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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경전 명언
인에 처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스승은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다. 책을 통해 지식을 가르쳐주고, 선현의 지혜를 가르쳐주며, 삶의 도리를 일러주는 소중한 존재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부모형제 다음으로 스승을 중요한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승이라고 항상 옳을 수는 없다. 공자와 같은 성인도 제자와의 대화에서 실수를 하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공자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제자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배움의 기회를 삼는데, 하물며 평범한 인간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따라서 ‘인’을 실천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에 스승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만일 제자된 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스승의 잘못에 동조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공자의 죄인일 것이다. 근래는 스승에 대한 제자의 충심어린 존경 혹은 제자에 대한 스승의 각별한 사랑이 간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낸 학비만큼 배우면 된다는 잘못된 자본주의의 병폐를 습득하여 스승의 존재를 지나가는 범부처럼 여기는 경우가 허다한 듯하다. 또한 제자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어 그저 월급쟁이로 전락한 스승도 너무 많은 현실이다. 사람에게 스승이 없다면 평생 어둠 속에서 헤매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자가 없다면 과연 학문을 누구에게 전수할 수 있겠는가?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인을 양보하지 않는 마음으로 서로를 성장시킨다면, 우리의 미래는 지금보다 조금더 행복하게 되지 않을까!
〔當(당): 당하다. 讓(양): 사양하다. 師(사): 스승.〕 # 출전: 『논어』 「위령공」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
공자의 이 말은 유학이 말하는 도가 인도(人道)요, 유가철학이 ‘인간학’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즉 유학의 도는 ‘자연의 도’나 ‘사물의 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를 의미한다. 이 도는 인간의 본성대로 좇는 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란 사람이 자기의 본성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 본성을 잃으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인도’라고 한다. 공자는 다른 동물이나 사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을 인(仁)이라 말했다. 맹자는 이것을 ‘인의예지’라고 했으며, 성리학에서는 이를 ‘성리(性理)’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본성과 본심의 다양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도는 바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길이요, 인간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일상생활은 도를 떠날 수 없다. 공부하고 밥 먹고 일 하고 사람을 만나는 모든 일에 사람이 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일에 인도가 있고, 그 인도대로 살아가야 군자가 되고 어진 사람이 된다. 철학은 도를 추구하고 도를 실천하는 긴 여정이다. 따라서 진정한 철학은 인간을 떠날 수 없다. 만약 철학이 인간을 떠나 도를 말한다면, 그 철학은 관념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요, 소위 개똥철학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진리론, 가치론, 고원한 형?鵑贊?역시 인간의 삶, 인간의 자유, 인간의 행복과 무관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용』의 이 구절이 현대의 철학이 현실을 떠나 방황하거나 인간을 떠나 진리를 논하는데 대한 경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遠(원): 멀다.] # 출전: 『중용』제13장
잘 시작하고 잘 마치는 사람은 성인일 것이다
학교에서의 2월과 3월은 마침과 시작이 있는 달이다. 2월에 대부분의 학교들이 졸업식을 가져 졸업생들을 상급학교나 사회로 배출하고, 3월 초에 일제히 입학식을 하여 새로운 입학생들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입학하는 학생들은 저마다 새로운 각오와 계획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졸업하는 시점에서 그 각오와 계획을 얼마나 지니고 있으며 얼마나 실천 했는가 되돌아본다면, 시작할 때의 각오를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시작할 때의 계획을 모두 달성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는 『논어』「자장」편에서 “잘 시작하고 잘 마치는 사람은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잘 시작하고 잘 마치도록 권면하는 말이자, “잘 시작하고 잘 마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율곡 선생은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용 책자인 『격몽요결』에서 「입지장」을 맨 앞에 두어 시작할 때에 뜻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작할 때 뜻을 크고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잘 시작하는 만큼이나 중요하고 또 더 어려운 것이 잘 마치는 일이다. 잘 시작하고 잘 나아가다가 마지막에 그르치는 일과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시경에서도 “잘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잘 마치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잘 시작하는 것과 잘 마치는 것을 연결해주는 것은 성실함이다. 성실함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성실함 그 자체이지만 사람은 끊임없이 성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중용』에서는 “지극한 성실함은 쉼이 없다.”고 표현한다. 잎이 모두 떨어진 교정의 나무들이 하늘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이제 파아란 새잎들이 봄의 향연에 나서고 있다. 졸업생들이 떠나간 대학 교정엔 또다시 풋풋한 새내기들이 채워줄 것이다. 아무쪼록 잘 시작하고 잘 마치는 나와 우리, 그리고 한 해가 되길 빌어본다.
