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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운동을 일으키자
(삶의 한길) 信天 함석헌
- 한길이라 했다. 대(大)인 동시에 또 일(一)이다. 삶이란 하나 밖에 없는 유일(唯一)의 길이요, 운동이다. 그러므로 대도(大道)다. 그 대도(大道)가 곧 평화의 길이다. -
주간
나는 지난 5월 8일 장로교신학대학의 초청에 따라 그 대학원에서 열렸던 평화 세미나에서 주어진 제목인「한반도에 있어서의 평화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라는 제목아래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 세미나는 아마 두 달 동안이나 계속해서 매주 월요일마다 열렸던 것으로서 거기 나왔던 강사도 여러 사람이었는데 그 중에는 정부와 여당의 중요 인사들도 몇 사람 있었다. 원장인 한철하 박사의 말에 의하면 그는 특별히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참고하려고 그같이 초청한 것이었는데 그들의 결론은 일치해서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나는 내 강연을 마치고 난 뒤에 들었지만 그것을 들음이 없이 나는 평화운동은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이 글은 대체로 그 때에 했던 말에 제목을 갈아 붙인 것이다.
나 다음에도 강사 두 분이 더 말씀을 했을 것이고 그것이 다 끝난 뒤에 전체 대학원생의 종합 대토론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못 들은 것이 유감이다.
불가능의 가능
나는 내가 평화운동은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했지만 더 자세히 말한다면 나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설명하잔 것,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다는 그 방법을 내놓자는 것이 말하는 목적이 아니었다. 평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이 내 말의 초점이었다. 평화는 내게 있어서 하나의 논(論)이 아니라 신조다. 여기 제목을 삶의 한길이라 한 것도, 지난 1월에 평화문제를 두고 수련회를 했는데 또다시 이 문제를 다루는 것도 그 까닭이 여기 있다.
평화운동이 가능하냐 하고 문제 내놓는 그 태도부터가 잘못이라고 나는 본다.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의 길이지 계산의 길이 아니다.
나 같은 것에도 혹시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생(生)은 선택을 불허 한다”는 것이다. 살 수 있으면 살고 살 수 없으면 말자는 태도는 사는 태도가 아니다. 생(生)은 그렇게 한가하고 뜨뜻미지근한 것이 아니다. 살고 난 뒤에는 쉽고 어려움도, 좋고 언짢음도, 잘 잘못도 있겠지만, 삶의 뿜어대는 불길 속에는 그런 것 다 있을 여지가 없다. “생자(生者)는 불가불생 (不可不生)이요, 사자(死者)는 불가불사(不可不死)다.” 필연이다. 절대다.
그것을 깨닫는 데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다.
나라 하고 내 것이라 하며, 크고 작은 모든 싸움이 그 때문에 일어나지만, 모두 다 망상이다. 나의 뒤에는 언제나 절대의 명령이 서 있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이라 한다. 생(生)은 명(命)이다. 삶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이요 주장이다. 내가 살았을 때, 그것은 벌써 단순히 “살아 있다”가 아니라, “너는 살아라!” 하는 명령이다. 듣고 싶으면 듣고, 듣고 싶지 않으면 아니 듣는 따위의 인간의 명령이 아니라, 아니 들으려 해도 아니 들을 수 없는, 생각하기 전에 벌써 복종하고 있는 절대의 명령이다.
인생이 행복스러울 것 같아 살고 싶어서 나온 세상이 아니었다. 한국 놈이 되고 싶어서 내가 천하만국(萬國) 중에 한국을 택해서 나온 살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생이 맛이 없다 해서 살기를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한국이 싫다 해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싫으면 그만둘 수 있고 버리면 버려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망상이다. 그 망상 때문에 모든 비겁하고 악독한 싸움은 일어난다. 버렸거나 아니 버렸거나 간에 한국 놈은 한국 놈으로 남고, 잘살았거나 못살았거나 간에 인생은 인생으로 선다. 참은 긍지에 있다.
그러므로 한길이라 했다. 대(大)인 동시에 또 일(一)이다. 삶이란 하나밖에 없는 유일의 길이요 운동이다. 그러므로 대도(大道)다. 그 대도가 곧 평화의 길이다. 여러 운동 중에 평화운동이 따로 있고 여러 길 중에 평화의 길이 따로 있는 것 아니라 삶의 꿈틀거림이 곧 평화 운동이요, 평화의 길이다.
평화운동에서 가능 불가능을 물어서는 아니된다.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당위요 의무임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하자는 결심이 있을 뿐이다.
평화를 할 수 있나 가능을 묻는 것은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일이다. 신기하고 재미있지 않은가? 평화는 그 할 수 없는 데가 바로 할 수 있는 데다. 이 긴장 속에서 평화운동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지만 모르는 말이다. 평화는 이 긴장, 이 전쟁의 위협 속 에서만 가능하다. 평화의 나라에 평화운동은 있을 수 없다. 평화는 전쟁의 불꽃 속에서만 피는 꽃이다. 삶은 죽음 속에서만 나오고, 기쁨은 근심 걱정 속에서만 나오고, 사랑은 미움과 싸움 끝에만 나온다. 생명의 가는 길은 처음부터 언제나 그러했다. 늘 불가능의 가능이다.
도리어 천국에서는 평화운동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이 아랫동과 윗동이 서로 따로 놀아 지랄을 떠는 이 반도에는 평화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못 일어나면 망하는데 가능 불가능을 묻고 있겠느냐?
평화운동에 대한 장애
그러므로 평화운동에 대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장애가 있어서 못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모두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그 원인은 성의가 모자라는 데 있다.
그러한 그릇된 생각에서 나오는 장애를 네 가지로 묶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남북의 긴장
둘째, 주위 강대국들의 야심
셋째, 인간의 본성
넷째, 민중의 도덕수준
이제 그 네 가지 조건에 대해 간단히 실명해보기로 한다.
