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이디즘Druidism, 즉 드루이드라 불리는 승려를 중심으로 한 신앙 형태는 켈트 족을 규정짓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실, 드루이즘이나 드루이드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들이 사라진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을 뿐 아니라, 드루이드들이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문자가 아닌 구전(口傳)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로마 시대의 저작이나 고고학적 자료, 그리고 당대에 창작된 문학 작품에 의존하여 간신히 그들의 역할과 성격을 추측해낼 수 있을 뿐이다.
드루이드는 흔히 사제로서 알려져 있다. 확실이 그들은 성소(聖所)를 지키고 종교적 의식을 집행한다는 면에서 사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역할 중 단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루이드가 '철학자'였다는 사실이다.
드루이드의 주된 사명은 자연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살며, 그러한 삶의 방법을 타인에게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트라보는 "드루이드는 과학자일 뿐 아니라 윤리학자이기도 했다"고 썼던 것이다. 카이사르 역시 "그들은 별들의 운행, 우주와 지구의 크기, 자연의 법칙, 그리고 불사하는 신들의 힘 등을 연구하여 그 지식을 젊은이들에게 전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드루이드는 신의 힘과 자연의 법칙을 논의하는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 동시에 그들은 진실을 탐구하는 학자이자 지식을 전수하는 교사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드루이드들은 고대 켈트 사회에서 가장 학식이 높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식과 지혜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제, 교사, 입법가, 정치 고문, 천문학자, 화학자, 음악가, 시인,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재판관의 역할이 모두 한꺼번에 요구되었고, 의학적, 약학적 지식 역시 필수 조건이었다. 따라서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긴 수련 과정이 필요했다(로마의 문서들은 이 기간이 약 20년에 이르렀다고 적는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각종 학식(學識)과 기술을 연마했으며, 영적인 수련을 쌓았다. 현대인을 흔히 놀라게 하는, 역사와 계보(系譜)와 서사시의 암기는 그 중 단지 일부분에 속했다.
그들의 지위는 왕들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그들이 일반 민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웬만한 부족장이나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실제로 당대의 왕들은 드루이드들을 매우 존경했으며, 모든 왕들은 한 명 이상의 드루이드를 곁에 두고 매사에 조언을 구했다. 왕의 조언자가 되어 정치를 올바로 이끄는 것은 드루이드의 수많은 사명 중 하나였다. 교육 역시 그들의 사명이었으며, 그래서 왕자들은 예외 없이 드루이드들의 교육을 받았다. 드루이드들은 서로 대치한 두 군대 사이로 걸어들어가 그들의 적의(敵意)를 없애고 전쟁을 종결시키곤 했다고도 한다.
교육, 종교, 그리고 행정에 있어서도, 드루이드의 발언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신과 인간을 잇는 연결고리였기 때문이다. 드루이드의 철학은 켈트 족의 사회를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법칙이었다. 아일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 앵글랜드, 그리고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드루이드들은 각기 다른 신들을 섬겼고, 같은 지역에 산다 하더라도 부족에 따라 다른 신을 섬기기가 일쑤였으나, 공통된 철학은 그들을 모두 하나로 묶었다. 따라서 '드루이디즘'은 숭배의 대상에 중점을 둔 '신앙'이라기보다는 숭배의 방법에 초점을 맞춘 '철학'이었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옳고 그름을 가르는 잣대였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이 철학은 드루이드라는 특수한 계층의 기억력에 의존한 채, 수많은 세대를 거쳐 전해졌으며, 켈트 족은 모두 이 철학에 따라 살았다. 그 철학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우주를 움직이는 절대적인 힘, 즉 균형의 힘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불멸과 재생에 대한 믿음이었다.
드루이드가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숭배했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견(異見)들이 있다. 그들은 유일신을 섬겼는가, 여러 신을 섬겼는가, 혹은 자연 그 자체를 섬기는 범신론자였는가? 혹자는 켈트 족에게는 여러 신이 있었지만 드루이디즘은 그 중 가장 위대한 한 신을 섬기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므로, 드루이드들은 유일신론자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혹자는 그 최고신 외에도 어머니인 대지를 숭배했으므로, 이신론자(二神論者)였다고도 말한다. 또 혹자는 그들이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자였다고도 하고, 혹자는 그들이 자연에서 태어난 만물(萬物)을 숭배하는 범신론자였다고도 한다.
고고학적 자료들에 의하면, 드루이드들 중에는 이 각 부류에 속하는 이들이 모두 공존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드루이드들에게 어떤 신, 혹은 어떤 신들을 섬기느냐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드루이디즘은 자연친화적인 철학이었고, 그 철학과 그 철학을 실천하는 방식이 드루이디즘을 정의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는 그 철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이었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을 가르치고 바로잡는 사람이었다.
역사
드루이드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진 자료가 없다. 아마도 그 시작은 기원전 약 40세기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문자가 발명되어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밖에 없다.
