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싶은절|남양주봉선사(경기도)| 한글역경을꽃피운
경기 남양주 진접읍에 위치한 봉선사는 대웅전 대신 한글로 씌어진 '큰 법당'이라는 편액을 단 전각이 있으며 사찰 곳곳에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절이었던 귀중한 자료가 남아있습니다. 무엇보다 불자들이나 일반 대중에게 커다란 기쁨을 선사하는 연꽃 군락지는 봉선사의 큰 자랑입니다. 여느 사찰 방문 시 조금 피어있던 연꽃이 아쉬웠다면 봉선사에서 매년 열리는 연꽃 축제에서 실컷 연꽃도 감상하고 힐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절따라 전설따라 수려한 자연환경을 가진 남양주 봉선사로 사찰여행 찾아 떠나봅니다. 서기 969년 고려 광종 20년에 법인 국사께서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서기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시고는 광릉이라고 합니다. 봉선사는 세조에 관한 이야기가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세조는 풍수에 눈이 밝았습니다. 죽은 후에 자신이 묻힐 땅을 찾다가 아주 흉한 땅에 아버지를 묻고 있는 일행을 만나게 됩니다. 일행은 흉지를 알려 준 노인을 세조에게 말하였고 세조는 노인에게 왜 이들에게 흉지를 알려주었냐고 묻게 됩니다. 이 노인은 왜 흉지를 알려주었는지 그리고 세조와의 인연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김유식의 펜화로 찾아가는 사찰기행] <17> 남양주 봉선사
민족정기 서린 도량…최근 조성 미륵석불 ‘눈길’
경기지역 북부 관할하는 교구 본사
조선시대에는 세조 위한 원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근거지
대웅전 한글 현판 ‘큰법당’ 유명
봉선사 전경. 72x40cm, Pen drawing on Korean paper.
서울 근교의 국민 휴식처인 광릉과 광릉수목원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남양주 봉선사는 주차장부터 널직해서 넉넉한 느낌이다. 아마도 찾는 이가 많은 점을 배려한 것으로 보이는 데 ‘운악산 봉선사’라고 현판이 걸린 화려한 일주문은 네 개의 석주가 받치고 있다. 최근 조성한 대형 석조미륵부처님은 자비로와 기도객이 붐빈다.
일주문을 지나면 사찰의 중흥에 기여한 고승들의 부도들이 보이고 연잎으로 가득한 큰 연못이 있어 7~8월이면 화려한 연꽃이 장관을 이룬다. 봉선사를 찾았을 때도 한 여름이어서 화려하게 만개한 연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봉선사는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언문을 제작한 장소로 태허스님 등 관련자가 체포되었던 근대 역사의 흔적지이기도 하다.
사찰 입구에 있는 2층 건물 청풍루는 현재도 설법공간으로 사용 중이라 하는데 원래 이 자리에는 한국전쟁 전까지 해탈문과 천왕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절 마당으로 가는 길에 정희왕후가 심었다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절의 역사를 간직한 듯 수많은 전란에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일반 사찰과 달리 금강문이나 천왕문이 없이 조선시대 양반가옥이나 재실처럼 솟을대문이 있는 출입문이 법당으로 가는 문이고 대문 양쪽의 행랑채 형식의 숙소가 마련되어 신도들이나 손님이 묵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지금은 스님들이나 손님이 머무는 방으로 쓰이는데 원래는 광릉을 방문한 왕실 인사들의 수행원들 숙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 보살상이 있는데 길상사에 있는 작품을 만든 최종태 원로 조각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봉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고려 광종 때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창건하여 운악사라고 하였는데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를 추모하여 인근에 있는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중창한 뒤 봉선사(奉先寺)로 바꾸어 부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동종을 같은 해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봉선사는 한양 외곽이다 보니 많은 수차례의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한 때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으로 융성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지만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뒤 화엄스님, 운허스님, 월운스님의 재건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희왕후가 중창했을 당시 현 위치에 세워졌고 1970년 중건하면서 큰법당이라는 현판을 단 것이라 한다. 큰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글 현판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 놓아 이채롭다.
그리고 큰법당 앞에는 운허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3층 정중탑이 있어 봉선사 전경의 중심에 자리한다. 김천 금오산 자락에 있던 신라시대 갈항사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전되어 있는데 이 탑은 그 원형을 참고해 조성한 것이라 한다. 큰법당 오른편에는 5칸짜리 규모의 큰 지장전이 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어실각으로 봉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오른편에도 5칸짜리 관음전이 있어 사찰의 규모가 컸음을 짐작케 하는데 당시의 모습은 아니고 한국전쟁 때 소실되고 두 법당 모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설법전 방향에서 큰 법당 중심으로 봉선사의 전경을 바라보며 전체적인 파노라마 광경을 펜화로 담았다.
사찰에는 많은 당우들이 보이는데 스님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 방적당은 법당 오른편에 있고, 운하당은 법당의 왼편에 있는데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고 하며, 이외에도 당우들이 많아 절의 규모가 꽤 크다는 걸 실감한다. 새로 지은 선열당도 신도들을 위한 공간이라 한다.
특이한 ‘판사관무헌’이라는 건물은 왕실 위패를 모신 어실각의 관리로서 주지가 집무했던 장소라 하니 왕실의 원찰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절 입구 우측에 종각이 수려함을 뽐낸다. 여기에는 보물로 지정된 조선초기 작품인 봉선사 대종이 걸려 있다. 봉선사가 조선시대 승과시험을 치루었다는 표지석도 세워져 있어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고승들이 여기서 배출되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최근 조성한 미륵불. 40x72cm, Pen drawing on paper.
연못가에는 공원처럼 깔린 잔디밭에 해태상, 오채현 석조각가의 불상 석조물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휴식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연못가를 산책하고 카페를 이용하는 시민이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랬다. 템플 스테이를 하는 당우들을 뒤로 한채 연못가에 우뚝 세워져 있는 석조 미륵불의 모습이 보인다. 최근 점안식을 한 오채현 석조각가의 작품인데 온화한 미소가 퍼지는 모습에 반해 펜화에 담았다.
이외에도 금으로 장엄한 약사여래 부처님이 모셔진 전각이 있는데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정자 형식의 누각에 모셔져 있어 어디서나 보이도록 함으로서 시민 품에 가깝게 놓여진 부처님의 모습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자주 가 봐도 언제나 편안한 서울 근교의 명찰이라 가을에 다시한번 기도드리러 가고 싶은 곳이다. usikim@naver.com
[불교신문 3735호/2022년9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