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법조윤리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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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진은 자신의 성범죄자 변호 이력이 논란이 되자 말도 안되는 해명을 내놓았다. MBC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변호사로서 직업윤리와 법에 근거해 변론했다”면서 “공직자에게 바라는 국민 눈높이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는 “성범죄자 변론을 맡은 것과 블로그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홍보한 것은 변호사로서 윤리 규범을 준수해 이뤄진 활동”이었다면서 앞으로 “국민 눈높이를 가치의 척도로 삼겠다”고 밝혔다.
즉, 자신의 활동이 법조윤리를 준수한 것이며 변호사의 직업 윤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의 비판이 마치 “변호사에서 국민을 위한 공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진통인 것처럼, 이제는 변호사의 눈높이가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로” 일해야 해서 겪는 고초인 것처럼,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 없이 정당화하고 있다.
조수진은 틀렸다. 그의 활동은 법조윤리에 위배된다.
당연히 모든 피고인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다. 그 누구도 성범죄자라고 해서 변호인도 없이 법정에 서야한다고 주장한 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조건 피고인의 최대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피해자를 음해하고, 강간통념(여자가 No라고 해도 속마음은 Yes다)을 한껏 부추기고, 관습적인 “피해자다움(the ideal victim)” 모델을 내세우며, 근거없는 거짓 주장을 펼쳐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제대로 된 변호사가 성범죄자를 기꺼이 변호하기를 원한다. 변호사야말로 피고인과 가장 가까이에서 지속적으로 대화하면서 진정한 반성, 피해자에 대한 속죄와 배상, 성폭력 예방교육 프로그램 이수 및 재발 방지와 같은 행동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양형 사유와도 맞아떨어진다. 깊이 있는 반성, 기습공탁이 아닌 실효성 있는 배상, 장기적 학습, 행동 변화 및 감시에 대한 자발적 수용을 바탕으로 피해자에게 있는 힘을 다해 성심껏 용서를 구하고 재판부에 양형인자로 고려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변호사들은 피고인이 원하는 수준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술수를 쓴다. 조수진 같은 이가 그렇다. 예컨대 그의 이력이 보여주듯이,
- 피해자는 “스쿨미투” 이력이 있으므로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 배심원들은 강간통념에 휘둘릴 수 있으므로 이를 적극 활용하면 무죄를 받아낼 수 있다며 각종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을 지속적으로 강간해 성병까지 감염시킨 피고인을 변호하면서, 물증이 없으니 “다른 성관계로 성병에 걸렸을 수도 있지 않냐, 혹시 아버지와 성관계한 것은 아니냐”고 주장한다.
조수진에게 묻는다. 이런 것도 변호인가?
문제는 조수진 같은 변호사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성범죄자를 변호하기 때문에 그들은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피해자는 법정 싸움에서 더 큰 상처를 입고, 한국의 변호 관행은 걷잡을 수 없이 부도덕하고 폭력적으로 되어버렸다. 예컨대,
- 피해자가 먼저 가해자를 좋아해서 DM을 보내지 않았냐고 사건과 무관한 주장을 펼친다. (최종범 측이 고 구하라에게 - 1심에서 집행유예 선고)
- 증거가 없는데 무고죄로 고발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고 피해자를 협박한다. (정준영 측이 전 여자친구에게 - 여자친구가 겁에 질려 고소 취하)
- 휴대폰 포렌식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허위 의견서를 제출한다. 피고인 방어를 위해 먼저 영상을 확인하겠다면서 휴대폰을 초기화한다. (정준영 측 변호사 - 휴대폰에 물증이 없어서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
정준영 측 변호사는 변협 징계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누가 확인해주면 좋겠다. 이 글에서는 언론에 보도된 사례만 나열했지만, 수많은 피해자들이 이보다 더한 일을 겪고 있다. 가해자 및 가족들의 사연을 창작해서 제출하는 가짜 탄원서,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 복지기관 봉사인증서, 돈을 내고 받아오는 범죄심리 의견서 및 전문의 의견서, 피해자의 과거 및 신상털기 등 이 모든 것들이 “유능한 변호사”의 전략으로 동원된다. “불법”이 아니라고 아무일이나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집행유예 또는 무죄 판결을 받아내면 “성공사례”로 자랑스럽게 홈페이지에 올려둔다.
어떻게 피고인이 반성하도록 설득하냐고?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그래서 무죄, 집행유예, 감형을 받아내 성공보수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 “인권변호사”의 직업윤리인가?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면 그것은 청부업자의 직업윤리와 무엇이 다른가? 의뢰인을 대변해 소위 “불법이 아닌” 테두리 안에서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며 그에 비례해 인센티브를 받는다면 그는 청부업자에 불과하다.