남북의 긴장
전쟁의 불가피, 따라서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남·북이 서로 체제를 달리하는 정권 밑에 적의(敵意)를 가지고 대립이 되어 수십 년을 내려오는 이 현실이다. 더구나 이북 정권의 침략성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대부분의 지식인도 같이 그렇게 인정하는 태도일 것이다. 상당히 인도주의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들도 감히 거기 대해서는 반대를 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절대평화주의로 살아 십자가에 희생이 되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사 하고 기도했던 예수의 제자라는 목사들까지도 “공산당이 있는 한은 전쟁은 불가피”라는 의견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아무도 이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면 반문하겠는데, 전쟁에 의해서는 이 긴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아마 일부러 눈을 감고 제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감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본래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전체의 민중이 아니요 권력욕에 취한 정치업자 전쟁업자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에게는 전체에 대한 성의도 역사에 대한 깨달음도 없다. 오직 폭력과 책략과 선전을 믿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기주장에는 한계가 없고 그 싸움에는 끝이 없다. 그들의 하는 대로 내맡긴다면 민족과 강산의 밑천을 건질 수 없을 것이다. 사나운 짐승은 본래 둘 다 죽을 때까지 싸움을 그치지 않는 법이다.
무력통일이라 할 때는 지금 있는 정권 중의 어느 하나가 저쪽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오늘의 전쟁은 혼자 하는 전쟁이 아니요 세계적으로 같은 전쟁업자들이 서로 흥정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하나의 무너짐으로 끝을 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 나라 남의 나라를 구별할 것 없이 전쟁이 계속되어서만 번영하는 족속들이다. 오늘 베트남의 참혹한 현상이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보면서 인간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무력통일을 주장할 수 있는가?
통일이 되는 오직 하나의 길은 평화의 민중이 깨어 일어나는 평화 운동의 길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쟁업자들조차도 겉으로는 ‘공존공영’ ‘탈(脫)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않던가? 탈(脫)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본래 이데올로기란 그 정치업자들이 민중을 강제로 끌어 묶기 위해 내세운 구호였는데 이제 탈(脫)이데올로기 소리가 나오는 것은 세계적으로 민중은 깨어 자기네의 이해가 세계적으로 서로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같은 설명으로는 더 이상 묶어둘 수 없게 됐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물론 민중이 일어나 평화적 통일을 하는 것은 많은 희생을 내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무력통일의 소리를 곧이들었다가 전체가 망하거나 남의 종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다.
또 만만 가정을 하여 무력으로 어느 한 정권 밑에 묶인다 해도 그것이 어찌 통일이겠는가? 봉건시대나 민족주의 시대는 또 모른다, 적어도 지금은 사회정의 없이는 민족도 없고 문화도 없다.
그러므로 남·북의 대립 긴장 때문에 평화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주위 강대국들의 야심
평화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그 다음 내세우는 이유는 우리 주위에는 큰 나라들이 있어 그것들이 다 야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평화주의로는 절대로 나라가 서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이다.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미국도 다 우리보다는 훨씬 크고 강하고 부한 나라들이다. 우리만이 그 틈바구니에서 맹장처럼 꼬부라져 달려있는 조그만 반도에 살게 됐으니 역사가 평탄할 수 없었다. 그런 처지에 있어서 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강은 물질적인 힘의 강일 수는 없다. 그것은 비례가 너무 아니되기 때문이다. 소위 ‘부국강병주의’로 되지 않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다.
맹자는 이러한 국제관계를 말하면서 “큰 나라를 가지고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즐거워하는 일이요, 작은 나라를 가지고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이다. 하늘을 즐거워하는 이는 천하를 가눌 수 있을 것이요, 하늘을 두려워하는 이는 제 나라를 가눌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우리는 작은 나라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 틈에 끼여 그 나라를 지켜가는 길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 곧 분수에 넘게 큰 나라를 흉내 내어 어리석은 모험을 하지 말고 마땅히 지켜야 하는 천하의 공도(公道)를 지켜가는 길이다. 그러면 그 야심 있는 큰 나라들로서도 어떻게 못한다는 말이다.
그 외천주의(畏天主義)를 요샛말로 하면 평화중립주의라 할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크지 못한 것과 지정학적으로 위치가 좋지 못한 것과 천연자원이 많지 못한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을 억지로 면하려고 부국강병주의를 쓰다가는 소와 크기를 비하려 하다가 배가 터져 죽는 개구리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요, 가장 어진 길은 사나운 나라들의 길을 따를 것 없이 겸손히 중립의 길을 지켜가는 길이다. 그러면 실지로 역사에서 늘 보듯이 강대국들은 저희끼리 힘의 균형이 잡히어 도리어 그 어느 하나의 침범을 막아주게 되고 우리는 화가 복이 되어 속으로 높은 정신문화를 발달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평화운동은 정신적 강자의 자리에 서지 않고는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지금은 대국주의가 없어지려는 시대다. 실지로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비교적 실속 있게 행복스럽게 사는 나라는 결코 강대국들이 아니고 모두 자그마한 평화주의의 나라들이다. 지금 세계정세가 어려운 것은 그들 작은 나라 때문이 아니고 삼대니 사대니 하는 강대국들 때문인데 그 깊은 속을 분석해보면 고민이다. 그들은 지난 날 남의 피를 빨아먹고 쓸데없이 비대했던 그 틀거리를 유지하노라 고민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오늘은 중공, 내일은 소련을 찾아다니는 닉슨의 고민이 얼마나 하며 원하지도 않으면서 그 닉슨으로 나라를 대표해 보내지 않으면 아니되는 미국 민중의 고민은 어떻겠나? 소련도 일본도 중공도 해부해놓고 보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의 배에 칼을 능히 대어 속에 든 병을 따내는 것은 다시 살릴 수 있는 성의와 확신이 있는 의사이고서야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보면 그저 위험한 일로만 보이듯이, 문명의 분석도 그럴 것이다. 현실에 애착하는 사람들은 이 강대국의 고민을 모를 것이요, 알면서도 무서워 눈을 감으려 하겠지만, 앞에 새 길을 보는 사람은 사정없이 파헤치고 살길을 제시해줄 수 있다. 그런 눈으로 볼 때 현대 강대국의 끝은 멀지 않다. 그것을 뒤에서 모방하려는 약소국의 어리석음이야 말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말로는 이상이니 공상이니 하지만 세계의 모든 민중의 가슴 속에 하나의 나라가 어렴풋이나마 이미 있는 것은 사실이요, 좀 앞서고 뒤짐의 차이는 있어도 지역사회의 자치가 차차 늘어가는 것만이 이미 대세 아닌가? 지역사회의 민중이 완전히 깨어 자치할 때 강대국이란 도깨비가 어디 다시 있겠는가?
