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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는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 터로 익산의 진산 미륵산 아래
있습니다. 백제 무왕 때 지어졌습니다.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로
가는 길에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왕비가 이곳에 절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가 신통을 부려 하룻밤에 연못을 메운 뒤,
세 곳에 탑과 법당과 회랑을 지어 ‘미륵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삼 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굴 결과 늪지 위에 탑, 법당, 회랑
이 각각 세 곳에 세워져 있음이 확인되어 기록이 사실로 증명되었
습니다. 역시 역사는 여자에 의해 기획(?)되나 봅니다.
2009년 서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심주석에서 사리장엄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얇은 금판 앞뒷면에 새긴 금제사리봉안기에
적힌 발원문의 내용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무왕의 왕후가 ‘좌
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전해
져 오던 서동요의 전설과는 어긋납니다. 하지만 서동과 선화공주
의 설화를 허구로 치부할 수 없었던지 선화공주가 사망하여 새로
들인 후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등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가람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디귿자로 돌려진 1탑 3금당
이고, 신라는 탑 뒤로 금당 세 채가 나란히 늘어선 1탑 3금당인 반
면 백제의 사찰은 1탑 1금당입니다. 그런데 미륵사는 3탑 3금당
의 가람배치로 좀 특이한 구조입니다. 1탑 1금당을 기본으로 하고
동서 양측에 별원을 붙여 규모를 확대한 것입니다. 세 차례의 설법
을 통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륵을 위해 세 군데에 설법처를 마련
하느냐 이러한 구조가 나왔으리라 여겨집니다.
미륵사지 석탑(서석탑)은 2017년에 보수를 마쳤습니다. 원래는
9층이었는데 현재 6층만 남아 있습니다. 부재를 하나하나 따로 만
들어 맞춰 세운 이 탑은 재료만 돌로 바뀌었을 뿐 목조건축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발생의 시원으로 보고 있습
니다.
1층은 3칸으로 되어 있고 각 면 가운데에 문이 뚫려 있습니다. 가
운데 공간에 커다란 돌기둥을 세워 전체 무게를 받치고 있습니다.
기둥은 민흘림기법과 귀솟음기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지붕 밑
처마 부분도 목조건축 방식을 따랐습니다. 지붕 모서리는 살포시
들려 경쾌합니다. 2층부터는 높이가 낮고, 지붕의 폭도 줄어들어
안정감을 줍니다.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묵직하면서도 안정감과 경
쾌함을 잃지 않아 단아함까지 느껴집니다. 백제인의 뛰어난 솜씨
에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국보 제11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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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네 귀퉁이에 수호 석인상 세 분이 있습니다. 웅숭그리고 앉아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자세입니다. 돌장승이나 돌하르방을 연상시
킵니다. 1,400년 동안 불탑을 지키고 있는 이 석인상은 우리 전래
의 수호신상을 불교가 흡수한 것으로 장승의 원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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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보물은 또 있습니다. 석등받침입니다. 귀꽃을 맵시있게 살짝 올린 팔엽의 연화문이 번잡하지 않고 깔끔합니다. 지금까지 알려
진 가장 오래된 석등받침돌입니다.
동서 탑 앞에 각각 한 기씩 두 기의 당간지주가 우뚝 솟아 있습니
다. 양식과 구성수법이 같습니다. 지주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
라 띠를 돌리고 중앙에도 한 줄의 띠를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안쪽
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3개의 구멍이 있는데 맨 위의 것만 직
사각형이고 나머지는 둥근 모양입니다. 기단 네 면에는 안상이 있
습니다.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 늘씬한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입니다.
