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峯先生年譜
三十三年甲寅。先生二十八歲。赴東堂鄕試居魁。春哭龍山鄭先生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28 東堂鄕試에 장원하다.
고봉 선생 연보(高峯先生年譜) 〔목판본〕
27년 무신(1548) 선생 22세
○ 나주 충위(羅州忠衛) 함풍(咸豐 함평(咸平) ) 이임(李任)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8년 기유(1549) 선생 23세
○ 일재(一齋) 선생 -성은 이(李), 명은 항(恒)이다.- 을 배알하였다.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시와 진사시 )에 모두 2등을 하였다.
29년 경술(1550) 선생 24세
○ 8월 10일, 아들 효증(孝曾)이 태어났다.
30년 신해(1551) 선생 25세
○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다. 급제할 수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하등(下等)의 점수를 주는 바람에 낙제하였다. 곧바로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26세, 27세-
33년 갑인(1554) 선생 28세
○ 동당 향시(東堂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다. -봄에 용산(龍山) 정 선생(鄭先生 정희렴(鄭希廉))을 곡(哭)하였다.-
[서산정씨] 정희렴(鄭希廉)
자(字)는 이간(以簡). 조선(朝鮮)에서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용산(龍山) | 정희렴(鄭希廉 : 1495~1554)의 호이다. 본관은 서녕(瑞寧)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다. | 고봉전서(高峯全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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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렴 (鄭希濂)
조선전기 예문관검열, 정언,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이간(而簡), 호는 동계(東溪). 정종소(鄭從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이득(鄭以得)이고, 아버지는 정형(鄭珩)이다.
1519년(중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용되었다.
그 뒤 정언·지평 등 언관을 역임하면서 당시 세도를 부리고 있던 김안로(金安老)일당의 횡포를 비판하다가, 그가 주관한 과거시험의 비리를 빌미로 하여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학문에 전념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자손으로는 기대승(奇大升)의 문인인 외아들 정휴(鄭隳)가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접기/펼치기집필자
최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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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大升 | 1527 | 1572 | | | 幸州 | 明彥 | 高峯, 存齋 | 文憲 | 德原君 |
高峯先生續集卷之二 / 雜著 / 自警說