그렇게 볼 때 강대국의 야심 때문에 평화주의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약자는 새 시대를 먼저 보아서만 살 수 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다 할 때 그 적(適)은 이빨이 날카롭고 발톱이 강한 것이 아니었다. 몸집이 큰 것조차 아니었다. 평화 속에 잠잠히 생각할 줄 아는 것이다. 남을 반드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살 길을 새로운 곳에서 찾는 신비로운 믿음이었다.
앞으로는 원수의 나라 없다. 그렇게 돼야 한다. 될 것이다.
국가지상주의, 정치만능주의가 없어진다. 그런 때에 부국강병 못한 것이 무엇이 한스러울 것 있나? 더 좋은 것이 있다.
인간의 본능
그 다음 학문을 했다는 사람들로서 평화주의에 반대하는 이유의 가장 강한 것은 인간 본능에는 싸우려는 버릇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사람이지만 마음처럼 사람을 속이는 것이 없다. 먹은 마음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마음이 바로 되면 천하 어디라도 마음 놓고 갈 수가 있지만 마음이 비뚤어지면 이웃집에 온 손님이 간첩으로 뵌다. 불인(不仁)한 생각을 가지면 신의개적(身外皆敵)이지만 인(仁)을 내 속에 품으면 천하무적(天下無敵)이다.
잘못이 당초에 다원에서 시작됐다. 사실은 다원이 그런 것 아니고 그의 말을 잘못 해석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그가 소위 생존경쟁이란 말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소위 약육강식의 정치철학이 나왔다. 물론 다원 전에도 약육강식주의가 있지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근대 서양식 정치처럼 그렇게 그것을 아주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횡행천하(横行天下)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우선 차분히 역사를 살펴서 이 현대의 그릇된 정치사상이 반드시 늘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알아두어야 한다.
지금은 진화론도 상당히 나아가서 이미 생존경쟁설은 그대로서 있지 않다. 전에 모르던 것을 첨으로 발견할 때는 언제나 속기 쉬운 법이다. 맨 첨에 잡히는 것을 유일의 진리로 알고 강조하기 쉽고 또 한 번 권위 있게 주장하면 세상은 쉽게 따라서 하루아침에 들판의 불이 돼버리기 쉽고, 되면 끄기가 참 힘들지만, 그래도 불은 잡히는 물건이다. 수정 아니되는 학설 없다. 지금은 생존경쟁이라기보다는 생(生)은 서로 협조하는 데서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 도리어 대세다.
그렇지만 거기 일부러 귀를 싸매고 듣지 않는 것은 정치업자들이다. 그것이 자기네를 변호하고 민중을 속이는데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미 사라진 사상이 고약하게도 소위 정치계라는 데서는 아직 통용이 되고 있다. 학문은 늘 앞서는 것인데 지배자들은 자기네의 이익을 위해 짜고 들어서 계획적으로 악용하기 때문에 학문이 그 본뜻 아니게 민중을 해하는 일이 많다. 그때에 정신 차려야 할 것은 민중이다. 생산자도 필요에 응해 만들고 수용자(需用者)도 필요에 응해 구하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직결되면 별로 문제가 없는데 거기 필요에 응한 것이 아니고 우연한 기회를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장사치가 들어서 농간을 하면 경제에 파란이 생기듯이, 학문도 필요에서 나왔고 가르침을 구하는 민중도 실 살림의 필요에서 하는 것이지만 그 중간에 아무 노력 없이 불로소득으로 남의 힘들여 얻은 것을 나서서 말 몇 마디하고 뺏으려는 소위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나서면 여러 가지로 악용하게 된다. 정치의 필요를 몰라서 하는 말 아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참 정치가는 새벽하늘에 별같이 드물었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지배를 목적 하는 도둑들이었다. 인간 본능이다 본성 이다 하지만 본성이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적 발달은 가정에서 시작인데 가정은 결코 폭력이 다스리는 곳도, 꾀가 다스리는 곳도 아니다. 사랑이 다스리고 불쌍히 여김이 다스리는 곳이다. 인간이 만일 다 정치가가 됐다면 인류 멸망한지 벌써 오랠 것이다. 이날껏 정치자(政治者)들이 역사를 도둑질하여 역사를 자기네가 이끌어온 것처럼 비꼬아서 역사를 썼기 때문에 인간이 다 그런 줄 알고 살기 위해 자유의 어느 부분을 죽이고 참아왔지만 이제 학문과 민중이 직결되는 오늘 그런 협잡 농간은 있을 수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간은 본래 악한 것 아니다. 싸우고 잡아먹는 것이 인간 아니다. 도둑하는 것이 인간 아니다. 도둑질하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려고 나섰노라는 것은 도둑놈인 정치자(政治者) 자기의 말이고 인간은 결코 본래가 도둑 아니다. 정치가 도둑을 만들었다.