[始(시): 처음. 시작하다. 卒(졸): 군사. 마치다. 惟(유): 오직. 聖(성): 성인.] # 출전 : 『논어』「자장」
어째서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위(魏)나라 제후인 혜왕(惠王)은 맹자를 만나자 마자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오신 것은 우리나라에 이익이 될 책략을 가지고 오셨겠지요?”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맹자는 “왕께서는 어째서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마음자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국시대라는 혼란한 시대에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 절대적닌 사명은 부국강병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유세를 접한 혜왕이 국가 이익에 대해 질문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맹자는 이익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 대신에 윤리적 규범으로서 ‘인・의’를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이익추구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을 때 나타나는 사회・국가적인 무질서와 혼란을 맹자 자신은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적대적 인수 합병이나 헤지펀드의 무차별 공략 등은 이익의 무한추구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특정한 집단에 의한 이익추구의 극대화는 건전한 시장경제질서를 교란시키고, 나아가 한 사회와 국가의 전체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 속에서 유지・발전된다. 따라서 정치・경제 시스템은 이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작동되어야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다. 집단과 조??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규정할 때, 조직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맹자의 생각이다. 강압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질서와 조화는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시황의 통일과 멸망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맹자는 리더십의 첫 번째 덕목으로 윤리의식을 제시하면서 리더의 확고한 도덕의식이 한 사회와 국가 안정의 기초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출전: 『맹자』「양혜왕 상」
예의 쓰임은 조화가 귀중하다
공자의 제자인 유약이 말한 이 구절은 ‘어울림’이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덕목에 해당하는 예의의 실질적인 내용임을 지적하는 글이다. 이 글은 둘 이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예의를 인간??바르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질서를 유지하는 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시대 변화에 유기적으로 부응하지 못하는 경직되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는 낡은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와 같이 유학에서 말하는 예의는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상대를 인정하며 시대변화에 합리적으로 부응하는 활기있는 사상이다. 기본적으로 유학에서 말하는 어울림은 ‘동일화[同]’나 배타적인 ‘싸움[爭]’과는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동일화란 나의 주체성이 사라진 상태에서 상대에게 귀속되거나 혹은 상대의 주체성이 나의 주체성으로 흡수된 상태를 말한다. 또한 배타적인 싸움이란, 내가 배재된 상태에서 상대만 존재하거나 혹은 상대를 배척하며 나의 존재만 부각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이 때문에 동일화나 배타적인 싸움의 상태에서는 자기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비민주적인 태도가 만연될 수 있다. 그런데 어울림의 논리는 이러한 동일화나 배타적인 싸움의 논리와 다르다. 어울림은 마치 맛있는 국을 끓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국을 끓일 때, 고추장, 간장, 소금, 깨, 마늘 등을 비롯한 각종 재료를 섞은 다음 알맞게 조리하??좋은 맛을 만들어 내듯이, 서로 다른 성질을 배척하거나 사라지게 하지 않고 혼합하여 조화로움을 창출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다양한 악기의 연합에 의해 하나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어울림 사상은 오늘날 이기적인 욕망 실현을 위해 타인을 경쟁 대상으로 여기며 타인의 인격을 배제하는 현상이 확산되는데서 나타나는 온갖 소외와 갈등 현상을 치유하는 측면에 의미있게 적용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用(용): 쓰임. 和(화): 어울림.] # 출전 :『논어』「학이」