오늘날 드루이드라는 존재는 브리튼 군도(群島)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특히 아이오나Iona, 혹은 모나Mona라고 불렸던 섬(오늘날에는 앙글시Anglesey라고 불리는)은 드루이드의 성지(聖地)로써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들은 브리튼 군도가 단지 드루이드들의 최후의 보루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고대인들이 남긴 드루이드의 성소와 기념물은 거의 유럽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브리타니 지방과 프랑스에는 드루이드들이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켈트 사회에서 드루이드는 지식과 지혜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제, 교사, 입법가, 정치 고문, 천문학자, 화학자, 음악가, 시인,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재판관의 역할이 모두 한꺼번에 요구되었고, 의학적, 약학적 지식 역시 필수 조건이었다. 그들의 기억력과 지식은 로마인들을 질리게 할 정도였으며, 그들의 지위는 왕들조차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그들은 부족장이나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일반인들(평민들은 물론, 귀족과 왕족까지 포함한)은 그들을 숭배하고 따랐으며, 로마 인들의 점령기에 저항 세력을 지휘했던 중심 세력도 드루이드들이었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이들이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이들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은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이사르의 계획은 거의 성공했다. 모나의 드루이드들은 완전히 전멸당했으며, 그 때부터 드루이즘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로마의 침략 이후 크리스트 교가 유입되기 시작했을 때, 드루이드들은 아직 로마가 가한 타격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 자연히 새로운 종교의 전파는 매우 빨랐다. 그 이면에는 켈트의 종교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상당 부분 받아들인 교회 세력의 노력도 있었다. 켈트 족의 신들은 크리스트 교의 성인(聖人)들이 되었으며, 드루이드의 신성한 샘은 성자들의 전설이 덧붙여진 채 보존되어 세례(洗禮)에 쓰였다. 드루이드의 성지는 크리스트 교의 성지가 되어 성당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 후, 이러한 종교의 융합을 거부하는 수도사 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은 종래의 켈틱 기독교 시대의 잔재들을 청산하려는 목적으로 그 내부의 이교적 요소들을 멸절하기 시작했으며, 드루이드들과 그 신도들을 박해했다. 결국 7세기경, 드루이즘은 브리튼 군도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세력은 철저히 모습을 숨기고 비밀 결사가 되었다.
17세기 경, 드루이즘은 다시 런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히무스 산의 숲Mount Haemus Grove"이라 불리는 조직이었다. 그리고 1858년, 캘리포니아에서도 "플레이스빌Placerville"이라 불리는 미국 최초의 드루이드 조직이 탄생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지에서도 드루이즘이 살아남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증거도 밝혀진 바 있다.
드루이드의 철학
앞서 언급했듯이,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은 지역과 부족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자연히 요구되는 종교 의식 역시 신들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갖는 종교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종교를 통틀어 "드루이디즘"이라는 하나의 번주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드루이드는 종교인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철학자로서의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 역시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영혼불멸설에 입각한 "재생" 혹은 "윤회"의 사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균형"의 개념은 공통적으로 이들의 철학의 근간이 되었으며, 이 철학에 기반한 자연친화적 태도 역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다양한 신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교리는 하나였으며, 드루이드들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재생과 균형
드루이드의 지혜는 트라이어드Triad(삼제가三題歌라고도 불림. 세 개의 제목을 가진 시의 일종)의 형태로 흔히 표현되었다. 신은 세 가지 일에서 발현되는데, 바로 삶과 학문과 힘이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불과 지혜와 생명이다. 음악이 주는 세 가지 선물은 잠과 웃음과 눈물이다. 추구해야 할 미덕은 세 가지인데, 그것은 용기와 신의(혹은 우정, 우애)와 이타심이다. 결코 범해서는 안 될 악덕도 세 가지인데, 그 하나는 오만이오, 그보다 더 나쁜 것이 배신이요, 가장 나쁜 것이 이기심이다...
인생 역시 세 가지 단계로 인식되었다. 최초에 인간은 심연(深淵)의 세계(웨일즈어로 안운Annwn이라 불리는)에 있다가,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아브레드Abred)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어서 천국(귄피드Gwynfyd)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세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완전한 존재를 누릴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된 지혜들은 하나의 명제로 환원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이란 일시적인 것이며, 다른 세계들을 오가는 잠시 동안의 유예(猶豫)일 뿐이라는 것이다. 육체가 죽더라도 영혼은 불멸하며 다른 세계로 오간다는 믿음, 곧 영혼불멸과 재생의 사상은 드루이드의 철학을 구성하는 근간이었다.
사람은 자궁에서 태어나 죽으면, 마침내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될 낙원으로 가게 될 때까지 다시 태어나고 죽으며 윤회를 반복한다. 따라서 고대의 켈트 인들은 죽음과 탄생을 모두 애도했다. 이 세계에서의 탄생은 곧 다른 세계에서의 죽음을 뜯하기 때문이었다. 한 영혼이 이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웠을 때, 마침내 그 영혼은 영원한 안식의 땅으로 간다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날 때마다, 그 영혼은 더 성숙해진다.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경험한다는 것은 학대자로서, 그리고 학대받는 자로서, 살인자로서, 그리고 살해당하는 자로서,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으로서, 부자와 빈자로서 모두 살아 본다는 것을 뜻했다.
