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울과 엔돌의 무당 / 하느님의 권능과 섭리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하려고 애쓰는 사울
이스라엘의 첫 세왕 사울 - 다윗 - 솔로몬
윌리암 브루스 지음/배제형 옮김/스베덴보리 관련서적
삼상 28장 3-25
“..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서는 사울이 이르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하니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이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하는지라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올리랴 하니
사울이 이르되 사무엘을 불러올리라 하는지라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가 심히 고통당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순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하건대 이제 당신도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내가 왕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하니
사울이 거절하여 이르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의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가져다가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 앞에와 그의 신하들 앞에 내놓으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 - -
구약 역사에서 사울이 ‘엔돌의 무당(witch)’과 대면하는 이야기만큼
호기심어린 흥미와 엄숙한 경고의 교훈을 주는 부분은 거의 없다.
여인이 불러낸 것이 사무엘의 실상이든, 겉모습이든, 아니면 환영이든
(the reality, appearance, or illusion)
그녀가 지녔거나 지닌 것으로 생각되는
초자연적 능력의 본질과 그 범위에 대해서는 종종 논의되어 왔고
다양한 의견이 표현되었으며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위와 같은 비평적 견해를 떠나
단순한 역사적 측면에서 이 이야기 자체는
하느님과 부를(God and Mammon) 동시에 섬기기 원하는
마음상태의 두려운 그림을
사울의 품성과 행동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집행하는데 무척 게을렀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잽싸게 기대려 들었다.
그는 사무엘의 생존시 그의 충고를 우습게 여기고 묵살했다.
그러나 사무엘이 죽은 지금 그의 충고를 간절히 바래고 있다.
사울은 그 땅에서 무당들을 쫓아내려 애썼는데
지금은 자신이 파괴하려고 했던 그 불법적인 힘을 이용하려 한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종교에 대해 진정한 존중이 없는 마음은
미신의 큰 영향 하에 있게 되고,
자기를 인도해줄 종교적 원리가 정착되지 못한 마음은
일관성 없이 행동하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울이 부탁한 여인이 과연 죽은 자를 불러내는 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있는 척 한 것인지,
그리고 여인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할 경우
그 여인이 불러낸 사람이 과연 사무엘 자신인지
아니면 예언자의 역을 맡은 다른 사람인지,
이와 같은 질문 자체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추론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면,
산 자가 죽은 자와 의식을 가진 채 교통할 수 있다는
믿음에 반대되는 어떤 증거도
성경에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말씀 자체가 이런 사실에 풍부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듯이
이 세상을 떠난 사람도
육체를 지녔던 때와 똑같은 사람으로 살고 있고
영혼의 거주지인 영계는 자연계만큼이나 가깝게 있으며
영계와 자연계는 영혼과 육체의 경우처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도
그것은 특별히 놀라운 일이 되지 못한다.
물론 인간은 자기 육체의 눈으로 영들을 볼 수 없고
귀로 그들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계에 사는 동안에도
그들 자신의 영적 기관으로 영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로
이끌릴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육체가 자연적 감각을 지녔듯 영체에도 영의 감각이 있다.
인간의 영혼과 영들이 거주하도록 창조된 영계는
적어도 물질적인 몸과 그 세계만큼이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그리고 신성한 지혜가 허락하거나 허락하는 것을 좋게 볼 때,
영적인 대상은 물질적인 육체의 개입 없이 영적인 감각에 의해
나타나고 인식될 수 있다.
천사나 영들이 인간에 의해
보여지고 만져지며 서로 대화하는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물질적 감각이 아닌 영적 감각에 의한 것들이다.
천사들이 그때 물질적 몸을 입고 나타난 게 아니라
인간이 그러한 영적 상태에 놓여진 것이다.
영적 교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경우
그것을 이루어내는 힘이
인간의 의지에 의해 행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특히 엔돌의 무당이 행한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그것이 신성한 질서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행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 같은 원칙에서 우리는
에집트의 마술사들이(magicians) 행했다고 하는 기적이
속임수였다고 믿지 않을 바에는
그 기적들의 힘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는지 모른다.