생각해 보라, 막막대지(漠漠大地)와 호호장천(浩浩長天)에 국경이란 것이 어디 있겠나? 정치한다는 도둑들이 인위로 그것을 만들고 모든 자유의 인간을 도둑으로 만들었다. 지배자들은 정치 없으면 못산다 하지만, 아니다. 정치 있기 전에 이미 사회 있었고 문화 있었다. 종교도 있었고 시도 음악도 그림도 있었다. 생각하는 것을 정치가 가르쳤던가? 농사와 기계 만들기를 정치가 가르쳤던가? 아니다. 그것이 다 있은 후 정치가 도둑질하기 시작했다. 만일 정치가 이처럼 타락되지 않고 순전히 가름새 하는 것을 대신하는 그 본뜻대로 있었더라면 인간은 훨씬 더 진보했을 것이다. 오늘 인류가 당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정치문제인데 그것을 만든 것은 결코 평화에 살기를 본바탕으로 하는 민중 곧 씨알이 아니고 정치가들이다.
그러한 불행한 역사과정에 있으면서도 선(善)은 역시 이겼다. 그래서 군주, 영웅, 군인들의 싸움이 쉬는 날이 없었는데도 씨알은 그 밑에서도 견디며 선한 노력을 쌓아 인도사상(人道思想)은 발달했고, 세계가 하나 되는 단계에 들었다. 이제 이 인간사회는 정치의 분립주의, 배타주의에도 불구하고 유기적인 인격관계에 들었다. 그러므로 이미 서로 떨어지거나 그중 어느 부분을 무시하고는 전체가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라! 미국이 반드시 성인(聖人)정치의 나라가 아니어도 인도, 아프리카, 남미의 궁핍을 눈감지 못하고 중공깐에 넉넉해서 하는 것 아니지만 남의 나라를 도우려 하지 않던가? 울면서 겨자 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겨자는 울면서까지 먹지 않아도 좋을지 몰라도 선(善)은 울면서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울면서야 선은 할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을 어떤 놈들이 감히 본성이 악하다, 싸움은 본능이 하는가?
인간 본능 때문에 평화 아니된다는 말 거짓말이다.
민중의 도덕수준
인간 본성에 관하여는 이미 평화적인 것을 말했지만, 그것을 인정 하면서도 현실의 우리 민중을 내다보고 거기 어려움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이 평화주의의 옳은 것 을 인정하면서도 이 정도의 우리 민중을 가지고 능히 평화통일의 큰 사업을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의심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의 병, 당파주의의 병이 골수에 든 사람들이다. “내 발등의 불을 끄고야 남의 발등의 불을 끄겠다”는 이 민중, "굿이나 보다 떡이나 얻어먹겠다”는 이 민족,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이 인간들을 가지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 같은 평화 통 일의 어려운 일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살신성인”(殺身成人) 소리를 말로는 잘 알면서도 동무들의 참혹한 꼴을 고쳐 보려다 못해 분신자살을 하는 젊은것이 있어도 만장 하나 뜨끔하게 보내지 못하는 유 교, 천도교, 대종교, 300만 400만 교도를 자랑하면서 베트남전쟁 하 나 반대할 줄 모르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 하나 못 내는 이 불교, 기독 교, 천주교 이 사람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권이 없는 공산주의 이북에는 가볼 것도 없고, 민주주의라는 이 남쪽에서조차 정부 세운 이래 30년이 되어오는 오늘 아직도 공명선거는 한 번도 못 치러본 이 사회, 막걸리 한 잔에도 민권을 팔고 돈 몇 푼에도 파는 또 그나마도 못 받고 끽소리 한 마디도 못하고 내 자유를 뺏기며 뺏기면서도 뺏긴 줄도 모르는 이 사람들을 가지고 평화운동으로 정치악 사회악을 물리쳐낼 수 있을까? 삼국시대의 버릇을 아직 못 놔 경상 도는 경상도만 알고 전라도는 전라도만 알며 고향에서 쫓겨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는 설 곳이 없으며, 이조시대의 병 아직도 아니 떨어져 당파주의는 종교 교육. 경제 ‘예술‘정치를 초월해 모든 데서 지배의 술잔을 들고 있는데 이것으로 능히 하나의 평화전선에 나설 수 있을까?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조차 권력이라면 반드시 칼을 뽑고 올가미를 쳐들지 않아도 말만 듣고도 벌써 과천서부터 네 발로 기기 시작을 하여 언론도 집회도 연구도 결사도 다 없어졌는데, 잡지 하나 하려면 인쇄소를 얻기 위해 600만 서울 시가를 다 뒤져야 하고 바르고 빠르다는 체신정치에 잡지를 부쳐도 하늘로 날았나 땅에 잦았나 간곳을 알 수 없으니 이러고도 평화는커녕 무슨 운동이 도대체 가능할까?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관하지 않는다. 병이 들었지만 병이 생리(生理)의 본질은 아니다. 타락이 됐지만 타락이 정신의 바탕은 아니다. 바람이 불면 바다는 억만고(置萬古)의 잠에서 깬다. 그리고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한 순간 에 역사의 묵은 깍지를 벗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막다른 시대지만 막다랐기 때문에 비약의 시대다. 이 민중은 비약을 할 것이다. 아니하면 망하는 것을 어쩌나? 모든 시대는 비약으로 왔지 논리 계산으로 오지 않았다. 우리는 좋은 경험이 있다. 늙은이에게는 3·1의 경험이 있고, 장년에는 해방의 경험이 있고, 청년에게는 4·19의 경험이 있다. 병이 들기도 쉽지만 낫기도 쉽다. 낙망할 것 없다. 낙망하는 자는 죽는다. 죽을까 봐 겁이 나면 비겁하고 악독해진다.
할 일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서로 사람으로 대접해주라.
