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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8 말씀에
누구든지 자기 살을 기쁘게 하려고 심는 자는 그 살에서 멸망을 거두리라. 누구든지 성령을 기쁘시게 하려고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말씀하셨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날마다 수고하고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목표는 각자도생입니다. 누가 책임져 주는 사람이 없는 고독한 현대인의 질고입니다.
그 질고는 누가 져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야박하고 치열한 경쟁의 시대가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어떤 미국인이 말합니다. 우울한 나라에서 우울할 백성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 말씀에 사도바울은 자기의 살을 기쁘게 하려 함은 그 살에 멸망이요 영을 기쁘게 하려 함은 영생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살에 기쁨이 되지 않는 단어를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우울이라는 증세입니다 사전적으로 우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울(憂鬱, 영어: depression)은 활동력 저하를 특징으로 하는 정신적 상태 (mental breakdown)를 가리킨다.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변화가 생겨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난다. 주로 우울한 기분, 정신활동의 저하, 초조와 번민, 식욕 저하, 수면의 증가 또는 감소, 불안감 등이 나타난다.
대인관계나 사회적 또는 가족문제 등에 의한 스트레스, 경제적 문제 등으로 인한 일시적인 우울감은 인간 심리에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겠으나 그 정도나 기간 등이 비정상적인 경우 병리적인 상태 즉 우울 장애로 볼 수 있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심한 우울증 상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 우울장애라고 하며, 생물학 또는 생리학적으로 우울감은 슬픈 감정을 더 느끼는 경우보다 행복한 감정을 덜 느끼는 경우가 우울감에 대한 신뢰도면에서 유의미할 수 있음이 지속적으로 보고 되고있다.
우울증을 겪게 하는 장애요소는 말씀에서 보는바와 같이 기쁨의 상태를 육체적 욕망에 대한 반대되는 모든 조건이 우울감 또는 우울증을 유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마음의 갑옷을 입으라
베드로전서 4:1-3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이제부터 여러분은 남은 생애를 인간적인 욕망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십시오.
육체가 당하는 최악의 고난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 가장 큰 고난은 그것을 잃는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셨을 때 가지셨던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죽음을 당하셨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셨나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3:18).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는 “죄를 위하여”입니다. 죄를 정복하기 위해, 죄의 사슬을 끊기 위해,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죄가 없으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께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의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스스로의 죄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를 이겨내기 위해,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고후 5:21은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 분을, 우리르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셨을 때 죄에 승리를 선포하시기 위해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은 ‘죄를 미워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느 정도로 미워하셨습니까? 죄를 끝장내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실 정도로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우리를 종처럼 부리던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을 가지고 무장해야 합니다. 이 마음으로 죄와 싸우고 거룩함, 경건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이 되었습니다. 참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물과 피를 쏟으면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많은 고통 가운데 생각하신 것은,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신 죄인들의 짐이 모두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길을 여시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과 사랑을 생각할 때, 오늘날 이것이 사라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로 죽을 때까지 살다가 결국 멸망을 향해 가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를 위해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죄를 찾아간다면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인연이 끊어진 사람이고, 죄에 매일 필요도 없고 종노릇할 필요도 없는 사람입니다. 죄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아는 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1-2). 이제는 죄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6-1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의 삶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2,13). 이것이 앞에 이야기한 초대교회 성도들, 종교개혁자들, 청교도인들이 추구했던 경건한 삶의 모습입니다. 경건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것으로 무장되어 있는 삶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이러한 열정이 있는가,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하는 마음, 죄를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왜 그러한 정신을 잃어버렸을까요.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조엘 비키와 마크 존스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누가 옛날의 교회와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차이를 알 수 없겠는가? 옛날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이 타올랐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안에서 우리의 심장은 있다고 해도 거의 타오르지 않고 있다.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열정에 이끌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동기를 거의 부여받지 않은 것 같다. 옛날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싸우고, 하늘의 힘으로 거룩함을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죄를 매우 쉽게 묵인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최저한도로 행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될 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다. 구원 능력도 변하지 않았다. 거룩함에 대한 요청도 변하지 않았다. 원수의 위협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르지 않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가?’(조엘 비키, 마크 존스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1074p).