(On the same principle we might refuse to admit
the power of working miracles said to have been exercised
by the magicians of Egypt,
unless we believe them as some do to have been deceptions.)
이러저러한 경우를 두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과 빌라도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들어볼 수 있다.
요 19:10-11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런 힘이 발휘되는 곳이 어디든
그것은 신성한 허용에 의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런 것들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그것들을 원하셔서가 아니라
그분의 한없는 사랑과 영원한 지혜가
인간의 의지와 지혜 저 너머의 영역에서 일하시는 분으로서
무한하고 영원한 목적을 위해 허용하시는 것이다.
더불어 그분 스스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
그러기에 그분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 의지가 파괴되지 않고는
악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악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And God permits such things, not as one who desires them,
but as one whose boundless love and everlasting wisdom work
in a sphere above the will and wisdom of man,
and for an infinite and eternal end;
and because evil cannot be prevented without destroying
the freedom of the human will, which God Himself has granted,
and which He cannot therefore violate.)
능력 자체만을 떼어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성한 것이다.
그리고 마술적인 기적이나
불법적인 영적 경이로움으로 행해진 것들은
천국에서 도난당한 것이지만
경로들을 거치며 천국을 왜곡하는 목적에 응용된다.
(The power itself, absolutely considered, is Divine;
and that which is exerted in magical miracles,
or in any unlawful spiritual prodigy, is stolen from heaven,
but has passed through channels and is applied to purposes
which pervert it.)
그러므로 엔돌의 무당이 사울을
영계나 그 거민 중 한 사람과 공공연히 교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성경의 증언에 모순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영적 교섭의 법칙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엔돌의 무당이 불러낸 영이 사무엘의 영인지
아니면 예언자를 가장한 영인지에 관한 것인지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스웨덴볽 자신이 출판한 새 교회의 저서에서는 다소 특이하지만,
엔돌의 무당의 경우와 관련된 언급은 없다.
그러나 18장에서 언급했듯 그의 단편 저서들인
사후 출간된 책들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이 부분과 관련이 있거나 관련된 것을 포함하는 다른 글들이 있는데
본문의 사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무엘이 무당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은 적절하게 본 것이다.
그것은 다만 착오였고 다른 것이었다.
즉 올라온 것은 사무엘을 표징한 어떤 자였다.
(It is well to be observed that Samuel was not raised up
from the dead by the witch. That was only a fallacy: it
was another. One was raised up who represented Samuel.)
그 이유는 악한 영들이나 그 지도자들에게 허용이 있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개별적으로 보고 알게 된 사람과 그 특성을
그것이 무엇이든 목소리의 모든 억양이나 특징이 갖추어진
아주 놀라운 기술로 완벽하게 그것을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관해 나는 어떤 영들을 매체로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다.
그들은 내가 살아 있을 때 알고 지냈고,
그들과 긴 대화를 나누었으며, 생전의 자신의 모습과 닮은 사람들을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들이 같은 자들인지 의문을 가졌고
영들에게 좋지 않은 의심을 표했다.
이렇게 영들은 원한다면 자기들이 관찰한 누군가를
가장해내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무엘이 아니라 그를 표징한 악령이라는 것을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또 사무엘이 아니었다는 것이 너무도 확실한 이유로
여인이 만들어낸 것은 그의 겉모습이었고
13절에서는 ‘지하에서 유령이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에 대한
예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악한 영들에게도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주어지는데
그러나 이는 주께로부터 비롯되었고,
또 그것은 선한 영들을 통해 주어지며 그런 경우 그것은
악한 영들의 말을 물리치기 위해 주어진다.
(To evil spirits it is also given to declare things that are future,
but this is from the Lord, and it is given through good spirits,
to whom it is given in such cases to turn away
the speech of the evil spirits.)