갑옷 만드는 사람은 행여 사람이 상할까를 두려워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옳지 않은 이익을 추구하는 직업을 선택할 경우 사람을 잔인하게 만들 수도 있고 궁극적으로 생명을 해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맹자는 직업을 소중히 여겼다. 즉, 갑옷을 만드는 사람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을까?’에 마음을 쏟는다. 하지만 화살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죽도록 만들어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따라서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가 만드는 화살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고 화살을 만든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목숨을 쉽게 생각하는 반생명적(反生命的)인 경향으로 치닫게 되고, 생명을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확충되기 어렵다. 맹자가 “한 가지 불의(不義)를 행하고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 천하를 얻는 일은 백이․이윤․공자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의한 것이다. 만약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는 것을 가정하고서 한 사람의 무고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본다면, 때로는 천 만 사람의 희생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의(義)에 합당한 리(利)를 추구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이해(利害)에만 밝은 인간을 소인으로 취급하고 가장 경계해야할 존재로 여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익만을 추구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생명 경시 풍조와 사회적 혼란의 근원을 처음부터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函(함): 갑옷. 恐(공):두려워하다. 傷(상):다치다. # 출전 : 『맹자』「공손추 상」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에 위배된다
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중용(中庸)이다. 중용이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공자 역시 “백성 중에 중용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 오래되었다.” “천하 사람들도 평등하게 할 수 있고, 높은 벼슬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도 맨발로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중용은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판단력을 수반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유교적 전통에 따르면, 현명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위정자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반면, 군자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소인(小人)의 경우는 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는 소인이 치우친 판단과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요즘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놓고 전국이 소란하다.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 시기에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를 무리하게 호전시키려다 역풍(!)을 맞은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떤 전문가는 공산품의 수출을 늘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래저래 민생고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로 하여금 거리로 나서게 하는 정치는 분명 좋은 정치는 아니다. 일찍이 공자는 정치를 바람으로, 백성을 풀로 비유했다. 바람에 따라 풀이 눕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의 혼란은 분명 위정자들이 만든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시위에 참가한 대다수 국민들은 선량한 시민들이다.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 떠드는 대로 그렇게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연일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너무나 안타깝다. 안전한 쇠고기를 먹자는 요구가 그렇게도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5가지로 정리한 매슬로우(Maslow)는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다음으로 인간의 ‘안전 욕구(safety needs)’를 언급한 바 있다. 이번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하는 처사는 아닌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정치인들이 말하는 대로 만일 국민들이 잘못된 정보에 의해 오해하고 있다면, 모든 문제를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밝히면 그만이다. 그러나 현재 이 정부는 애초부터 그런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여당 대표가 대통령을 면담하고, 권력 핵심부에서도 자성(自省)의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는 점이다. 부디 더 늦기 전에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기 바랄 뿐이다. 위정자로서 반중용(反中庸)이 아닌 중용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필자 한 사람?맛?바람은 아닐 것이다.
