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을 뭘 해서 먹을까 부엌을 서성이다가 에이 그냥 아침 겸 점심으로 때우자며 다시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았는데 책상 우편 맨 꼭대기 시집들이 꽂여있던 자리에 비스듬히 책 하나가 돌출해 있어 '나 좀 읽어주라'는 것 같아 빼든 게 이정록의 시집 <정말>입니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재밌게 읽었던 게 기억이 나 다시 찾아 읽어보곤 혼자 보기 아까워 자판을 두들기는 수고도 감수하고 옮겨 적습니다.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 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더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살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 양반보다 빠르게 설날 먹고 남은 쇠고기에 떡 몇 주먹 넣고 끓여먹고는 기타교실 가려고 준비합니다. 일요일이라고 애들은 일어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뭘 해도 빠른' 홀아비 아빠는 안 닮은 모양.
*이 시를 읽다 보면 장면 장면이 기가 막히게 그려지잖습니까? 나도 빠르다고 속이 타 죽을 지경인데 이 양반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오토바이 뒷바퀴가 아직도 돌아가는데 벌써 끝났다? 그런 양반 애닳아하는 화자도 참 무던합니다.
첫댓글이 작품을 내 서재에 올려놓지도 않고 부천문협 카페에 먼저 올려 놓았었네요. 해서 역으로 퍼왔습니다. 너무 재미 있게 읽었던 건데 시인은 언제나 심각한 것만 아니라 이렇게 능청스러울 때도 있어야지요. 서정주처럼, 오탁번처럼. 이 작품도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와 같이 패러디 소설화 작업할 0순위입니다.
첫댓글 이 작품을 내 서재에 올려놓지도 않고 부천문협 카페에 먼저 올려 놓았었네요. 해서 역으로 퍼왔습니다. 너무 재미 있게 읽었던 건데 시인은 언제나 심각한 것만 아니라 이렇게 능청스러울 때도 있어야지요. 서정주처럼, 오탁번처럼. 이 작품도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와 같이 패러디 소설화 작업할 0순위입니다.
ㅎㅎㅎ 정말 장면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잼따.
콕콕 박히네요 정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