무수한 예를 통해 나는 악령이 마치 어떤 사건 등등을
예견하는 듯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여호와 하느님 외에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
본문의 세부사항이 아무리 흥미롭고
또 그 특별한 역사가 기록하는 영적 현상의 기원과 본성에 대해
만족할만한 관점으로 우리를 인도할지라도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사건의 영적 의미와 실제적 응용에 관한 것이다.
표징적 특성으로 볼 때 사울은
깊은 영적 고통의 상태에 빠진 자연적 마음의 상태와 경험을,
또는 투쟁하는 열정의 영향 아래 애쓰는
자연적 인간의 상태와 경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블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자
사울도 이와 맞서기 위해 이스라엘 전군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승리를 보장해주는 확신감이 이번에는 사라졌다.
사울은 이번 전투가 두려웠고 그의 심정은 크게 떨렸다.
이스라엘 백성, 특히 그 지도자들이 믿고 신뢰하도록
가르쳐져온 으뜸가는 진리 중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만 주신다면 적의 수가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것이다.(사무엘상 14:6).
그 진리는 적어도 사울이 시련의 시간에 있는 동안
그를 지원하기 위해 필요했으나 그는 그것을 존중하지 않았다.
사울의 영적 시련들이 표징한 것 중 하나에
하느님의 섭리의 완전한 충족에 대한
불신감이 수반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럴 때마다 그것은 언제든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결핍에서 일어난다.
확신을 불어넣는 것은 믿음과 사랑이다.
그 이유는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신 그분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원리들을 통하여 우리를 지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에 속한 것이 아닌
악한 우리의 어떤 것에도 거하실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왕국의 원리인 사랑과 진리를 수단으로
내적 삶을 형성시킨 만큼에 비례해서
주님은 우리의 심정을 그분에 대한 신뢰로 고취시키실 수 있고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주실 수 있다.
이 두려움과 그 원인이 되는 불신은
우리에게 은밀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일상적인 삶의 환경에서는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에 대한
엄격한 영적 분석을 시도한다면 발견이 가능할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진정으로 감지하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요구가 있을 때다.
우리가 어떤 영적인 적들과 맞설 때
우리는 그들에게 정복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쉽다.
그리고 이 적들이 우리 심정의 적이라는 사실을 숙고할 때
우리는 우리의 염려의 근거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심정 속의 악이나 이해성의 거짓이
의식의 활동 안으로 불러낼 아무 것도 찾지 못하는 한,
마음은 고요해지고 삶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일상적인 경험의 과정을 벗어나
그들을 흥분시켜 행동으로 옮길 때
시련의 때는 오고 두려움과 떨림이 일어난다.
이런 것들을 허용하시는 하느님의 의도는
우리의 실제 상태를 인식하게 하고
그것으로 어떤 개선의 결과가 있게 해주려는데 있다.
본질적으로 고려되어야할 우리의 실제 상태는
일상의 상황에 보이지 않고
특별한 조건과 위급한 상황에 나타난다.
모든 불확실하고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
하느님의 자녀들은 끊임없는 위로와 진실한 조언의 기원을
하느님 안에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큰 임무를 수행하게 될 때,
특히 전투가 막 개시되려 할 때 하나님께 조언을 구했는데
이때 지도자든, 백성이든
속죄되지 않은 죄가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했다.
이에 대한 것을 이 책 14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거기서 적들을 다 추격할 때까지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말라는
사울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요나단은 꿀을 맛보았다.
물론 요나단의 행동은
사울의 명령을 하달 받지 못한 상황에서 있게 된 것이고
그럼에도 하느님의 응답은 보류되었다.
이 사건이 가르치는 것은 모든 악이 행동으로 불거질 때,
설사 무지로 인한 악이라 해도 언제든지 모든 악은
하느님의 영향력의 하강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의도적인 악과 의도적인 악 사이에는
폭 넓은 차이가 있다.
어느 쪽도 비록 수준에는 차이가 있지만
상처를 주는 결과만이 있다.
이에 대한 이유는 명확하다.
