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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파악을 하는 성도가 되렵니다(4)
세례 요한의 주제파악
2023년 7월 23일 / 요 3:30
‘요한’은 헬라식 이름인데, 히브리 이름으로는 ‘요하난’으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다.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예수님의 친척으로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대 광야에서 거주했으며,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하여 ‘세례 요한’이라소 부른다.
헤롯대왕이 죽기 바로 직전인 BC 5년경에 태어나 예수님과 거의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그가 활동하기 시작하던 때에 유다는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암울한 때였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침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분위기를 일깨우며 회개를 선포한 세례 요한은 단번에 온 백성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다루기 전에 먼저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부터 기술하고 있다. 또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비로소 공생애 사역을 개시하셨다. 또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 이전에 와서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도래를 예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와왔을 때 바로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도 공개적으로 증언하였다.
세례 요한은 이사야가 예언한 바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고통과 희망을 상징하는 장소인 광야에서 주의 도래를 외치는 자였다. 또한 세례 요한은 주의 도래에 앞서 죄에 빠진 세상을 깨워 회개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러 메시야에 앞서서 온 엘리야였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리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라는 주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구약 시대를 마감한 인물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리고 구약을 대표하여 새로운 시대, 신약 시대를 도래시킨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함으로써 결국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세례 요한의 탄생 / 수태(受胎)가 불가능했던 나이 많은 부모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따른 기적적인 탄생이었다. 이러한 그의 기적적인 탄생은 물론 질적으로는 비교가 안되지만,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이라는 예수님의 기적적인 탄생에 대한 예표(豫表)가 되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해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 앞서 보내신 것이라고 분명히 기록하였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였다. 회당에서 배우지 않고 어려서부터 황야(荒野)에서 생활하며, 수도자들 사이에서 수련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속을 떠난 순수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안중에는 당시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헤롯왕의 불의를 담대하게 질책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군중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호령했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세례 요한은 불원간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것을 내다보았다.
■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는 구세군 사관학교의 졸업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군들을 3년 동안 학교에 붙잡아 두고 신학이나 전도법을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사흘 동안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게 하고 싶다. 그러면 어떤 위대한 신학수업을 받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열화와 같은 정열로 구령 사업에 열중할 테니까.’ 세례 요한에게는 그 같은 열정이 있었다.
세례 요한은 광야와 요단 강가에서 외쳤다. 그의 외침을 듣기 위해 유다의 방방곡곡에서, 심지어 사마리아나 갈릴리 지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분들이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세련되고 달콤한 설교로 칭송받으려 하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책망하는 말보다 달콤한 칭찬성 말을 듣기를 더 좋아한다. 세례 요한의 설교의 외침은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마 3:5-12 / 예루살렘과 요단 강변, 그리고 유대 전역에서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빈들로 나와서, 6)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독사의 자식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었느냐? 8) 침례를 받기 전에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라. 9)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을라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여기 있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10) 하나님께서 내리치실 심판의 도끼가 이미 열매 없는 모든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그런 나무는 다 찍혀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침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이 오시면 그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그분은 너무나도 위대하셔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벗겨 드릴 자격도 없다. 12)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의 곡식을 까불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세례 요한에게서 배워야 한다. 가르치는 자는 세례 요한처럼 되어야 하고, 말씀을 받는 자도 진리를 그대로 말하고 듣기를 원해야 한다. 깊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전해야 하고 또한 심금을 울리고 폐부를 찌르는 설교를 듣고 싶어해야 한다(행 2:14-39).
이러한 사실을 사도가 된 베드로가 호소할 때에 이루어진 사실을 볼 수 있다.
행 2:40-41 /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긴 설교를 통해 예수에 대해서 알려 주고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을 것을 모든 청중에게 강력히 호소하였다. 41) 이날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여 믿은 사람들은 다 침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3천 명이나 되었다.
● 세례 요한의 구별된 삶 / 누가는 세례 요한의 탄생기사를 기록하면서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7)고 하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널리 알리는 소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의 전 삶을 바쳤다.
세례 요한은 구약 시대의 엘리야 선지자처럼 어릴 때부터 광야에서 살았으며, 약대(낙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 이는 그의 삶이 나실인으로서 철저히 구별된 정결한 삶이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철두철미한 삶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삶은 당시 탐욕과 부정으로 가득한 유대 지도자들의 삶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한편 세례 요한의 삶 자체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도 철저히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는 메시야의 도래에 앞서 유대인들을 준비시키고자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으며, 회개한 자들에게는 그 회개의 증거로서 장차 주께서 주실 성령 세례를 예표하는 물세례를 베풀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로 하여금 장차 도래할 메시야를 영접할 영육간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함이다.