나는 <황해문화>에 기고한 “젠더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에서 “사법 절차가 진행되면서 가해의 총량이 계속 증가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작년 <한겨레> 칼럼에서는 “변호라는 이름의 가해”라는 제목으로 변호사들의 시장화 전략을 고발했다. 변호사들은 적극적으로 가해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피고인이 종국에는 유죄 판결을 받고 민형사상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경찰 및 검찰 조사, 증인 신문, 피고인의 공격적 변론과 허위 진술과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나날이 새로운 가해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자는 치유, 배상, 그리고 정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또다른 상처와 트라우마를 얻게 된다. 무리한 변호 행태가 보편화되면서 심지어 판사들조차 법정에서 일어나는 가해를 묵인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관행이 너무나 널리 퍼져있고 지금까지 법정에서 승산이 있었던 덕분에, 변호사들끼리의 정보 공유와 벤치마킹에 힘입어 성범죄 피고인 변호는 “손쉽게 돈벌 수 있는 비즈니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복잡한 법리 다툼이나 새로운 법리 해석은 불필요한 반면, 각종 꼼수를 들이밀면 요행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변호사들이 이렇게 사법 부정의에 공모하고 있다. 자칭 “인권변호사”들 역시 “심신미약”을 주장해왔고, “변호사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궤변을 펼쳤다.
조수진은 정치를 하겠다는 주제에, 자신의 행위가 “변호사로서의 직업윤리에 근거한” 활동이었다고 언론을 통해 퍼뜨려서는 안된다. 이는 잘못된 관행을 더욱 만연하게 만들 뿐이다. 얼마나 더 많은 비극이 있어야 바뀔 것인가?
그는 정치인은 물론 변호사로서의 자격도 없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 그리고 지금까지의 잘못을 반성하며 즉각 사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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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진의 변호는 법조윤리 위반이 아니다” 또는 “변호 과정에서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이 법조윤리 위반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놀랍다. 윤리와 실무는 별개라는 인식? 전문가의 일에 비전문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인식? 교사에게는 교사의 윤리를 요구하고, 의사에게는 의사의 윤리를 요구하면서, 변호사는 그런 사회적 요구로부터 예외라는 인식?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수진의 행위는 법조윤리에 위배된다. (허위 주장을 비롯한 진실성 의무 위반, 개인적 편견의 개입 및 증거 없는 주장 제시와 같은 공정성 의무 위반 등.) 관행이 원칙을 뒤집을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변호사답게 논증을 해라. 하물며 조수진의 행위조차도 법조윤리 위반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변호업계는 영업을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가해자 변호사가 제대로 해야 피해자가 받는 2차 가해를 그나마 줄일 수 있다.)
동시에 이런 현실은 법조윤리가 얼마나 소홀하게 다뤄지는지를 보여주는 듯해서 더욱 걱정스럽다. 이른바 “3일짜리” 시험, 그러니까 사흘 벼락치기해서 본다는 시험 말이다. 법조윤리 수험서조차 법조윤리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저자가 대놓고 법조윤리를 “귀찮은 통과의례”로 취급하며 빨리 끝내버리자고 한다. “부디 이 책을 통해 법조윤리와는 영원히 작별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저도 했으니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접하면 책과 저자에 대한 신뢰도가 추락할 것 같지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고 실제로 이 책은 수년째 베스트셀러다.
물론 저자는 법조윤리 “시험”과 작별하라는 뜻이었다고 둘러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공과목 “수험서”를 쓴다고 하더라도 나라면 절대, “이 책을 통해서 조직사회학과 영원히 작별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라고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장 너무 이상하지 않나? 이런 책을 썼다면 나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좋은 책도 있다. <한인섭 외 지음, 법조윤리, 박영사>)
나는 이것이 가벼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도적, 관행적으로 법조윤리가 “찬밥” 신세를 받는다는 점. 즉, 법조윤리는 변호사의 일의 “핵심”이 아니며 “열심히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영역으로 인식되고, 그것이 단순히 관행을 넘어 제도적으로 뒷받침된다는 점.
예컨대, 난이도 조절을 해서 합격률을 무조건 90% 이상으로 맞춘다든가. 시험을 본 이후에 어차피 자기 점수도 모른다든가. 대체 왜 그래야 할까?
그러니까 법조윤리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시간을 투자하면 바보라는 얘기다.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데 개개인이 “도덕, 선의, 사명감”으로 법조윤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열심히 공부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윤리를 열심히 공부해야 윤리적이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법과 정의를 다루는 이들을 양성하면서 윤리가 뒷전인 현실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고민된다는 얘기다. 요즘 법조계의 관행을 보면 다들 알지 않나. 일반 업계도 ESG니, CSR이니, 각종 유행어를 따라 변화하는데 법조계는 반대로 가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법과 사회정의를 논할 수 있나.
하지만 묻고 싶다. 왜 법조윤리가 변호사의 일의 핵심이 아닌가?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훌륭한 변호사들도 많지만, 왜 이렇게 변호사들이 막 나가게 되었을까? 심지어 민변 사무총장이라는 사람이 말이다.
슬프게도 조수진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