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류근) 제가 처음에는 몽진이라는 말만 듣고 경기를 일으켰는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까 (조선) 선조의 몽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선조의 몽진이 지극히 보신적 도망이었다고 한다면 (고려) 현종의 몽진은 강감찬이 사태를 분석해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었잖아요. 어떤 문제의 본질과 현상을 제대로 파악해서 그에 걸맞는 대안을 사유해 내는 능력을 보여 준 건데, 이래서 인문학적 교양이 필요한 거예요.
(55)
(박금수) 별무반은 기병을 강화한 특별 군대입니다. 크게 기병인 신기군과 보병인 신보군으로 나누고, 그 외에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전문 부대들이 있습니다. 강한 활을 쓰는 경궁군이 있고, 노 하나가 아니라 두세 개를 연결한 강력한 노를 쓰는 정노군이 있죠. 또한 돌을 그냥 던지기도 하고 돌팔매에 끼워 먼 거리를 던지기도 하는 석투군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각, 즉 뿔로 만든 악기를 입으로 부는 이 대각을 불어 신호를 보내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옆에서 죽어 나가는 매우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끊임없이 대각을 불어 추정되는 도탕군이 있는데, 도탕군은 돌격 부대인데도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었어요. 그래서 이 도탕군의 임무는 적이 공격대형을 제대로 형성하기 전에 돌입해 분탕질을 치며 적의 기세를 꺾는 소수 정예부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85)
(최태성) 이자겸의 본관이 어딘지 아십니까? 인주입니다. 인주 이씨죠. 인주가 어디냐면 지금의 인천이에요. 인주 이씨는 대대적으로 왕실과 혼인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던 대표적인 외척 세력인데, 가계도를 보면 정말 복잡합니다. 순종, 선종, 예종, 인종에게 시집을 간 인주 이씨 집안의 딸이 총 열 명이나 됩니다. 그중에서도 제16대 왕 예종과 결혼 사람이 이자겸의 둘째 딸 문경태후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가 바로 제17대 왕 인종이 되지요.
(102)
(이익주) 척준경은 고려 시대 때 곡주라는 곳의 향리 아들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집이 가난해 공부를 하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어울렸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다가 윤관을 따라 여진과의 전쟁에 참전해 윤관을 위기에서 구하는 공을 세웁니다. 그래서 윤관이 척준경에게 “내가 너를 아들처럼 대할 테니, 너도 나를 아버지처럼 대하라.”라고까지 했죠. 그 공으로 아주 고속으로 승진하고, 이자겸의 아들과 척준경의 딸이 결혼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자겸과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조선 시대와는 조금 다르게 부자간 또는 형제간의 정치 세력이 규합되는 것보다 이렇게 사돈 간의 정치 세력이 규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07)
(류근) 근데 제가 인터넷에서 이자겸을 검색해 봤더니 아주 재미있는 연관 검색어가 나와요. 영광 굴비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이자겸이 영광에서 말린 생선을 맛있게 먹고 난 다음에 비록 귀양을 온 몸이지만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어 줬다는 겁니다. 그 생선이 바로 영광 굴비고요. 굴비가 한자로 굽힐 굴(屈)자에 아닐 비(非) 자래요.
(117)
(최태성) 그런 인식에는 우리가 존경하는 신채호의 영향이 크죠.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인데, 그 신채호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관해 정의를 내렸다는 말이죠. 그 뉘앙스를 보면 묘청은 자주, 김부식은 사대라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듯하니까 많은 사람, 특히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는 식으로 외울 수밖에 없습니다.
(144)
(신병주) 묘청의 난을 이제까지는 개경파 대 서경파 또는 문벌 귀족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같은 식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사실은 국제 정세의 변화도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특히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수립되는 과정의 현장에 있었던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어떻게 고민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도 함께 고려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168)
(이익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환관은 거세한 남성이고, 궁궐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내리라고도 하는데, 고려 시대에는 내시와 환관이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환관은 우리가 아는 그 환관인데, 내시는 거세한 남성이 아니라 국왕에게 총애받는 젊고 유능한 문신 관료들입니다. 내시들은 늘 왕과 함께 있으면서 지근거리에서 왕을 시종하는 사람들이죠. 문벌 귀족의 자제들 또는 과거에 급제한 유능한 젊은 관료들은 내시가 되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환관과 내시가 다른 개념인데, 의종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친위군뿐 아니라 환관마저도 권력자로 만들어 놓아 그들과 함께하는 측근 정치를 해 왔던 것입니다.
(179-180)
(이익주) 무신 정변을 세 가지 다른 층위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신 정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의종의 측근 가운데 무신과 기타 세력 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고, 조금 멀리서 보면 무신 전체와 문신 전체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멀리서 보면 무신 대부분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문제까지 생각이 미치죠. 그 당시 고려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중하층을 구성했던 지방의 향리 계층이 무신 대부분의 원류입니다. 향리들이 서울로 올라가 무신이 되고, 무신 정변을 통해 권력을 드디어 장악한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무신 정변으로 일어난 권력 교체를 중하층의 무신이 상층의 문신들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신 정변은 권력의 상하이동을 의미하고요. 이때 권력을 잡은 무신들, 그리고 그 공급원이 되는 지방의 향리층이 이후 전개되는 고려 후기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210)
(신병주) 흔히 하는 말로 “가늘고 길게 살자”라는 신조에 딱 맞는 왕이에요. 명종이라는 왕은 1170년에서 1197년까지 무려 28년간 재위했어요. 우리 역사에서 왕권이 없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으로는 아마 1위일 겁니다. <고려사절요>를 쓴 사관들의 평가가 핵심을 찌르죠. “왕은 천품이 아주 나약하고 여러 번 변고를 겪어서 놀랍고 두려워하여 아주 심기가 약했다. 그래서 모든 군국의 기무는 무신들에게 견제 되었다. 심지어 회노애락까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 “슬프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명종으로서는 자기가 왕위를 유지하는 한 집권 세력은 누구로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적절하게 타협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