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로 남진하다가 天安(천안)분기점에서 새로 뚫린 25번 고속도로(천안~논산)로 길을 바꿔 남행하다가 南공주 인터체인지로 나와 40번 국도를 따라 5km쯤 북상하면 松山里 古墳群(송산리 고분군)이다. 아침 출근시간과 겹치지만 않았다면 1시간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300리 길이다.
오전 10시 松山里 떼무덤 〔古墳群〕 남녘 언덕배기에 위치한 武寧王陵(무령왕릉)으로 올라갔다. 무령왕릉 앞에 서기만 하면 百濟(백제)가 보인다. 무령왕릉과 그 유물은 백제문화의 국제성과 우아함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산인 것이다.
이 왕릉에서는 모두 108종 2906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종 16점에 달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국보 등 유물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보존·전시되고 있다.
무령왕릉은 만들어지고 난 뒤 1500여 년 동안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處女墳(처녀분)으로서 葬具(장구)·木棺(목관)·裝身具(장신구)·副葬品(부장품=껴묻거리)이 그대로 남아 있던 무덤이다. 무령왕릉 바로 앞에 놓인 5호분과 6호분, 그리고 그 동북쪽 100m에 위치한 1·2·3·4호분은 일제시대에 이미 발굴 조사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이란 이름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그러면서도 무령왕릉의 존재만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공주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 해설사로 자원 봉사하는 李惠影(이혜영)씨는 이렇게 말했다.
『日帝(일제)가 무령왕릉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우리 민족사에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조선총독부는 1∼4호분을 熊津(웅진)백제시대 네 왕의 무덤이라고 의식하여 샅샅이 뒤졌고, 그 후에 5호분과 6호분도 발굴했는데, 껴묻거리는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6호분 발굴 현장을 지휘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溫)도 그에 대한 조사보고서에서 「이미 도굴당해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썼어요. 그 말 누가 믿겠어요. 평양고보 교사로 재직하다가 당시로선 좌천을 자청해서 공주고보 교사로 전근해 온 가루베는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골동품상이라고 하데요. 그 시절, 왕릉에서 발굴한 많은 유물들을 지게로 져서 날랐다는 여러 분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때의 진실을 끝내 고백하지 않은 채 1970년대에 일본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심증이 가더라도 물증은 없는 傳言(전언)이다. 그야 어떻든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송산리 고분군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6호분이었다. 6호분은 인근 다른 무덤과는 그 규모, 형태, 건축재료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교하게 제작한 무늬벽돌을 사용했다. 또한 지하에 아름다운 아치형 곡선의 玄室(현실=무덤방)을 갖추었는데, 그 벽면에는 사방으로 四神圖(사신도)의 벽화까지 그려져 있다.
드라마틱했던 무령왕릉의 발견
무령왕릉의 발견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1971년 여름은 유별나게 무덥고도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었다. 계속되던 폭우 때문에 松山 위쪽에서 빗물이 쏟아져 내려 제6호분에 물이 보永榕駭? 6호분의 보호가 관련 기관과 학계의 걱정거리였다. 빗물이 6호분에 줄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배수시설의 보완 축조가 시급했다.
6호분 위쪽의 배수시설 공사가 진행된 7월5일, 한 현장 인부의 삽이 땅 속의 어떤 단단한 물체와 부딪쳤다. 그것은 아름다운 무늬벽돌이었다. 땅 표면 바로 밑에 무령왕릉의 앞부분 건축부 윗모서리가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그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멋쟁이 왕으로서 웅진시대의 백제문화를 화려하게 滿開(만개)시킨 무령왕 부부라는 점에서 세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8척 장신에 미남으로서 인품 또한 인자하고 관대하여 민심을 모았던 임금이었다.
무령왕의 이름은 斯麻(사마), 성은 복성인 扶餘(부여)인데 흔히 외자 餘로 약칭된다. 무령왕은 501년 12월 加林城(가림성·지금의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의 성주 加(백가)에게 피살된 東城王(동성왕)에 이어 백제 제25대 왕으로 즉위했다. 무령왕은 加 세력 등에 옹위되었던 것이다.
