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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진우스님 2018.3.15~3.31
3월 15일 [오늘의 명상] . . 온 나라가 마치 정지라도 한 듯, 그야말로 패닉 상태이다. 나라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물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지경이다. . 어려운 공업(共業)의 시절인연이 지나가면 머지않아 다시 활발발한 시절이 분명히 다시 오게 되겠지만, 희망을 갖기에는 현재의 삶이 그리 녹녹지가 않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부처님법을 믿고 부처님께서 말씀을 실행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꿈에서 깨 듯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불교의 근본 정신에 대해 잠시 짚어 보기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임시로 어려움을 땜빵?하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또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믿는 신앙은 더더욱 아니다. 곧 세상의 질서와 이치는, 욕심을 부려 얻게 되는 것에는 무조건 대가가 따른다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적용된다. 요령을 부리거나 잔머리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세상에 좋은 것은 없다. 아니, 좋은 것을 얻으려 하면 그 즉시 싫고 나쁜 것이 생기게 되니, 이러한 고락업(苦樂業)은 항상 함께 얻고 함께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러한 마음상태에서는 괴로움을 면키 어렵다고 하시고, 좋고 싫은 두가지 고락(苦樂)의 업(業)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하신다. 아니 좋은 것을 분별(分別)하지 않고 얻지 않는다면, 싫고 나쁜 것은 자동으로 생기지 않게 된다. 따라서 그 어떤 일이든지 고락(苦樂)의 업(業)이 작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직업이나 장소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직업에 귀천(貴賤)을 찾고, 장소에 호오(好惡)를 따지는 것은 착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이미 고락업(苦樂業)의 작용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좋은 일은 있을 것이고, 좋은 일이 있으면 당연히 싫고 나쁜 일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항하(恒河)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세계에 칠보를 꽉 채워서 보시(布施)를 하는 것은 공덕이기는 하지만,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법(法)에는 비유할 수 없이 작다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아무리 좋은 것도 인과(因果)와 대가가 따르게 되니, 이와 같이 마음에 드는 좋은 것을 구하려는 마음으로는, 절대 고통과 괴로움을 해결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바로 좋고 싫고의 고락(苦樂)을 분별(分別)하는 마음을 무분별(無分別)의 마음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을 얻어야 한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은 우선 기도, 참선, 보시, 정진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무위 복의 수승함 2.) 수보리 아금실언 고여 약유선남자선녀인 이칠보만이소항하사수 삼천대천세계 이용보시 득복다부 須菩提 我今實言 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不 수보리언 심다 세존 須菩提言 甚多 世尊 "수보리야! 내가 지금 너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그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 만큼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대단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붙임] 부처님께서 앞서에도 공덕(功德)을 말씀하시고 이번에도 또 복덕(福德)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한 공덕과 복덕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시기 위함이시다. 세상에서 말하는 공덕(功德)과 복덕(福德)은 아무리 크다 해도 다함의 한계가 있고, 또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생멸(生滅)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리기 위함이고, 재물이라는 탐욕의 대상과 이러한 재물을 남을 위해 보시하여 얻은 공덕(功德)이라 하더라도, 이 또한 한계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유루(有漏)와 유위(有爲)의 법을 떠나야 유무(有無)의 인과(因果)가 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진실된 법(法)을 알게 됨이니,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수미산왕(須彌山王)과 항하(恒河), 그리고 칠보(七寶)와 삼천대천세계의 비유를 드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공덕(功德)의 기본 가운데 기본은 보시(布施)이다. 일단 보시를 하게 되면 공덕(功德)이 쌓이게 되어 공(空)과 중도(中道)를 얻는데 있어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다만, 보시(布施)를 통하여 얻은 복덕(福德)으로 원력(願力)의 힘이 생길 때, 드디어 보시(布施)와 공덕(功德)과 복덕(福德)이라는 상(相)마저 여의게 되어 비로소 보리(菩提)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 - 진우스님 -
3월 16일 [오늘의 명상] . . 세상에는 별별 사람이 많다. 천천만천구만천이라 하지 않는가. 주관적으로는 이상한 사람도 많다.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쁜 사람도 많다. 하지만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똑 같은 사람은 없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살 것인가. 가끔은 눈물겹도록 고마운 사람도 있지만, 죽여도 시원치 않을 만큼 넘넘 미운 사람도 있다. 때로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수 같은 사람이 내 생명을 구해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가 하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한다. 별별 인연이 다 있는 가운데, 오늘은 사람의 속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전제할 것은, 사람을 좋고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실 본질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분도 있겠으나,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은 누구나 똑 같다고 했다. 물론 삼세(三世-전생,금생,내생)라는 긴 시간에 걸쳐서 업(業)이 발생하기 때문에 쉽게 느끼지는 못한다. 그리고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의 때가 다르게 다가온다. 그러니 좋고 싫은 것 가운데, 좋은 것만 얻으려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왜냐하면 높이 올라갔으면 딱 그만큼 내려와야 하고, 밀물과 썰물, 일출과 일몰, 춘하추동, 생사, 생멸과 같은 이치이다. 이것이 나타나는 때와 반대의 저것이 나타나는 때가 다를 뿐이다. 다만,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이 큰 사람은 좋은 일도 크지만 나쁜 일도 크게 다가온다. 반대로 업(業)이 적은 사람은 좋은 일도 적고 나쁜 일도 적다. 한마디로 다이나믹한 업(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락(苦樂)의 업(業)이 크게 나타나지만, 도(道)가 찬 사람일수록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작게 다가온다. 참고로 불보살은 분별(分別) 업(業)이 아예 없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고락(苦樂)의 업(業)을 모두 멸(滅)해야만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렇다고 업(業)을 완전히 없애기도 어렵지만, 설사 업을 멸(滅)한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맛이 있겠느냐고 할 수 있으나,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수승할까? 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기 위하여, 자신이 원하는 욕심을 채우려 무엇이던 물불 가리지 않으며 무조건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삼세(三世)의 인과(因果)가 따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하여, 항하(恒河)의 모레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에 칠보(七寶)를 가득 채워 보시(布施)한다 할지라도 이는 고락(苦樂)의 인과(因果) 업(業)이 따르기 때문이니, 가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위에 설명한 내용을 여실히 잘 아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금강경 강의} 제 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무위 복의 수승함 3.) 불고 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알려준다면 그 복덕이야 말로 앞에서 말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더 나으리라." [붙임]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심히 많습니다” 라고 한 말을 듣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그 누구라도 이 경의 네 가지의 경구 가운데 한 게송 만이라도 믿고 지녀서, 그 묘리(妙理)를 잘 알아 마음을 청정히 한다면, 자신의 진여보제(眞如菩提)로 삼공묘지(三空妙智)에 부합하게 되고 대도(大道)를 이룰 것이니, 그 얻은 바 공덕이야 말로 항하수(恒河水) 모래수 만큼의 모든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布施)하는 것보다 그 복덕(福德)이 더욱 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보다도 더 큰 것이 있으니, 진공묘의(眞空妙義)에 능히 밝아서 남을 위해 설명하고 알아 듣게 하여 자성을 밝혀 줌으로서, 생사(生死)의 언덕을 벗어나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이르게 한다면 이 사람이야 말로 자리리타(自利利他)를 겸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 복덕이야 말로 무위(無爲)의 복덕이므로, 그 얻는 바 이익이 어찌 항하(恒河)의 모래수 같은 삼천대천세계의 칠보(七寶)로 보시(布施)하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칠보(七寶)의 보시는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유위법(有爲法), 무루법(無漏法)인 물질 보시(布施)에 불과할 것이요, 또 아무리 대도(大道)를 알았다 하더라도 자기 혼자만 소화하고 남에게 이르지 못한다면, 이 역시 소승법(小乘法)을 면치 못할 것이요, 자타(自他)를 정복하여 자타를 살리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능히 하나의 사구게(四句偈)라 할지라도 무위법(無爲法), 무루법(無漏法)의 진여진리(眞如眞理)가 실려 있는 무상법보시(無相法布施)가 되는 것이므로, 다함이 있는 유위(有爲)의 한계를 능히 벗어날 것이다. - - 진우스님 -
