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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상처와 그 치유
사무엘상16:6-13 2021/05/09 부활절 제6주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16: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16: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6: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6: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자식을 낳고 기르느라 애쓰신 이 땅의 모든 어버이들과
그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오게 된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상처 하나쯤은 누구나 다 가지고 힘겹게 살아갑니다.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가난에 대한 상처, 가난에 대한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고생 없이 자랐겠구나.’ 여기지요.
신학교시절 학생회 대표로 있을 때입니다.
3개 신학교 연합체육대회를 위한 찬조금을 얻기 위해 김홍도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금란 교회에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김홍도 목사님과 1:1면담을 하였습니다.
당시 김홍도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세계적인 부흥 강사로 소위 가장 잘 나갔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요청하는 집회와 각종 모임으로 인해 늘 바쁜 일정을 보내야만 했던 분이 김홍도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귀한 분과 담임목사 실에서 1:1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그분의 첫 질문이었습니다.
‘그래, 어느 교회 목사님 아들이신가?’
저를 이름 있는 교회의 목사님 아들쯤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저를 본 첫 인상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다윗.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이만한 인물이 없지요.
최고의 인물이자 최고의 왕이지요.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되는 두 인물이 나옵니다.
한 분은 모든 족속과 열방을 대표하는 아브라함이고
또 한 분은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다윗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고, 말 못하는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윗의 상처,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상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가정에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뽑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지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과정에서 다윗이 아주 큰 상처를 받습니다.
사무엘상 16장입니다.
삼상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진 사울이 이 전과 같지 않고, 목이 곧아지고, 교만해 지자, 하나님이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버리십니다.
그런 후,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들 중에 하나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울 것을 선지자 사무엘에게 지시하십니다.
그렇게 선지자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그 여정은 사울 왕의 눈을 피해 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만만치 않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새에 집에서 도착한 선지자 사무엘은 이새의 장남 엘리압과 마주하자 깜작 놀랍니다.
사울 왕보다 더 준수한 용모와 더 큰 키를 가진 이가 자기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이구나!’
‘이런 촌 동네에, 세상에 이런 인물이 다 있다니.’
이새의 장남 엘리압의 외모와 키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하나님이 지목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선지자 사무엘이 확신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지까지나 사무엘 선지자 개인의 안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지요.
삼상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준수한 외모와 큰 키를 가진 엘리압.
누가가 보아도 큰 키를 가진 사울 왕(10:23-24)을 대적할 만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아니다.’
그러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안목은 사람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식들을 가장 잘 아는 아버지 이새가 직접 나섭니다.
사람의 외모.
그 기준이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서열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나이순으로 갑니다.
서열을 잘 알고 있었던 아버지 이새가 내세운 것은 둘째 아비나답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상16: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하니
둘째 아니면, 누구일까요?
그렇지요.
아버지 이새가 셋째를 부릅니다.
그리고 둘째처럼 셋째 삼마를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시 셋째 삼마도 아니었습니다.
삼상16: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렇게 일곱째까지 서열에 따라, 차례차례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지만 하나님은 하나같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삼상16: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이제 아버지 이새도 더 이상 내 세울 자식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선지자 사무엘이 아버지 이새에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삼상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그러자 이새가 그 때서야 마지못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삼상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양을 지키는 그 아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미칠 만큼 그런 아이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막내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가톤’은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한 마디로 ’쓸모없는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이새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다윗의 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과의 전투가 한창일 때입니다.
아버지의 이새의 심부름으로 양을 지키던 막내 다윗이 전쟁터에 나간 첫째 엘리압과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삼마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블레셋 특히 골리앗의 기세에 눌린 이스라엘 병사들이 어느 누구도 앞서 나서 싸우려하지 않는 것을 다윗이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자 양을 지키던 막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지요.
그 때 큰 형 엘리압이 이런 말로 막내 동생 다윗에게 상처를 안겨줍니다.
(새)삼상17:28 다윗이 군인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맏형 엘리압이 듣고, 다윗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너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은 누구에게 떠맡겨 놓았느냐?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아, 네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17:29 다윗이 대들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다는 겁니까? 물어 보지도 못합니까?"
이처럼 형들의 안중에도 없었던 인물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이나 치는 녀석’
결국 이 말 한마디가 다윗에게 큰 상처로 남게 됩니다.
아버지와 형들로부터 외면당한 다윗.