[ 庸(용) : 쓰임, 평상.] # 출전 : 『중용』2장
군자는 푸주를 멀리한다
옛날 맹자가 어진 임금을 찾아 유세(遊說)할 때 제 나라 선왕을 만났다. 제 선왕은 지난날 큰 공업(功業)을 세운 제 나라 환공과 진 나라 문공의 일을 듣고자 했다. 즉 왕이 듣고자 한 것은 부국강병책이었다. 그러나 맹자는 그 속셈을 알아차리고 왕도정치를 자문해 주기로 작정했다. 맹자가 제 나라에 왔을 때, 그는 제 선왕의 신하로부터 전해 들은 ‘흔종(釁鍾)의 일’을 가지고 왕과 대화를 나누었다. 흔종이란, 새로 종을 만들어 그 낙성식을 하는 의식이다. 전통적으로 이때 소를 희생으로 잡는다. 마침 왕이 그 희생으로 쓸 소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불쌍하다고 하여 신하에게 양으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맹자는 이런 이야기를 왕에게 상?蒐쳔갭庸?“백성은 왕이 재물을 아낀다고 생각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왕의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것으로 정치를 한다면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짐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진 정치도 할 수 있다고 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맹자는 임금이 소라는 희생물은 직접 그 소리도 듣고 눈으로 끌려가는 모습도 보았지만, 양은 아직 보지 않았으니, 그것이 사랑을 베푸는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동물을 사랑하기로 말하면 양도 잡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부득이 짐승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인간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그러므로 맹자는 짐승을 사랑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으로 군자 혹은 지도자가 푸주를 멀리할 것을 이야기하였다. 푸주는 고기를 파는 가게, 또는 그것을 다루는 부엌을 말하는데, 그 짐승을 잡을 때를 생각하면 그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멀리한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 동물애호의 응용윤리가 있지만, 유교의 입장에서는 인간주의 입장을 취하되 욕망을 절제하여 동물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중용의 도를 중시하고 있다. 오늘날 지나친 애완동물 애호, 선진국의 광우병 소동 등은 지나친 문명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庖(포): 부엌. 廚(주): 부엌. 포주=푸주: 부엌 또는 고기 가게] # 출전 : 『맹자』「양혜왕 상」
사람이 멀리 생각하는 것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
‘원려(遠慮)’란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지향'을 뜻한다. '근우'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걱정거리를 의미한다. 사람에게 근원적인 차원의 근심이 없으면, 반드시 일상적인 차원의 근심거리가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늘 수많은 걱정거리 속에 살아간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 중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耉爭?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고 한다. 결국 걱정거리 중 96%는 쓸데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거리가 없으면 뭔가 적적하고 심심하다고 느끼는 것인지 때로는 걱정거리 없음 자체에 대해 작은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때로는 만들어가면서 즐기기도 하는 것 같다. 시험성적, 게임, 축구경기, 외모, 옷, 자동차, 신발, 심지어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연예인에 대한 것들까지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걱정거리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왜냐하면, 걱정거리들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엄마친구 아들’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비교 우위를 가지고,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매기고 또 확인하면서 걱정거리를 만들어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지고 있는 것들 -지위, 명예, 재산, 사회적 관계 … 등등- 이 고민의 대상이 된다. 마음을 비우고 걱정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다가도 어느 순간 걱정거리 속으로 빠져들어 그것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속에서 만나는 이러한 걱정거리는 각각의 삶의 그릇의 크기로도 연결된다. 예컨대, 학점을 B+에서 A로 받으려고 전전긍긍할 때의 내 마음보다, 이성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어 안달할 때의 내 마음보다, 좋은 옷, 좋은 차, 멋진 몸매와 얼굴, 멋진 춤과 노래 등으로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기를 갈구할 때의 내 마음보다, 내 삶의 의미에 대해 근원적이고 근본적으로 질문을 던질 때의 내 마음과 국가적인 문제에 대해, 혹은 인간적인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속상해 할 때의 내 마음은 분명히 그 크기와 깊이와 넓이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걱정을 통해 나의 의미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현존이라면, 우리는 그 걱정의 대상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한없이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내 마음을 통해 나를 하염없이 작은 존재로 위축시킬 수도 있고, 내 마음을 통해 나를 한없이 넓고 큰 그릇으로 넓혀갈 수도 있다.