바깥쪽의 악은 우리의 유전적 본성의 안쪽의 악으로부터 나오고
또 그것은 악의 본성이 알려지기 전에도 자발적으로 나온다.
요나단의 실수에서 살폈듯이
악이 행동으로 반복되어 돌출되다 보면 생활의 습관이 되어간다.
그리고 악한 습관은 그것이 생산되게 한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을 더욱 굳혀 강화시킨다.
그런 이유로 덕행을 쌓는 것,
질서 있는 습관을 몸에 배게 하는 것,
더구나 올바른 원리들을 계속 획득해가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젊은이들의 교육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실제적인 악 즉, 행동하는 악(evil in act)은
설사 비의도적으로 범하여졌다고 해도 그것을 범한 당사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의 의식에서 의식적인 죄 뿐만 아니라 무지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의식은 실제적인 악은, 비록 그것이 경미하다 해도
당사자가 하느님과 교통할 수 있기에 앞서
실질적인 회개를 통해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표징하고 있다.
요나단이 미처 몰라서 지은 죄까지도
하느님의 응답의 길을 가로 막았을 정도인데
하물며 사울의 경우는 어떠할까?
실수에 의한 죄보다 의도된 죄는 얼마나 더 하느님의 응답을
가로막을 것인가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으리라.
블레셋의 군대를 보며 곤경에 빠진 사울은 주님께 물었으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꿈으로도, 이상(vision)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 세 가지 매체는 하느님과 교통되게 하는 방법들이었다.
잠들어 있을 때 꿈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주님의 영이 마음으로 흘러드는 것이고
이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통해 오는 것이며
예언자로 해서 주어지는 것은 교리적 가르침을 통해 온 것이다.
사울의 경우에는
그가 속한 표징적 교회의 법에 따라
이런 것들이 그에게 보류되었으나(withhold),
영적 체험에 관한 문제라는 점으로 볼 때는
하느님께 반대되는 죄라는 이유로 인해
영적 교통의 이러한 통로가 닫치게 된다.
이사야가 말한다.
(사 59:2)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의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1:15)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천국으로부터 오는 모든 빛과 위로가 차단되고
외부로부터 나아갈 방향이 제시되지 않을 때 얼마나 두려운 상태인가?
이것들이 실패하면 무엇을 해야 하나?
이에 적절한 방책은
필요한 대답 주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어쩌면 거절하는 바로 그 말씀에 의해 밝혀진다.
그 이유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은 질문과 질문자가 잘못되었을 때
응답을 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더 말한다.(1:16,18)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요구하는 것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원인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성 그 자체는 우리에게
고백과 간구와 회개와 착한 행실로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의무라고 가르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수단을 찾을 때,
가장 지혜롭고 최선의 소원을 달성하는데 있는 장애물을 찾을 때
우리는 툭하면 자신의 바깥만을 점검하려 든다.
그리고 동일한 방식의 잘못된 판단은
우리가 훨씬 더 큰 악을 범하도록 이끌 수 있다.
그것은 신성한 약속의 질서 있는 수단과 방법을 무시함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차단된 것을
금지된 수단과 불순한 경로를 통해서라도 찾도록 우리를 이끌 수 있다.
사울은 진심으로 회개의 재를 둘러쓰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대신,
신성한 법과 자신이 선포한 법이 정죄하고 있는 매체를 통해
자신이 원한 것을 얻으려 했다.
하느님의 법은 이렇게 선포되어 있다.(신명기 18:10-13)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마법사나 신접자나 박수나 주술사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 or that useth divination, or an observer of times,
or an enchanter, or a witch, Or a charmer,
or a consulter with familiar spirits, or a wizard, or a necromancer ..)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사울은 위와 같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기 위해서였든지,
아니면 자신의 기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든지 어쨌든 간에
그는 그 땅에서 혼백을 불러내는 신접한 자와 박수들을 몰아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 중 하나에 도움을 얻으려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울을 모방할 때가 많다.
우리는 판단할 때 우리가 정죄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또 남이 하는 일을 비난하고는 자신은 그것을 하려든다.