3월 17일 [오늘의 명상] . . 최고의 기도는 무엇인가? 최고의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기도(祈禱)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부처님이나 신장(神將) 등께 정성(精誠)을 다하는 것이다. 정성이란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여 마음을 오롯이 모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정성(精誠)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이다. 이는 인과(因果) 인연에 따라 어느정도 성취할 수는 있으나, 성취에 따른 즐거움과 기쁨, 행복은 인과(因果)의 과보(果報)가 따르게 되므로, 그만큼의 불행과 괴로움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속된 말로 본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도란 무엇일까? 진리(眞理)를 여법(如法)히 알고 체득(體得)하여 전법(傳法) 회향(廻向)하는 것이다. 진리란 부처님과 부처님 말씀인 법(法),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이들인 수행자 즉,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여실히 믿고 공경하며 호지(護持-감싸 지님)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진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法)인 경전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등이 있다. 게송(偈頌)의 공통된 뜻은 좋다 싫다의 고락(苦樂)을 분별(分別)하지 않고, 마음을 머물게 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하늘신과 인간, 수라, 그리고 천룡팔부의 신장이 감복하여 공경하고 공양하게 된다. 따라서 기도의 처소인 법당(法堂)과,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의 형상 등은 곧, 부처님의 진리를 가상(假像)한 모습으로 꾸민 도량으로서, 이는 곧 부처님의 불(佛)과, 부처님의 진리인 법(法)이 담겨져 있는 고로, 불법(佛法)을 오롯이 수지(受持) 독송(讀誦)하는 나와 수행자(스님)들을 승(僧)으로 보아, 이를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란, 부처님의 진리를 여법(如法)히 잘 아는 것이고, 진리를 체득(體得)하려면 분별(分別)하지 않는 참선(參禪)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참다운 참선의 마음을 갖추려면, 탐진치(貪嗔痴-탐욕,성냄,분별) 삼독심(三毒心)을 버리고, 어떠한 선연(善緣)과 악연(惡緣)이 닥치더라도 마음이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잘못 쓴 대가인 인과(因果)에 걸려 업보(業報)와 과보(果報)를 받아야 하므로, 고통과 괴로움이 항상 따르게 되니, 육도(六道) 윤회(輪廻)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러니 진정한 기도와 참선의 마음, 그리고 괴로운 마음을 비우기 위한 보시(布施)를 늘 멈추지 말고 정진(精進)해야 한다. {금강경 강의} 제 12.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1. . 부차 수보리 수설시경 내지 사구게등 당지차처 일체세간 천인 아수라 개응공양 여불탑묘 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 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 天人 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하황유인 진능수지독송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 또 수보리야! 어디에서나 이 경을 설할 때 네 글귀로 된 사구게의 한 게송 만이라도 마땅히 알지니라. 이에 대해 일체 세간의 천상, 인간, 아수라들이 모두다 마땅히 공경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거늘, 하물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워서 능히 더 잘 안다면 말할 것이 있겠느냐. [붙임] 하늘, 사람, 아수라는 천취(天趣), 인취(人趣), 아수라취(阿修羅趣)이니 세간(世間)에 사는 중생의 업보(業報)를 여섯 갈래로 나뉜 것이니, 이를 삼선도(三善道)라 하고, 지옥취(地獄趣), 아귀취(餓鬼趣), 축생취(丑生趣)의 삼악도(三惡道)를 더하여 육도(六道)라 한다. 여기서 삼악도(三惡道)를 말하지 않은 것은 죄가 중하고, 지혜가 박약하여 반야(般若)의 묘법(妙法)을 알아듣지 못하는 까닭이다. 탑(塔)은 불사리(佛舍利)를 모신 뜻이고, 묘(廟)는 부처님의 형상을 모신 법당(法堂)을 말한다. 사구게(四句偈) 가운데 한 게송(偈頌) 만이라도 능히 그 뜻을 깨달아 나와 남을 제도한다면, 이는 항하(恒河)의 모래 수 만큼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칠보(七寶)를 가득 채워 보시(布施)하는 것보다 더욱 복덕(福德)이 수승(殊勝)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천상과 사람, 아수라 등이 공경하기를 불탑(佛塔)과 법당(法堂)에 공양하듯 하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탑과 법당이 귀중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의 법(法)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라 함은 형상과 사리를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사구게(四句偈)가 귀중한 것이 아니다. 사구게(四句偈)에 담긴 진리가 귀중한 것이다. 진리가 있으면 그 자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계시면 천(天),인(人),아수라(阿修羅)가 응당 부처님(진리)이 계신 탑묘(塔廟)를 공경하며 청법(聽法)하고 호법(護法)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진리를 능히 알고 제도한다면, 어떤 이가 곧 법(法)이요, 불(佛)이며, 무주무상(無住無相)의 보리법(菩提法)일 것이다. 이러한 경을 설하는 장소가 있다면 이곳이 바로 진리가 있으므로, 천룡팔부(天龍八部)가 공경하고 공양하거늘, 심(心)이면 곧 부처요, 구(口-설법)이면 곧 법(法)이요, 심구상응(心口相應)이면 곧 승(僧)이니, 이러한 삼보(三寶)야 말로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 - 진우스님 -
3월 18일 [오늘의 명상] . . 온 나라가 마비된 듯하다. 아니 온 세계가 패닉 상태다. 2차 세계 전쟁이후 이렇게 전 세계 모든 국가가 하나같이 힘든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역시 97년IMF와 2008년 금융위기에 버금갈 정도로 사회와 경제가 매우 힘들다. 자연이나 사회나 개인이나 위기는 항상 온다. 연기(緣起)현상의 시절인연(時節因緣)이요, 인과(因果)작용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습과 마음의 모양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를 대하는 감정이다.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필연(必然)이다.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다. 다만 그 원인을 정확히 모를 뿐이다. 그러니 겸허히 받아들이는 방법 이외는 없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사라진다. 너무나 당연한 소치겠지만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르다. 오가 가는 필연적 연기(緣起) 현상을 거부감없이 잘 받아들일 줄 아는 이는 그래도 덜 힘들겠지만, 억울하다 거나 슬프고 힘들게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은 매우 괴롭다. 이와 같이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인과(因果)의 인연 소치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를 갖추려면 평소에 훈련과 마음수행이 꼭 필요하다. 적어도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것만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좀더 품덕(品德)을 갖추려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에 의해 좋은 일 나쁜 일의 인과(因果)가 생겨난다는 것을 체득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고통과 괴로운 일이 생기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 아닌 필연(必然)이다. 어찌되었든 내가 희락(喜樂)의 즐거움을 맛본 만큼, 딱 그만큼의 과보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의심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법이다.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마음 써봐야 속만 상한다. 고락(苦樂)의 감정과 세상은 우연과, 운과, 재수와, 요행과, 로또는 없다. 결과적으로 인과(因果)가 윤회(輪廻)하는 시절인연(時節因緣)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완벽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삼보(三寶)를 호지(護持)해야 한다.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마음공부와 수행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재미가 있고 없고를 따져서는 안된다. 그래야 눈물 흘릴 일이 없을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12.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2. . 수보리 당지시인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약시경전소재지처 즉위유불 약존중제자 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이니, 만일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고 이 제자는 존중 받을지니라. [붙임]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여실히 잘 알아 지닌 사람은, 진실로 무상무주(無相無住)의 진리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법을 성취한 것이니, 이 법은 오직 하나의 드문 법이다. 이렇게 희유(稀有)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의 이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요, 부처님의 법(法)이 있는 곳이니, 곧 불보(佛寶)와 법보(法寶)가 있는 곳이면 이를 배워 수행하는 승보(僧寶)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 법이 있으면 그 제자가 있게 되는 법이니,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이룰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경전이 있으면 곧 읽는 사람이 있으니 승보(僧寶)인 것이요, 이 경전이 있으면 곧 보리법(菩提法)이 담겨 있으니 법보(法寶)요, 보리법은 곧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니 불보(佛寶)인 것이다. 삼보(三寶)를 합하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된다. 보(寶)는 귀중하다는 이름이다. 불보(佛寶)는 근본인 체성(體性)을 완전하게 깨달아, 있고 없고의 유무(有無)도 아니요, 그렇다고 공(空)도 아닌 저 언덕의 피안(彼岸)을 이름함이다. 법보(法寶)는 유무(有無)도 아니요 공(空)도 아니며 그렇다고 저 언덕이 끊어지고 없어졌다는 것도 아닌 고로, 중생을 바로 깨닫게 하는 법(法)의 이치를 말한다. 승보(僧寶)는 이 법(法)을 행하여 자리리타(自利利他)하는 모든 보살을 이름함이다. 이 같은 보살은 이(理)와 사(事)를 화합하고 능히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지 않으며, 불보(佛寶)와 법보(法寶)를 융화(融和)하여 스스로 삼보일체(三寶一切)가 되는 책임자일 것이다. - 진우스님 -
3월 19일 [오늘의 명상] . .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누구나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된다. 부모, 형제, 등 가족 간의 관계는 물론, 친구와 이성간, 직장동료, 이웃사람, 사회적 파트너 등, 그 어떤 사람을 대하든 평생을 상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마음이 맞는 상대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전혀 마음이 맞지 않는 상대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마음이 맞는 사람을 대할 때는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는 죽을 맛이기도 한다. 원론적으로 보면 이 또한 마음 맞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과(因果)현상이다. 그러나 이를 인과적(因果的)으로 바라보는 이는 드물다. 무조건 마음이 맞으면 좋은 사람, 그렇지 않으면 싫은 사람으로 분별(分別)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맞는 사람만을 골라서 찾으려 하는 사람은 마음이 맞지 않고 너무나 싫은 사람이 더욱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신이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원하는 만큼 원하지 않는 것 또한 똑 같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치가 인과(因果)이다. 따라서 재주를 부려 머리를 쓰거나 요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성적(個性的)으로 볼 수도 있으나, 문제는 싫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마음의 부담과 괴로움이다. 상대를 싫어하거나 물리치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을 멸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니 사람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고로, 그렇다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마음이 맞지 않고 싫은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분별(分別) 인과(因果)가 화두(話頭)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러한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싫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을 싫게 생각하는 나의 인과업(因果業)이 발동하였구나’ 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싫거나 피하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말도 안되는 행동이 싫어하게 되는 이유가 되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싫은 감정이 나타나는 자신의 인과업(因果業)을 생각하면서 미워하거나 싫은 감정을 자제하고 차분하게 대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와 주지 않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설득해야 한다. 설사 설득이 잘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고 감정을 잘 조절하면서 대해야 한다. 