학대자와 학대받는 자, 살인자와 살해당하는 자, 건강한 사람과 병약한 사람, 부자와 빈자 등은 모두 균형을 이루기 위해 함께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인생의 모든 면에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반대되는 면이 있다. 남자와 여자 없이는 동물도 식물도 번식할 수 없으며, 좋고 나쁨의 양극단 없이는 어떤 물질도 없을 것이요, 빛이 없다면 암흑만이, 암흑 없이는 빛만이 있을 것이다. 악이 없다면 선 또한 없고, 선이 없다면 악 또한 없다.
이러한 철학에 입각해 있었으므로, 드루이드들은 선입관을 갖지 않고 삶의 모든 면모를 대할 수 있었다. 그들의 철학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거나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드루이디즘에서 모든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살아갈 이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했다.
드루이드의 자연관
드루이드들은 자연을 존경하고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자연은 삶을 주는 자였으며 이를 유지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 즉 우주와 그 현상, 힘과 에너지, 성질, 본능, 직관(直觀) 등 수많은 것들을 가리켰다.
예를 들어, 태양의 빛과 열 없이는 동물도 식물도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태양은 동식물을 자라나게 하고 계곡에 물을 흐르게 하며 시와 음악을 지을 영감을 주는 동시에, 기근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태양의 모든 면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로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드루이드의 가르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드루이드들은 자연의 지혜를 얻는 데 있어서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들의 자연 철학은 철저한 자연주의naturalism에 입각해 있었다. 자연의 세계는 끈기 있게 탐구하는 자에게만 정당한 대가를 얻게 한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곡식의 낱알을 줍듯 조금씩 조금씩 얻어 축적함으로써 완성되어야만 했다.
신성화(神聖化)하지 않아도, 어머니 대지는 충분히 고귀하며 존중맏아 마땅했다. 지역과 부족에 관계 없이, 거의 모든 드루이드들이 어머니 대지를 숭배했다. 그러나 개개의 자연물을 숭배하는 드루이드는 드물었다. 드루이드가 보통 나무를 숭배한다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현대인의 오해에 불과하다. 드루이드가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태계를 유지하고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존재로서 존중한 것이었다. 드루이드라는 명칭의 근원이 된 참나무(drui) 역시 신앙의 대상이 아닌, 이들의 신앙과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무였을 뿐이다.
말을 하고 생각을 할 능력이 있는 인간은 종종 다른 동식물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드루이드들은 인간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단지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분에 비롯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은 대지와 자연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간은 자연을 구성하는 다른 존재들과 평등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결코 어떤 것보다 상위(上位)를 차지해서는 안 되었다. 자연 속의 우리는 자궁 속에서 보호받는 태아와 같으며, 따라서 어머니를 해하는 행동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들의 철학은 현대인이 "가이아 이론"이라 부르는 가설, 즉 지구라는 행성은 스스로 살아 있는 하나의 생물이며, 그 생물의 아이들인 우리 인간은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해야만 한다는 이론과도 같았다. 생태학적인 지식은 드루이드의 기본 조건이었으며, 스스로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키고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교화하는 것은 이들의 신성한 사명이었다.
축제와 의식(儀式)
약 12주의 간격으로 한 해에 네 번 돌아오는 불의 축제와, 그 사이에 위치한 춘분(春分), 추분(秋分), 하지(夏至), 동지(冬至)는 모두 드루이드가 주관해야 할 종교적 기념일이었다. 따라서 드루이드들은 약 6주에 한 번씩 대대적인 종교 의식을 집행했던 것이다.
불의 축제는 첫째 날의 일몰(日沒)부터 시작되어 3일동안 행해졌는데, 이 때 드루이드는 제물을 바치고 미래를 계시받았다. 한 해의 알리는 사빈Samhain과 겨울의 끝을 알리는 임볼크Imbolc, 봄과 재생의 때인 벨타네Beltaine, 그리고 추수제(秋收祭)인 루나사Lughnasad가 불의 축제일에 속했다.
이러한 축일(祝日)에는 언덕 꼭대기에 거대한 모닥불이 피워져, 축제가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낮에는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졌고, 밤이면 경건한 종교 의식이 치루어졌다. 드루이드는 잔치와 의식을 함께 관장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일랜드의 모든 불을 껐다가 드루이드가 피운 신성한 모닥불에서 얻어간 불씨로 새로이 켜는 사빈의 의식이다.