古人莫不訟前咎以自箴。蓋悼前之失。而起後來善思也。是皆聖人賢士之所寓意用功者。吾何爲獨不然。歌詠之餘。丕遠惟十九年前事。予生於嘉靖丁亥。乃大行王 中宗大王 之二十二年也。生一年。失王母。及齔而失慈天。惟嚴君是依。劬勞鞠養。少多疾疹。在死而生。至于今日。昧昧思之。懷慟窮天。嗚呼。天民之窮毒者。孰過於予哉。時念少時事。多不復記憶。亦有一二可想者焉。癸巳歲。始受學于家庭。明年甲午之孟秋。丁窮天之慟。因決捨其業。不復以問學爲事。蓋家君亦以新遭大變。未嘗爲誨。歲之乙未。讀孝經學書。又誦小學。庶幾有望於不自棄。何意天未悔禍。鬼亦不弔。於丙申之冬。小妹以疫疾逝焉。家君以患禍荐臻。避處山寺。予亦隨去。讀書習字。頗有進就之望。自其年冬月。至于丁酉之秋。家君在寺。秋晩。以上洛故還家。予時尙記憶也家君上洛後。予以居家不愜於心。十月之初。自矜奮。往書堂受大學畢。繼讀漢書及韓文。歲已晩矣。因下家覲親。且復上焉。讀孟子及中庸。常與儕輩聯句。亦不無述。人皆稱有學性焉。讀眞寶前集。又讀古賦。連誦不已。時則戊戌年也。是時。予之外王母之外王父之妾。以家門之位。常愛恤諸孫。予之慈天。少嘗育於其家。舍兄亦育於其家。以予等之失慈。眷顧甚至。年八十有餘。而聽視未嘗少衰。常撫余而言曰。必當爲大人。着力讀書云云。其年春逝焉。家禍卒迫。烏得無慟哉。讀後集數百遍。時則七月也。直至明年十月告畢。己亥年也。時先輩以監試之望。萃于書堂。讀書著文爲業。余亦從而學之。亦無難者。歌誦不隨乎時。詩賦惟其所欲。雖不能中於法度。人或謂之能焉。當十月之晦。受史略於家君。三閱月而畢。歲則庚子。月乃元也。其後稍稍蒙拔而業長矣。繼受論語。至秋而畢。是年春。外叔父擢第。及秋掃墳到此。考其已往之業。而講其當時之學。勉其有成也。於是。京中親戚。聞其將有成也。徵其文。余卽盡以取爲之付與。由是箱笥無昔時稿矣。其冬。讀書傳。皆成誦。明年秋。讀詩傳繼讀周易。自庚子至辛丑凡八月。自辛丑至壬寅之春凡十月。合數之。爲月者十有八。而爲年一度半强。志頹性懶。口不詠心不惟者殆半之。雖時有感奮作氣。勢亦不能矣。蓋家君以其少有知也。常弛其授講。簡誨而疏勸。時有所遊放。不究切之。余以其安逸爲可恒也。是以年壯而學益頹。歲久而志益弛。以至於今泯泯也。可勝歎哉辛丑之春。哭外從祖母。媽常以余慈天爲養嗣。及慈天棄世。視余等猶子。念寒而衣。念饑而食。小子何知。惟媽我母。至是捐世。終天永辭。此怨曷崩。天乎鬼乎。昔年奪吾母。今又奪吾媽。天乎鬼乎。一何毒我之極耶。自需給高堂。養以及百口之人。與吾輩二哀之小子。食有所不贍。衣有所不完。奚所資而取焉。後事之擺脫而不擧者。誰與告之。迷僮劣婢。於何聽受而共業焉問學之日。繼夜望顯揚者。無所事於榮養。嗚呼哀哉。嗚呼哀哉。春暮作西京賦。凡百有三十句。龍山評之曰。讀其詞。想其人。宜其聲之久播於人。思遠而氣壯。語高而辭達。雖間有生澁。特是小疵。一蹴便到古作者列。況其外之科乎。其可賀也已云云。於夏。嘗次西征賦。未及就而置焉。明年春。以秋有觀光之望。試作詩賦。學源鹵莽。思致泥澁。竟不能成篇。因竊自悲。幸生天地間。得二樂焉。旣無疾病厄窮之患。耒耟耕穫之勤。棄而不學。則無復有所事於一世。仍慷慨不能語。旣數日。聞先輩集于書堂。往從之。亦未嘗勤做。而嘗作吊鄭夢周賦。筆端自爾無澁。竟不知何故也。夏之仲。諸生皆歸還。僕亦下家。爲一日之勤。一日之間。一哦之頃。而溫故賦凡十餘首矣。嘗作議政府賦姑蘇臺賦。皆百餘句。始復其故所學。庶有不棄之期焉。及秋擧於試。卒無成。莫恥之甚而志氣頹墮。竟無一慨念到胸次。優游卒歲。挾大學一部而已。及聞罷榜之奇。旬日於山寺。誦元賦抄。然未識沿河之步。而徒趦趄於斷潢。海未卽而見未克大。勞思長懷。亦末如之何也已。從事於有司。亦無聞焉。然作疑義甚好。人皆許之。意其一得。而竟不得。命也可如何。負級山齋。時已夏孟。牧伯李公弘幹召諸生講于校。余亦從而蹁躚。奄冉日月。六月之晦。罷接而還。越八月初吉。牧伯更集十餘輩講小學。余亦齒焉。仍登名校籍。奔走率所職。路又極遠惡。一出入。息輒四五日。業廢而志弛。其爲弊也可勝言哉。道途之中。忽見歲暮。古人云。日月馬上過。詩書篋中藏。不其然乎。不其然乎。明年甲辰。牧伯宋公。純選儒生求益者。俾之講誦。必書其時。時已久。卽考其所就之如何。余因是讀孟子。三月之晦。畢讀韓文。四月之望。祗謁龍山先生函丈焉。午月。將赴都會。見于先生。先生命作民嵓賦。賦成。先生亟稱之。讀韓文止祭文而還。月已晦矣。六月。往都會。晦則刀頭。秋初。再往龍山。又讀韓文。望後還家。自是月至入月之終。困暑長臥。對案而已。九月初。往龍山講文選。旬時還家。十月之吉。又往龍山。講商書大文。未畢一二卷而還。月已生魄。烏飛鬼走。又見歲暮。回首天地。日欲晼晩。更何辭哉。初謂自數年來。惰放成痼。學未克就。而年且壯。甚軫于懷。庶冬朔勤修。而立志不固。結習未除。玩愒流光。虛度日月而已矣。嗚呼。余生之歲正月己卯朔。今已百有一十己卯矣。業儒之日。不爲近矣。降生之載。不爲少矣。棄之而未嘗及謀所立。甚矣。余之無知也。其亦不善變矣。追思之。可爲扼腕痛心。故自此以來。慨懷勞思。中夜起坐。度時揣已。悲來塡膺。言之不可已。乃編次往事。跡其所踐之如何。一以爲戒。一以爲勸。而又自悲我生之不辰也。抑是言也。皆前日小小之事。靡有警過失造工夫者。蓋記不忘耳。非所與論於言之外也。雖然。使之常接乎吾之耳目。思昔伊艱。顧今無成。慨乎其存乎心而不舍。則其於感勵激發之效。亦未必無少補云耳。其他事意。心計已熟。固未易與泓穎謀也。遂不復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