그래도 어렵다고 판단되면 뒤끝없이 깨끗하게 포기하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든 저렇든 싫은 감정,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 금강반야파라밀(金剛般若波羅蜜)이란 바로 이러한 좋고 싫은 분별(分別)의 감정을 티끌만한 것이라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피안(彼岸)이라 하고 해탈(解脫) 열반(涅槃), 정등각(正等覺), 반야(般若)라고도 한다. 티끌만큼의 좋고 싫은 분별의 감정이 있으면 티끌만큼의 괴로움이 생기고, 열 근의 좋고 싫은 분별의 감정이 생기면 열 근의 괴로움이 생긴다. 그리하여 어떤 일, 어떤 모습, 어떤 상(相)이든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문제는 마음에 좋고 싫은 분별(分別) 감정의 인과(因果)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통해 이를 깨우치려 하는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1. .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 운하봉지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불고 수보리 시경 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소이자하 佛告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子 汝當奉持 所以者何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며, 저희들은 어떻게 받아 지녀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 이 이름으로 너희들이 받들어 지닐지니라. [붙임] 수보리는 이에 말이 끊어졌고 이치가 다하였다. 더 나갈 길도 없고 물러 설 곳도 없었으니, 스스로 머무름이 없고 분별(分別)의 상(相)이 없으며 본래부터 저 언덕에 도달한 것과 같은 오직 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란 생각조차 없어서 머무름이 없고 분별상(分別相)이 없다는 생각까지도 두지 않았으며, 피안(彼岸)에 도달함을 깨닫지도 아니하였다. 정히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곧 부처님과 더불어 합해졌을 때, 이 모든 일체를 떠나 있음이다. 그리하여 이곳은 말과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과 말을 해야 알아듣는 중생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이름과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세존께 ‘이 경을 무어라 이름하오리까’ 하고 물은 것이다. 또 ‘이 경을 받아 알기는 오히려 쉽겠으나, 이 경에 들어있는 존귀한 뜻을 알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니, 어떻게 하면 이 경의 진정한 뜻을 깨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름과 법을 여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이르기를, 이 자리! 이 경은 남음이 없는 열반(涅槃)이요, 다함이 없는 청정한 반야지혜(般若智慧)요, 생멸(生滅)이 없는 금강(金剛)의 땅이요, 머뭄이 없고 분별(分別) 상(相)이 없는 여래장(如來藏)이요, 정등정각(正等正覺)의 보리법(菩提法)이니, 그런대로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일지니라 하셨다. - - 진우스님 -
3월 20일 [오늘의 명상] . . 코로나19가 지구를 삼킬 기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나라는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 하다. 하지만 유럽은 확진자가 이미 중국을 넘어서고 있고, 세계적으로 주가와 금값, 부동산, 금리 등이 모조리 하강국면이다. 이대로 가다 가는 대공황을 맞을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이미 누차 설명했듯이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 또한 인과(因果)가 공업(共業)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한마디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낙업(樂業)을 누려왔으니 그에 대한 과보(果報)로 괴로운 고업(苦業)이 공업(共業)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럴 때 과연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가? 물론 이러한 사태를 보고 마음 편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불보살과 마음을 깨친 조사들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 당연히 마음에 동요가 없을 것이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다는 것은 곧 편하고 즐거운 시절이 있었던 인과(因果)에 대한 과보(果報)이다. 속된 말로 인과(因果)에는 절대 에누리가 없다. 세상에는 결과적으로 공짜가 없다. 그래서 더하고 덜한 것도 없다. 더하면 덜하고 덜하면 더한 것이 인과(因果)이니, 더도 덜도 없는 것이 무분별(無分別)이요, ‘금강반야바라밀’이다. 모진 소리가 아니라 당연히 일어날 것이 일어나는 것이요, 연기(緣起)의 흐름이요 소치이다. 다만 이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는, 인과(因果) 업(業)에 따라 자신의 고업(苦業)이 나타나는 시절인연이라고 보면 된다. 인과(因果)로 치면 더 좋을 수도 없고 더 나쁠 수도 없으니, 좋은 만큼 나쁜 것이고, 나쁜 만큼 좋은 것이므로, 그래서 좋은 시절인연이 있었으므로 싫고 나쁜 시절인연이 오는 것이다. 이럴 때 지혜를 갖춘 사람은 나쁜 현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연기(緣起)와 인과(因果)의 흐름으로 볼 뿐이다. 그리고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다. 연기(緣起)와 인과(因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인다. 이유없이 생기는 것은 없다. 올 것은 막아도 오고 갈 것은 잡아도 간다. 그러므로 이를 보는 마음이 힘들지 않다. 마음이 항상 평화롭다. 무엇에도 머무르지 않고 걸리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다. 또 현명한 이는 싫고 나쁜 것이 가고, 좋은 것이 오길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좋은 것을 분별(分別)하는 만큼 싫고 나쁜 것이 더욱 짙고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연기(緣起)려니 인과(因果)려니 하고 그러려니 하며,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항상 평안을 누린다. 세상의 움직임은 연기(緣起)의 모습일 뿐, 실은 좋고 나쁜 것이 없다. 그러니 만약 내가 스스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무엇 때문에 내가 힘들다고 생각할 것이나, 이는 잘못된 착각이다. 실은 나의 업식(業識) 속에 숨어있는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금강반야바라밀을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가짜라고 했다. 그러니 한 점의 생각조차도 분별(分別)을 일으켜 괴로움의 인과(因果)를 받는다고 하였으니, 좋다 싫다 라는 분별(分別)이야 말로 얼마나 많은 인과(因果) 업(業)을 지어 괴로움으로 다가오게 할 될 것인가 말이다. 왜 이러한 분별(分別)을 멸(滅)해야 하느냐면,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果報)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항상 이를 잊지 말고 신구의(身口意-몸,입,생각) 삼업(三業)을 청정히 해야 하느니, 분별심이 없으면 모두가 이루어 진다.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2. .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무슨 까닭이냐 하면 수보리야!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붙임] 이 금강경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말을 하고 이름을 붙이는 즉시 이러쿵저러쿵 상(相)이 생기기 때문이고, 이것이라고 하면 저것이 생겨서 인과(因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중생을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거짓 이름을 세웠으니 바로 ‘금강반야바라밀’ 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단지 이름 뿐임을 명심하여 절대로 상(相)을 내지 말고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된다. 또 말과 생각을 하지 않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뜻을 합(合)해야 할 것이며, 좋다 싫다는 분별(分別) 망상(妄想)을 부려서는 안된다. 만약 가히 얻을 ‘금강반야바라밀’이 있다면 이는 이미 정하는 법이 되어 생기지도 않으므로 사라지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금강지가 아닌 것이다. 또 만약 이름을 붙일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벌써 이름에 상(相)이 붙게 됨이요, 완전히 남음이 없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피안(彼岸)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금강반야바라밀’을 얻었다고 한다면, ‘금강반야바라밀’ 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줄 알고 난 연후일 것이니, ‘금강반야바라밀’이 어느 곳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어찌 붙을 것인가.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면 이름자를 여의고 본래의 성품이 밝게 비칠 때, 영혼이 밝고 밝은 영명(靈明)이 되므로, 거짓 이름을 억지로 붙여서 진정한 ‘금강반야바라밀’ 이라는 것이다. 또 분별(分別)이 없는 본 성품에 이르러 묘(妙)하게 응하고 비지 아니하여서, 억지로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 이라는 것이며, 고요를 즐기는 담적(湛寂)이이 되니, 억지로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고, 본 성품에 이르러 걸림이 없고 자재(自在)하여 억지로 이름 붙여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다. - 진우스님 -
3월 21일 [오늘의 명상] . . 언쟁(言爭)을 할 때가 많다. 언쟁이란 말로 다투는 말다툼이다. 나의 주장과 상대의 주장이 서로 어긋나서 각자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쟁투하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왜 이기려고 하는 것일까? 당연히 나의 주장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설사 옳지 않더라도 고집을 부리고 억지를 부려서 까지 이기고 싶어 한다. 상대를 이기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유리하다고 생각할까? 물론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고 나쁜 것과 상관이 없다면 굳이 고집하여 이기려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현상은 결국 기분이 좋고 나쁨의 문제이다 하겠다. 그러나 기분이 좋고 나쁨은 분별(分別)이다. 분별은 인과(因果)를 낳는다. 인과(因果)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연속이다. 즉 즐거움에 따른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받는다. 그러므로 기분이 좋으면 기분 나쁜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 밀물이 들어올 때가 있으면 썰물이 나갈 때가 있는 것과 같다. 들어오고 나감에 단 1미리의 차이도 없다. 기분이 좋고 나쁜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도 이와 같다. 그러니 기분이 좋은 때가 있으면 기분이 나쁜 때가 반드시 있게 되는데, 이를 과보(果報)라 하고 시절인연이라고 했다. 따라서 만약 언쟁을 통해 설사 내 주장이 관철되어 기분이 좋았다면, 그 과보(果報)로 인하여 기분이 나쁜 시절인연이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때문에 사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좋고 나쁜 인과(因果)가 진짜 본질이라는 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시비(是非)와 고락(苦樂), 선악(善惡)과 정의(正義)와 불의(不義), 등의 분별(分別)에 머물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 신신당부하셨다. 따라서 결국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감정에 의한 인과(因果)가 문제의 본질이니 만큼, 언쟁이든 주장이든,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어떤 경우이든 기분에 의한 분별(分別)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기분이 좋은 만큼 기분이 나쁜 과보(果報)를 언젠가는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아래의 금강경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의 해설과 같이, 거울은 항상 밝고 여여(如如)하게 만상(萬象)을 있는 그대로 비치듯, 마음도 거울과 같이 있는 그대로 비치고 받아들일 뿐, 시비고락(是非苦樂)을 하지 않아야 하거니, 오만(五萬) 상(相)에 대해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이며, 무슨 시비(是非)가 있을 것인가. 