불의 축제들에 비해 천문학적 기념일들, 즉 춘분과 추분, 그리고 하지와 동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카이사르 등 로마의 저술가들이 이들에 대한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러한 날들이 불의 축제들보다 덜 중요했다고 단정짓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켈트 족이 분포했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스톤헨지, 둥근 고분(古墳), 선돌 등, 천문학에 쓰였으리라 추정되는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불의 축제들이 드루이드와 대중이 함께 즐겼던 축일이라면, 춘분, 추분, 하지, 그리고 동지는 일반인들보다는 드루이드 계층에게 훨씬 더 의미있는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러한 날들은 공식적인 축제의 날이 아닌, 조용한 연구와 비밀스런 의식의 날이었던 것이다
(자한 것은 켈트족의 축제에 관해서 알아 보세요 )
인신공희(人身供犧)
드루이드는 인간 제물을 바쳤는가? 이것을 부정하려는 많은 켈트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자료들에 비추어 볼 때 일부 지역에서 인신공희가 행해졌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숭배 대상과 숭배 방법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가 다시 한 번 제기된다. 어떤 지역의 드루이드들이 인간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반면, 다른 지역의 드루이드들은 인신공희를 암시하는 힌트조차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거의 모든 지역의 드루이드들에게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경우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는 의심을 살 만한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타르브-훼이스Tarb-feis(황소의 축제)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아일랜드의 주된 제물은 황소였으며, 적지 않은 지역에서는 약초와 향(香) 만을 바치기도 했다.
인간 제물을 바쳤을 경우라도, 희생이 자발적이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많은 자료들이 제물로 바쳐진 희생양이 기꺼이 그 역할을 받아들였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제물은 부족의 뜻을 직접 신에게 전달하는 신성한 매개체로 생각되었고, 종종 그러한 희생이 타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믿어지기도 했다. 또한 켈트 인들은 그렇게 "고귀한 희생"을 치룬 영혼은 더 좋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환생하거나, 영원한 낙원에서 안식을 취하게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시저가 드루이디즘을 반대하고 드루이드들을 박해했던 것은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날의 합리주의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 듯 생각되기도 하지만, 바로 50년 전까지만 해도 가미카제에 탑승한 일본인들이 기꺼이 군함으로 돌진했으며 총 잡는 법조차 거의 배우지 못한 학도병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6.25의 최전선에 참전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해당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사회에 모범이 되는 행동이라고 받아들여졌으며, 권장되기도 했다.
로마의 수많은 집필가들은 드루이드가 인간 제물을 바쳤다고 기술했다. 그들의 저술에 따르면, 희생물로 가장 자주 선택되는 인간은 범죄자였으며 그들은 인간 모습을 한 고리버들 바구니에 담겨 생매장되었다. 수도사들은 "세 번 죽음"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희생양은 물에 빠진 다음 돌팔매질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창에 꽂힌다. 그러나 드루이드가 인간 제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이 모든 자료들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우월감에 빠져 있던 로마 인들은 종종 외부의 "야만족"을 필요 이상으로 하등하게 묘사했다. 특히 크리스트 교가 처음으로 전파되던 시기, 일부 수도사들이 전도 활동을 위해 자신의 경쟁자들을 헛소문으로 모함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드루이드라는 지위가 혈통이나 신의 택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드루이드의 조건은 학식이고 지혜였으며 그것이 일반인들이 그들에게 바치는 존경의 이유였다. 즉, 그들은 맹목적으로 '숭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인해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이유였건 옳은 이유였건, 다른 계층(특히 귀족과 왕족 등 상위 계층)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이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은 인신공희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교육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은 대체로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흔한 나이는 약 5~6세 경이었지만 특별히 정해진 나이는 없었고, 드루이드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밝혀지면 좀 늦거나 일러도 그 때 당장 교육을 시작하곤 했다. 교육 과정은 보통 15-20년 걸렸지만 개인차가 심했다. 그것은 몸도 마음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힘든 과정이었다. 드루이드의 힘과 지혜의 원천인 '자연'의 본질이 '생존(生存)'이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단 한 명의 선생으로부터 교육받지 않았다. 주로 드루이드 사회 전체가 지식을 나누어 가졌다.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학생들조차 자신의 후배들을 가르치곤 했다. 가르침의 기술 역시 드루이드가 반드시 갖추어야만 할 능력이었으며, 그것은 실습에 의해 가장 잘 습득되었기 때문이다.
드루이드에게는 특별히 요구되는 지식의 영역이 없었다. 그들의 교육 과정은 시인이자 역사가인 바드Bard의 교육 과정과 사제이자 예언가, 의사, 약사인 오바테Ovate의 교육 과정을 모두 포함했을 뿐 아니라, 잡다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온갖 분야의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고 실천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드루이드들에게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우주 전체를 이해하고, 부족이 조언을 구하는 문제라면 그것이 어떤 분야의 문제가 되었건 올바른 해답을 줄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드루이드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지식이라도 외면하지 말아야 했고, 온갖 분야에 걸친 다양한 지식들을 모아들여야 했다. 한마디로,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걸어 다니는 사전"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드루이드에게는 전통으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온갖 지식과 지혜를 얻는 동시에, 그것을 실천하고 타인에게 전파할 2중의 의무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완성의 단계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비록 약 20년의 교육을 거치면 드루이드라는 칭호를 부여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교육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드루이드는 결코 배움을 멈추어서는 안 될 존재였기 때문이다.
