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구름이 낀 하늘은 햇살도 두께가 얇아졌다.
햇살이 뜨거운 여름날에는 어둑해지는 저녁 즈음에 집 밖을 나서다가 오늘은 모처럼 낮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수성못을 한 바퀴 돌아올 요량이었다. 어둠이 밀려올 때 골목길을 혼자서 걷노라면 곳곳에 불빛이 새어 나오긴 하지만 어둠이 주는 두려움에 살짝 걸음이 빨라지곤 했었다. 내 발걸음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하지만 오늘은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천천히 나의 호흡에 맞추어 걸어가고 있다. 밝음이 주는 편안함이 이 정도였던가. 매일 목표한 걸음 수를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앞만 보고 걸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다가오는 주변 풍경에도 시선이 간다. 보호자와 같이 쪼르르 걷고 있는 반려견들을 보면서 예전에 내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생각나 한 번 더 눈길이 가기도 하고 길옆 꽃가게에서 내어놓은 작은 꽃들의 향연에 선뜻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보며 어쩌면 이리 예쁘고 고울까 감탄도 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수성못이 가까워질 즈음 반기기라도 하듯이 귀에 익은 음악 소리가 들린다. 더위가 한풀 가라앉은 저녁, 산책 나온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붐비는 시각 공원 둘레길 곳곳에 마련된 간이무대에서 저마다 버스킹을 시작하고 있다.
차들이 붐비는 도로를 건너 수성못 둘레 길에 들어섰다. 잘 관리된 굵은 모래흙길이 조성된 탓에 수성못 둘레 길은 요즘 맨발 걷기 열풍이 대단하다. 두 발을 동동 걷어 올리고 열심히 맨발로 걷는 사람들 사이로 아이를 앞세워 걷는 젊은 부부들과 혹은 친구들, 연인들, 머리띠까지 착용하고 가볍게 달리는 젊은이들, 심지어 주인을 따라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반려견들과 더불어 동물전용 유모차를 타고 같이 산책하는 고양이와 강아지들도 만났다. 아마 제 발로 먼 길을 걷기에는 무리가 있는 늙은 개들이리라.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관심에도 아랑곳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강아지들을 보면서 그들도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문득 예전 집에서 기르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두 마리 애완견이 떠올랐다. 단비란 이름의 푸들은 당뇨로 오래 고생하다가 합병증을 이겨내지 못했고 다롱이라는 이름의 말티즈는 결국에는 종양으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주인의 표정을 읽어내어 사랑을 받겠다고 경쟁적으로 짖어대곤 하던 시간이 바람에 겹쳐지는 수면의 물무늬처럼 스쳐 지나간다.
못 둑을 감싸고 있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소란스러움, 곳곳에서 들리는 다양한 음악 소리, 가끔 들리는 거위들의 울음소리 등 불협화음 속에서도 저물어가는 햇살이 보내는 고요를 느껴가며 천천히 걷다가 불현듯 떠오른 옛 생각이었다. 강아지들에게는 시간이 좀 빨리 흐른다는 것뿐 사람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이제 내게도 준비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낡은 벤치에 걸터앉았다. 이제는 조금씩 길이 들어가지만 소위 젊은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신체적 변화들로 얼마나 당황했던가. 남의 얘기로만 들리던 불면증이 찾아오고 걸음 속도가 느려지고 계단 오르내리기가 불편해지며 소화가 잘 안 된다며 친구들과의 병치레 자랑은 또 얼마였던가. 이런 변화를 마주하는 순간 때로는 허탈감과 상실감으로 마음이 서서히 닫혀가고 있었다. 스스로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의 오감은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예쁘게 물든 낙엽을 골라 책갈피에 끼우고 굴러가는 낙엽만 보고도 까르르 웃던 그 시절의 감성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저물어가는 수면의 반짝이는 윤슬이 불현듯 눈가를 촉촉하게 만든다. 그 순간 생각에 빠져 닫혀있던 귓속으로 낯익은 노랫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어디인가 두리번거리며 찾아간 간이무대에는 이미 내 나이 즈음의 사람들이 가득 앉거나 서서 자리를 메웠고 그 어깨너머로 보이는 버스킹 가수들은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들이었다. 아마 그들도 내 나이쯤은 족히 되어 보이는 연주자들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남은 낡은 기타 하나와 키보드 건반, 그리고 악기 이름이 언뜻 생각나지 않는 타악기 하나, 그리고 여러 개의 앰프, 반주 시설들. 이미 오래된 모습들임이 드러나 보였다. 해거름 못가 주변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도 관중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음악에 몰입하여 웃고 손뼉 치고 감상에 젖어 들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소리가 뭉개질 때까지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하고 녹음하던 그 음악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듣게 되니 불현듯 그때 그 감성이 살아나는 듯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분들 한 무리도 같이 몰입하여 무릎에 얹힌 가방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낭만’이라는 두 글자. 그래 그땐 낭만이 있었지. 요즘도 그런 낭만이 있는지 몰라. 나부터도 이제는 낭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 혼자 주절거리며 회상한 옛 젊음의 추억들은 멋진 한 장의 예술 사진처럼 각인되어 떠올랐다. 가을에 접어들때쯤 수업이 빈 시간이면 낙엽이 내려앉은 캠퍼스 앞 플라타너스 길을 폭 넓은 바짓가랑이 휘날리며 친구들과 천천히 천국의 정원인양 걷곤 했었다, 단체로 통기타를 배우겠다고 동기생 모두 기타 하나씩 들고 교정을 떼 지어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하굣길에는 의무적으로 시내 음악다방으로 향하고 그 옆 골목길 주점에서 생고구마 한 쪽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청춘을 이야기했었다.
불현듯 낭만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옛 추억처럼 흑백영화 같은 기억들이 과연 낭만의 전부이며 그럼 현재의 나는 낭만이라는 것을 즐길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부질없이 휴대폰에서 낭만을 검색하였다.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상태 또는 그런 심리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라고 적혀있다. 그래 그런 거였지. 어렴풋이 짐작하던 감성이 옳았다. 지나온 삶의 고단한 수레바퀴에 깔려 본래 지니고 있던 감성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변연계 깊숙이 숨어버린 탓에 생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는 이즈음, 거칠어지고 핏줄이 드러나는 손등처럼 내 정서도 각박해지고 모질어지고 말았었다. 아픔도 참아야 하고 슬퍼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기뻐도 곁눈질하기 바쁜 삶이었다.
버스킹 공연도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자 주변의 관객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서늘한 바람이 빈틈 사이로 내 옷깃을 파고들 때까지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낭만이라는 두 글자가 나를 옴짝 못하게 묶어두는 것 같았다. 다들 자리를 비우고 공연자들도 짐을 챙겨 떠날 즈음 닫혀버린 내 감성의 문을 열어 어떻게 해야 낭만을 불러올 수 있을까 숙제를 받은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둑해진 골목길 사이로 나를 닮은 또 하나의 내가 발끝을 따라 걷고 있었다.
첫댓글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는 저의 십팔번 곡입니다. 뇌의 화학물질과 전기적 신호에 따라 우리의 기분이 변화한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냥~가슴으로 즐기면 좋겠어요.
낭만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던 시절은 이제, 다시 오지 않겠죠. 그시절을 떠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개들의 생활사에서 인생사를 생각하고, 앞서 간 애완견 단비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정경이 그려집니다. 나이가 들고 보면 젊은 시절의 낭만을 되돌아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