언쟁을 하더라도 또는 이기고 지더라도, 기분이 좋은 것에 집착하고 걸리지 말아야 할지니, 그렇다면 굳이 이기려 하거나 지지 않으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세존께서 최고최상의 금강반야바라밀 조차도 마음이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으시던가.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3. .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소설법부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所說法不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래 무소설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을 말한 바가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아무것도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붙임] 금강반야바라밀은 이렇듯 말을 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경지라 했거늘, 만약 여래(如來)께서 ‘금강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대중이 있다면, 이는 법을 들을 줄 모르는 자의 생각일 것이다.’ 고 하심이다. 이미 ‘금강반야바라밀이 언설(言說)과 이름을 여의었다’고 했다면, 이미 적나라한 본체가 드러났음 이니, 이 자체가 여래지(如來地-여래가 머무는 땅)인지라 말과 이름이 없고 법(法)과 아상(我相)이 벌써 공(空)하였으므로, 무슨 말이 있을 것이며 무슨 법이 있을 것인가. 만약 말을 하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면, 대중을 위하여 거짓 법에 불과한 것이니, 이는 대중의 상(相)으로 세운 법이요, 대중들을 위한 말이니, 대중의 상(相)으로 생각하고 대중의 상(相)으로 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굳이 마음으로 비유하자면, 밝은 거울에 비친 천태만상의 모습들은 거울이 만들어낸 것들이 아닌 것이요, 거울은 항상 밝은 거울일 뿐이니, 거울에는 일어나고 꺼짐이 없는 것이다. 마음도 거울과 같아서,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언정 거울은 항상 그대로 밝을 뿐이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이미 금강반야바라밀에 도달하였고, 피안(彼岸)을 건너 분별(分別)하지 않는 곳에 있는지라, 즉 불(佛)과 법(法)을 여실히 잘 알아서 불법(佛法)과 자신의 승(僧)을 포함해 삼보(三寶)를 하나로 실현한 까닭이다. 그런 연유로 수보리는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고 답을 한 것이다. - - 진우스님 -
3월 22일 [오늘의 명상] . . [주인공인 ‘바홈’은 ‘바시키르’ 마을에 가장 싼 땅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촌장을 찾아 1000루블을 지불하고,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걸어서 도달한 그 안의 땅을 모두 갖게 되는 계약‘을 하게 된다. 조건은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땅을 차지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하루 종일 먹지도, 쉬지도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너무나 지쳐서 그 자리에 고꾸라져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그의 땅은 겨우 2평 남짓한 무덤 뿐이었다.] 지난해 8월 11일자에 올인 명상 글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라는 단편 소설 작품에 나온 내용이다. 오늘의 주제에 대한 설명을 돕기 위해 다시한번 인용을 해 본다. 사람들은 무조건 많이 차지하는 것을 원한다. ‘많다’ 라는 의미는 상대적인 마음의 관념이다. 많다 라는 것은 더 많은 것에 비해서는 항상 작은 것이 된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것도 더 많은 것에 비해서는 많은 것이 되지 못한다. 누구나 대부분 부자되기를 원한다. 자기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이에 대해 부러운 마음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재산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은 모두 해당된다. 그러나 부자는 항상 스스로 부족하다. 본인보다 더 많은 부자를 쳐다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라고 하여 더 많이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물질이나 명예를 무조건 갖지 않는 것만이 무소유가 아니다. ‘많다 작다’, ‘좋다 싫다’ 라는 분별심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무소유다. 거꾸로, ‘나는 거지로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아무 것도 갖지 말아야지’ 하는 분별심을 소유하는 꼴이므로, 이는 진정한 무소유가 아니다. ‘있고 없고’는 연기와 인과에 따라 올 때 오고 갈 때 가는 것이다. ‘있다 없다’ 라는 분별된 생각을 갖지 않으면 유무를 떠난 중도의 마음이 된다. 이를 진짜 무소유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차지하려고 하는 소유심도 큰 문제지만, 굳이 갖지 않아야 한다는 분별심 역시 이에 못지 않게 경계해야 한다. 마음이 머물러 집착하는 것은 인과에 걸려서 결국은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저 인연 연기에 맡기고 ‘있고 없고’ 에 대해 분별하지 않고 그러한 마음을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 하면 되는 것이다. 중생으로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고 인과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의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고통과 괴로움을 비켜갈 수 없다. 생각이나 감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각을 완전히 전환시켜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단계까지는 접어 들어야 한다. 아직도 이러쿵저러쿵 생각만으로 잔머리를 써서는 수미산의 초입에도 도달치 못한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많다’ 라는 것에 대한 법을 설하셨으니, 아래의 붙임 설명을 자세히 숙지하시길 바랍니다.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4. .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 시위다부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수보리언 심다 세존 須菩提言 甚多 世尊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아주 작은 티끌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붙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을 여읜 저 언덕 즉 피안(彼岸)과, 오고 감의 분별이 없는 여래(如來)와, 삼라만상의 일체 모든 것이 분별이 없고 머묾이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법(法)의 몸, 즉 법신(法身)에는 문자와 언어가 모두 공(空)하고, 육진(六塵)과 심식(心識)이 공(空)하고, 얻음과 얻는 것이 공(空)하고, 법(法)과 내가 공(空)하였으니, 일체가 돈탕(頓蕩)한 깨달음으로 쓸어버렸으므로, 세계니 신상(身相)이니가 모두 사라졌다. 이러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형상 없는 모든 법상(法相)은 마음의 일이므로 없을 수도 있다 하겠으나, 지금 내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세계의 모든 형체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집착이 다하지 못하고 사량(思量) 분별(分別)이 공(空)하지 못한 대중들은 의심이 가시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의심을 깨뜨려 주시기 위하여 수보리에게 다시 물어서 결론을 지으시려는 것이다. 이에 수보리는 ‘매우 많습니다’ 라고 대답을 드렸다. 하지만 수보리의 대답은 대중들이 가진 일반적인 생각을 대중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지 진여(眞如) 성품의 경지에서 답을 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 역시 앞에서의 설명과 같이 언설(言說)과 사량(思量)을 떠난 많음은 아닌 것이다. 미진(微塵)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 미진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일시적인 모양을 보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써, 미진(微塵)이 미진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미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미진의 수가 한량없다 해도 한량없는 것 역시 끝이 있을 것이니, 지구의 먼지가 아무리 많다 해도 우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우주의 먼지가 아무리 많다 해도 더 큰 우주에 비하면 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렇듯 많다는 개념에 항상 속아서 더 많은 것에 집착하고 머무는 마음을 갖기 때문에, 항상 모자라는 것이 따르고 부족한 것이 따른다. - 진우스님 -
3월 23일 [오늘의 명상] . . 인생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가장 후회되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물론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봄 직 하지 않을까? 호주에서 호스피스로 일했던 ‘브로니 웨어’ 라는 간호사는 “죽을 때 가장 후회되는 다섯가지” 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수년간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보살펴 오면서 그들이 말한 내용 가운데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이 후회가 되는 다섯가지를 선정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짧게 다섯가지 제목만 짚어본다. 첫째,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 (나의 행복을 위해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 것) 둘째, 변화를 두려워한 것. (현실에 너무 안주하고 도전하지 못한 것) 셋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 (화 낼 때 화도 내고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하고) 넷째, 옛 친구와 연락을 끊고 산 것. (바쁘다는 핑계로 인간적인 정을 나누지 못한 것) 다섯째, 일만 너무 열심히 한 것. (가족을 위한다는 핑계로 일을 위한 일만 한 것.)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되고 하나같이 공감가는 내용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순전히 불교적인 관점에서나 소납의 입장으로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대체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후회와는 별개로, 모두가 아쉬운 인생살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견해에 대해 당연히 존중하고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나게 되었고 왜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이 정도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든다. ‘금강반야바라밀’은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명쾌하고 분명한 부처님의 최상승 법문내용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 물론 잘 이해하고 체득하여 내 것으로 소화한다는 전제하 에서다. 죽을 때 후회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후회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부처님법을 여실히 잘 안다면 적어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된다. 아직도 욕심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무엇에 대해서 이건 못마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부처님법을 여실히 잘 알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이는 信心이 부족한 탓일 것이며, 신심이 부족하다는 것은 적어도 연기(緣起)와 인과(因果), 그리고 공(空)에 대해 아직도 체득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니, 더욱 정진에 정진을 거듭할 일이다.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5. . 수보리 제미진 여래설 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 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모든 티끌은 티끌이 아니요 그 이름이 티끌이며, 여래가 설한 세계 또한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 이니라. [붙임] 세존께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먼지가 많느냐 물으심에 수보리가 ‘매우 많습니다’ 한 대답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그 이름이 먼지이고 ‘많다’ 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상대적인 분별심(分別心)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선 먼지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나타난 나의 상(相)에 불과한 것이고, 이 또한 언제나 변하고 변하여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므로, 먼지가 본래 먼지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또 하나 다른 뜻은, 먼지에 의한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먼지가 음식에 들어간다면? 눈에 들어간다면? 깨끗하지 못하다는 등등의 분별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기분이 생기게 되고, 고락(苦樂)의 분별(分別) 인과(因果)로 인하여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결과를 계속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지에 대해 굳이 분별된 생각과 기분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인연(因緣) 연기(緣起)에 맡기면 될 뿐이다. 그래서 이름이 먼지라고 알고 있으면 된다. 또 ‘삼천대천세계’ 라는 것 또한 내가 보는 분별된 관점에서 보게 되면, 크다 작다, 많다 적다, 좋다 싫다는 등의 분별된 감정이 생기므로, 이렇게 되면 좋다고 하게 된 그 인과(因果)로 인하여 저렇게 되면 나쁘고 싫다고 하게 되는 과보(果報)가 항상 따르므로, 그 이름만이 삼천대천세계 라고 하는 것이고, 정녕 좋고 싫은 삼천대천세계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진우스님 -