● 세례 요한의 자기 분수를 안 삶 / 세례자 요한은 당시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의 신분을 알고자 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그만큼 대중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그를 메시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요한은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요한은 이미 사람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로 잘못 인식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초점을 두었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인기가 높아지면 자기를 뽐내고 싶은 마음이 더해질 텐데 요한은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야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이었다. 분별력 있는 지도자이다.
세상에 맛들인 사람은 자신의 인기를 과장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한다. 자기가 아니면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떠벌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분수를 안다. 마더 데레사는 당신이 ‘하나님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이라고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도 자신을 ‘바보’로 표현했다.
마태복음 3:13–15의 상황에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겸손의 본보기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다. 요한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회개의 세례가 필요하지 않으며, 그가 자신의 구세주에게 세례를 주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의 우려 섞인 말에 대답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를 요청하셨는데, 장차 자기 목숨을 주실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로 인하여 그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후 5:21). 요한은 겸손히 순종하며 예수님께 세례를 주는 데 동의했다(마 3:13–15).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위에 임하셨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다.
세례요한이 특별한 것은 예수님께 아주 특별한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11:1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큰 인물이라고 극찬하신 것이다. 예수님께 이렇게 극찬을 받은 사람이 세례요한 외에 또 누구 있었을까? 정말 특별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요한복음 3:22-30을 보면 세례요한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2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세례요한이 요단 강가 애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베푸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세례 요한에게 전했다. ‘선생님, 요단강 건너편에서는 선생님이 전에 증거하신 그분이 침례를 주고 계시므로 모든 사람이 이리로 오지 않고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불편한 마음’이 내포되어있다. 저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이신 세례 요한이 메시야라고 증언했던 예수님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더더욱 ‘메시야’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다. 고작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라고 했다.
그리고 저들은 세례요한보다 예수님의 인기가 더 높아지자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했다. 전에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로만 왔는데,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이 상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이런 보고를 듣고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말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에 맞는 일을 맡기신다. 내가 맡은 일은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는 것은 그 권위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로 세례를 베푸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실 때 자기를 찾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시기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례요한은 최초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 하나님의 권위를 받은 분이라는 점을 세례 요한만이 인정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을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보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마음을 한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바로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결혼식 비유이다. 당시 결혼식에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참여해서 특별한 역할을 맡았다. 바로 들러리 역할이다. 신랑이 결혼 예식이 치러지는 신부집으로 향할 때 신랑 친구들이 들러리로 함께 한다. 대체로 늦은 저녁에 어둠을 밝히며 신부집을 찾다. 무사히 신부집에 도착했을 때 신랑과 신부가 만나서 행복한 결혼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때 들러리였던 신랑 친구들은 자기들의 들러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으로 인해서 기뻐합니다.
요 3:29 / …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한다. 나는 지금 그러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세례 요한의 마음이 바로 이런 신랑 친구들의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자기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왔다. 이제 메시야가 오셔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 백성들이 메시야를 알아보고 메시야께로 나아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세례요한은 마치 신랑 친구들처럼 그 마음이 기뻤다는 것이다.
사실 세례요한은 인간적으로 보면 기뻐할 일이 하나도 없다. 자기의 인기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예수가 등장하여 인기가 치솟기 때문이다.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 자기의 최측근들마저도 불안해하고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자기가 쌓아놓았던 것들이 다 무너질 판이다.
그런데도 세례요한은 기뻐했다.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다. 기뻐해도 보통 기뻐한 것이 아니다. 정말 크게 기뻐한 것이다.
도대체 세례요한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크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한 마디로 사명 때문이다. 자기의 사명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께로 몰려들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게 된 것이다. 바로 사명 때문에 기뻐한 것이다. 이점이 또한 특별하다.
경우는 달랐지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15-19에서 이런 말씀을 남겼다.
빌 1:15-18 / 물론 개중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쓰시는 데 대한 질투심으로 덩달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두려움 없는 전도자라는 명성을 듣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에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16-17)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주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쓰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에 애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잘 해내어 감옥에 갇혀 있는 내가 속상해 하고 질투하게 만들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18) 그러나 그들의 동기야 어떻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은 사실이니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 중이다. 빌립보 교회로부터 소식이 전해졌다.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내에 바울의 반대파의 세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저들은 이렇게 해서 바울을 괴롭게 하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쨌거나 복음이 전파돼서 기쁘다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돼서 기쁘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자기의 사명인데 그 사명이 잘 이루어지니 기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3:30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요 3:30 / 그분은 더욱더 위대해지고 나는 더욱더 작아져야 한다(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님 앞에서 역시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명품조연’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줄곧 주연에만 관심을 가졌다. 당연히 영화 등에서 빛나는 역할은 주연이다. 주연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흥행의 성공 여부가 갈린다. 하지만 가끔은 주연보다 더 빛나는 명품조연이 있다. 약방의 감초와 같이 주연보다 더 주목을 받는 조연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명품조연으로 고창덕, 류승룡, 마동석 등등이 있다. 하지만 조연은 주연을 빛나게 함으로 그 존재감이 더 해지는 것이다. 주연 없이 조연만으로 성공한 영화는 없다. 만약 조연이 주연보다 더 빛났다면 그 조연이 주연인 것이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말한 자신의 자리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신랑의 친구이다. 우리는 세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였던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로 오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에 시기심이 일어나 불평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이 허툰 마음을 가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았다. 그 쐐기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달리 더 할 말이 없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이 흥하셔야 한다. 온 세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 인도의 성자라고 불린 썬다싱은 일찍이 한 사람의 병사자를 위해 기도했더니, 이튿날 아침에 그가 다시 살아나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자 그 고장 사람들은 썬다싱에게 신비한 초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받들어 모시려고 했다. 썬다싱이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그 후부터 그는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기로 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성경에도 쓰여 있으며, 따라서 신유의 은사를 나타내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썬다싱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쏠리기를 원했다.
