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일본 현지인의 증언이다.
*증언자: 사토 사도리(佐藤サトリ, 79歲, 女)
*증언 연월일: 1994년 8월 8일
*증언 취재 장소: 사토 사도리 씨 자택
*취재 경위: 강제노동현장조사 때 방문하여 면담함.
*취재 :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대표 전재진
*통역 : 무카이 미도리(向井 翠)
*증언: 사토씨는 시모키타군 오하타의 해안가 마을에서 딸 사토 미도리와 둘이서 살고 있다. 1943년 사토 씨의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그는 시아버지인 구니헤이國平와 한 살 된 딸과 오하타에서 살았다. 오하타는 오마철도 구간인 키노푸터널 공사장과 멀지 않은 마을이라서 한국인 노무자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마을 근처에는 터널 공사장과 군사시설 공사장이 많았다. 전쟁물자가 부족하던 1943년 이후에는 일본인에게도 식량이 부족했다. 조선인에게 주어지는 식량은 형편없이 부족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쓰레기통이 헤쳐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하여 그 날 밤에 망을 봤는데 글쎄 조선 사람들이 와서 뭔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무서워서 얼른 방으로 들어와 시아버지한테 일렀더니 시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그 청년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오더군요. 시아버지께서 밥을 차려 주라고 하여 부엌에 있는 밥을 다 꺼내 주었습니다. 청년들은 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몇몇 조선 청년들이 저희 집에 자주 놀러왔습니다. 그 때마다 먹을 것을 내 놓고는 했습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 청년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쓰레기통이나 구정물통을 뒤져 감자껍질과 호박껍질을 건져 먹었던 것입니다. 시아버지는 조선 청년들을 나쁘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모두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제 남편도 전쟁터에서 죽은 한 사람이지요. 시아버지는 아들과 같은 또래의 조선 청년을 보면 아들을 보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는데 그 청년들이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지요. 작별 인사하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사람이 돌아가 제게 편지를 보내 받았는데 경상도 울산에서 산다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가네미치金光였습니다. 조선 청년들이 돌아갈 때 시아버지께서 축음기를 선물로 주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마이즈루만에서 사고가 나 축음기는 없어지고 청년도 죽었다더군요.」
「김광 씨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제가 가서 광고하여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부편지를 써 주시면 되겠는데요.」
「어렵지 않습니다. 편지를 쓰지요. 지금도 울산에 살고 있을런지요? 전에 받은 편지가 있으면 좋겠는데 몇 해 전에 심한 홍수로 집이 떠내려 갈 때 없어졌어요.」
「시아버지는 일본이 벌인 전쟁을 저주했습니다. 아들을 둘 다 전쟁터에서 잃었거든요. 제 남편 역시 전사했습니다. 가족을 잃었기 때문에 전쟁이 나쁘다기 보다는(전쟁도 나쁘지만?) 일본이 일으킨 전쟁 그 자체가 인류에게 특히 조선 사람들에게 억울한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