둘째, 언론자유 완전히 지켜라.
세째, 공동체 살림의 훈련을 쌓아라.
그러면 새 감격 속에 새 국민의 자격 하루아침에 찾을 것이다. 쓸데없는 신중론, 거짓부리 점잔론, 그것은 다 비약하려는 민중의 발목 에 쇠뭉치를 달려는 정치배의 장난이다. 민중을 믿어야 한다. 민중을 아니 믿으면서 하늘을 어떻게 믿으며 도리를 어떻게 믿으며 과학을 어떻게 믿겠는가? 생명의 씨알이요 역사의 씨알인 민중을 무조건 믿지 못하면 종교도 도덕도 과학도 다 거짓말이 되고 만다. 믿으면 믿어준다. 정치야말로 믿음으로 해야 할 것인데 민중을 믿지 않기 때문에 민중이 정치를 또 믿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도둑질이 되고 폭력이 나오고 전쟁이 터진다. 속더라도 민중을 믿는 수밖에 길이 없다. 민중이 속이는 법 없다. 속여도 한두 놈이지 전체 민중이 속이는 법은 없다. 속이고 전체에서 떨어질 때 그것은 이미 씨알이 아니고 죽은 살점이다.
그러므로 국민의 정신수준이 낮다는 말에 속아서는 아니된다.
평화의 정말 방해자
그런 것이 다 평화의 방해가 아니다. 남한이 평화에 방해될 리도 없고 북한이 될 리도 없다. 정권 같은 것, 30년 같은 것 걱정되지 않는다. 생식세포 속에 54개의 염색체가 있는 한 한국 사람은 남에 있어도 북에 있어도 언제도 한국 사람임에 변함이 없다. 이웃 나라가 걱정될 것도 없다. 그 나라와 그들의 정치와는 하나가 아니다. 정치는 악하지만 그 나라는 역시 인간의 나라다. 인간본성은 더구나 걱정이 없다. 거짓말하는 선전이 나쁘다. 금방 말한 대로 국민의 정신 정도 걱정할 것도 없다.
정말 걱정은 국가주의에 있다. 평화를 방해하는 것은 세계에 통하는 격언이 있는 대로 정치가들이다.
갈라가지고 해먹는다(Devide and rule)
그들의 목적은 전체가 사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문화가 발달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해먹는 데 있기 때문에 서로 갈라 싸움을 붙인다. 전체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전체에서 갈라지면 어리석어진다. 그리고는 싸움을 하고 내 편이다, 원수다, 의(義)다, 악 (惡)이다 하고 서로 시비한다. 그러면 지배자들은 바로 민중을 위하기나 하는 척 조국을 건지자, 계급을 해방하자, 일치단결해라, 정의는 우리에게 있다, 오랑캐를 물리쳐라, 하며 싸움을 붙여놓고 자기네는 죽지 않을 안전한 자리에 앉아 어리석은 것들을 시켜 훈장까지 붙이게 해가면서 명군(名君), 영웅(英雄), 영도자 노릇을 하며 앉아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철학으로 하면 전쟁은 없어서 아니되고 상벌도 없어서 아니되고 차별도 없어서 아니된다. 그러한 세상에 평화는 있을 수 없다. 한번 평화가 없어지면 그것이 본성인 양 잘못 생각하여 점점 더 악 바로 이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 역사의 줄거리로 이제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 때가 왔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기 때문에 서로 싸우면서도 오히려 살아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전쟁이 그 극점에 이르렀고 갈라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다스릴 수없이 과학과 기계가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그러므로 이제 속이던 지배자들의 속셈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날이 왔다.
그들이 민중을 속이기 위해서 쓴 또 하나의 악한 방법은 향락주의의 선전이다. 예로부터 민중의 타락이 향락주의에 있는 것은 잘 아는데 그 향락주의는 정치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모든 타락이 옛날 왕궁에서 나온 것은 다 알지 않는가? 임금이 하면 영광이라 하고 귀족이 하면 고상이라 하고 중류급에 내려오면 풍류라 하다가 민중에 내려오면 나라가 망하니 타락이라 했다. 우리는 세계를 망친 전쟁이 제국주의에서 나온 것을 잘 알지만 제국주의는 곧 기업주의인데 소위 기업이란 사치품과 무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 대부분이다. 생각해보라. 미국의 번영이 그것 없이 있겠나? 일본의 갑작 진출이 무기와 사치품의 제조 아니고 됐겠나? 이것이 세계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이다. 그런데 이제 그 기업주의가 차차 비명을 올리기 시작하는 시대가 오게 됐다. 언제나 약소민족이 있어 그 상품의 시장이 돼주고 전장(戰場)이 돼주는 것을 예상하고야 되는 그 기업주의가 세계 민중의 자각에 따라 막다른 골목에 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쪽으로는 애국주의의 선전으로 이웃 나라 사이를 이간을 시키며 한쪽으로는 향락주의를 선전해 민중의 정신력을 약화시켜 그 사이에서 권력과 부를 독점 하던 국가주의 정치가들의 속셈이 차차 드러나게 되었다. 이래서 그들은 단말마의 발악을 하여 사양(斜陽)에 든 그 영화(榮華)를 돌이키려 애를 쓰게 됐다. 그것이 오늘의 세계를 휩쓰는 노골적인 실리주의 정치다.
2천년전 서양문명을 건지려고 포악한 로마 제국과 평화의 싸움을 싸웠던 초대 기독교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평화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우리의 싸움은 육체의 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힘을 대적하는 것이요, 이 어두운 세계의 정권과 권력자를 대적하는 것이요, 하늘에 있는 초인간적인 악의 세력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장을 취하라. 그러면 심한 환란에서도 굳세게 견딜 수 있고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자, 굳세게 버티고 서라.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로 흉배를 붙이고, 평화의 복음으로 신을 삼아 실족함이 없게 하고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들어 그것으로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라.』
이 말은 지금도 그대로 쓸 수 있는 말이다. 예나 이제나 세계 혼란의 책임은 정치에 있고 그 정치 뒤에는 폭력주의 강제주의의 사상이 서있다. 그것이 국가주의다. 좀더 자세히 말해서 국가지상주의 흑은 정부지상주의다.