3월 24일 [오늘의 명상] . . 어제 밤 은사스님께서 지병이 도지셔서 서울의 모 대학병원에 모셔 놓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비교적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는데, 습관을 잘못 들였는지 거의 난폭한 운전수준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살짝 화가 나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나의 고락(苦樂) 인과(因果) 업(業)을 생각하고 이내 참았다. 물론 한마디 할 수도 있었고, 언쟁을 할 수도 있었고, 화를 낼 수도 있었고, 변명을 들을 수도 있었으나, 이 가운데 어떤 말과 행동을 선택했더라도, 문제는 나 스스로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쁜 것은 순전히 나의 고락(苦樂) 인과업(因果業)이요, 따라서 오롯이 나의 몫이다. 객관적으로는 택시 기사의 난폭 운전이 잘못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은 바로 나다. 택시기사와의 시비(是非)를 통해 설사 상대를 굴복시킨다 하더라도 나의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은 엄연히 나의 고락(苦樂) 업(業)의 움직임인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대단히 사소한 문제 같지만, 이로 인하여 발생한 나의 좋고 싫은 고락업(苦樂業)이 또 다른 인연과 연결 되면서 계속적인 여파가 이어질 것을 생각하면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사건 사고가 계속 이어질 개연성이 있을 뿐더러, 그때마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기분이 크게 출렁일 소지가 충분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참는다는 또는 참아야 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원천적인 나의 고락업(苦樂業)이 모든 문제의 근본임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나의 기분을 흔들어 놓은 상대 또는 대상과는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상대 또는 내가 보는 대상은, 나의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과 육식(六識-육근으로보고인식함)에서 감지되는 대상인 육경(六境-물질,소리,향기,냄새,촉감,기억)이다.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경(六境)을 감지하는 육식(六識)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은 모두가 한 몸인 것이다. 따라서 상대 또는 대상 또한 나의 몸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것이다. 또 한가지는, 상대 또는 대상인 육경(六境)을 통해 육식(六識)으로 감지되는 것은 좋고 싫은 두가지 분별심(分別心)으로 요약된다. 상대 또는 대상에 대해 좋고 싫은 감정이 드는 것은 순전히 나의 고락업(苦樂業)이라는 말이다. 좋고 싫은 고락업(苦樂業)은 상대 또는 대상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지는 인과(因果)이다. 즉, 좋은 것이 생기는 즉시 싫고 나쁜 것이 저절로 생긴다는 말이다. 따라서 금강경을 통하여 부처님께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상(相)이다. 상(相)은 분별(分別)이다. 그래서 부처라는, 법(法)이라는,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32상(相)이라는, 이 모든 상(相) 또한 이름 뿐이라는 것이니, 그 어떤 상(相)이라도 머물러 집착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6. .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느냐? 가히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붙임] 삼십이상(三十二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을 했거니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눈귀코혀몸생각) 육근(六根) 등의 형상으로 나타난 모양을 말함이다. 즉, 소리와 모습 등의 형상으로 나타낸 성색불(聲色佛)이다. 청중들은 세계와 미진(微塵-티끌)이 세계와 미진(微塵먼지)이 아니요, 그 이름이 세계와 미진이라 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개개물물(個個物物)이 다 법신(法身)임을 깨달아 세계와 미진에 대한 상(相)과 마음으로 느끼는 상(相)이 모두 공(空)하여 금강반야파라밀(金剛般若波羅蜜)이자 법신(法身)임을 알아 들었으나, 이에는 얻은 자가 있으므로 곧 신상(身相)에 대한 집착함 마저 떨치지는 못한 것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은 완벽한 몸을 말한다. 곧 부처님의 신상(身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을 깨쳐서 모두가 공(空)한 금강반야바라밀을 얻게 되면 부처님의 신상인 삼십이상(三十二相)이 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으면 깨닫는 대로 32상이 될 것이어서 결코 신상(身相)만은 공(空)하지 못할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한편, 만약 깨치지 못한다면 32상의 신상보(身相報)를 얻지 못한다고 지레 짐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상(身相)이 없다면 법신(法身)도 금강반야바라밀도 얻지 못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를 알려주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가히 32신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수보리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이며,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을 하실 것인가? - 진우스님 -
3월 25일 [오늘의 명상] . . 갓난아이가 혼자서 철없이 놀고 있다. 얼굴과 손과 온 몸에는 온갖 음식물들이 묻혀져 있고, 온 방바닥에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하물며 귀중하게 여겼던 청자병도 깨져 있다. 그래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천진난만하게 깔깔대고 웃으며 놀고 있다. 이를 본 엄마는 은근히 속이 탄다. 귀여운 자식을 뭐라고 야단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그대로 놓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광경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지만, 그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다. 굳이 따지자면 문제를 일으킨 것은 갓난 아이였으나, 철모르는 아이가 마음이 불편할 리는 만무할 것이고, 분명 속이 타고 불편한 쪽은 부모일 것이다. 만약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그랬다면 아마도 싸움이 나도 크게 났을 일이다. 여기서 심각히 생각해볼 것은, 잘잘못을 떠나서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나는 쪽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대개는 상대방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서로가 시비(是非)를 가리느라 성을 내기도 하고 화가 나서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마음이 불편하게 되는 것은 상(相)을 가졌기 때문이다. 옳다는 상, 잘못이라는 상, 나와 너라는 상, 싫다는 상, 밉다는 상 등의 모든 상(相)은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화(幻化)일 것이다. 환화(幻化)란 거짓된 마음의 상(相)을 말하는데, 왜 거짓된 것인가? 모든 상(相)은 변하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어서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相)이 생기므로 그 반대의 저런 상(相)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 인과(因果)의 상(相)이다. 인과상(因果相)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상(相)을 낳는다. 그러므로 괴로운 상(相)을 피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거짓된 마음속 환화(幻化)의 상(相)을 가지지 말라고 강조하신다. 설사 부처라는 상(相) 마저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그러나 진정으로 상(相)이 아닌 것은, 상(相)에다가 좋다 싫다는 고락(苦樂)의 상(相)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얼마든지 이런 상(相), 저런 상(相)을 말해도 좋다. 다만,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분별하지 않고 있는 상(相)을 그대로 보면 된다. 옳거나 그르다는 시비(是非)를 할 수도 있으나, 고락(苦樂) 감정의 분별(分別) 상(相)을 내지 않으면 된다. 하물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화를 내는 동시에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감정 상(相)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갓난아이는 정작 고락(苦樂)의 분별(分別) 상(相)을 내지 않는데, 옆에서 보는 엄마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순전히 엄마의 인과업(因果業)이 스스로 홀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손해일까? 가끔은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경우가 있다. 정작 시누이는 아무렇지 않는데 내가 더 화가 나는 것은 왜일까? 나의 고락(苦樂) 인과업(因果業)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의 최고 가치란, 언제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이 스스로 편안한 것이다. 그러려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 공부를 해야 한다. 마음 공부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으로 해야 할 것은 바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이다. 뭐니뭐니 해도 나의 업(業)을 멸하는 것만이 모든 일이 저절로 저절로 풀리게 되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7. .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하이고 여래설 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삼십이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곧 진짜 상이 아니오라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붙임]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왜 상(相)이 아니냐 하면, 본래 마음속에 있는 망념(妄念)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지은 거짓된 환심(幻心)은 결국 공(空)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상(身相)과 세계상을 별달리 보는 자는 마음을 신상(身相)속에서 찾는 그릇된 생각을 하는 것이니, 세계와 허공이 모두 마음속에 있는 줄 모르는 까닭이다. 따라서 신상(身相)에 의해 마음이 생기게 된다면, 신상(身相)을 여의고는 금강반야바라밀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어서, 이는 뒤집힌 생각인 것이다. 마음에 의하여 신상(身相)도 있고, 마음을 여의고는 세계도 신상(身相)도 바라밀(波羅蜜)도 없다고 하여야 바른 생각일 것이니, 이 마음 속에서는 세계나 신상(身相)이나 바라밀이나 모두가 거짓된 환화(幻化)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진(微塵)이라 해도 아니되고, 삼십이상(三十二相)이라 해도 아니되며,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해도 아니되고, 큰 마음이라 해도 아니되니, 이 모두는 출입(出入)과 대소(大小)와 내외(內外)가 함께 없어져서, 작기도 크기도 하는 거짓된 환화상(幻化相)이 곧 마음인 것이요, 거짓된 마음이 곧 환화상(幻化相)이며, 보화신(報化身)이 곧 법신(法身)이요, 법신이 곧 보화신(報化身)인 것이다. 이로써 마음으로 짓는 모든 상(相)은 그 자체가 분별(分別)을 낳고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계속 낳게 되므로, 이는 진정한 마음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것이니, 이름하여 진정한 마음의 가치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일체의 모든 법(法)을 두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구족한 본래 법신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 - 진우스님 -