(We lean in our hearts to what we condemn in our judgment,
and do ourselves what we blame others for doing.)
꼭 배워야할 큰 교훈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의 영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하는 것과도 관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주 하나님께 온전하고 신실한 것,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생명의 창조자이신 그분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과 진리의 교리를 통하여,
그리고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사 8:19-20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영적 의미에서 초자연적 지식의 그런 불법적인 통로는
악한 심정이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진리와 선함을 설득하려드는 것을 표징했다.
신성한 뜻에 반대하여 일하는 자들, 곧 주술사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부패한 자아에서 비롯된 다양한 수단을 표징했다.
그것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권능과 섭리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수단과 노력이
가능한 한 완전히 뒤엎어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No doubt these means and efforts are, as far as possible,
overruled for good.)
발람이 발락에 의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이용되었을 때의 경우가 그러했는데(민수기 22-24장)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예언자였고 이스라엘 백성의 적이었다.
그들과 싸울 때 그는 미디안 사람들 사이에서 살해당했다.(민수기 31:8).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사울은 금지된 능력의 영역 안으로 억지로 들어갔지만
그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받았다.
그 불순한 통로를 통해서조차 그에게 전해진 것은
주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며
그와 그의 두 아들이 전투에서 죽게 된다는 무거운 소식이었다.
사울과 같은 사람과 관련해 생각해볼 때
이것은 시험에 빠지는 것을,
그리고 진리의 생명이 그 애정이나 생각과 함께
소멸되는 것을 표징함이 분명하고
또 영적 삶을 발전시켜가는 이들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옛사람의 남은 것들의 죽음을,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다윗으로 표징된 새 사람이
진정 살아나 고양되고 새 힘이 부여되는 것을 표징함에 틀림없다.
그들이 시사하는 이런 일반적인 견해와 생각에
몇 가지 좀 더 특정한 종류의 의견이 추가될 수 있다.
영적 의미로 이해해 본다면 성서의 무당들은
믿음의 진리에 자아 사랑이라는 악의 거짓을 접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술은 모독의 죄를 포함한다.
사울이 하느님께 듣기를 저버리고 엔돌의 무당을 찾았을 때,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서 돌아서
죽은 자에게 듣는 무당에 신뢰를 두었을 때
그는 신성한 것에 더러운 것을 혼합시켜 자멸로 빠져들고 말았다.
사울이 찾아 나선 무당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을 변장하고 옷을 바꿔 입고 두 신하와 함께
밤중에 그녀에게 갔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거룩한 것에서 속된 것으로 돌아선 사람들의
상태와 행동을 얼마나 강력하고 간단하게 표현하는지!
그들은 자신을 위장하고
진리의 옷을 거짓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들은 의지와 이해성의 동의하에
낮의 빛을 떠나 밤의 어둠을 향한다.
‘오직 항상 악할 뿐인 자기 심정의 생각의 망상’에 관해,
그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함에도,
그리고 믿음으로 구하면 그분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심에도
그는 그것을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에게 묻는다.
(.. they leave the light of day for the darkness of night,
to inquire of the familiar spirit of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hich is only evil continually,"
respecting that which should be asked of God,
and which he never refuses to grant if asked in faith.)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매체를 통해
자신이 원한 것을 얻는데 아무리 단호한 결심을 할지라도
한때 자신이 죄라고 정죄하고 억누르려고 했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이는 마치 무당이 은밀한 방문자에게 사울이 했던 일을,
즉 그가 이 땅에서 무당과 박수를 어떻게 끊어놓았는지를
상기시켜 준 것과 같다.
그러나 마음이 잘못된 쪽으로 크게 기운 이상
자신의 행동이 삐뚤었다고 판단하여
자기 의도를 철회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진다.
그래서 사울은 “이 일로 자네에게 죄가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하고 쉽게 보증까지 서주고 있다.
하지만 욕망이 충족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왕의 명령에 따라 이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내었을 때
그 여자는 큰 소리를 치며 말했다.