어떤 왕이 피살될 경우 누가 최대의 수혜자인가를 살펴 암살의 배후를 판별하는 것이 왕조사의 한 법칙처럼 되어 있다. 동성왕의 피살로 가장 덕을 본 인물은 동성왕의 이복형인 무령왕이다. 그래서 무령왕을 궁정 쿠데타의 주역이라고 보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동성왕은 부여로 사냥을 나갔다가 가림성에 들렀는데, 때마침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그곳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다. 동성왕은 사냥을 겸하여 천도 후보지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사비 천도는 동성왕 재위 말기부터 추진되었던 국가적 대사업이었다. 웅진은 지키기에는 좋았으나 번영의 터전으론 너무 좁았다.
그러나 웅진의 토착 신흥 귀족들은 천도에 반발했다. 특히 백가는 衛士佐平(위사좌평: 백제 제1 官等의 大臣으로서 국왕 경호를 담당한 親衛長官)에서 가림성주로 좌천된 인물로서 웅진 토착 귀족인 씨를 대표하던 인물이다. 추측컨대 백가는 그를 좌천시킨 동성왕에 대해 원한을 품었고, 천도에도 역시 반대했을 것이다. 자객의 칼에 찔린 동성왕은 상당 시일 혼수상태를 헤매다가 죽었다. 그때까지도 동성왕을 보위하려는 무령왕의 액션은 역사기록에선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곧 백제판 兎死狗烹(토사구팽)이 전개된다. 즉위 직후 무령왕은 그의 옹립 功臣(공신)인 加를 토벌하여 그 시체를 백마강에 던져 버렸다. 왕권을 우습게 알던 토착 신흥귀족 세력에 대해 본때를 보인 셈이다.
이미 인생의 山戰水戰(산전수전)을 다 겪은 40세의 무령왕은 이복동생 동성왕을 백가의 兇手(흉수)를 빌려 암살한 다음에 滅口(멸구)를 위해 백가의 모반을 충동 또는 조작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무령왕은 帝王學(제왕학)의 達人(달인)인 셈이다. 제왕학과 인격은 별개의 문제이다.
무령왕이라면 웅진시대 백제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고 해양강국으로 재건한 백제의 英主(영주)이다. 백제의 웅진시대는 제21대 개로왕(455∼475)이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아 참살되고 수도 漢城(한성·지금의 서울)이 함락되자 그의 동생 文周王(문주왕)이 이곳 웅진으로 내려와 수도로 삼은 후 제26대 聖王(성왕)이 사비로 都城(도성)을 지금의 부여로 옮겼던 때(성왕 16년=538)까지의 63년간을 의미한다.
무령왕 즉위 이전 웅진시대의 왕권은 허약했다. 문주왕(475∼477), 삼근왕(477∼479), 東城王(579∼501)이 한결같이 비명에 생을 마쳤던 것이다. 동성왕대에 추진된 일련의 왕권강화책은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在地 귀족들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했다.
또한 기질이 드셌던 동성왕은 신하들의 진언을 무시하고 도성 안에 臨流閣(임류각) 등 호사스런 토목공사를 벌여 민심을 잃고 있었다. 백제가 침체와 혼돈의 밑바닥에서 벗어나 회복국면에 접어들게 된 것은 바로 무령왕 즉위 이후였다.
한반도에서는 이례적인 벽돌무덤
무령왕릉은 1997년 6월까지 공개되었으나 내부 조명으로 열이 발생하여 조명기구 주변에 곰팡이가 서식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고분 내부의 공개로 인하여 통로가 열리고 관람객의 출입으로 結露(결로) 현상까지 나타나 방치할 경우 무덤 손상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문화재 당국은 몇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듭하다 1997년 7월 무령왕릉의 입구를 폐쇄했다. 닫아 놓는 것이 최선의 보존책임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무령왕릉 발굴은 당시부터 「졸속 작업」 이란 비판을 받았다. 공주大의 이남석·서만철 교수는 「무령왕릉의 발견과 보수의 역사」라는 공동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적의 중요성, 그것도 처음 발견된 왕릉이면서 聆寬坪?확실한, 더욱이 백제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발굴 자체가 너무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때문에 많은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중략) 발견 후 발굴까지 조치라든가 발굴과정 및 후속조처에 대한 문제점이 적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령왕릉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고급정보의 상당량을 잃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발굴을 시작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묘실의 문이 열렸다. 유물이 반출되기 시작한 시각이 밤 12시, 마지막으로 묘실 바닥이 청소된 것이 아침 9시였다. 왕릉 내부 유물 잔존상태의 실측 및 촬영, 그리고 유물의 수습이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1차 조사가 불과 10시간 만에 超(초)스피드로 해치워진 것이다.