양심에 찔리지 않으십니까. 청교도 시절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서 먼지 날리는 길을 성도들은 아기들을 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모임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전도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죄를 하나님께 쏟아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청년회, 학생회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타락을 보고 놀랍니다. 제가 어릴 때는 동성애라는 말 자체를 듣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는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잡혀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그 이유로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 우선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있어도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면 아내를 내치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어도 나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악하고 폭력적이고 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가,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법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늘날 교회를 보면서 무엇에 놀랄까요? 그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살고 있지?’ ‘목숨을 버려서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초대교회 성도들은 도덕적으로 구별된 삶을 살았는데, 현재 우리는 그 경계선이 모호할 정도로 세상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불륜이 소재가 된 드라마 좋아합니다. 배신과 배반, 사기가 넘치는 영화, 미신적인 영화를 좋아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봤다면 상상할 수 없는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의 무장이 반드시 필요할 때입니다. 죄와 치열하게 싸우겠다는 정신으로 우리의 마음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갈수록 악하고 부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더욱 깨어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여러분과 저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말씀처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죄와 싸우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에서 어떤 죄의 유혹이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조엘 비키와 마크 존스는 직장인이 받는 죄의 유혹과 부모로서 받는 죄의 유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 노동자가 일하는 환경을 생각해보라. 그는 끊임없이 나쁜 상황들에 직면한다. 직장에서 불경한 말, 조잡한 농담, 독설을 듣고, 잡담, 비방, 불평, 험담, 악의적인 말, 거짓말에 휩싸여 있고, 죄를 미화시키고, 결혼 서약을 깨뜨리고, 시시덕 거림을 즐기는 사무실 분위기에 속해 있다. 그는 야한 옷차림, 유혹하는 말, 음탕한 눈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거짓말하고, 속이고, 훔치고, 사기치고,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고, 반쪽 진실을 온전한 진실로 포장하도록 요구받는 명령과 기대에 직면한다’(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1086p).
부모가 받는 죄의 유혹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소명 가운데 부모 역할을 하는 것은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 이끌도록 부르심을 받지만 자녀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본성적인 거역 곧 그들의 교만, 이기심, 죄에 대한 내재적 사랑과 욕망, 유전 받은 본성의 부패와 싸우고 있다. 본성적인 죄악성의 이런 공세에 맞서 부모는 자녀를 훈련시키고 자녀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이 소명은 얼마나 힘들까! 사실은 훨씬 힘들다. 부모는 자녀의 죄악성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악성을 무릅쓰고 자신의 소명에도 순종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전념해서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일을 자녀에게 기대해야 하고, 자신이 계속 싸우고 있는 삶의 분야에서 자녀가 불순종할 때 징계해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부모는 위선자처럼 느끼고, 양심이 괴롭고, 자녀를 교정시켜야 하는 모든 시간이 매우 무겁게 다가온다. 자시느이 죄에 대해서는 변명이 전혀 없지만, 자신도 극복하려고 싸우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부모가 자녀의 죄를 묵인하는 것은 다만 그 죄를 더 조장할 뿐이다. 부모는 자녀를 징계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부모는 끊임없이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이 꺼지지 않도록 부채질해야 한다’(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1087-88p).
목회자는 더 많은 유혹에 빠집니다. ‘만약 마귀가 한 사람의 목회자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의 목회자를 탐욕과 욕정에 빠뜨릴 수만 있다면, 그는 이를 통해 무지막지한 침략을 가할 계획을 할 것입니다’(리차드 백스터, 참목자상, 68p), ‘형제 여러분, 그대의 모든 설교와 가르침은 그것이 그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철저히 실현되기 전까지는 꿈과 사악한 위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대의 육신적 마음이 그토록 혐오하는 목회 사역을 어떻게 밤낮으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77p)
목회자의 자리는 정말 힘든 자리입니다. 항상 승리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저 역시 넘어지고 죄와 싸우고 있기에 이 자리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경건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수많은 유혹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저는 모든 죄의 유혹을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죄로 인해 넘어지면 끝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전투에서 종종 패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무장해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매순간 전쟁 중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3).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은 죄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나온 여러 죄들은 구원받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한 사람이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을 평생으로 계산했을 때 ‘15년’이라고 합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그보다 많은 시간을 쓸 것입니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참 많습니다. 이제 얼마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15년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낸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영적으로 생각할 때 죄라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영생을 주셨고 죄와의 관계를 끊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죄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무가치한 일입니까. 도박을 해서 진 빚을 다 갚고 도박장에서 아들을 데려왔는데 그것에 감사하면서도 다시 도박장으로 간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요? 부모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네가 예전에 도박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니.”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 저질렀던 죄로 족합니다. 죄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 11:18). 악인이 한 것들은 허무하고 소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부리는 씨는 확실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악을 버리고 경건을 추구하는 삶이 정말 남는 삶입니다.
우리는 인정하든 하지 않든 매순간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죄와의 전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되어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날마다 묵상하십시오. 여러분 삶에 분노가 올라올 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물리치십시오. 게으름, 방탕함, 비방과 수군거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내십시오. 욕망과 욕정이 도사리는 장소와 대상을 피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된다면 죄를 이기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진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이 성경적인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