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3.7.2.) 말씀/ 예레미아 2:36-37 생명의 길로 가라 네가 어찌하여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뇨 네가 앗수르로 인하여 수치를 당함같이 애굽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을 인하여 형통치 못할것임이니라(예레미아 2:36-37)
인생은 흔히 길이라고 합니다. 아침에 산에 오르면 언제나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길 옆에 벤치가 있어 거기에 앉아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글도 씁니다. 마지막 목적지 텐트가 나타나면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하고 책을 읽습니다. 그렇게 잠시 쉬다가 길을 따라 다시 내려옵니다. 살아가면서 어디에도 길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산으로 가던 길이 최근에는 바다로 옮겨졌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차를 몰고 바다 한적한 곳으로 갑니다.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바다를 보며 큐티를 합니다. 갈매기들도 물 때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넓은 바다에도 길이 있고 하늘에도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배도 지나가고 비행기도 날아갑니다. 그 넓은 바다나 하늘에서 무슨 사고가 있는가 하지만 길을 벗어나면 충돌 사고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에는 이처럼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바람도 길이 있고, 비구름에도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태양이 뜨고 달도 뜹니다. 욥기 28:24-26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레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자연의 신비 다큐를 보면 정말 신비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어는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자신이 태어난 모천으로 돌아와서 산란을 하고 죽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들은 생명을 걸도 그 먼 바닷길을 여행합니다. 그 거리가 자그마치 46,00km나 된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험난한 강줄기를 따라 때론 폭포도 거슬러 올라가는 도전을 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장소에 와서 산란을 하면 임무를 다 하고 죽습니다. 아프리카의 누 떼들도 우기를 따라서 대 이동을 합니다. 탄자니아에서 마사이마라로 백만이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입니다. 중간에 강을 건너면서 악어에 잡혀 먹기도 하고 사자들의 공경을 받기도 하지만 그 길을 빗겨지나가지 않습니다. 길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바꾸어 길을 벗어나 멸망을 자초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고 하십니다. 인생은 근본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나그네의 존재입니다. 평생에 살아감이 다 길입니다. 길을 잘 알고 가야 합니다. 모르면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생하지 않고 삽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믿음의 길을 떠나 하나님 대신 다른 길로 갑니다. 사람을 의존하고 재물을 의존하고 썩어질 것들을 의지합니다. 동물들도 한번 주인을 알면 충성을 다하고 길이 정해지면 그 길을 끝까지 갑니다. 개들도 주인을 정하면 끈까지 중성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을 보면 주인의 꽁무니를 좇아다니는 염소, 오리 돼지등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도 하나님께서 내가 전능자이며 너의 하나님이며 너희를 지켜주고 도와주리라고 하셔도 나름대로 길을 가려합니다. 이사야는 53장에서 우리 인생을 가리켜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시하신 길을 가는 백성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생명의 도인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따라 믿음의 바른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청년 때의 인애, 신혼 때의 사랑처럼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여호와의 성물 곧 첫 열매로 거룩히 구별하셨다 하였습니다(렘2:2-3). 하나님은 그들을 출애굽시켜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셨습니다. 최상으로 대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땅을 더럽히고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렘2:7). 그 길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였습니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관리들은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습니다(렘 2:8).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을 떠난 결국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땅은 황폐하여졌습니다. 그의 성읍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습니다(렘2:15).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의미하던 앗수르와 애굽으로 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면서 모진 고난과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예레미아2:36). 그들의 길은 형통하지 못했습니다(예레미아 2:37). “네가 어찌하여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뇨 네가 앗수르로 인하여 수치를 당함같이 애굽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을 인하여 형통치 못할것임이니라(예레미아 2:36-37)
예레미아 2:17절을 보면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길의 결과는 수치를 당하고 형통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데 왜 형통치 못합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면 형통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어있습니다. 길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힘들고 어러운 길을 갔지만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노에로 살던 옥중에 억울하게 갇히던 그 길이 형통했습니다. 형통했다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나중에 그는 애굽의 최고 통치자 총리가되었습니다.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보다 더 형통했고, 자신을 옥에 넣은 보디발 보다 형통했고, 자신이 지키던 간수보다도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면 실패가 없습니다. 모든 길은 형통으로 통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안 가도 다른 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안 가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길 모로 가는 법 없습니다. 가면 죽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좁은 길과 넓은 길,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 길의 선택은 우리가 합니다. 그 길의 선택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길을 가야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바른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혹 그 길이 굽어 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스러질 수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주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2-3저을 보면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우리가 가는 길 막연한 길 아닙니다. 고난만 있는 길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 믿음의 길 끝은 영생이고,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천국입니다. 작년에 우리가 로마 세계 독서 트래킹을 계획했을 때 8개월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음 달입니다. 조금 있으면 천국을 미리 맛보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의 길을 가는 이유는 그 길은 생명의 길이고 이 세상 어떤 길과 비교할 할 수 없는 열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하나님을 알고 믿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이 길을 갔습니다. 