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와 체휼적신앙(體恤的信仰)이 필요(必要)한 이유(理由)
<말선28-25~26> 기도(祈禱)라는 것은 마음(心)과 몸(肉)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물질(物質)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心)과 몸(肉)을 완전(完全)히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한 정성(精誠)의 시간(時間)이 기도(祈禱) 시간(時間)인 것이다. 정성(精誠)을 드렸다는 것은 살아생전(生前) 하나님 앞에 몸(肉)과 마음(心)을 바쳤다는 인연(因緣)을 맺고 넘어가기 위(爲)한 것이다. 기도(祈禱)는 몸(肉)과 마음(心)을 드리는 시간(時間)이기 때문에 마음(心)으로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모셔야 되고, 몸(肉)으로는 자신(自身)에게 붙어 다니는 사탄을 때려 잡아야한다.
몸(肉)이 원(願)하는 모든 욕망(慾望)을 버리고 마음(心)이 원(願)하는 세계(世界)로 깊이깊이 찾아 들어가는 시간(時間)이 기도(祈禱)의 시간(時間)인 것이다. 그리하여 몸(肉)이 완전(完全)히 마음(心)에 점령(占領)되어 화(化)하는 자리가 바로 세상(世上)에서 말하는 도통(道通)하는 경지(慶地)이며 기독교(基督敎)에서 말하는 성신(聖神)을 받는 경지(慶地)이다.
<신천성경p249> 왜 기도(祈禱)해야 되느냐? 하늘과의 주체적(主體的)인 인연(因緣)을 맺기 위한 것이고, 정성(精誠)은 횡적(橫的)인 인연(因緣)을 확대(擴大)하자는 것입니다. 주체(主體)되는 하늘의 협조(協助)를 받아서 하늘이 나에게 같이 동조(同調)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왜 정성(精誠)을 들여야 되느냐? 환경적(環境的) 여건(與件)을 전부(全部)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닦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선9-186~187>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는 회개(悔改)의 자리이다. 무슨 죄(罪), 무슨 죄(罪)를 지었으니 용서(容恕)해 달라고 기도(祈禱)할 필요(必要)가 없다. 아버지의 심정(心情)을 몰랐던 것을 회개(悔改)하면 다 용서(容恕)받을 수 있다. 회개(悔改)하는 기도(祈禱)보다 천륜(天倫)의 원칙(原則)을 파괴(破壞)하고, 하늘과 인간(人間)의 인연(因緣)을 유린(蹂躪)하고, 인간(人間)과 만물(萬物)의 인연(因緣)을 파괴(破壞)한 죄(罪), 즉(卽) 심정문제(心情問題)에서 지은 죄(罪)를 용서(容恕)해 주십시오. 라고 해야 된다.
<신천성경p847> 신앙생활(信仰生活)은 체휼(體恤)’입니다. 체휼(體恤)’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체휼(體恤)’해야 됩니다. 체험(體驗)이 아니라 체휼(體恤)’입니다 체휼(體恤)’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늘이 슬플 때 내가 그 슬픔을 알아야 됩니다. 그 슬픔이 느껴져 오는 것이 체휼(體恤)’입니다. 체휼(體恤)’하게 되면 기도(祈禱)가 필요(必要) 없습니다.
<신천성경p848> 체휼(體恤)은 반드시 신앙생활(信仰生活)에 필요(必要)합니다. 체휼(體恤)을 통(通)해서 하나님의 인격(人格)에 대(對)해서 알 수 있고, 그와 동시(同時)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어떠한 내적심정(內的心情)의 인연(因緣)을 갖는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체휼(體恤)의 길을 통(通)해서만 우리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통(通)해서 행복감(幸福感)을 느끼고 또,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통(通)해서 보다 이상적(理想的)인 새로운 소망(所望)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체휼(體恤)의 과정(過程)을 거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基督敎)가 로마 박해시대(迫害時代)에 있어서 그런 핍박(逼迫)을 받고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신앙(信仰) 길을 꿋꿋이 갈 수 있었던 것은 막연(漠然)한 입장(立場)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자리를 넘어갈 수 있는 체휼적(體恤的)인 내용(內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선212-174> 하나님을 체휼(體恤)’해야 돼요. ‘체휼(體恤)’ 알지요? 몸(肉)으로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이 슬프면 나도 슬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體恤)한 사람에게는 기도(祈禱)가 필요(必要) 없습니다.
