원이었다.
그림16: 러시아 다음에 들른 곳은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이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 도시로 가는 곳마다 성당이 즐비했다.
그림17: 노르웨이의 구경거리는 피요르드라고 한다. 수백만 년 전 빙하가 흘러내릴 때 바닷가를 깎아내려 만든 피요르드는 장관이었다. 노르웨이에선 어딜 가나 피요르드를 볼 수 있었다.
그림18: 노벨상은 스웨덴에서 시상식을 하는데 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열린다. 노벨평화상 시상식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오슬로 시청 건물의 시상식장을 둘러보았다
그림19: 오슬로에서 데마크 수도 코펜하겐으로 이동은 야간 유람선을 이용했다. 동화의 나라답게 코펜하겐 거리에는 아기자기한 동상과 분수대가 눈에 띄었다.
그림20: 이렇게 13일의 여행이 끝났다. 쉴 새 없는 여정이었지만, 볼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았다. 모스크바에서 인천으로 오는 동안 비행기 안에서 내내 잤다.
그림21: 2015년엔 동네 복지관에서 수영을 함께 배우는 친구 3명과 일본을 다녀왔다. 그리고 작년에도 수영장 친구 10명과 일본여행을 했다.
그림22: 2016년엔 딸 및 손자 2명과 태국을 갔었다. 악어고기도 먹어보고 코끼리 등에 올라타 밀림을 구경했다.
그림23: 79살이 된 올해도 2016년처럼 딸과 손자 2명이 함께 싱가포르 관광을 했다. 밤에 유람선을 타고 도시의 화려한 야경을 보는 호사를 누렸다.
그림24: 남편이나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사실 큰 재미가 없다. 여행을 가도 아내로서 엄마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다. 친구와 손잡고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림25: 국내여행은 편안하다. 통역이나 가이드 없이 어디든 내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인 음식 먹기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그림26: 해외여행은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특히 유럽에 가면 깨끗한 거리와 성당을 둘러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다. 처음엔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했지만 이젠 익숙해져 괜찮다.
그림27: 내년에 나는 80살이 된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여행을 떠날 마음의 준비는 돼 있다.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설렘과 기쁨, 그리고 떨림과 두근거림
해외여행 맛들여 모두 8번 나가봤네요
첫 여행지는 미국, 모든 게 놀라움의 연속
‘처음’ 만이 가져오는 설렘과 기쁨, 그리고 떨림과 두근거림이 있다. 인생의 설렘과 떨림이 공존했던 1995년, 나는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섬 처녀가 서울살이를 하는 동안 여행은커녕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바로 내 삶이었다. 하다못해 고향을 떠나 바다를 보러 가는 국내여행도 나에게는 사치일 때가 있었다.
서화에 조예가 깊은 남편 대학원 동기 부부들과 함께 한 여행길. 처음으로 타 보는 비행기의 설렘,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두근거림 수많은 감정과 감성이 공존했다. 출발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 나의 감정들은 비행기에 오르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푸른 하늘, 창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창밖의 모습은 불과 출발한지 몇 시간 만에 그 광경이 그 광경이 돼 버렸다.
김포국제공항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10시간이 넘는 비행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 비행기 창문 가리개를 올리고 창밖을 내다보고는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창 밖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에 눈을 때지 못했다. 저 밑 아름다운 구름과 그 위로 비행기 날개와 나란히 평행선을 그리며 뭉쳐있는 구름 띠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 장관이었다. 강한 햇빛에 눈은 부셨지만 그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산과 숲, 그 사이로 뻗어있는 도로, 반듯하게 정돈된 시내와 아기자기한 집들은 모두 조화를 이뤄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었지만 포근하고 친근하기까지 했다. 그 광경은 나에게 출발 전의 설렘과 떨림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남편 친구부부와는 전부터 알고 있던 터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의 설렘을 나눴다. 마음이 너무 즐거워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예술의 도시인만큼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인근 자매결연을 한 버클리 대학교가 첫 방문지였다.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세미나에 참석하고 수료증을 받고 학교를 구경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나는 늘 학교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런 내가 외국 대학에 온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 바람도 선선하고 하늘도 맑고 쾌청해 교정을 거닐기 딱 좋았다. 마치 내가 학생인 마냥 일행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교정을 거닐고 교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토종 한국인인 내가 첫 식사를 교내 식당에서 하려니 입에 맞지 않았다. 빵밖에 먹을 것이 없었다. 김치와 고추장이 첫날부터 간절했다.