바드와 오바테
바드,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Bards, Ovates and Druids
기원전 1세기에 스트라보Strabo는 "갈리아인 중에는 특히 존경받는 세 부류가 있었는데, 그들은 바드Bard, 바테Vate, 그리고 드루이드이다. 바드는 시인이자 가수였고, 바테는 점술사이자 과학자였으며, 드루이드는 과학자이면서 윤리학자이기도 했다"라고 기록했다.
바드, 오바테Ovate(혹은 바테), 그리고 드루이드의 관계는 현대인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종종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직업군(職業群)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어떤 때에는 마치 바드와 오바테가 드루이드의 하위 개념에 속하는 것처럼 설명되기도 하며, 다른 때에는 바드와 오바테가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 거쳐 가야 할 중간 과정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과연 바드,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는 독립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는가? 아니면 드루이드라는 넓은 개념 안에 바드와 오바테가 포함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바드와 오바테는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 거쳐가야 할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세 가지 모두 "그렇다"이다.
바드,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는 기본적으로는 모두 독립된 직종이다. 스트라보가 기록했듯, 바드는 흔히 말하는 음유시인이었고(비록 그 사회적 지위가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높았다 하더라도), 바테는 자연과 신들을 연구하고 미래를 점치는 종교인이었다. 그리고 드루이드는 앞서 이야기했듯, 기본적으로 철학자였다.
혼란은 드루이드가 이론적인 철학자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데서 온다. 그들의 역할이 책상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종교,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해당 사회 전반에 걸쳐 요구되었음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철학을 실천하고 그 실천을 전파하는 자로서, 그들은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제, 교사, 입법가, 정치 고문, 천문학자, 화학자, 음악가, 시인, 의사, 재판관 등등의 역할이 모두 한꺼번에 요구되었다. 간단히 말해, 드루이드의 역할 속에는 바로 바드, 즉 시인의 역할과 오바테, 즉 사제의 역할이 함께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드루이드의 교육 과정 역시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과 오바테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야 했다. 이 중 바드의 교육 과정이 선행(先行)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기는 했으나, 웨일즈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오바테의 교육 과정을 먼저 수료하게 하는 등, 지역과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두 과정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지역, 어느 부족이라도 차이가 없었다.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오바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그 위에 드루이드에게만 요구되는 교육을 또 받아야만, 한 사람은 드루이드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교육 과정에는 최소한 20년이 소요되었다고 카이사르는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드루이드를 항상 노인으로 표현하는 오늘날의 고정 관념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이러한 드루이드의 교육 과정이 바드와 오바테를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과정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바드인 동시에 오바테이기도 하고, 또한 그 이상이 되어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드와 오바테가 독립된 직업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스트라보가 기록했듯, 드루이드 못지 않은 존경을 받는 엄연히 다른 직업군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드와 오바테는 드루이드라는 범주 속에 포함되는 하위 개념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드루이드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때에만 이해가 가능하다. 좁은 의미의 드루이드란 앞서 설명한 대로, 바드와 오바테와는 구별되는 '철학자'로서의 드루이드이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를 중심으로 한 해당 계층 전체, 즉 혈통이 아닌 재능과 노력에 의해 사회 전반의 존경을 받게 된 '재인(才人; Men of Arts)' 계급 전체를 드루이드라 부를 수도 있다. 이 때의 드루이드는 바드와 오바테, 그리고 좁은 의미의 드루이드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바드와 오바테, 그리고 드루이드는 비록 전문 분야가 다르기는 했지만, 모두 같은 철학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된 일 역시 공통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것은 현대인의 혼란을 야기하는 또다른 이유일 것이다. 비록 드루이드만이 본격적인 철학자였고, 바드는 시인과 역사가의 직책에, 오바테는 사제와 의사의 직책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 모두는 재생과 균형의 철학을 공유하며 이를 실천하고 전파한다는 면에서 분명 '드루이드'라 부를 수 있었다.
바드Bard
바드는 부족의 전통을 보존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 세상의 신성함을 수호하고 알리는 사람들이었다.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교육의 첫 단계가 바드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바드가 드루이드의 도제(徒弟)일 뿐이라거나 드루이드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드 안에도 여러 등급이 있었고,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과정은 그 중 아주 낮은 단계에 속했다. 최고의 경지에 이른 바드는 오바테나 드루이드와 마찬가지로 존경받았으며, 그들 못지 않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다.
바드가 되기 위한 교육 과정은 무척 길고 힘든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웨일즈의 바드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았으나, 그것이 오랜 시간과 엄청난 노력을 요한다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었다.
아일랜드 바드의 교육 과정을 예로 들자면, 갓 입문한 학생은 1년안 올리레Ollaire, 타반Tamhan, 그리고 드리사크Drisac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바드의 기초 과정을 배웠는데, 올리레는 바드의 원칙을, 타반은 시학(詩學)을, 드리사크는 풍자(諷刺)를 교육받았다. 또한 문법과 오감Ogham 문자를 완벽히 터득하고 스무 개의 이야기를 암기하는 것 역시 요구되었다.