3월 26일 [오늘의 명상] . . 소납이 지난 9년동안 한두번을 빼고 거의 매일 소위 명상 글을 이른 아침마다 밴드에 올리는 이유는, 밴드나 유튜브의 독자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제 자신을 단속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새삼스럽게 이런 말씀을 뜬금없이 드리는 것은, 어떤 독자분들은 내용이 어렵다 하시고, 어떤 분은 거기서 거기인 말을 반복하는 것 이외의 새로운 것이 없다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노릇 수십년을 해왔다 한들, 수 억겁에 걸쳐 쌓여져 온 업장(業障)에서 나오는 탐진치(貪嗔痴-탐심,성냄,분별심) 삼독심(三毒心)과, 오욕락(五慾樂-식욕,수면욕,재물욕,성욕,명예욕), 그리고 번뇌 망상을 깨끗이 지우기에는, 수행력이 역부족이고 태부족인 동시에, 찰나찰나 한 생각 정신줄을 놓치게 되면, 잘못된 업식(業識)이 준동하여 스스로 불편함의 고업(苦業)을 감당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서 입니다. 따라서 수행력과 능력이 너무도 모자라는 탓에, 매일 아침 이렇게 라도 나 자신의 업상(業相)을 스스로 단속하는 차원에서, 제 자신에게 설하는 설법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고, 이왕이면 함께 더불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올리는 어설픈 글이라는 것 또한 감안해 주시기를 양해바랍니다. 매일매일 스스로 이해하고 체득하려는 화두는 단 하나,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머물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즉, 좋고 싫은 고락(苦樂) 분별(分別)하지 말자는 것이 단 하나의 화두(話頭)입니다. 그저 말할 뿐이고, 그저 행동할 뿐이고, 그저 그렇게 할 뿐입니다. 털끝 만큼의 사량분별(思量分別)도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낳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금강바라밀경의 부처님 말씀에 눈물이 날 정도로 감응할 따름입니다. 이 또한 분별이겠으나, 분별이라는 분별 또한 분별이므로, 항상 방하착(放下着-그대로놓음)을 시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항상 걸림의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놓고 또 놓을 뿐입니다. 상대의 험한 말을 듣고 움직이는 감정을 놓고 또 놓습니다. 어떤 일이 되었건 잘되고 잘못 되고의 지레 걱정도 놓습니다. 단 하나의 의심도 놓습니다. 인과(因果) 인연(因緣) 연기(緣起)에 맡길 뿐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현상이 다가와도 항상 마음을 평화롭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뜻이라는 것을 늘 잊지 않고 화두(話頭)로 삼고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 강의에 붙이는 “제 13여법수지분 8”의 대목은 내일 계속 이어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8. .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항하사등신명보시 약부유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기복심다 其福甚多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항하수 모래와 같이 많은 목숨을 보시하였더라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말해준다면, 목숨을 살려주는 복보다 더 큰 복이라 할 것이다." [붙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금강반야바라밀과 여래(如來)를 법신처(法身處) 즉, 법(法)의 몸이 있는 그 곳을 이름한다. 그러나 법이 이미 공(空)했으므로 모두가 공했다 할 것이다. 그래서 법을 얻었다 함도 공하고, 얻은 자도 공하고, 얻은 것이 공하고, 마음이 머무는 그 곳이 공하고, 이러한 설명이 공하고, 이름이 공하고, 모습이 공하고, 깨달음이 공하다 함이다. 공(空)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하니, 세계는 세계가 아니요, 신상(身相)이 신상이 아니요, 금강반야바라밀이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어서, 돈연(頓然)히 공(空)하다 할 것이므로, 그래서 일체가 돈연(頓然)히 실(實)답다 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마음이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좋다 싫다는 고락(苦樂) 인과(因果)의 감정을 일으킬 아무런 이유가 없는 고로,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맑고 밝은 청정한 마음, 이를 돈연(頓然)히 실답다 하는 것이다. 진정한 돈연(頓然)의 실다움은, 돈연(頓然)이 공(空)하다는 것조차 두지 않음이요, 돈연이 공함은 돈연 또한 실다움을 두지 않는 것이니, 이렇게 양쪽의 변을 모두 여읜 자재(自在) 본연(本然)한 법신(法身)을 말 함이니, 한마디로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치가 이에 이르게 되면 말이 다하고 이치가 끊어졌다 함이니, 따라서 소납이 이렇게 설명하는 이 자체도 이미 틀렸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까지도 하지 않으면 이 조차 짐작을 하지 못할 것이므로, 가정하고 이름하여 억지로 설(說)하는 것이니, 짐작을 잘해야 할 것이다. 노파심에서 하나 덧붙이자면, 털끝만한 것이라도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는 곧바로 이것이 생기면 반대의 저것이 나타나는 분별(分別)을 낳게 되므로, 좋고 싫은 고락(苦樂)과, 옳고 그른 시비(是非)가 동시에 생기게 되는 것이어서, 말과 생각을 하더라도 시비고락(是非苦樂)을 붙이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 진우스님 -
3월 27일 [오늘의 명상] . . 그야말로 전 세계가 난리법석이다. 얼마전까지 만 해도 세계가 우리나라를 걱정하고 회피해 왔으나, 이제는 우리나라가 세계를 걱정하고 회피하게 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일반 직장인들보다 자영업을 하는 국민들이 한마디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될 형편이다. 이러다가 모두가 파산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현실이 되고 있으니, 한사람 한사람의 엄청난 스트레스는 나날이 쌓여져만 가고 있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니 끝도 있는 법, 절망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반증이니, 바닥이 다하면 반등의 시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이런 때야 말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을 하지 않는 중도(中道)의 마음이 절실한 시점이라 하겠다. 이 엄중한 시점에 이런 말을 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겠지만, 소납은 걱정하는 마음은 간절하되, 마음이 불편하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선 인과(因果)의 법칙을 믿기 때문이다. 공업(共業)이든 자업(自業)이든 좋고 싫은 두 고락(苦樂)의 질량은 같다는 것이다. 받은 만큼 잃게 되고, 들어온 만큼 나가기 때문이며, 즐거운 만큼 괴롭고, 기쁜 만큼 슬프며, 행복한 만큼 불행하고, 희열을 느낀 만큼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따라 이것과 저것이 나타나는 시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인과(因果)를 받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 들이면 그만인 것이니, 그래서 항상 좋다 싫다 분별하지 않고, 이런 것과 저런 것으로 구별할 뿐이다. 따라서 늘 마음은 중도적(中道的)으로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또 어떡하지? 좋으면 좋은 대로 싫은 마음이 생기고, 싫으면 싫은 대로 더 좋은 마음을 찾게 되어 항상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하게 되므로,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열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더 깊은 설명은 아래의 금강경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의 마지막 붙임으로 대신한다. {금강경 강의}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법 답게 받아 지님.) 8-1. .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항하사등신명보시 약부유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기복심다 其福甚多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항하수 모래와 같이 많은 목숨을 보시하였더라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말해준다면, 목숨을 살려주는 복보다 더 큰 복이라 할 것이다." [붙임] 세간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가운데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소중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보시(布施)를 하되, 한두번이 아니요, 다생(多生) 겁(劫)을 드나들며 항하(恒河)의 모래알과 같이 많이 남을 위해 목숨을 보시했다면 과연 그 복이 얼마인가를 수보리에게 물으셨다. 그러나 이러한 목숨을 수도 없이 보시한 공덕이야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겠으나,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에 불과한 구절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남을 위해 설법(說法)한다면, 이 복덕이야 말로 수억의 목숨을 보시한 공덕보다 더 크다 하심이다. 과연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말씀일까? 당연히 의심이 들겠으나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일단은 믿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선 남을 위해 목숨까지 보시(布施)하는 것은 웬만한 마음으로는 가능치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남을 위한다는 명분 이전에, 우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은 숭고한 마음이라고 칭찬할 대목이겠으나, 그 이전에,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 더 좋다고 판단되는 마음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좋다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동시에 좋지 않다는 상대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 분별심(分別心)이라 하고, 아주 미세한 분별심이라도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발생하므로, 이를 여의지 않는 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은 계속 이어져서 좋다 싫다는 분별 인과(因果)가 계속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어려운 보시라 하더라도,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으로 보시(布施)를 한다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계속 나타나게 되어 윤회(輪廻)로 이어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와 반대로, 좋다 싫다는 두 분별심(分別心)을 완벽하게 여읠 수 있는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깨달아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면, 이야말로 더 없는 성불(成佛)이요, 더 없는 복덕(福德)이요, 더 없는 공덕(功德)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니, 분별심으로 목숨을 보시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이 복덕이 크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해, 복덕(福德)을 비교하셨으니, 처음에는 한 개의 삼천대천세계의 칠보(七寶) 보시(布施)로 비교하셨고, 다음에는 항하(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의 칠보 보시로 비교하셨으며, 지금에는 항하사(恒河沙) 모래알의 수와 같은 신명(身命)보시(布施)를 비교하심이다. 그 다음에는 하루 3시(時)로 항하사(恒河沙)의 목숨보시를 말씀하신 것이니, 점점 어려움을 증가시켜서 비교하심이다. 이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이 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금강반야바라밀과 여래(如來)와 중도(中道)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설(方便說)이시니, 부처님의 눈물겨운 설법에 감복할 뿐이다. - - 진우스님 -