문화유산해설사 李惠影씨와 함께 무령왕릉이 위치한 언덕에서 내려와 실물 크기의 무령왕릉의 모형관에 들렀다.
무령왕의 무덤은 바로 밑 6호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선 드문 塼築墳(전축분), 즉 벽돌로 만든 무덤이다. 벽돌은 다른 건축재료에 비해 크기가 작고, 규격화되어 있어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자유롭게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무령왕릉에 사용된 벽돌에는 주로 연꽃을 소재로 한 무늬들로 표면을 장식하였기 때문에 전체적 외관이 매우 화려하고 세련미를 느끼게 한다. 벽돌은 당시의 첨단기술 제품이었다. 무덤 내부 규모는 남북 7m, 동서 4.2m이다. 무령왕 부부가 모셔진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3m. 부부가 합장된 왕릉으로선 그리 크지는 않고 낭비공간이 없을 만큼 알뜰하다.
무덤의 구조는 널길(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안치한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 부분과 玄室(현실·무덤방)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무덤방 벽면에는 5개소에 홈을 만들어 조명용 白磁(백자) 등잔을 설치했으며, 무덤방의 안쪽을 한 단 높게 하여 여기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을 놓았다.
역사의 미스터리 풀어준 국보 163호 誌石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1500여 년의 역사적 미스터리를 푸는 것으로 가장 주목받아 온 유물은 무령왕과 그 왕비의 墓誌(묘지)와 買地券(매지권)이 새겨진 국보 제163호 誌石(지석)이다. 墓誌는 죽은 사람의 이름·신분·행적 등을 기록한 글이며, 買地券은 土地神(토지신)에게 묘터를 구입했음을 밝히는 道敎的(도교적) 증서다. 두 장의 청회색 돌판(가로 41.5cm, 세로 35cm, 두께 5cm)으로 이뤄진 誌石은 발굴 당시 널길 한복판에 세워져 있었다.
지석의 墓誌에는 무령왕인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 계묘년(523) 5월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楷書體(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로써 무령왕의 계보와 웅진시대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관계에 대한 단서가 잡히게 되었다.
또한 무령왕이 523년에 죽자 3년상을 치르기 위해 2년3개월간 가매장했다가 왕릉에 안치할 때 왕의 墓誌와 買地券을 만들었고, 526년에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른 후 안치할 때(529년) 무령왕의 買地券 반대쪽에 왕비의 墓誌를 새겼음도 밝혀졌다.
무령왕이 523년에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것은 그의 출생연도가 462년이며 즉위연도인 501년에 그의 나이가 40세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한 무령왕의 계보와 관련한 三國史記의 관련 기사가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무령왕은 그보다 최소한 세 살 연하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동성왕은 즉위시 15세 이하의 나이인 「幼王」(유왕)이었으므로 피살된 해인 在位 23년째 되던 해인 서기 501년에는 37세를 웃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누구의 아들인가.
日本書紀(일본서기) 雄略 5년(461) 條에는 무령왕의 계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개로왕의 동생인 昆支(곤지)의 의붓아들로 되어 있다. 개로왕이 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461) 곤지의 간청에 의해 임신한 왕비를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는 것이다.
이같은 兄弟共妻(형제공처)의 설화는 백제의 婚風(혼풍)으로 미루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 글의 뒤편에서 자세히 거론할 것이지만, 곤지가 왜국으로 건너간 시기, 무령왕의 출생연대와 출생장소 등에 관한 기록만은 신빙성이 높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기록된 무령왕의 출생설화는 어떤가? 다음은 그 골자이다.
<임신한 夫人(삼국시대 왕비의 호칭)은 항해 중 산기를 느끼고 가카라시마(各羅島=지금의 후쿠오카 북방 加唐島로 比定됨)라는 섬에 내려 무령왕을 낳았는데, 이로써 무령왕의 이름이 섬왕(島王), 즉 사마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무령왕의 즉위 이후 백제인들이 왜국에 갈 때 지나치게 마련인 가카라시마를 일컬어 니리무세마(主嶋: 임금님의 섬)라고 하였다>
公州 역사·문화의 제1번지 公山城
필자 일행은 당초 무령왕릉 답사에 이어 곧장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전시된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취재할 계획이었다. 문화유산해설사 李惠影씨의 귀띔이 없었다면 필자 일행은 헛걸음을 할 뻔했다. 그날은 마침 월요일이어서 공주박물관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박물관이 휴관하는 날이었다.