이 과정을 무사히 졸업한 학생은 '청동 가지Bronze Branch'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다음 네 해 동안, 그는 한 해에 각각 열 가지의 이야기, 백 가지의 오감 문자 조합, 열 두 가지의 철학적 교훈, 그리고 셀 수 없는 시들을 암기해야 했다. 또한 이 동안 그들은 2중 모음(母音)의 조합법과 특권층에 관한 법률, 그리고 문법의 사용법 등도 완벽히 터득해야 했다.
여기까지 요구되는 교육을 모두 마치면 그는 비로소 클리Cli, 즉 '기둥'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클리가 된 학생은 한 해동안 48 가지의 시와 20여 가지의 이야기를 암기해야 했다.
클리의 과정을 졸업한 학생에게는 '은(銀) 가지Silver Branch'가 수여되었다. 그는 안루흐Anruth, 즉 '고귀한 흐름'이라 불렸는데, 그것은 '그로부터 아름다운 말들이 흘러나오고, 부(副)가 그에게 흘러들기' 때문이었다. 안루흐의 교육 과정은 모두 3년이었는데, 이 동안 그는 95 가지의 설화와 175 가지 이야기의 레퍼토리를 모두 익혀야 했다. 운율과 시어, 문체, 구성 등 시작(詩作)에 필요한 모든 것과 여러 가지 시의 형식을 배우는 것도 이 시기였다. 그 외에도 신에게 기원하여 예언을 하는 법과, 아일랜드 전역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들을 완전히 터득하는 것 역시 요구되었다.
안루흐의 과정을 마치면 에케스, 즉 '학자'와 필리, 즉 '시인(詩人)'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케스는 모든 시형(詩形)과 구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고, 필리는 100 가지의 시와 120 가지의 논설(論說)을 암기하는 동시에 네 가지 시학(詩學)을 터득해야 했다. 그러면 350 가지 이야기를 모두 터득한 그 학생은 마침내 올라브Ollamh, 즉 '시의 대가(大家)'가 되어 '황금 가지Gold Branch'를 수여받을 수 있었다.
청동, 은, 그리고 황금으로 만들어진 각각의 가지들에는 모두 종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강당으로 걸어들어가 시를 낭송(朗誦)을 할 때면, 항상 지팡이에 달린 종이 울리곤 했다. 이 종소리는 청중들에게 조용히 할 것을 고하고, 시나 이야기에 혼을 불어넣을 힘을 시인의 내면 세계로부터 소환하는 소리였다.
바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신화나 전설과 분리되지 않은)와 영감이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었으며, 영감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 주었다. 그것이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드의 교육 과정을 밟아야만 하는 이유였다. 바드의 웅변술(雄辯術) 역시 드루이드에게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필요했던 것은 역사를 통한 자기 부족의 이해와 영감을 통한 자연의 이해였던 것이다.
세대(世代)를 관통하는 힘과 자연에서 샘솟는 힘을 이해하고 다루는 것은 바드의 조건인 동시에 드루이드의 조건이기도 했다.
오바테Ovate
오바테는 죽음과 부활의 비밀을 이해하며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들은 미래를 예견했고, 조상들과 이야기했으며, 저승으로 여행하여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곤 했다. 바드가 '말의 힘으로 문을 여는' 자였다면, 오바테는 '시간의 문을 여는' 자였다.
예언과 예견의 대가인 오바테는 시간을 뛰어넘어 여행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의 켈트 족이 믿었던 시간의 순환론(循環論)에 기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불교도나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드루이디즘의 신자(信者)들은 영혼이 불멸(不滅)하며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대 켈트 인들에게 조상들의 땅은 단지 사자(死者)의 땅이 아니었다. 환생을 기다리는 조상들이 거하는 그곳은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었으며,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지혜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으로 여행한 오바테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조언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시까지 얻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오바테는 다른 누구보다도 저승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사자(死者)의 축제인 사빈Samhain 의식에서 그들의 역할은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올라브의 역할이 음울한 것은 아니었다. 켈트 인에게 죽음과 재생이 하나였던 것만큼, 오바테는 죽음의 사제인 동시에 곧 삶의 사제이기도 했다. 오바테가 의사이자 약사이기도 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나무의 지혜tree-lore'는 오바테의 지혜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죽음과 재생, 희생과 변화, 그리고 시간의 비밀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나무처럼 좋은 스승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무들의 뿌리는 알 수 없는 과거와 무의식(無意識)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고, 씨앗을 숨기고 있는 열매와 잎새는 미래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따라서 오바테가 약초학(藥草學)에 정통한 약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바테는 몸이나 마음이 자연의 조화에서 벗어나 있을 때 인간이 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약초와 천체의 순환에 힘이어 몸의 병을 고쳤으며, 죽음과 재생에 대한 지혜로써 마음의 병을 고쳤다. 인간은 죽음을 직시해야 하며, 죽음으로써만 인간은 또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인간은 추구하는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오바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다.