3월 28일 [오늘의 명상] . . 가끔 사람의 됨됨이나 행동을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거나, 재수가 좋은 사람이거나,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거나, 등등 과분한 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럴 깜이 아님에도, 그러한 복(福)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더구나 인품은 고사하고, 막돼먹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인색하기는 놀부보다 더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고, 성질은 개떡같으며, 인물은 모과보다 더 보잘 것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실력도 뛰어나고, 인품과 인물도 빠지지 않고, 하물며 점잖기도 하고, 하지만 하는 일은 사사건건 잘되지 않고, 사기도 많이 당하고, 번번히 낙마하고, 그야말로 지질이도 복이 없는 참으로 아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된다. 아무리 살펴봐도 나보다 더 못난 사람들이 득세를 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공평치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물론, 억울한 생각에 속도 상하고 세상 살 맛 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세상은 무조건 공평하다. 팥 심은데 팥나고 콩 심은데 콩난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자작자수(自作自受)며, 업인업과(業因業果)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의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다만, 일시적으로는 불공평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에는 공평해진다. 알고 보면 세상은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 다만 내 마음이 비뚤면 세상이 비뚤게 보이게 된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불편할 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공성(空性)이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다. 그러니 잠깐 물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러므로 결과는 같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듯 보이는 사람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에 따라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겁대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고 돈이 많고 인물 좋고 떵떵거리는 듯 산다 하더라도, 그 속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얼마나 많이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고락(苦樂)이 좌우된다. 즉, 고락(苦樂)의 업(業)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의 과보(果報)도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니, 잘 사는듯 하지만 고통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범하게 사는 듯 하지만,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이 작을수록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러워하거나 억울해 하거나, 선망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인연 연기(緣起)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있는 그대로만 보고 받아들이면 된다. 스스로의 업(業)만 생각하고 멸해 나가면 된다. 적어도 부처님의 최고 설법인 금강경을 읽고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이들이라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세간(世間)의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꿈,환,물거품,그림자)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슬,번개) 같은 일들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하거나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금강경 강의} 제 14. 이상적멸분 (離相寂滅分- 상을 떠나 적멸에 들다.) 1. . 이시 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이백불언 희유 세존 불설 여시심심경전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佛說 如是甚深經典 아종석래 소득혜안 미증득문 여시지경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 如是之經 이때에 수보리가 이 경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 깊은 뜻을 잘 이해하고 흐느껴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옵기를,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심히 깊은 경전을 설하시는데 제가 예로부터 쫓아오면서 얻은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붙임]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시기 이전에도 목숨을 던지는 복덕(福德)에 대해, “오늘의 여래(如來)가 된 것은 억겁(億劫)의 전생(前生)을 거쳐오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보시한 까닭”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수보리는 이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고, 목숨을 내놓는 보시(布施)는 수행인도 행하기 어려운 일인 동시에, 도(道)를 얻음에 있어서는 이러한 복덕이 반드시 필요한 행임을 알았던 것이니, 이제 금강반야바라밀을 얻음에 있어서도, 목숨이 목숨 아닌 줄을 알아서 목숨을 지푸라기 같이 던질 수 있는 보시(布施)를 행해야 그 복덕으로 여래(如來)가 되는 것임도 알았다. 나아가 목숨이 목숨이 아니라는 것, 항하(恒河)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신명(목숨) 보시를 하더라도 보시가 보시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하나만이라도 여실히 깨닫는다면 그 어떤 보시보다 큰 복덕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때에 수보리는 최후의 한 막(幕) 마저 터짐을 깨달았고, 드디어 온 우주에 걸쳐서 진리 전체가 여실히 드러남을 알게 되었다. 이에 수보리는 흐느껴 울었고, 감동에 못 이겨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희유(希有) 하였고, 부처님께서 이끌어 주신 방편법(方便法)이 희유 하였고, 후세에게 전하시려 호념(護念)부촉(咐囑)하시던 은혜가 희유 하였고, 말과 글 밖의 법(法)을 전수(傳授)하심이 희유 하였다. 또한 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희유 하였고, 법 가운데서도 가장 희유 하였으니, 전생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지혜의 눈으로도 들어보지 못한 희유한 가르침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 진우스님 -
3월 29일 [오늘의 명상] . .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대학진학에서의 면접시험이나, 직장에 입사를 위한 면접시험이나 공무원의 면접시험에서도 말을 어떻게 잘 하느냐에 따라 합격 불합격이 결정되는 시대이다. 또, 말 한마디에 천 량 빚을 갚는다고 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도 한다. 그만큼 말이란 나의 호감도를 높이기 위한 중요한 교류 수단이다. 그리고 직접적인 이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말 기술을 배워 말을 잘 한다 하더라도 평생동안 계속적으로 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은 기술이 아니라 복합적인 마음의 표현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에 진실성이 없으면 단순히 말을 잘 한다 하더라도 금방 탄로가 나게 된다. 그런데 말을 잘 하기가 쉽지 않다. 선천적으로 말을 곱게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말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에 따라 말씨에 그대로 묻어 나오게 된다. 아무튼 말을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부처님 법(法)에 대해 청정(淸淨)한 신심(信心)이 돈독해야 한다. 불법(佛法)에 대한 신심(信心)이 투철한 사람은 말이 험하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게 되므로 상대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한다. 만약 아무리 말을 잘 해도 상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부처님 법에 대한 신심(信心)이 부족하여 믿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니, 스스로 참회해야 한다. 말은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이란 본능적으로 유리한 것을 선택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이 생각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말을 하는 이유 역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선택하기 위함이니,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이 클수록 말에 따른 구설이 크게 따르게 되며, 분별심이 작을수록 말에 따른 구설이 작게 따른다. 따라서 말을 잘하면 물론 좋기는 하겠으나, 무조건 잘하려고만 한다고 해서 잘해지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인과(因果)가 생기지 않고 말에 대한 집착심이 없어져서 걱정 근심이 생기지 않게 된다. 말을 너무 잘하려고 하는 생각이 지나치면 걱정 근심이 생긴다. 걱정 근심은 집착에서 나온다. 집착은 업을 낳아 계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매번 반복하여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이라는 상(相), 말을 잘해야 한다는 상, 말을 잘못한다는 상, 내 말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상, 등등의 상은 진실된 실상(實相)이 아니니 이러한 분별(分別) 상(相)을 떠나야 한다. 아래의 붙임 설명을 참고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14. 이상적멸분 (離相寂滅分- 상을 떠나 적멸에 들다.) 2. .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 시인성취제일 희유공덕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 是人成就第一 希有功德.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 여래설명실상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의 말씀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바로 실상을 알 것이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줄로 마땅히 알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은 진실된 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그 이름만을 실상이라 하셨습니다. [붙임] 수보리는 왜 일찍이 듣지 못하던 경이라 했을까? 이 경이 참으로 희유(稀有)하므로 누구든 이 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淸淨)하기만 하면, 청정한 반야(般若)의 묘한 땅(妙地)과 그 뜻이 합하여 실상법신(實相法身)이 됨을 알았다. 또 신심(信心)만 청정하면 이것이 곧 실상법신(實相法身)이고, 이를 깨달은 사람이야 말로 마땅히 제일 희유한 최상의 공덕을 성취할 줄로 아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이를 깨친 사람은, 마음이 청정하여 사상(四相-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하지 않아 관찰(觀察-보는마음)이 청정했고, 관찰함이 청정하므로 믿는 마음이 청정하여, 이 경전을 들음에 곧 마음이 머물지 않고 상(相)이 없는 무주무상(無住無相)의 실상(實相)이 된 것이다. 머물지 않고 상(相)이 없는 무주무상(無住無相)의 실상(實相)이면 이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금강반야바라밀이요, 제불제불(諸佛諸佛-모두가부처)이오니 이것이 제일 희유한 공덕의 성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實相)이라 하면 또 실상이 아니되는 고로, 실상이라는 상(相)은, 상(相)을 말하는 상이 아니고, 일체상을 여의어 실다운 이치인 원허태공(圓虛太空-큰 공마저 비어서 이름하여 원만한)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이름함 이니, 그 자리는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고 相貌(상의모양)도 없기에 상(相)이라 할 것이 못된다. 이런 까닭에 실상(實相)이라 한 것은, 여래께서 그 이름만을 실상(實相)이라 하심에 불과한 것이다. - 진우스님 -