李五峰 사진부장과 필자는 공주박물관 취재를 건너뛰어 다음 행선지인 公山城(공산성)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공산성 西門을 마주보는 「고마나루쌈밥집」에 우선 들러 점심을 먹었다. 「고마나루」라면 바로 公州의 옛 이름 熊津(웅진)의 백제식 발음이 아니었겠는가. 1만원짜리 쌈밥 2인분을 주문하니 반찬의 가짓수가 많아 밥상이 그득했다.
공산성은 웅진시대의 王城(왕성) 소재지였다. 본래는 土城(토성)이었는데, 조선 선조·인조 때 石城(석성)으로 개축되었다. 북으로는 금강을 띠처럼 두른 해발 110m의 산성이다. 낮기는 하지만 사방경계와 방어에는 더할 나위 없이 양호한 천연의 요충지다. 성곽의 총길이는 2660m이며 성 안은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다.
공산성은 공주 역사·문화의 제1번지다. 공산성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게 된 것은 漢城(한성: 지금의 서울) 백제시대 後期(후기)의 都城(도성)인 몽촌토성(前期의 도성은 慰禮城=지금 서울 천호동 風納土城)이 고구려군에 의해 함락된 475년 이후의 일이다. 여기서 그 전후의 역사를 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근초고왕(346∼375) 때 3만 명의 백제군은 평양까지 북진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최강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광개토왕(391∼412)이 즉위한 직후부터 고구려는 백제를 漢江(한강)경계선까지 밀어붙였다. 더욱이 396년 백제는 고구려군에 의해 도성인 漢城이 포위된 가운데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고구려 장수왕(412∼491) 때 백제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압록강 북안 集安(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정책을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즉각 신라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한편 왜국과의 친선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백제의 개로왕(455∼475)은 461년 동생인 昆支를 왜국에 파견했다. 곤지는 동성왕과 무령왕의 아버지다. 무령왕은 바로 그 해 곤지가 왜국으로 가던 중에 규슈 연안의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났음은 앞에서 거론한 바 있다.
개로왕은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472년에는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중국의 北魏(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장수왕을 비방하면서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對북위 외교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고구려의 대규모 침략을 유발시킨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장수왕은 475년 9월,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漢城을 포위했다. 사태가 절망적이라고 판단한 개로왕은 수십기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와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 붙잡혀 참살당하고 말았다. 곧이어 수도의 함락과 동시에 태후·왕자를 비롯한 최고 지배층의 다수가 몰살당했고, 8000명의 남녀가 포로로 끌려갔다.
漢城이 포위되기 직전, 개로왕은 그의 동생이며 上佐平(상좌평)인 餘都(여도)에게 신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명했다. 명에 따라 餘都는 신라군 1만 명을 얻어 漢城으로 달려왔으나, 그때 이미 한강 하류 일대는 모두 고구려군에게 점령당해 버렸던 상황이었다.
백제는 나라의 명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이에 餘都는 웅진으로 남하, 왕위에 올라 국가재건에 착수했다. 그가 바로 문주왕이다. 문주왕이 개로왕의 동생이라면 무령왕은 문주왕의 조카다. 그때 무령왕의 나이는 16세였는데, 그가 왜국과 백제 중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무령왕은 462년 출생 직후 생모(개로왕의 妃)와 함께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가 왜국에서 성장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異論(이론)도 만만치 않다. 무령왕의 아버지 곤지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의 차남인 동성왕의 경우 문주왕의 아들인 三斤王(삼근왕)이 재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왜국의 군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 왕위에 올랐다.
그러면 곤지의 장남인 무령왕이 일본서기 본문에는 왜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일본서기의 本文과 달리 백제 사람이 쓴 일본서기의 百濟新撰(백제신찬)에는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왕실의 傍系(방계)인 무령왕이 스스로 개로왕의 직계를 표방함으로써 그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