[遠(원): 멀다. 慮(려): 생각하다. 근심하다. 憂(우): 근심하다.] # 출전: 『논어』 「위령공」
작은 것을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고, 큰 것을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된다
사람을 소인과 대인으로 가르는 것이 편리했던지 옛사람들은 자주 이런 구별법을 썼다. 소인과 군자라는 말도 흔히 썼다. 오늘날에야 물론 이런 구별법을 잘 쓰지 않는다. 더러 속 좁고 자기 잇속에만 밝은 사람을 소인배라고는 칭하지만, 대인이니 군자니 하는 말은 아예 낯선 말이 되었다. 군자는 책 속에서나 만날 수 있고 대인은 무슨 매표소 요금표에서나 보게 되는 단어일 뿐이다. 그렇다고 대인, 군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 실체적 의미가 모호한 만큼, ‘소인과 대인’이란 개념 자체는 우리에게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만 느껴진다. 어쩌면 그 개념이 전문화, 세분화된 시대에 걸맞게 다른 명칭으로 이미 바뀌어버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맹자가 이 부분을 설파한 내용을 읽어 보면 상당히 구체적이면서 설득력이 있다. 맹자는 말한다. “신체에는 귀중한 것과 하찮은 것이 있고 작은 것과 큰 것이 있다.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해치지 말고 하찮은 것 때문에 귀중한 것을 해치지 말라.” 그리하여 ‘작은 것’에 집착하면 소인이 되고 ‘큰 것’에 신경을 쓰면 대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의 어느 부분이 귀천과 대소로 구분되는가? 맹자의 비유를 빌자면 손가락, 발가락에 비해 어깨나 등은 상대적으로 귀하고 큰 부분이다. 손발을 온전히 지키자고 몸통과 머리를 해칠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 맹자의 비유는 단순히 인간의 신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인간사를 두고 보더라도 우리가 하찮고 작은 것에 매달려 중대한 것을 방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맹자는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자주 거론하였다. 정원사가 귀중한 오동나무를 돌보는 대신 값싼 가시나무에 정성을 들이는 일, 육신의 안일에 탐닉하여 인성도야에 소홀히 하는 일, 미식과 미색에 취하여 도덕과 명예를 저바리는 행위, 이 모두가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손상시키고 ‘천한 것’으로써 ‘귀중한 것’을 해치는 결과를 빚는다. 일처리에서든 사람관계에서든 우선 순위를 정한 다음, 마음 씀씀이의 강약을 잘 조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큰 것과 귀중한 것’을 얻는 지혜가 될 것이다.
# 출전: 『맹자』 「고자 상」
나의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서 남의 노인에게까지 미친다
유가 철학?【?친친(親親)은“친한 이는 친하게 대접 받아야 한다.”를 기본 원리로 한다. 친친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와 먼 인간관계를 명확히 구분하며,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자식 간의 사랑을 다른 어떤 인간관계의 사랑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상정한다. 이 때문에 유교문화 내에서 내 부모는 무시한 채 남의 부모를 돌보는 행위나 내 형제의 처지는 아랑곳 하지 않으면서 남의 형제를 돌보는 것은 인정되지 않으며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부모·형제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지 않으며, 내 부모와 남의 부모가 물에 빠졌을 때는 응당 내 부모를 먼저 구해야 한다. 특별한 관계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유가 철학의 친친의 원리는 정직함의 의미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정직함이란“아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그 잘못을 감추어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그 잘못을 감추어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논어』「자로」)”이다. 일반적인 상식 안에서 이러한 편애적 사고와 행위는 공평무사함과는 반대되며 비합리적, 비도덕적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정으로 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유가의 친친은 공평무사함이 강조되는 도덕 패러다임 안에서 보면 결코 도덕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이 공적 영역과 관계된 평등성, 불편부당성, 상호성 등을 보장하는 보편적 원리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비중립성, 차별애, 편애성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공평무사함을 도덕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배려와 노약자에 대한 특별한 보살핌의 행위는 공평무사함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도덕적 행동으로 간주된다. 장애를 가진 자와 노약자들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행위는 엄밀하게 따져 볼 때 분명 차별애이며 편애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공평무사함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내 집안의 가족을 보살피는 마음은 단지 사적 친밀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먼 관계, 공적 영역에까지 미치게 하는 도덕심의 발로이다. 이러한 데에서 친친의 도덕적 유의미성이 발견되는 지점은 바로 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逃沮? 아니 보다 멀리 만물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 출전 : 『맹자』「양혜왕 상」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백성들이 미워하는 바를 미워함을 일러 ‘백성들의 부모’라 한다