이 길을 간다고 화형에 처하고 짐승의 밥에 먹히고 카타곰이라는 무덤속에 살았지만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길이 십자가의 길로 무겁고 힘드셨지만 이것이 가야할 길임을 아셨을 때 끝까지 가셨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밖에서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 길을 가야할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엉뚱한 길을 갔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는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갔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그 길은 어려웠지만 끝까지 완주하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이라”(딤후 4:7-8)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일본의 마스시타 고노스케는 <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주어진 길이 있다. 하늘이 내려준 존엄한 길이 있다. 어떤 길인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은 갈 수 없는 나만이 걸을 수 있는, 두 번 다시 걸을 수 없는 소중한 이 길, 넓을 때도 있고, 좁을 때도 있다.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도 있다. 이 길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이 길밖에 없지 않은가?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이 길,,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어째든 이 길을 쉬지 않고 가야하는 것이다. 나만이 갈 수 있는 소중한 길이 아닌가? 나에게만 주어진 소중한 이 길이 아닌가? 타인의 길에 마음을 빼앗겨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어봐야 길은 조금도 열리지 않는다. 길을 열기 위해서 우선 걸어야 한다. 마음을 다 잡고 열심히 걸어야 한다. 설령 그 것이 먼 길이라 여겨져도 쉼 없이 걸으면 새로운 길이 반드시 열리는 법이다.” 그런데 길을 갈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길을 걷는 자세입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이 길이 맞는 길인지 분명한 확신이 없으면 가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염려하고 불안 해 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러자 제자 중에 가장 의심이 많은 도마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떻게 알겠삽나이까?“ 이 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 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 아버지께로 가는 생명 길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 아버지께로 갈 자가 아무도 없다. 세상에 많은 성인들이 있어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마음에 평안해진다고 합니다. 해탈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예수님처럼 이렇게 확실하게 길을 가르쳐준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길을 먼저 체험하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땅에 잠시 살다가 죽음으로 떨어지는 길이 아닌 죽어도 다시 살고, 죽어도 하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너무도 확실하게 가르쳐 준 분은 예수님 외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50년동안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느 이유입니다. 변개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길이 생명의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길을 걷는 태도입니다. 특히 먼 길을 갈 때는 무조건 걷지 않습니다. 계획을 세웁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지치지 않기 위해서 힘을 안배 하며, 짧은 길은 혼자 먼 길을 동행. 될 수 있으면 무거운 짐들은 줄이고. 필요한 것만.. 에너지 바도 준비하고 물도 준비한다. 평탄한 길이라고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길은 도입니다. 안주하려는 안일과 싸워야 하고, 게으름과 투쟁해야하고, 때론 충격 장치를 가동하면서 언제든지 진행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길의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가야 할 이유, 어떠한 자세로 갈 것인지, 막연히 남이 간다고 따라가며 끝까지 못갑니다. 어떤 형편에도 이 길을 가리라는 분명한 확신이 없으면 중도에 머물로 일어서지 못합니다. 여러분, 코로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그 때 온라인 예베드린다고 집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못나오는 사람들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핍박 때문에 못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엔트로피이 힘에 무너진 것입니다. 핍박 때문에 길을 걷다 포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게으름과 안일 때문에 무저집니다. 그래서 길을 가는 사람은 멈추어서느 안됩니다. 계속 한걸음씩이라도 가야 합니다. 책 읽는 사람은 한 페이지식이라도 계속 읽어야 합니다. 악기를 배우는 사람은 하루 20분 30분이라도 계속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주저 앚게 되고,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는 사람은 영광스런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은 길이 분명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떠나는 것입니다. 지난 해 저는 돌롬티 트래킹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원대식 선교사님과 이야기하는 중에 무조건 오시기만 하면 안내해드리겠다고 하여 용기를 내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걸어보고자 결단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알지도 못해서 소원도 못가는 길, 알아도 비용이 비싸고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가지 못하는 길, 저는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여러 조건들을 살펴보고 비용도 계산 해보니 일인당 550만원이 나왔습니다. 정에 같았으면 이것저것 생각하다 포기햇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감상하고, 사유의 시선을 넓히고, 로마까지 가서 예술의 극치를 겸험하고, 바울의 순교터를 복, 순교자들의 무덤 카타곰과 오드리헵번의 로마의 유일 장소도 가보고, 폼페이까지 가서 역사의 교훈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이기만 했습니다. 인원 제한으로 6명밖에 갈 수 없지만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이 단지 트래킹이 아니라 우주교히 최초 세계 독서 트래킹이 되기에 의이도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도 두 권 설정했습니다. 나를 향해 걷는 10걸음,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희망으로 쿠르트 파이페씨가 쓴 나를 치유한 3000킬로미터 기적의 유럽 걷기 여행기입니다. 독일에서 로마까지 감동 여행수기입니다. 두 권 다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천천히 걸어서 희망으로 이 책에 보면 쿠페씨가 이 여행을 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6개월 사형 선고를 받고서 나는 침대에서 죽기보다 사는 것을 택하고 여행을 꿈꾸는 것을 택했다. 얼마나 용기 있고 멋진 선택입니까? 그러나 그는 아무도 못한 일을 마침내 해 내었습니다. 그는 의사의 진단보다 2년 6개월을 더 살았습니다. 그라고 6개월 여행으로 60평생 만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맣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습니다. 그의 삶과 여행 수기는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 길은 선택입니다. 생명냐 죽음이냐 희망이냐 절망이냐? 그리고 선ㅌ캑 후에는 지체하지 않고 떠나는 것입니다. 길의 선택이 우리 인생을 결정합니다.
저는 쿠르트 파에페씨가 길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을 택하였고, 내일 죽을지라도 희망을 택하고, 쉽고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고 도전적이고 의미 있는 길을 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중도에 몇 번 아내와 함게 길을 걷기도 했는데 이만큼 한 것도 잘 했으니 함께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로마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여 완주의 축포를 쏩니다. 그가 한 일은 외적으로 큰 일이 아닙니다. 처음 목표한 길을 끝까지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인류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는 책을 출판하고 죽었지만 그 감동은 오늘 우리에게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입니다. 크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길 생명을 끝까지 잘 가면 됩니다. 길을 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면 되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일 길 되신 예수님을 택한 일, 그 다음 우주교회르 택한 일, 그래서 생명과 사랑의 본질을 추구하는 믿음의 길을 택한 것이 잘 한 것입니다. 확신과 믿음을 갖고 끊임없이 이 길을 걷고 완주한다면 주님의 영광이 되고 또한 세상에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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