<신천성경p847> 신앙(信仰)에 있어서 가장 귀(貴)한 것은 체휼(體恤)입니다. 체휼(體恤)해서 나 자신(自身)도 알 수 없는 눈물을 한없이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의식(衣食)을 초월(超越)하여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껴보았습니까? 누구한테 욕(欲)먹었다고 해서 분(忿)하고 서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自身)도 알 수 없는 비장(備藏)한 심정(心情)이 감돌아 하염없는 눈물이 떨어져야 합니다. 신앙자(信仰者)의 본질적(本質的)인 생활상(生活相)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自身)도 모르는 고통(苦痛)이 사무쳐 들어와야 합니다. 가슴이 메이고 몸 둘 바를 모를 정도(程度)까지 사무쳐 들어와야 합니다.
<신천성경p848> 선생님(先生任)이 길을 가려고 차(車)를 척 타고 나서면 벌써 안 좋은 느낌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진로(進路)를 다시 잡습니다. 그런 영감(靈感)이나 체감(體感)이 옵니다. 체감(體感)은 체휼적(體恤的)인 신앙(信仰)에서 생깁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전봇대고 무엇이고 간(間)에 그것을 붙들고 통곡(痛哭)하고 싶은 심정(心情)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때를 절대(絶對)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때를 몇 번만 놓치게 되면 그런 기회(機會)는 나에게 멀어집니다. 그것을 놓쳐버리면 그것은 절대(絶對)로 나에게 플러스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反對)의 힘(力)이 되어서 나를 밀어 졎히는 것입니다.
<말선503-94> 기도(祈禱)보다 <천성경(天聖經)>을 읽고 은혜(恩惠)된 내용(內容)을 읽어주는 것이 더 낫다. 하루 종일(終日) 사는데 그렇게 살아야 돼요. 여러분, 요즘 통일교회교인(統一敎會敎人)들 뭐 주일(週日)날, 안식일(安息日)에 설교(說敎)하기 위해서 <천성경(天聖經)>을 읽고 가게 되면 은혜(恩惠)되는 것을 읽어 주는 것이 여러분이 열심히 기도(祈禱)하는 것보다도 낫다는 걸 알아야 돼요. <천성경(天聖經)> 응 읽으면, ‘<천성경(天聖經)>의 읽은 그 내용(內容)으로 내가 은혜(恩惠)받아서 감동(感動)된 이런 자리에 섰구나,’ 하는 것을 느껴가지고 감동(感動)된 어조(語調)로써 <천성경(天聖經)>을 읽으면 그 이상(以上) 영향(影響)을 줄 것이 없다는 거예요.
<말선346-280> 훈독회(訓讀會)가 새벽 기도회(祈禱會)보다 더 중(重)해요, 훈독회(訓讀會) 열심히 참석(參席)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방향(方向)이 사방(四方)으로 갖춰져요. 그래 선생님(先生任)이 기도(祈禱)하든 말씀하든 그때의 영적(靈的)인 한 방향(方向)에 들어와서 입체적(立體的)으로 쭉 연결(連結)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성(精誠)들이고 해야 돼요. 기성교회(旣成敎會)에서 야단하는 새벽 기도회(祈禱會)같은 것은 문제(問題)가 아니에요. 그것은 모르는 가운데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에서 기도(祈禱)하고 정성(精誠)들이면 다 봐요. 이것이 어떻게 되겠구나 하고 다 알아요
<말선303-86>(1999,8, 파라과이 올림포아메리카노호텔) 요즘에는 기도(祈禱)할 필요(必要) 없지, 다 가르쳐주고 아는데 뭘 기도(祈禱)하겠어요? 다 아니까 이제는 할 것밖에 없어요. 이제는 하기가 바빠요. 기도(祈禱)를 안 해도 하나님은 하는 걸 좋아하게 되어 있지, 기도(祈禱)만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기도(祈禱)하면 뭘 해요? 천년만년(千年萬年) 해방(解放)이 안 되는데 안 그래요 그래 기도(祈禱) 안 했어요, 20년(年) 동안 기도(祈禱) 안 했어요. 몸뚱이(肉) 가지고 사탄을 이겨야 돼요.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받지 않고 알겠어요? 「예」
몸(肉)으로써 영적(靈的)인 기준(基準)을 통(通)하지 않고 몸뚱이(肉) 가지고 사탄을 자연굴복(自然屈伏) 시켰어요. 몸뚱이(肉) 가지고 사탄이 따라오지 못 하는 일을 했어요. 내가 가면 무서워서 도망(逃亡)가지, 붙들리면 자기(自己)가 죽든가 내가 죽든가 해야 돼요. 기도(祈禱)할 새가 없어요, 뭘 빌겠어요?
<말선39-205> 기도(祈禱)라는 것은 전체(全體)를 위해서 비는 것이다. 통일교회교인(統一敎會敎人)들은 절대(絶對) 자기(自己)를 위해서 기도(祈禱)하고 정성(精誠)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세계(世界)를 붙들고 나라를 붙들고 기도(祈禱)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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