그들은 말할 때마다 일부러 나라와 정부를 혼동시킨다. 나라는 하나의 산 전체요 정부는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데 스스로 전체인양 속여 민중을 지배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전체가 아니고 집단체(集團體)다. 이기주의가 가장 높은 형태로 나타날 때 집단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다수라 하여도 전체는 아니다.
개인이 인격적으로 참 자각을 가질 때 배타적이 아니므로 한 사회 안에 있어서 개인과 개인의 충돌이 없으나 그 자각이 없을 때 이기주의에 떨어져 서로 충돌하게 되듯이, 한 나라도 그 안의 민중이 하나의 전체의식으로 자각될 때는 배타성이 없으므로 세계 안에 있어서 나라와 나라의 적대가 일어나지 않지만 그 자각이 없을 때는 하나의 집단주의로 떨어지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다.
이제 평화의 대적이 무엇인가가 밝혀졌다. 그것은 이기주의, 분리 주의, 차별주의, 집단주의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종합체인 국가지상주의.
평화운동에 필요한 조건
그러면 평화운동을 일으키는 데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원틀을 말하면 조건이 있을 것 없다. 불가능 속에 가능을 만들어내는 생명의 운동에 조건이 있을 리 없다. 절대의 생명 앞에 무슨 조건이 있을 수 없다.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이런 조건이니 가능했고 저러한 조건이니 불가능했다고 설명을 붙일 수 있지만 행동의 그 순간에는 어떤 제약도 규칙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말은 이래서 있다. 두루뭉수리로 텅 빈 무(無) 가운데 그저 “있어라!” 하니까 있어졌다고 했고, 있어지니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평화가 어떻게 오나?
대기(大氣)를 마시고 가스를 뱉으니 평화요, 먹을 것을 먹고 마실 것을 마시고 속에 담긴 찌꺼기를 내보내니 평화요, 햇빛을 보고 웃고 바람을 쐬고 죽지를 펴니 평화다.
아니다. 마시고 뱉으니 대기가 있었고 먹고 마시고 내보내니 밥이요 물이었으며 웃고 나니 햇빛이요 펴고 보니 바람이었다.
물질 속에 자기를 나타냈다면 냈다 할 수 있지만 그런 것 아니라 자기를 나타내니 산이 되고 바다가 된 것 아닌가? 빛이 어둠을 삼켰다면 삼켰다고 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빛의 리듬이 어둠 아닌가? 말씀이 육(肉) 속에 파고들었다면 들었다 할 수 있으나 그보다도 새 말씀을 하니 옛 말씀이 육이 아닐까? 선(善)이 악(惡)을 이긴다면 이긴다 할 수 있지만 도리어 자라는 정신의 밑둥이 악(惡) 아닐까? 생(生)이 사(死)를 삼켰다고 하지만 속을 말한다면 그저 스스로 좋아서 빚었다 뭉겠다 하는 것 아닐까?
그저 기쁨이요 평화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 사는 이 인간으로는 노상 그럴 수만은 없다. 사람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반사하는 것이 생명이다. 반자(反者)는 도지동(道之動)이다. 자기 지은 세계를 내면화함으로써 정신은 스스로 새로워진다.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른다. 설명해 본 조건을 그대로 미래에 가져다 맞출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해보는 동안에 우리 속에는 새 창조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생명의 평화의 걸음의 발자취를 쫓아본다면 이렇게 네 가지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전체의식.
둘째, 종교적 신념.
셋째, 민족의 특성.
넷째, 우주사적 비전.
전체의식
평화운동은 전체의식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다 하는 자각이 모든 가치 활동의 근원이 된다. 전체의식 없는 것은 도덕인간 정신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 하는 그 우리는 세 개의 테두리로 표시 할 수 있다. 가장 작게는 가정이요, 가장 크게는 우주요, 그 중간에 국가 사회가 있다. 표현되는 테두리의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그 하나다 하는 통일의식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그 의식이 없을 때 그것을 이루는 각 분자는 이기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배타적이 되므로 거기는 싸움이 일어나고야 만다.
우리 민족은 본래 단일민족이므로 이 전체의식을 가지는 데서는 쉽게 되어 있다. 핏줄도 하나, 말도 하나, 풍속도 하나기 때문에 ‘우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되어 있다.
저 먼 옛날에 올라가면 아마 우리도 여러 요소가 섞이어서 됐을 것이다. 그러나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거의 차이를 알아볼 수없이 단일적으로 돼버렸다.
그러나 아주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큰 불행은 삼국시대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때에 민족적인 통일국가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거기 실패했기 때문에 그 후 오늘까지의 고난의 역사인데 삼국시대 실패의 속 원인을 찾는다면 완전한 통일의식으로 그전 부족시대의 습관을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것같이 이 20세기 민주사회에 있어서도 아직 떨어지다 남은 깍지가 붙어있어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면 우리는 단일민족이기는 하면서도 전체의식을 가지는 데는 상당히 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남·북 분열도 그 내적(內的) 원인은 거기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겉으로 볼 때 물론 우리의 본의 아니게 밖에서 오는 힘 때문에 된 불행이지만, 자주 자유하는 것이 사람인 담에는 원인을 전혀 밖에다만 돌릴 수는 없다. 전체 민중이 결코 분열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또 남·북을 따라 이데올로기가 다를 아무런 까닭도 없다. 그런데도 분열이 된 것은 간단히 말해서 민중이 외국세력과 결탁하는 소수의 권력 숭배자들이 이데올로기의 이름을 빌어 선전과 폭력으로 강요하는 집단주의를 용감히 물리치리만큼 전체의식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민족이 다시 통일되려면 이데올로기란 가면을 쓴 그 집단주의를 물리쳐야 하는데 그것을 하려면 먼저 남과 북의 민중 속에 강한 전체의식을 불러일으켜야만 할 것이다.