이 글은 군주시대에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하면 백성들이 군주 사랑하기를 부모같이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군주가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야 가능하다.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문과 수양을 통하여 자신의 인간다운 근본을 밝힐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편견과 욕심으로 마음이 가로막혀 있으면 그런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밖에 다른 사람을 헤아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공자는 자신이 살던 나라의 권력자가 정치에 대하여 묻자, “그대가 바름으로써 솔선수범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바르게 하지 않고서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요즘 ‘쇠고기협상’ 문제로 ‘촛불시위’가 시작하면서 나라가 어지럽다. 촛불시위가 벌써 두 달이 되었지만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종교계까지도 시민들과 함께 하기 시작하였다. 6월30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비상 ‘시국미사’를 마친 신부들은 마침내 광장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하였다. 대표 신부는 “촛불 민심의 진원지인 시청 앞 광장이 봉쇄되고 시민들이 공권력에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사제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하는 위기감을 느꼈다”며 “앞으로 탄압받는 촛불을 지키기 위해 광장을 지킬 것”이라고 ?뽀杉? 대선도 민심이었고, 촛불시위도 민심이다. 군주시대에도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으려고 노력하였는데, 하물며 주권재민의 시대에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출전 : 『대학』 「제10장」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겠다
세한(歲寒)은 한겨울의 추운날씨를 말한다. 추위에 잘 견디는 소나무, 잣나무는 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기도 하는데, 역경 속에서 지조를 굽히지 않음을 의미하여 선비의 절개를 칭송하는 문학적 수사로 자주 사용된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을 한결같이 시들지 않는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す? 잣나무요 추워진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공자는 다만 추워진 후의 일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할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덜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 칭할 만한 것이 아닌가?” [추사 김정희, 발문 중에서] 조선후기 천재적 예술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말년에 제주로 유배되어 9년을 보냈다. 이 때 세한(歲寒), 즉 한 겨울의 추위를 겪어내면서 추사는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각박한 세상 인심속에서도 잊지 않고 귀한 서적을 해마다 보내주었다. 추사는 그 마음씀이 대견하고 고마워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는데 국보 180호 가 그것이다. 이 그림의 발문(跋文)에서 그는 사마천의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사기(史記)』는 말을 인용하여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공자의 말을 통??탐욕과 권세를 멀리하고 절개와 올곧은 기상을 지키려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내 보인다. 이해의 사이에서 혹은 변고가 일어난 뒤에 비로소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만약 세한을 겪으면서 삼우(三友)를 만나는 즐거움이 멀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 歲(세); 해. 寒(한): 차다 後(후): 뒤, 늦게. 彫(조): 시들다 ] 『논어』 「자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움은 따라 가지 못할 듯이 하면서도 행여 때를 잃을까 두려워하여야 한다.”
이 글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공부하는 자세를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공자의 평소 학문에 대한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모름지기 사람은 공부를 할 적에 이미 배운 것을 미처 따라 가지 못하는 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배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복해서 복습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자칫 교만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늘 공부할 것을 내일로 미루어 공부하는 데 진전이 없을까 염려한 것이다. 현대의 공부 중에는 그때그때 빨리 이해하고 지나가야 하는 것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되새기는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이 근원적인 질문이나, 어떻게 행동해야 올바른 행동인가, 또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반성해야 하는 경우에는 좀 더 다른 태도가 필요하다. 반성적이고 근원적인 것에 관련된 공부에 있어서는 그것을 이해함에 있어 보다 신중한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가끔 교만에 빠질 경우가 있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하듯이 학문이 깊어질수록 겸손해져야 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지식이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거나 특별한 것으로 뽐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것을 드높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공부를 하려면 적극적인 자세로 제대로 해야 한다. 오늘 공부할 것을 내일 할 수 있다는 안일한 태도로 임한다면 공부에는 진전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점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함을 공자께서 일깨워주신 것이다. 우선 나 자신부터 마음을 가다듬게 하며, 반성을 하게 하는 글이다.