● 순교자 세례 요한 / 세례 요한은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와 그의 새로운 아내 헤로디아에 의해 처형되었다.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인 이유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자신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법적으로 결혼한 사실에 대해 세례 요한이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앙갚음을 위해서였지만 이면적으로는 많은 사람이 세례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추종함으로 그가 정치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다가 당한 그의 죽음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부르짖다가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묘하게 예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세례 요한은 이런 암흑기에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 있었으나 그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기억하게 된다. 성경은 90회 이상이나 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하고 예수님 자신이 그를 증거했다. 그는 실로 ‘주 앞에 큰 자’였다.
겸손에 대하여 참고가 되는 글들
겸손이란 / 우리는 늘 겸손한 성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조금만 무관심하면 교만이라는 잡초가 자라기 때문이다. 모든 잡초가 그러하듯, 잡초는 좋은 씨앗들을 쉽게 해쳐 버린다. 겸손은 아주 피기 어려운 꽃이요, 아주 힘들게 맺는 열매와 같다. 그러므로 늘 주의하여 겸손이란 성품을 가꾸어야 한다.
휫 필드와 웨슬리 / 감리교의 창시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 필드이다. 두 사람은 목회의 방법이 같았고 구령의 열정도 똑같았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이해는 달랐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의 신학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던 한 사람이 휫 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은 웨슬리 목사님과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 필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휫 필드의 대답이었다. 비록 신학이 다르지만, 웨슬리 목사의 능력과 영향력을 인정한 휫 필드 목사의 태도는 매우 훌륭하다. 조지 휫 필드처럼 온유함과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하겠다.
자아가 죽은 사람 /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을 겸손하다고 말한다. 자아가 완전히 죽었다는 확실한 증표는 겸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아가 죽지 않은 겸손은 위선에 불과하다. 자아가 완전히 죽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겸손한 가정이 수준 높은 가정이다. 겸손한 교회가 수준 높은 교회이다. 겸손한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이다.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가 수준 높으며 깨끗하고 평안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면 자아(自我)가 죽어야만 한다. 자기 교만, 자기 자랑, 자기 욕망, 자기 생각, 자기 주관, 자기 사랑 등이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고 참다운 믿음이 생기게 된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은 신앙생활에 갈등이 많고 시끄럽고 복잡하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은 교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은 원망과 불평이 많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은 비겁해지기 쉽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에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에는 참다운 봉사와 헌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아가 죽지 않은 봉사와 헌신에는 인간의 한계가 있다. 자아가 죽지 않은 믿음으로는 영안(靈眼)이 열리지 않는다.