그것을 하려면 우선 남·북 사이에 교통이 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두 정권은 다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완전한 폐쇄주의를 쓰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우리 할일은 이 남한에서만이라도 우선 민중 속에 전체의식을 불러일으켜 그것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개방적인 정책을 취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공산정권이 아무리 폐쇄적이라 하더라도 이북 민중에도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외국의 원조를 얻어 무력으로 통일하겠다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일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남·북을 가를 것 없이 우리 민중을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30년 가깝게 서로 다른 교육을 받은 것을 걱정하지만 30년은 4천 년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해방 전 40년을 일본 교육 밑에 있었어도 일단 해방이 오니 푸른 강물을 칼로 잘랐던 것과 마찬가지 아니던가? 겉으로 보기에 일본이 다 됐던 것 같았어도 아니었더라. 정말 일본이 돼버리고 만 것이 있으니 민중이 아닌 소수의 권력주의 자들이더라. 그러나 그러한 소수는 전체 민족의 끓는 솥에 들어갈 때 자취 없이 녹아버린다. 전체는 관대한 것이요 뜨거운 것이다.
종교적 신념
평화운동에 나서는 사람은 먼저 그것이 철두철미 정신운동인 것을 알아야 한다. 정신운동이란 말은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은 겉에 나타난 제도 조직을 변경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평화운동은 속마음에 관계된 것이다. 마음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는 첨에 말한 것같이 가능, 불가능의 제약이 없지만 또 성패(成敗)의 가름도 없다. 결과에 상관하지 않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념 없이는 될 수 없다.
종교적 신념이라 했지만 반드시 어느 기성종교의 교리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교리는 도리어 싸움을 일으키는 일이 많은 것을 역사에서 본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라 하지 않고 폭넓게 하기 위하여 신념이라 했다. 신념이 초점이 잡히면 신앙이 되겠지만 신념은 신앙만큼 또렷하지는 못할는지 몰라도 그 대신 탄력성이 있다.
신념은 무조건 긍정하는 태도다. 반드시 설명을 못하더라도 모든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이 있고, 무조건 믿는 통일적인 뜻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의 구원이 약속된다. 성공해도 뜻이 있고 실패해도 뜻이 있다.
그러므로 구원된다. 허망한 것은 하나도 없다. 거기서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강함과 무엇도 용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 나온다. 그것이 평화의 정신 아닌가?
이 점에서 우리 민족이 가지는 고유 종교사상은 참 좋다. 그들은 그것을 하느님이라는 한 말로 표시했다.
이것과 정반대의 극에 서는 것이 당파심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반대의 두 극을 다 가졌다. 첨에 가졌던 바탈을 잊어버렸다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오늘 우리는 제도주의, 결과주의에 빠져 있다. 이것이 또 이 분열의 한 큰 원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잡종교가 많은 것이 한 특색인데 그것도 참 신념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것일 것이다.
하여간 이 정신 상태를 가지고는 평화운동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180도의 차이는 일직선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장 멀면서 가장 가깝다. 율법주의 열성분자인 사울은 누구보다 참된 복음의 사도 바울로 변했다. 당파싸움으로 망한 민족을 세계평화의 사도로 개심시키지는 못할까?
민족의 특성
나는 우리 민족은 그 바탈이 평화적인 민족이요 세계평화운동에 앞장을 설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건국정신에 침략적 영웅주의의 빛깔이 전혀 없는 것이요, 또 실지로 4천년 역사에 침략전을 한 일이 별로 없는 것이 역시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두드러진 증거는 고대 종교사에서 볼 수 있다.
이능화 님은 그의『한국도교사』에서 중국의 도교사상은 사실은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것이 상당히 근거 있는 말 이라고 찬동하고 싶다.
우리나라에는 문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중국의 것을 빌어서 한다면 그 가르침의 요지는 무위(無爲), 자연(自然), 정허(靜虛), 유약(柔弱)이라 할 것인데 그것은 다 평화주의다. 실지로 역사에 나타나 있는 인물을 통해 보아서 더욱 그렇다.
삼국시대 전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 유교의 영향이 상당히 강했던 삼국시대에 있어서도 선도(仙道)사상은 아직도 성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그 전형적 인물을 하나씩 든다면 온달, 검도령, 처용이라 할 것인데 그 셋이 다 선도(仙道)의 선비였다. 그런데 그 사적을 보면 온전히 평화주의자들이었다.
온달이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은 그가 철저한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었고, 처용이 제 아내를 겁탈한 마마 귀신을 죽이지 않고 노래로써 불러 물러가게 한 것도 놀라운 평화주의였고, 검도령은 장양의 청을 받아 철추로 진시황을 박랑사에서 때렸다는 것이 얼핏 보기에 무력주의 같으나 기실은 평화주의였다. 장양의 청을 듣고 그 의거에 나섰다니 이치로 보아 초면에 그랬을 수는 없고 전부터 서로 뜻이 통하는 벗 사이였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장양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도교 신자였다. 그 황석공(黃石公)이라는 것이 그렇고 할일을 다하고는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신선이 되어 갔다는 것이 더욱 그가 도교 신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는 물러갔다는 것이 온전히 공성명수신퇴(功成名遂身退)라는 그 교리를 실천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지기지우(知己之友)인 검도령이 도교 신봉자, 따라서 평화주의자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와 성질이 비슷한 이야기로는 을지문덕의 일을 들 수 있다. 그가 우문술(宇文述)과 싸울 때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물러갔다고 했다. 그래서 수군(隋軍)을 이끌어 청천강을 건너 평양성 밖 30리에 이르러서 반격을 시작해서 수군(隋軍)을 거의 전멸시켰다고 했다. 얼핏 보기에 아주 능란한 군략가 같고, 나도 어려서 역사를 배울 때 선생이 그것은 거짓 패해서 적군을 유인한 거라고 칭찬하는 설명을 해주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아니 그렇다. 그가 반격하려 할 때에 적장에게 보낸 시가 그것을 증명한다. 교묘하게 유인하는 전략을 쓴 것 아니라 그는 평화주의였기 때문에 될수록 살상을 피해서 한 것일 것이다. 계교로 한 것이면 일부러 시를 보내 알릴 리가 없다. 그 시 그대로다.
