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위에 있어서,
그 양극의 생활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마음을 상실한 가혹한 육체 고행에 의해서 번뇌를 소멸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육체주(肉體舟)의 오관은, 객관적으로 모든 현상을 포착하지만,
판단은 자신의 마음이 한다.
보통은 그 판단이, 거의 현상에 사로잡힌다.
이때문에,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마음을 잊은 현상으로 되어 새로 만들어져 간다.
자기의 형편에 불리하면, 타인에게 예사로 거짓말을 한다.
겉모양을 꾸미고, 자기 보존(自己保存)으로 날을 지새고 만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에게 충실하다.
자신의 마음에 자신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어떤 사람도 부정할 수 없으며
인간이 선(善)한, 신(神)의 자식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
인간은 둥글고 풍부한 마음이었는데,
태어난 환경, 사상, 교육, 습관의 영향을 받아 둥근 마음에 왜곡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 결과, 마음의 구름이 광명의 평안을 잃어,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나는 평안의 길을 찾아 출가하여
그대들과 함께 우루벨라의 숲에서, 혹독한 수행을 6 년이나 하였다.
의문과 모색 가운데서 헤매었으나, 해탈할 수 없었다.
소녀가 보시해 준 한 건으로,
그대들은 ‘고타마는 타락했다. ‘수행을 포기했다. 라고 생각해서,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우루벨라를 떠나고 말았다.
네란자라 강둑을 따라 내려가는 뒷모습을 나는 바라보았으나
삼 씨나 깨 씨만을 먹고 있어서는 육체는 망하고 만다.
육체가 망하고 무슨 수행이 있겠는가.
나는, 그때, 결심한 것이다.
육체를 회복하여, 자신을 되돌아보겠다고,
너희들과 헤어진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보리수 나무 밑에서 36년 여의 자신을 반성했다.
중도(中道)라는 자(尺)를 기준으로.
그 결과는, 생(生)과 사(死)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생로병사라는 것은,
일체의 괴로움이며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려면,
생각과 행동에, 어떤 기준을 갖고 생활을 하면 좋은 지를 알았던 것이다.”
차근차근 설법을 풀어가는 붓다의 말은, 그대로 빛이었다.
신리의 말은 빛으로 충만되어 있다.
듣는 자의 마음이 열려 있으면,
그 빛은, 모래사장에 물이 스며들듯, 아무 막힘이 없이, 흘러 들어간다.
그들 다섯은, 붓다의 언혼(言魂)속에서,
6년 여의 잘못을 깨닫고,
신생(新生)의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주위는 벌써 어두워졌다.
이웃 수행자들이 땔감 꺾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로몬들이여, 얼굴을 들어라. 벌써 어두워졌다.
땔나무를 모아 불을 지피고, 그 주위에서 도를 논하자.“
그들은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코스타니야, 아사지, 밧데야는, 얼굴이 먼지와 눈물로, 범벅이었다.
어느 얼굴도 감격과 감동에 젖어, 다리의 저림조차 잊고 있었다.
“예, 옛”
“예......”
아사지도 대답을 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다리가 마비되어 비틀거리고 말았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있었기 때문에, 다리가 마비되었던 것이다.
간신히 일어나서,
“땔감을 가져오겠습니다.”
하고 전부터 강변에 모아 두었던 땔나무를, 밧데야와 함께 안고 왔다.
코스타니야는 불씨를 얻으러, 이웃 수행장으로 달려갔다.
오목한 모양으로 된 장소를 골라,
다섯 사람은 원으로 둘러앉아 붓다의 다음 설법에 온 몸을 집중시켰다.
모닥불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어떤 얼굴도 싱싱했다.
어제까지의 그들은, 미로에 빠진 새끼양처럼 의혹과 혼미 속에 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모닥불은, 신화(神火)였다.
햇빛에 익은 그들의 얼굴은 붉은 기를 띠고 평안과 기쁨이,
다섯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붓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등 뒤에, 후광(後光;오~라)이 비치고 광명과 함께,
보사타(菩薩)들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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