# 출전 : 『논어』 「태백」
마음으로부터 참으로 구한다면 비록 꼭 맞지는 않아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
요약 통치자가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보는 애틋함과 간절함으로 국민의 믿음을 얻을 때, 비로소 사회는 안정되고 즐거움은 배가 될 수 있다. 국가는 돈이나 힘이 아닌 바로 이런 기본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설명 『대학』에 나오는 이야기의 원래 의미는 대략 다음과 같다. 「강고」에 ‘갓난아기를 돌보듯 하라’라고 하였다. 마음으로부터 참으로 구한다면 비록 꼭 맞지는 않는다고 해도 멀지는 않을 것이니, 일찍이 자식 키우는 것까지 배우고 시집간 사람은 없었지만 진심으로 보살펴 탈 없이 키우지 않던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까지 알고 시집오는 여자는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기의 옹알이를 알아듣고 치대는 것을 받아준다. 아기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머니는 알아듣는다. 딱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틀리지도 않는다. 아이와 어머니는 말 이전에 가슴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아기를 바라보는 시선과 아기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같다. 그 어떤 것도 사이에 넣지 않고 오로지 마주 보고 있다. 이 애틋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갓난아기 돌보듯 하라. 마음으로 간절히 구하면 딱 맞지는 않아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는 정도로 그릴 수밖에.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치국(治國), 즉 정치의 원리라는 것이다. 흔히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하곤 한다. 비슷한 말이다. 다만 그 참된 마음을 내가 아닌 남을 돌보는 데 쓰는 것이다. 온갖 권모술수와 염치없는 행동들이 난무하는 정치판에 이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하지만, 국가는 돈이나 힘이 아닌 바로 이런 기본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경제를 충실하게 하고 군비를 갖추며 백성들이 믿도록 하라.” 자공이 물었다. “어쩔 수없이 버려야 한다면 셋 중 어떤 것부터 할까요?” 말씀하셨다. “군비를 없애라” 자공이 여쭸다. “어쩔 수없이 버려야 한다면 둘 중 어떤 것부터 할까요?” 말씀하셨다. “경제를 없애라. 예부터 죽음은 언제나 있었으나 백성들이 믿지 않는다면 나라가 있을 수 없느니라.”(『논어』 「안연 13」) 통치자가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보는 애틋함과 간절함으로 국민의 믿음을 얻을 때, 비로소 사회는 안정되고 즐거움은 배가 될 수 있다. 만약 국민들의 간절함을 무시하고 폭정을 계속한다면 이 간절함은 “너 죽고 나 죽자”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맹자는 말한다. 「탕서(湯誓)」에 보면 스스로 ‘태양’이라는 폭군에게 백성들이 ‘이놈의 태양 언제나 없어질고? 내 너와 함께 죽겠다’고 하였다는데, 백성들이 ‘너 죽고 나 죽자’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곳에 있다고 한들 혼자서 즐길 수 있겠습니까? 국민이 통치자와 같이 죽겠다고 까지 나서는 데 온전할 정권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시대에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철모르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라면 너무도 참혹하지 않을까?