드루이드는 컬트어로 "현명한 사람들" 이었다. 비록 그들에 대한 수십권의 책들이 나왔지만, 드루이드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의 신앙은 매우 밀교적이고 입을 통해서만 전달이 되었다. 그들의 행동은 대부분은 공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글로 남겨진 전통이 전혀 없으며 혹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그림이 남겨질 만한 주요 사원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외국에서 온 관찰자들의 글과 생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드루이드에 대한 언급은 고대 로마의 Strabo, Diodorus, Posidonius 와 쥴리어스 시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은 드루이드를 매우 잔인한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드루이드들은 종종 종교적인 기능을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사제들이라고 불렸다. 디어도루스는 그들을 철학자들이라고 불렀다. 스트라보는 그들은 음유시인과 예언가로 명망이 있으며 사람들을 중재한다고 했다. 그들이 누구였던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현대의 드루이드들이 풀과 바람을 벗삼아 환상열석(環狀列石)을 돌면서 위로를 받는 것과는 달리 켈트족 사회에서 매우 높은 지위를 누렸다.
현대의 드루이드들은 영국에 있는 스톤헨지(Stonehenge)- 제가 전에 올링 자료 중 멀린에 관한 자료가 잇습니다. 멀린도 드루이드 입니다. -와 다른 거석기념물을 숭배의 장소로 취급한다. 모든 환상열석, 선돌, 돌멘 등등은 켈트족보다 천-3천년이나 먼저 살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톤헨지는 기원전 2800-1500 에 건설된 것이다. 켈트족은 거석문명이 만들어지고 한참 후에 영국에 도착했다.
아마도 켈트의 드루이드는 켈트 사회의 전사들과 분리된 계층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들의 부족이나 집단에서 재판관, 예언자, 점쟁이, 현자, 그들 공동의 기억에 대한 보관자로서 일했다(Herm, 61). 그들은 전사 사회의 지식층이었으며 이것은 인도의 카스트 시스템에서 브라만(Brahmins) 과 비교될 수 있다.
드루이드란 단어 (druid)는 아마 고대 그리스의 drus (참나무)와 인도 유럽어의 wid (지혜)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oak-knower라는 명백히 불합리한 결합을 보였다(Herm, 57). 어쨌든, 현대의 드루이드들은 참나무와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신성한 참나무 숲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으며, 참나무에 자라는 겨우살이를 매우 칭송한다고 하며, 혹은 그 참나무 자체를 숭배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드루이드들의 자연 숭배는 고대의 켈트족과는 연관이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켈트족의 드루이드와 현대의 위카와는 역사적인 연결이 전혀 없다.
Wicca, 위카
위카란 자연종교로 그 신앙과 의식은 고대의 풍습에서 유래한다고 믿어진다. 위카는, 고대 켈트의 전통과 직접 연결된다고 하며, 고대 켈트의 전통은 기독교나 그 밖의 서양 근대의 종교보다도 자연의 힘과 잘 조화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위카는, 일종의 종교라기 보다는 단지 자연이나 자연 현상에 대한 영적인 생각의 원칙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보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위카신자는, 정통적인 종교인이라면 지켜야할 명문화된 신경(creed)이 없다. 그녀들은 숭배를 위해 석조의 사원이나 교회를 짓지도 않는다. 그녀들은 넓은 야외, 즉 공원,정원, 삼림, 광장, 언덕의 산중턱 등에서 의식(ritual, 儀式)을 행한다. 위카FAQ 페이지에 의하면,
"위카"란 현대적인 네오 페이건(Neo-Pagan)의 이름으로, 시 공무원을 퇴직한 제랄드 가드너의 노력에 의하여 주로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1940년대 말]. 최근 수 십년간, 위카는 페미니스트와, 여성을 긍정적으로 보며 자연에 기초한 종교를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진 덕택에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네오 페이건 신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위카는 자연의 내재 (immanent)를 신성한 것으로 여겨 숭배하고 있고, 그 영감의 대부분을 비 기독교 또는 기독교 이전의 유럽 종교로부터 얻고 있습니다. "네오 페이건"란, 단지 "새로운 페이건(new pagan)"(페이건은 라틴어의 paganus, "농촌지역 생활자"를 어원으로 한다.)이라는 의미이며, 요즘 주요 유일신(하나의 신만 믿는)종교가 널리 퍼지기 전 시대에 귀를 기울입니다. 위카 신자의 대부분은 네오페이건입니다만, 페이건 전부가 위카 신자가 아니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 Wicca FAQ]
위카를 위카로 만들어주는 공통적인 신앙이나 실천 체계는 한가지도 없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 (An' it harm none, do what you will)"라는 한가지 믿음 만큼은 자주 나타난다. 또, 몇 가지 의식은 자주 눈에 띄인다.