샌프란시스코 거리는 예술과 문화가 가득해 가는 곳곳이 관광명소였다. 시내 관광을 하면서 말로만 듣던 금문교와 베이브릿지 시내공원, 바닷가에 여유롭게 누워있는 물개들을 보니, 이 나라에서는 물개팔자가 상팔자 같았다.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다음날 라스베이거스의 관광과 야경은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반짝이는 불빛 사이로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화려함 속의 따뜻함이 공존하는 그곳은 최고의 야경이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안하면 후회한다는 경비행기 그랜드캐넌 관광을 했다. 낡은 경비행기라 비행기 자체가 많이 덜컹거렸다. 아무래도 위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해서 그런지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이러다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고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안 했으면 후회할 뻔 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그랜드캐넌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동안 버스만 타고 이동했는데 하늘 위에서 눈앞에 펼쳐진 그랜드캐넌의 웅장함과 광활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경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면 이 다양한 모습을 가진 그랜드캐넌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 같다. 함께 간 일행 모두 경비행기를 타기 잘 했다고 엄청 만족스러워했다.
또 우리는 허리우드 거리에서 스타들의 발도장을 보고 신기한 뱀쇼를 보고 유니버설스튜디오를 거쳐 산타모니카 해변을 거닐기도 했다. 그리고 LA로 이민 간 친한 친구 부부를 만나 회포를 풀며 지난날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너무 즐거운 만남이었고 뜻 깊은 시간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하와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하니 우리에게 꽃목걸이가 걸렸다. 풀루메리아로 만들어진 꽃목걸이는 청순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이 목걸이는 환영의 의미를 지닌 레이를 목에 걸고 나니 내가 드디어 하와이에 왔구나 하고 실감하게 됐다. 이 레이는 하와이 전통 꽃을 엮어 만드는데 환영, 존경, 사랑, 축제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와이 사람들은 레이를 선물 받으면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레이를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을 거닐며 하와의의 해변보다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는지 동양 사람이라고는 우리가 전부였다. 바람동산과 분화구,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침몰됐다는 함정을 보며 전쟁은 없어져야 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8박 9일 동안의 짧고도 긴 나의 첫 해외여행을 마치고 우리나라에 오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들이 생각났다. 언젠가는 꼭 다시 우리 가족과 갔으면 좋겠다.
대만 국제시범 영춘휘호대회에도 남편과 함께
첫 여행의 설렘을 뒤로하고 14년 후, 대만에서 개최된 국제서법 영춘휘호대회 교류전에 참석했다. 남편이 서화작가이기에 초청받아 간 교류전이었다. 한국, 대만, 일본, 미국, 캐나다, 홍콩 등 6개국이 돌아가며 교류전을 각국에서 개최하는 행사이다. 대만 공항에 도착하니 대만 서법협회 관계자들이 나와 환영해주었다. 점심 식사 후 손문 기념관 및 시내구경을 하고 온천 후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행사에 참여해 전시, 휘호 등 행사를 마치고 우리나라 작가들의 서체를 배우고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각국 회원들과 만찬 및 유흥시간을 가졌다.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에 우리는 아리랑, 진도 아리랑으로 흥을 돋았다. 행사를 마치고 야시장을 구경했다. 우리나라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그리고 대만의 순수하고 맑은 민족성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화련에 가서 대만의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하고 소수민족의 공연도 보고 대만 초등학교 학생들의 팽이 돌리기 묘기도 봤다. 보기에 쉬워 보여 나도 해 봤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상당한 기술이 있어야 했다. 대만은 작은 나라지만 보석이나 광물이 많은 것 같았다. 보석을 가공해 판매하는 곳을 구경하고 가족에게 줄 선물도 샀다. 생각지도 못한 작은 나라 대만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딸과 손자 2명과 함께 매년 여행을 다닌다. 그 여행도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든든하고 꼼꼼한 딸의 여행코스에 맞춰 손자들과 함께 가는 여행은 갈 때만다 추억거리를 만든다. 매일 작은아들 손자 2명의 아침을 해 먹이고 학교 보내는 일과가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보람되기도 한다. 내가 아직도 우리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조용한 우리 집에 손자들로 하여금 활기가 느껴져 그것만으로도 기쁨이다.