올 초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의 외관이 눈에 거스르지 않아 보기
좋았습니다. 전시장 반 이상이 땅에 묻혀있고, 지붕에도 잔디를 깔
아 마치 구릉같은 모습입니다. 위로 솟고 옆으로 퍼진 우람한 건물
이 아니다보니 눈맛을 전혀 해치지 않습니다. 폐사지 미륵사지 경
관과 잘 어울려 궁디팡팡 해주고 싶은 그런 건물입니다. ‘2020 한
국건축문화대상’ 준공건축물 부문에서 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첫날밤을 보낸 선화공주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황
금을 서동에게 보이며 살아갈 방도를 세우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서동은 이 같은 황금은 마를 캐던 오금산(五金山)에 흔하게 있다
며 금 다섯 덩이를 신라 왕궁으로 보냈습니다. 이 일로 서동은 진
평왕에게 사위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그곳에 ‘익산토성’이 있습
니다.
오금산 구릉 위의 이 성은 흙과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오금
산에 있어 ‘오금산성’이라고도 합니다. 또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고
구려 왕족 안승을 익산지방 보덕국 왕에 임명하고 이곳에 살게 하
였다하여 ‘보덕성’으로도 부릅니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 무왕
때 처음 쌓은 산성으로 추정합니다.
21세기 역병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익산향교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메뉴는 갈치구이와 갈치조림이었습니다. 솥밥이 유독 맛있었는데 회원님들과 담소 나누며 먹으니 더욱 꿀맛이었습니다.
식후에 마룡지로 향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왕의 어머니가
남쪽 연못가에 살았는데, 그곳에 살던 용과 인연을 맺어 서동을 낳
았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연못이 익산 오금산 마
룡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룡지를 서동의 생가터로 추정합니
다.
지난여름 홍련으로 물들었을 연못이 초겨울 바람에 쓸쓸히 말라가
고 있었습니다.
익산 쌍릉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나란히 있어 쌍릉이라고 부
릅니다. 좀 더 큰 것은 대왕묘, 작은 것은 소왕묘라고 합니다. 무덤
안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입니다. 1916년
조사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되어 유물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다행
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을
복원 할 수 있었습니다.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근처에 미륵사가 있어 미륵사를 만든 백제
의 무왕과 그의 왕비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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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유일의 왕궁터로 확인된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왕궁이 폐한 뒤 사찰이 들어선 곳으로 왕궁 유적과 사
찰 유적이 동시에 남아 있습니다.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의 왕궁터에서는 수부(首府)라는
글귀가 있는 기와, 왕족들만 쓸 수 있었던 금과 유리를 만들었던
공방터, 후원 유적, 정전 추정지, 화장실 유구 등이 발견되었습니
다. 사찰 유적으로는 금당지 등 건물터를 비롯해 국보 제289호인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습니다.
탑은 단층의 기단 위에 5층을 올린 모습입니다. 기단 각 면에는 우
주와 탱주가 2개씩 있으며 갑석은 폭이 좁고 얇은 편입니다. 몸돌
과 지붕돌은 각기 여러 개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1층 몸돌에는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고 2층 몸돌부터는 우주만 있습니
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평평하게 내려오면서 처마 끝부분이 약간
올라갔으며, 지붕돌받침은 3단입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
화 등이 남아 있습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에 3단의 지붕돌
받침 등 신라석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이 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국보 제123호로 일
괄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궁리의 풍경을 완성시킨 오층석탑을 두고 떠나려니 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다 돌아서 사진 한번 찍고, 또 돌아서 한
번 더 찍다가 아예 뒤돌아서 뒷걸음질 하며 눈에 담고 또 담았습니
다. 고운 여인네보다 더 곱디고와(?)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보러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왕궁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석사지가 있습니다. 불법의 수호신
인 제석천을 주존 불상으로 모셨던 절터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제석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된 사찰로 무왕 40년
(639)에 벼락을 맞아 절이 모조리 불에 탔습니다. 다행히 탑 아래
심초석에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동판금강반야경만은 보존되어 다
시 사찰을 지어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절을 지은 시기와 폐허가 된 연대를 알 수 있고, 왕궁리 유적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백제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나오는 등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절터입니다.
두 매로 절단된 심초석에 둘러서서 김채영님이 사천에서부터 준비
해 오신 생강차를 마셨습니다. 먼 곳에서 오신 것도 감사한데 차까
지 준비해 오신 마음 씀씀이가 생강차의 향기 못지않게 진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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