결국 이런 상처들이 고착이 된 다윗은 여자에 대한 집착으로 퇴행하게 됩니다.
어릴 적 겪은 애정결핍의 상처가 이성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 중에 하나가 사무엘 상 25장에 나오는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취하는 사건입니다. 자신의 청을 거절한 나발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됩니다.
그러자 곧바로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합니다.
아무리 아비가일이 그의 남편인 나발과 달리, 자신을 선대했다 할지라도 도망자 신세로 아내로 맞이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내로 맞이합니다.
아비가일의 고엘(기업 무를 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이가 여기에 사족을 답니다.
(새)25:42 아비가일이 일어나서, 서둘러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니, 그 뒤로 그 여인의 몸종 다섯이 따라나섰다. 아비가일은 이렇게 다윗의 시종들을 따라가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
25:43 다윗은 이미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두 사람이 다 그의 아내가 되었다.
25:44 본래 다윗의 아내는 사울의 딸 미갈이었으나, 사울이 이미 다윗의 아내를 갈림 사람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다.
그렇게 다윗이 왕에 오르기도 전에 아내가 셋이 됩니다.
성경의 저자는 이 부분을 사족으로 답니다.
삼상25장 44절의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위인 다윗과 사이가 나빠지자 장인인 사울 왕이 다윗의 아내이자 자기 딸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줍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시집보내 딸을 또 시집보낸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은 장인 사울 왕에게도 철저히 무시를 당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어떻게 하냐하면, 끝까지 쫓아가서 자기 아내를 다시 찾아옵니다.
남의 도움 까지 받아가면서 정말 우여곡절 끝에 찾아옵니다.
하지만 아내와 화목하지 못한 다윗은 결국 각방을 쓰게 됩니다.
소심한 복수이지요.
그렇다면 다윗은 왜 이렇게, 이성에 대한 편력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바로 아버지와 형들로부터 버림받은 상처 때문입니다.
‘양이나 지키는 아이’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이나 치는 녀석’
이런 무시와 상처가 여자에 대한 집착과 퇴행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로 인해 때로는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그것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왕에 오른 후에도 다윗은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여전히 여자에 대한 집착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터진 사건이 사무엘하 11장 이후에 나오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이전의 것과는 결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성의 문제로 인해 다윗의 행실이 악하다고 책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하 1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11:27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의 경우와 다르게 하나님이 이번에는 아주 크게 진노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이 전과 다르게 다윗을 대했을까요?
왜 다윗의 행실이 악하다고 하셨을까요?
표면적으로는 부하 장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한 다윗의 악한 행동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하나님의 뜻도 숨어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자기 내면의 상처에 대한 보상으로 그릇된 짓만 행할 것인가?’
하나님은 지금 이것을 다윗에게 따져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의 상처
그 내면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사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할 때까지, 자신의 행동이 악하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의 눈에 들어온 한 아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축복받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
바로 불륜의 씨앗으로 태어난 자신의 상처, 그 버림받은 아이의 아픔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처지와 같은 이 아이를 위해 금식하면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회개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이 아이를 죽입니다.
아이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실은 악행의 근원이었던 다윗의 상처를 죽인 것이지요.
이후로 자신의 상처로 인한 악행이 더 이상 다윗에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다윗의 위대한 신앙고백 시편 51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상처는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또 다른 상처를 남에게 주는 악행이 됩니다. 더욱이 상처가 크면 클수록 남에게 행하는 악행은 더욱 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상처로부터 고착된 우리의 악행을 반드시 치유 받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다윗이 그런 것처럼 먼저 자기 자신의 상처와 그 상처로 말미암은 악행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늘 반역했던,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 회개의 영이 임해야합니다.
시51:1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51:2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51:3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둘째 그런 다음에 시편 51편 10절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깨끗한 마음이 내 속에 창조되어야합니다.
51:9 주님의 눈을 내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51:10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난 다음, 셋째입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찢겨진 심정,
그 상처를 제물로 드리십시오.
51:16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리더라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51: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51:18 주님의 은혜로 시온을 잘 돌보아주시고, 예루살렘 성벽을 견고히 세워 주십시오.
51:19 그 때에 주님은 올바른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제물을 기쁨으로 받으실 것이니, 그 때에 사람들이 주님의 제단 위에 수송아지를 드릴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여러분의 상처, 그 찢겨진 심령을 치료하여 주실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