“왜 나를 속이셨습니까? 당신은 사울 왕이 아닙니까?”
왜 유령은 방문자가 사울이라고
여인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확신시켰을까?
이에 대한 상상은 어렵지만 거기에는 영적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예언자 사무엘은
말씀, 그리고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를 표징했다.
그리고 말씀의 진리는
인간의 심정 속 매우 잘 숨겨진 비밀까지 밝혀준다.
“..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열왕기하 6:12).
그러나 (여인의)두려움은 이내 누그러졌고
마음은 그 목적에 열중해 있다.
사울은 여인이 무엇을 보았는지 물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사울은 아직 유령을 직접 보지 못한 것 같다.
이것은 자연적인 눈으로는 영을 볼 수 없고
영적 시력을 여는 것은 신성한 능력의 행위라는
사실과 아주 일치한다.
따라서 각양의 여러 사람들 중에는
영적인 대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주께서 영혼의 눈에 덮인 베일을 벗겨주기를 기뻐하시면
나타난 영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울이 이 개방된(open) 환상을 받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울이 여인에게
그의 모습이 어떤지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여인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올라온다고 대답했고
이 말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땅에 대고 절을 하였다.
사무엘은 곧바로 사울에게 왜 나를 불러와
성가시게 하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사울은 이 예언자의 유령에게
자기가 곤경에 처해 있고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셨으며
그분께서는 더 이상 예언자로도 꿈으로도 대답해 주지 않으시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를 사무엘에게 물으러 왔다고 말했고
이에 그는 “여호와께서 이미 너를 떠나 네 원수가 되셨는데
어쩌자고 나에게 묻느냐?” 라고 대답했다.
선이 떠난 사람을 어떻게 진리가 도울 수 있을까?
선은 선함을 떠나버린 사람에게서만 떠나며
이럴 경우 진리는 오직 심판의 말만을 들려주게 된다.
진리만의 심판은 자비 없는 심판이다.
자신의 행동 안에 심판에서 자비를 제거해버린 이들은
자비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심판을 받는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 7:1-2).
사울은 자신이 선함을 빼앗은
그 진리의 심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그가 불순종 때문에
왕국이 몰수되어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임박한 전투의 비참한 결과를 그에게 말해준다.
“내일이면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게 되리라
게다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도 불레셋 군의 손에 붙이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엄청난 소식을 듣자
“사울은 땅에 완전히 엎드러졌다.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삼상 28:20)
이것은 참회의 자발적인 엎드려짐이 아닌
절망으로 인한 비자발적인 엎드려짐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무 기력도 없었다.
그는 먹지 않았으나
주님이 정하신 방식으로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
여인이 사울에게 다가와서
빵 한 조각을 먹으라고 권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종들이 그 여자와 함께 강권하니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았다.
그가 앉은 침상은 참된 교리의 침상이 아니었고
여자 점쟁이 (pythoness)의 침상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가 마련한 살진 송아지를
거룩한 송아지가 아닌 부정한 살코기로(학개 2:12, 에제키엘 4:14),
또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이 아닌
악마에게 바치는 제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울에게 이런 친절한 행동을 하는
무당 자신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사울의 안타까운 모습이
그녀에게 더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여인은 적어도 한동안은 자신이 무당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표징적인 역사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취한 악한 매체들에 자신을 내어줄 때
우리는 그들이 제공하는 수단으로부터 우리의 힘을 끌어내도록
강요받는 상황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울 이야기의 이 부분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얼마나 엄숙한가!
심정이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면
마음은 참된 모든 위로와 올바른 방향마저 잃게 된다.
이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많이 느껴지고 나타난다.
그러므로 악한 날이 아직 미래에 있는 동안
우리는 주님의 모든 섭리의 돌보심에 의지하여
주님의 음성에 충실히 순종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래서 시련과 투쟁의 날이 이를 때를 대처하는 행동력과 인내력이
이미 우리 속에 이루어져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