겸손이란 / 빌립 네리는 16세기의 아주 훌륭하고도 지혜로웠던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녀는 성녀로서 평판이 나 있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다랐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하였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 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천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토록 명성을 얻고 있는 자신이 그런 일을 요구받다니 생각만 해도 화가 났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교황에게 말했다. ‘이젠 놀라실 것 없습니다. 거기는 성녀가 없어요.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뜻밖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겸손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겸손을 연약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겸손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이 주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온전히 전적으로 위탁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겸손의 의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얻어진다. 그것은 친구로서, 용서와 자비의 유일한 공급처로서 그리고 인생의 모든 중요한 결정의 때마다 상담과 안내를 하시는 분으로서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프랑스 포앙가리 대통령의 겸손 / 유명한 쏠비대학의 라비스 박사가 있었는데, 그 대학 강단에서 박사 교역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때 많은 손님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 기념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때 라비스 박사는 답사를 하려고 강단에 올라보니 맨 말석 학생들이 앉은자리에 포앙가리 대통령이 학생들과 함께 앉은 것을 보고 너무 황송하여 단상으로 모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끝까지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는 배운 제자로서 이 영광스런 자리에 대통령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 축하하러 왔다.’라고 하였다. 그때 라비스 박사는 ‘우리가 이렇게 겸손하신 대통령을 모시었으니 앞으로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겸손과 교만 / 하나님은 겸손의 문을 통해 들어오신다. 사탄은 교만의 문을 통해 들어온다. 참 겸손은 ‘나는 겸손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 대단한 겸손은 ‘나는 교만하다’라고 생각하는 것, 최고의 교만은 ‘나는 교만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 구제불능의 교만은 ‘나는 겸손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 / 매년 방학이 되면 정신여고 틴 라이프 중창단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벌이곤 했다. 오래전 인솔자와 함께 중창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고등학교, 교회, 대학들을 순방하며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때 단원은 모두 15명이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차를 타야 할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차 있는 데로 뛰어가 서로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하는 모습을 그날 동행했던 장로님 한 분이 지켜보고 있다가 인솔자에게 물었다. ‘저 학생들은 차를 탈 때마다 앞을 다투어 뛰어갑니까?’ 인솔자의 대답은 자동차의 좌석이 12좌석밖에 안 되기 때문에 3명은 차 바닥에 엎드려야 하는데, 서로 먼저 타서 엎드리기 위해 그런다는 것이었다. 궁금해진 장로님이 직접 차 있는 데로 가서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뛰어간 2명의 여학생이 바닥에 엎드렸다. 그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감동적이었다. 그날 그 장로님은 정신여고의 중창단을 위하여 15인승 봉고차를 선물로 사주었다. 그것은 엎드리고 얻은 선물이었다.
성공 인자는 겸손 / 벤저민 프랭클린. 그는 1706년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 후에 위대한 정치가 과학자 사상가가 되었다. 피뢰침을 발명하고 미국의 독립선언서 기초문안을 작성한 것도 그였다. 그는 「성공 인자」는 물질이 아니라 「창조적인 마음」임을 알았다. 젊은 시절 그는 급하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머리를 부딪친 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충고했다. 『젊은이, 당신 앞에 놓여있는 세상을 살아갈 때 겸허하게 몸을 구부리시오. 그러면 위험한 충돌을 모면할 거요.』그것을 프랭클린은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섬기는 지도자 / 남침례교단의 유명한 빌 핸드릭스라는 교수님이 계시는데, 교단 전체에서 존경을 받는 대단한 학자이다. 침례교단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이 골든게이트 신학교의 학장으로 모시기 위해서 그분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헨드릭스 박사께서 그 부탁을 거절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저는 교장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가르치는 교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지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는 그런 지도력이 저에게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람을 한 분 추천하겠습니다. 제 제자 가운데에 폴랏트 박사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분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추천을 참고해서 폴랏트 박사가 골든게이트 신학교의 학장이 되었다고 한다. 학장이 된 다음에 폴랏트 박사를 가르쳤던 스승인 핸드릭스 박사는 제자 밑에서 교수 일을 하면서 신실하게 섬기면서 그 학교의 발전에 혁혁하게 이바지했다.
삼포능자 / 일본의 여류작가 삼포능자는 작가가 되기 전에 구멍가게를 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돼 나중에는 트럭으로 물건을 공급할 정도였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여보 우리 가게 장사가 너무 잘돼 이웃 가게들이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소. 이것은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게 아니겠소?’ 하고 아내에게 말했다. 이 말에 자극받은 삼포능자는 상품을 다 갖추지 않고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내주곤 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소설을 써서 소설을 응모, 당선됨으로써 가게에서 번 돈보다 몇백 배의 돈을 벌었다. 이 소설이 그 유명한 [빙점]이다. 만약 장사의 욕심으로 계속 사업을 확장했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을 것이다.
겸손의 길 / 성 부러더 로렌즈 수도사는 어느 날 제일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장을 받았다. 그가 문제 많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수도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노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이다. 노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음을 발견했다. 노수도사는 ‘네! 그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노수도사는 한 달, 두 달, 석 달, 접시를 닦았다.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대단했다. 석 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차 왔다. 젊은 수도사들이 쩔쩔매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감독이 물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다.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다.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수도사의 죽기까지 낮아진 겸손의 도! 그 후부터 그 수도원이 모범적이 수도원이 됐다고 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 시 8:3-4 / 주님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든든히 매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을 이 몸은 우러러 감탄하며 바라봅니다. 4) 인간이란 이렇듯 보잘 것 없는 것이어늘 어찌하여 주님은 그토록 생각해 주시는지요.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이렇게 보살펴 주시는지요.
성서에 의하면 세계는 1일, 2일, 3일... 하는 순서에 따라 만들어져, 6일째에 완성되었다. 사람은 그 마지막 6일째 만들어졌다. 왜 인간은 마지막에 만들어졌을까? 그것을 당신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탈무드에 의하면, 파리 한 마리도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다지 교만해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겸허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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