3월 30일 [오늘의 명상] . . 어떤 이는 소납의 명상 글 내용을 인과(因果) 법문, 인연 법문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물론 폄훼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소납의 생각으로는 기본적으로 인과법(因果法)을 모르면 부처님법을 절대 알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또 인과(因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말한다. 인과(因果)를 제외하고, 공(空)의 도리는 물론, 유식(有識), 중론(中論), 화엄(華嚴), 법화(法華), 반야(般若), 나아가 격외도리(格外道理)인 선(禪)이 왜 필요할 것인가. 원인을 모르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즉 인과(因果)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마음을 깨쳐야 인과를 벗어날 수 있음을 알 것인 즉, 오직 인과(因果)를 벗어나는 길이 곧 해탈(解脫)이요, 열반(涅槃)이요, 성불(成佛)이므로 인과(因果)는 중생의 모든 모습 그 자체인 것이다. 평면적인 인과법(因果法)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로 해석된다. 좋은 원인을 지어야 좋은 결과를 맺고, 나쁜 원인을 지으면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인과법(因果法)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인과(因果)는 마음의 모양이다. “하나가 생기면 다른 반대의 하나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인과(因果)의 기본 법칙”이다. 마음의 근(根),경(境)인 12처(處)와, 육식(六識)을 더한 18계(界), 이 모두는 인과(因果)에서 비롯된다.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이 생긴다. 그래서 마음이 인과(因果)요,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도 인과(因果)의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모든 중생은 누구나 즐거움과 기쁨, 행복과 희열을 추구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걱정 근심, 고통과 괴로움, 불행과 불안 불편, 이 모든 우비고뇌(憂悲苦惱)의 과보(果報)가 생긴다. 바로 인과(因果)의 법칙에서 비롯된다. 배가 너무 고프면 고통스럽다. 배가 불러야 고통도 사라진다. 배고픔이 없어지면 고통도 사라짐과 동시에 기분이 좋아지고 즐거워 진다. 따라서 고통과 즐거움은 지구의 대척점인 낮과 밤과 같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중생의 삶이요, 현실이다. 이것이 인과(因果)의 모습이다. 인과(因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과(因果)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공(空)의 도리를 알아야 하며, 유식(有識)과 중관(中觀), 화엄(華嚴)과 법화(法華) 금강(金剛) 등의 부처님 말씀을 청정히 들어야 하고, 더 나아가 선(禪)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 모든 욕심은 인과(因果)에 따라 괴로움의 과보(果報), 즉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괴로움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과(因果)는 현실이요, 실전이다. 인과(因果)와의 전쟁에서 이겨야 비로소 중도(中道)의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 과연 인과(因果)를 얼마나 절실하게 체득(體得)하느냐에 따라 금강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 14. 이상적멸분 (離相寂滅分- 상을 떠나 적멸에 들다.) 3. .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약당래세 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시인 즉위제일희유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하이고 차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고 족히 알아서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만약 이 다음 세상 후 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들어서 믿고 알아서 잘 받아 지니게 되면, 그 사람이 곧 제일 희유하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생각도 없고,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고, 중생이라는 생각도 없고, 오래 산다는 생각도 없기 때문입니다. [붙임] “세존이시여, 우리들은 희유(稀有)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실상(實相) 또한 그 이름 뿐이요, 그 상(相)이 상(相) 아님을 아는 즉시 흔적이 없으며, 지극히 청정하므로 체상(體相)마저 사라졌음 이니, 상(相)이 상 아님을 아는 실상(實相)의 도리인 금강반야바라밀을 여실히 믿고 알아서 받아 지니기 란 참으로 어렵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행히 여래를 친히 모시고 호념(護念) 부촉(咐囑)하시니, 이를 믿고 알아서 받아 지닐 수 있는 은덕을 입은지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장차 다가오는 세상인 오백세(五百世) 후의 중생들이 이 경을 들어서 믿고 알며 받아 지니기는 참으로 어렵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를 깨닫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 말로 제일 희유(稀有)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은덕이 멀어진 지가 오백세 후의 일이건만, 이를 능히 깨닫는다는 것은 청정본연(淸淨本然)의 자성(自性)을 밝힘이요, 여래(如來)가 항상 머무는 것을 알았음 이요, 청정자성(淸淨自性)을 반조(反照)하여 업력(業力)을 다 멸하였으므로, 희유(稀有)하다 하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제일 희유할까요? 이 사람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는 이유입니다. 사상(四相)에 머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자성(自性)이 청정(淸淨)하고 자성(自性)이 청정하므로, 청정실상(淸淨實相)인 이 경을 듣는 동시에 마음과 일체가 되므로, 제일 희유(稀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 진우스님 -
3월 31일 [오늘의 명상] . .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아니 감정이란 애초에 없는 사람, 아마 이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무섭고 틈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기나 할까? 사람이 어떻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까? 가능이나 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 방법은 있나? 감정이 없으면 사람인가? 무슨 재미로 사나? 목석이나 로봇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함에 불교의 최고 목적은 감정을 멸(滅)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감정을 완전히 멸한다면 이름하여 청정(淸淨)과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만 남게 된다. 이를 부처라 한다. 반대로 중생은 감정만 남아 있다. 그래서 유정(有情)이라 한다. 감정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낳기 때문에, 즐거움도 있으나 즐거움의 질량만큼 똑 같은 무게의 고통과 괴로움이 따른다. 그래서 중생의 삶은 인과(因果)의 연속이다. 다만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시간이 다를 뿐이다. 이를 시절인연이라 한다. 부러우면 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분 나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자기의 업(業)이고 자기 몫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며 인과(因果)의 소치다.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즐거움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이런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지루하고 싫증이 날 수도 있다. 이 또한 기분이 좋지 않은 인과에 의한 분별업(分別業)의 소산이다. 돈도 없고, 힘도 없고, 건강도 나쁘고, 사업도 망하고, 직장도 잘리고, 공부도 못하고, 남에게 인정도 못 받고, 욕도 듣고, 말다툼도 잦고, 짜증도 나고, 사람도 싫고,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등등, 이렇게 기분 나쁜 일은 팔만사천가지도 넘는다. 기분 나쁜 감정이 드는 것은 그만큼 기분 좋아지려고 하는 욕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기분 좋은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행복을 맛봤기 때문이다. 기분 나쁜 것이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좋은 것을 바라지 말라 하셨다. 일체의 상에 머물지 말고, 갖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 하셨다. 모든 상(相)이란 곧 감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좋은 감정이든 싫고 나쁜 감정이든, 정(情)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다. 인과(因果)가 생겨서 고통과 괴로움이 같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일체의 상(相)은 공(空)이 아닌 것이 없어서 일체의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머무를 수도 없거니와 머물러봐야 모두 잃게 된다. 그러므로 무조건 상(相)을 상(相)으로 보지 말고 집착하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라 하셨다. 기분이 나쁜 것 즉,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그 자체가 손해요, 자기 몫이다. 그래서 무조건 기분이 나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상을 상으로 보지 말 것이다. 물론 감정을 없애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인과(因果)를 알아야 하고, 공(空)을 알아야 기분이 나쁘지 않게 된다. 금강경은 바로 이렇게 위대한 법(法)을 부처님께서 설법(說法)하심이다. {금강경 강의} 제 14. 이상적멸분 (離相寂滅分- 상을 떠나 적멸에 들다.) 4. . 소이자하 아상 즉시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시비상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왜 그런 것인가 하면, 나라는 생각은 곧 상이 아니요,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도 곧 상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상을 여의어야 부처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붙임] 사상(四相)이라는 상(相) 또한 없어야 제일 희유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나라는 생각의 상(相), 사람이라는 생각의 상(相), 중생이라는 생각의 상(相), 오래 산다는 생각의 상(相)이 이 모든 상이 없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상(相)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것이다. 사상(四相)이란 본래 이름 뿐의 상(相)일 진데, 사상(四相)이 없다는 것은 곧 사상(四相)이 사상(四相) 아님을 아는 것인 줄 필경에는 알 것이니, 사상이란 본래 공(空)한 것이므로 상(相)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사상이라는 상(相)만 공(空)한 것이 아니라, 사상(四相)을 말하는 설법도 공(空)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구경(究竟)의 상(相)마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일체의 모든 상(相)을 없애면 곧 이름하여 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일체의 상(相)을 여의면 마음이 공적(空寂)하여 일체의 상(相)을 여의었다는 마음까지 머물지 않을 것이요, 일체의 상(相)을 여읜다는 생각까지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일체의 상(相)을 떠남도 없을 것이니, 이같이 일체상(一切相)을 떠남이 없는 것이 참으로 일체상을 떠남이 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경지를 곧 부처라 이름하는 것이다. - 진우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