신기한 계책 천문을 다하고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묘한 산 놓음 지리를 다했구려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싸움 이겨 공 이미 높았으니 (全勝功旣高 전승공기고)
족한 줄 알아 그침이 어떠할까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지족(知足)은 도교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풍자(諷刺)로써 평화주의를 가르친 것이다. 비겁하거나 나라의 위급을 생각 아니하고 멍청할 수 없으니 알리리만큼 알려서 아니 들으면 부득이 반격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본뜻은 될수록 사람 죽이지 말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민족은 근본이 평화민족이라고 단정해서 잘못될 위험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비록 한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잘만 하면 이제라도 평화운동에 앞장설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결코 망상이 아닌 것을 3·1운동과 4·19혁명이 증명해주고 있다. 두 운동이 다 역사 위에 큰 의미를 남기는 운동이 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이 비폭력이었던 데 있다.
세계사적 비전
마지막으로 평화운동에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세계사적인 위대한 비전을 가지는 일이다. 평화운동에 나서는 사람이라고 딴 종류의 성인은 아니다. 무식하고 약한 보통의 민중으로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깊은 속에 잠자는 혼을 불러일으킴 없이는 할 수 없다. 이 민중의 혼에 동원령을 내려 어제의 골목의 범인(凡人)에서 오늘 정신적 십자군의 영웅이 되게 하는 것이 세계혁명의 비전이다. 흉악한 로마 제국의 군대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린 양의 싸움을 싸워 이겼던 초대 기독교도의 힘은 그 하늘나라 이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도들을 전도로 내보낼 때 예수는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들여보내는 것 같다”고 하면서 먼저 그들에게 “복 있다, 복 있다……” 하면서 하늘나라의 헌장을 일러주었다. 그리고는 맨 나중에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해라, 하늘에서 너희 받을 상이 크다” 하고 격려했다. 비밀이 여기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연약하지만 누구나 다 그 속에는 잠자는 전체의식을 품고 있다. 그것이 깰 때 기적은 일어난다. 필시 몸소 그 운동에 참가했던 체험이 있는「히브리서」의 기자는 후진을 격려해서 그 체험을 이렇게 말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다(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을 못한 것이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그 약속을 받지는 못했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고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듣는 사람에게 역사적 릴레이 경주에 책임 바통을 들려준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신이 나지 않을 수 없고 용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위기에 빠졌다. 예수 때에는 잘못 하면 서양 문명이 망하거나 인류 전체가 망할 위험이 있었지만, 이번은 그 정도만 아니라 생명의 씨가 아주 지구 위에서 멸망해버릴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은 무서운 핵무기와 독가스와 병균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평화기구를 세우는 것이 단 하나의 생명로(生命路)다. 이것을 무명의 씨알들에게 이해시켜서만 될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이 생명 진화의 행진이 이 지경까지 이르노라고 얼마나한 세월이 들었으며 얼마나한 희생을 치루었던가? 생명을 위해 무대가 준비되기 위해서는 20억 년의 세월이 들었고 단세포에서 인류가 나오기 위해서는 10억 년의 세월이 들었다. 거기 비하면 소위 문명이란 것은 빤짝하는 전광석화에 지나지 못하는데 이제 그 문명인이라는 것 중의 소위 정치가라는 어떤 미친 것들의 어리석은 불장난에 의해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이 생명의 씨, 아마도 막막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이것을 아주 없애버리고 만다니 그 얼마나 통분한 일이요 무서운 일인가? 인간의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멍청하고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책임을 느끼지 않겠는가?
히브리서의 말이 옳다. 오늘 우리가 의분을 아니 일으키면 이날까지 왔던 모든 고귀한 혼들이 희생으로 쌓아올렸던 모든 것이 무의미에 돌아가고 만다. 그러니 역사가 우리게 가장 소중한 책임으로 맡긴 것 아닌가?
맺는 말
그러므로 이 운동은 신념의 길이요 봉사의 길이요, 자기희생으로만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활의 길인 것이다. 비약의 길이란 말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인류는 이제 어리석음으로 망할지도 모른다. 진화의 과정에서 멸망해 버린 종족은 하나 둘만 아니다. 이 생명의 종자가 아주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망하는 조건이 있다면 육(肉)의 제약이라 할 것이다. 이 정도를 아주 초월한 소위 정신 이라는 정도까지도 뛰어 넘은 보다 높은 단계에 돌진하기 위해 몰아치는 이 궁지(窮地)인지 누가 알까? 그러한 신념만이, 이 생명의 씨가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대의 신념만이 다음 진화의 단계를 위한 새 씨알의 준비인지 누가 알 수 있느냐? 죽어도 죽지 않는 신념만이 그 씨알로 뽑히는 자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약 아닌가? 죽고 다시 살아남 아닌가?
모든 위대했던 종교가들은 멀리서 이것을 희미하게 직감하고 그 내세를 예언 했던지도 모른다.
씨알의소리 1972. 5월 11호
저작집30; 12- 57
전집20; 1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