출전 : 『대학』,「전9장」
빌어야 할 대상이 아닌데 비는 것은 환심을 얻고자 하는 것이요, 옳은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 하는 것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이는 모두 자기만을 생각하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용기란 이런 마음을 끊어내고 꿋꿋하게 할 일을 해가는 것을 이른다.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은 그 일을 함으로써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이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을 하면 뭔가 잃을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옳고 그름이나 자기 분수는 따지지 않고 그저 얻을 것이 있나 없?し罐?판단한다. 이제 입시철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 원하는 전공을 가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무리 대학이 많아도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이 따로 있고, 아무리 가고 싶어도 냉정하게 실력으로 뽑아야 하는 것이 입시이다. 실수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모를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모두 요행을 비는 것이다. 신(神)이든 부처든 이런 요행을 주는 존재가 아닐 텐데도, 이맘때면 교회로 절로 가는 사람들을 본다. 그것이 자녀들에게 용기를 줄지는 모르겠으나 바람직해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것만이 옳은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지 않나 돌이켜보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 이를 단호히 끊어내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의 잘못에 대해 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자신의 잘못에는 슬쩍 눈을 돌리는 경우가 있다. 옳은 줄 알지만 하려들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에게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서이다. 용기는 옳은 일인 줄 알면 하려는 마음을 내고 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지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위의 두 구절은 『논?障? 「위정」편에 나오는 글귀이다. 원래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분수를 넘는 짓을 하거나 사심(私心) 때문에 정의에 눈 감는 것을 나무라는 말이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의 이기적인 구복(求福)이나 도덕 불감을 경계하는 말로도 해석된다. 보통은 두 가지 내용을 늘어놓은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가만 보면 이 둘은 한 마음의 두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쌀쌀하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늘을 보면서 자신에게 투명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두 가지가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벗한다는 것은 그 덕(德)을 벗하는 것이니 내세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벗한다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믿는다는 것은 진실성이 없다는 뜻이다. 벗이란 ‘인격’을 사귀는 것이다. 벗에게 내세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진실함뿐일 것이다. 해설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정담을 나눌 때, 누군가 자신이 가진 것을 내세우며 자신이 얼마나 성공했는가를 떠벌리면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를 뜨게 마련이다. 벗이란 벌거벗고 뛰놀던 어린 시절처럼 그저 좋아서 만나는 것이지, 가진 것이 있어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이나 신분, 집안 등을 내세우려한다. 자신을 내세우고 싶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오랜 벗을 만나는 즐거움이 없고, 벗을 사귀는데 진실함이 없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가릴 수만은 없는 법. 얼굴로, 몸가짐으로, 말로, 행동으로 그 모습은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벗은 떠난다. 벗 이전에 ‘나’라고 하는 사람이 덜 되었기 때문이다. 맹자에는 이 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비(費)나라 혜공(惠公)이 말했다. “내가 자사(子思)께는 스승으로 대했고, 안반(顔般)에겐 벗으로 대했다. 왕순(王順)과 장식(長息)은 나를 섬기는 자들이다.” … 진(晉)나라 평공(平公)은 해당(亥唐)에 대하여, 들어오라면 들어가고, 앉으라면 앉으며, 들으라면 들어, 비록 거친 밥에 나물국이라도 배불리 먹지 않은 적이 없었다. … 그러나 그 뿐. 그에게 지위나 벼슬, 봉록을 내리지 않았다. 같은 입장에서 어진 이를 높인 것일 뿐, 왕공(王公)의 입장에서 어진 이를 대우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친하게 지낸다고 다 벗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경하는 사람도 있고, 벗하는 사람도 있고, 부리는 사람도 있다. 벗한다는 것은 같은 입장에서 그 인격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존중할 뿐,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 만약 평공이 해당에게 벼슬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해당이 그 벼슬을 받아들이든 말든, 평공은 아마 소중한 벗을 하나 잃게 되었을 것이다. 이미 둘은 같은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뭔가를 가진 사람은 항상 자신이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듯이 말하고, 없는 사람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를 한다. 인격이 아닌 이해타산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틀어지면 원망하기도 하고 나무라면서 ‘친구’였음을 내세운다. 하지만 친구란 애초에 그런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만나는 사이이다. 애초에 그런 것을 버리고 만났다면 원망할 것이 무엇이고, 탓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군자는 ‘문(文)으로 벗을 사귀고, 벗으로 인(仁)을 돕는다’고 하였다. 군자의 사귐은 덤덤하기가 물과 같다고도 한다. 아마도 살가운 맛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깊은 속내에는 옆에서 잴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니 문경지교(刎頸之交)니 하는 말이 있지만, 그보다 깊은 사귐의 도리가 있기에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