못다한 이야기들
유언장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아, 살아생전 너희들에게 해주어야 할 것 제대로 못 해주고 여러 모로 부족했던 것 같구나. 너희들은 나에게 불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너희들을 항상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모든 것이 부족해서 별로 해 준 것은 없었지만 반듯하게 성장해주어 너무 고맙다.
너희 삼남매 가족, 지금처럼 우애있게 끝까지 지금처럼 잘 살기를 바란다. 많은 재산을 남기지 못했지만 너희 삼남매 앞으로 각자 보험 들어 놓은 것이 있으니 잘 챙기고 민지엄마, 현민 엄마 우리 며느리들 앞으로 보험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재산이 남는 것이 있거든 너희 삼남매가 서로 의상하지 않도록 민지 아빠와 엄마, 그리고 현지 아빠와 엄마가 모두 한 자리에 앉아 의논해서 처리하길 바란다.
부족한 엄마에게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고 건강히 잘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 수진이도 오빠 내외와 동생 내외 조카들과 지금처럼 서로 의존하며 생활하기를 바란다. 수진이를 살아생전에 못 여워(혼사를 성사시키지 못해) 너희들 곁에 두고 가니 미안하다.
끝으로 너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절대로 남에게 보증서지 말고,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도 친하다는 이유로 돈을 빌려주거나 금전거래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명심해라)
만약 내가 중병에 걸려 병원에 가더라고 인공호흡기나 다른 시설에 의존해서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세상을 떠나가면 수목장을 하거나 아니면 산에 뿌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민지, 수영, 현민, 지민아 항상 건강하고 자기 할 일 열심히 해서 이 사회에 꼭 필요한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리 가족 항상 건강하기를 기도할게. 사랑해.
예쁜 하루 - 자작시
살아 있어 숨소리에 감사하며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커피 향처럼
향기로운 아침이 행복합니다.
어디서 끝이 날지 모르는 여정의 길에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좋고,
오늘도 안부전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말이 통하고 생각이 같고 눈빛 하나로
마음을 읽어주는 좋은 친구가 있어 행복합니다.
웰다잉을 위한 실천 13가지
1. 부부가 함께 의논하기
2. 디지털 장의 서비스
3. 엔딩 노트 쓰기
4. 자신의 이야기 쓰기
5. 무조건 희생하지 않기
6. 가훈 정하기
7. 기념일 챙기기
8. 아껴두지 말기
9. 주기적으로 가족사진 찍기
10. 영상 남기기
11. 자녀에게 죽음 교훈하기
12. 감사노트 행복노트
13. 사랑한다고 말하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장소, 활동
세상에서 최영노씨를 가장 좋아한다. 올해 76세 여자이며 스포츠센터에서 취미생활로 수영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알고 지낸지 25년이 되었으며 나 보다 예쁘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해서 좋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마음이 쓰이고 걱정이 된다.
좋아하는 장소는 유락복지관 이다. 다양하게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좋다. 레이크댄스, 영어, 하모니카, 노래교실을 수강하고 있다.
위치는 신당동에 있으며 집에서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하루에 1시간30분씩 수업을 듣고 있으며 주 5일을 간다.
운동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레이크댄스를 좋아한다. 유락복지관에서 배웠으며 3년 정도 되었다.
대회에 단체로 참가해서 3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꾸준히 열심히 해서 1등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