위카 신자는 사계나 하지·동지, 춘분·추분과 같은 자연 현상에 맞추어, 수많은 의식을 행한다. 그녀들의 심볼은 자연계와 인간 생명이 연결되었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그녀들은 Beltane라는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여름을 축하한다. 위카 신자는 경험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신에 기도하는 대신에, 자연이나 남자이고 동시에 여자이기도 한 자연신과의 연결됨에 눈뜨는 것과, 자기의 각성을 원하는 것 같다. 그녀들의 의식은 심리학적 프로세스의 은유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들은 노래부르고 춤추고, 찬송한다. 그녀들은 양초와 향을 태운다. 그녀들은 허브와 부적(charm)을 사용한다. 위카 신자는 민속 요법을 위해 허브를 많이 사용하기도 한다. 그녀들은 집단의식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공동체에 표현한다. 그녀들은 주문을 외지는 않는다. 그녀들은 동서 남북으로부터의 축복을 바라는 것이다. 그녀들은 명상을 한다. 그녀들은 큰 가마솥을 사용하여 기묘한 독약이 든 국을 만들지 않는다. 그녀들은 보름달 밤에 하늘을 날아가지 않는다. 그녀들은 적에게 해를 끼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위카 신자는 자연과 자연의 신성과 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그녀들은 범신론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위카 신자들은 기독교도와 한가지는 같다. 바로 그들은 모두 자연의 힘, 무지비한 파괴도 기본적으로는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폼페이의 유적에서 돌이 된 사람들이나, 홍수에 쓸려간 아이들이나, 회오리바람에 의하여 집이 날아가고, 화산에 의해서 내던지는 사람들, 부주의한 태양 때문에 땅이 갈라지고 살이 타고 있는 사람들, 아무 죄도 없이 생물학적 법칙에 의하고 기형으로 처럼 태어난 사람, 지진으로 갈라진 틈으로 빠져서 죽어간 사람들, 허리케인 때문에 물에 익사해 죽은 사람들, 매년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힘 때문에 토지가 엉망이 되고, 집을 잃어버리는 수백만의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들은 자연(또는 신)의 축복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위카의 마법(magick)과 기독교도의 기도가 홍수를 멈추고 번개를 일으키거나, 회오리바람이나 허리케인의 강풍을 진정시키거나 지진을 일으키거나, 또는 해일을 진정시키는 것은, 그들의 신화속에서 뿐이다.
위카의 매력은, 여성에 대하고 우호적인 것이나, 성에 관하여 자연주의적 견해를 취하는 것, 또는 마술을 통해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해 준다는 것일지도 모르다. 위카는 기독교와 같은 기성 종교에 의하여 수세기에 걸쳐 행해졌 왔던 여성 혐오나 "여성 말살 (femicide)"또는 "부인 말살 (gynicide)"에 대한 여자들의 반란이라는 의견이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으며,또 매력적인 의견이기도 한다. 예를들어, 여성은 남성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남성과 동등하다. 켈트족의 신화에 의하면 여성은 평범하지 않다. 여성은 지적이고 힘센 전사이고, 냉혹하며 또한 성적으로도 공격적인, 국가의 지도자이다.
마지막으로, 위카는 악마숭배와는 관계없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위카가 악마를 숭배한다는 주장은, 특히 종교 재판의 시대에 기독교도가 저지른 "마녀"박해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종교 재판의 망령은, 특히 위카 신자를 악마 숭배자라고 주장하고 박해를 계속하는 열광적 기독교도의 가슴속에 오늘도 살고 있다. 현재의 이단 심문관들은 사람들을 태우고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할로윈이나 학교의 닉네임(블루 데빌스라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고등학교의 마스코트는, 많은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구실을 주고 있다.)을 바꾸라고 말하거나, 마녀를 표현하는 것을 폐간시키라고 압력을 가하거나, 악마와 관련이 있다고 암시하는 모든 사인이나 상징물이나 사탄과 관련된 숫자를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다. (근처에 있는 피자집은, 배달용의 상자에 그려진 마크 때문에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근처의 마녀 사냥꾼들은 그 마크를 악마의 사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피자집은 네가티브 캠패인에 대항하지 않고 상지의 디자인을 바꾸었다.)
1996년 봄의 첫 날, 우리들의 지역의 신문은, 이 지역에서의 마녀의 집회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그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동그랗게 둘러서서 춤을 추고 동서남북으로부터 축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이들을 전혀 해가 되지 않는 자연 숭배자로서 취급했다. 그 결과, 이 기사를 썼던 저자를 단순 무지하다고 비난한 장문의 편지가, 편집부에 도착했다. 편지의 주된 내용은, 마녀들은 사탄과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고, "악마 숭배 학대의 생존자"라고 쓰여진 서명으로 편지를 마치고 있다. 편지의 신빙성은, 자신을 마녀이라고 고백한 셀렘의 여성들의 진실함과 비슷할 것이다. 현대의 악마 숭배에 의한 학대의 희생자는, 자기를 잡은 경건한 기독교도에 의하고 자신이 사악하다라고 믿어 버린 마녀들과 마찬가지로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일까? 현대의 위카 신자는, 악마의 음모의 일부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악마 숭배자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학대받는 기독교도가 있다고 해도, 그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은 위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국제 음모 조직은 아니다
자세한 자료는 아님니다.
ps - 출처는
아마도 하이텔 판동 같군요
^^;. 프린트 물을 그대로 친거라 .....
프린트 물에 자세한 자료 출처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제 프린트 물은 하이텔 아니면 나우누리 할동 시절 가지고 있던 거기 때문에 하이텔이나 나우누리일 확율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