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윈(Darwin)의 진화론(進化論)과 연기법(緣起法) >
찰스 다윈
오늘날엔 신(神)의 천지창조(天地創造)를 믿는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제 창조적 능력을 가진 신이 있을 곳은 없어졌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체는 세포단위로 한걸음씩 고등생명체로 발전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다윈의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떤 과학 혹은 어떤 사상, 어떤 종교가 됐던 간에
설 땅이 없어질 것이고, 앞으로도 진화론이 뒤집어질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분명해졌다.
그리고 붓다께서 깨달으신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연기법(緣起法) 역시 부정될 수 없는 진리로 남을 것이다.
붓다께서 이 연기법을 ‘여래가 있기 전이나, 여래가 멸한 후라도 존재하는 진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다윈의 이론에 대한 과학자들의 확신과 다를 바가 없는 말이다.
즉, 다윈의 진화론은 붓다의 연기법과 같이 ‘존재’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밝힌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은 생명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느 방향으로 흐를 것인가에 대한 인간 지성 최고의 개가였다.
진화론은 생명체의 자기 위치와 정체성을 명확히 해준다는 점에서
종교에 버금가는 신뢰성을 갖고 있다. 불교는 비록 종교이기는 하나
허황된 신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과 과학성에 근거해 있다.
따라서 불교 역시 중생들(모든 생명체)의 자기 위치와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
진화론에서 인간이 가장 발전된 생물이라고 결론짓듯,
불교 역시 인간만이 성불할 수 있는 존재로 가장 귀한 생명체라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의 생명관 중 핵심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는 윤회(輪迴)의 경우,
과연 그것이 합리성과 과학성에 근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윤회는 업(業)과 더불어 붓다시대 이전에 이미 인도에서 믿고 이어져 내려온 사상이다.
지금은 윤회를 6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정형화 돼 있다.
즉,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6가지의 세계를 업에 따라,
번갈아 가며 몸이 바뀌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윤회이다.
그런데 문제는, 붓다가 입멸하고 직계제자가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불멸 후 약 100년 무렵, 붓다의 가르침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숫타니파타(Suttanipata, 경집/經集)>란 경전 모음집에는
생명체의 6가지 사이클에 대한 언급이 없고, 물론 윤회라는 말도 거의 발견하기 어렵다.
‘다음 생’ 혹은 ‘하늘나라’ 또는 ‘나쁜 곳에 떨어진다.’고 하는 정도의 원론적인 표현만 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붓다는 결코 윤회(輪廻)를 말하지 않았다.
윤회는 당시 인도에 보편화된 상식이었고, 후세 불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붓다는 오히려 기존 바라문들이 믿던 업과 윤회를 부정했다.
전생의 바라문이 현재의 바라문으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붓다는 “인간은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결정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왜? 사후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알 수 없는 일엔 무기(無記)했다. 알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쓸데없는 희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붓다는 고정된 틀과 운명에도 동조하지 않으셨다.
전생의 바라문이 현생의 바라문이라는 정형화된 윤회론을 부정하셨다.
그 결과 붓다의 교단은 실제로 사성제 계급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출가 순으로 상하를 정했다.
윤회가 붓다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최고의 확고한 가르침에 포함됐다면,
훗날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이나 세친(世親)의 유식(唯識) 등에서
윤회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고 윤회는 사람이 업에 따라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짐승이 다시 사람으로 태어 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10선(善)을 닦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런데, 축생인 개나 돼지, 소가 어떻게 선(善)한 공덕을 지을 수 있으며,
더구나 윤회에 포함되는 짐승의 범주를 개, 소, 돼지, 닭, 모기, 굼벵이, 지렁이…
어디까지로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철학적 논쟁을 많이 벌이기를 좋아했던
부파불교 논사들이 “어디까지가 윤회에 해당된다.”는 논쟁을 왜 하지 않은 것일까?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윤회를 부처님이 가르친 법, 혹은 절대 진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회통념상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훈계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윤회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를 불교의 핵심사상으로 간주한다면, 힌두교, 자이나교 등과
다를 것이 없다. 불교의 핵심사상은 윤회가 아니라 연기법이다.
붓다께서 깨달았다고 선언하신 내용이 곧 연기였지 윤회가 아니었다.
붓다는 업과 윤회에서 떠나야 하고, 오로지 ‘연기’만이 진리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업(karma)과 윤회(Samsara)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고 연기를 설명하면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다.
경전에 그러한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이미 ‘업과 윤회’가 당시 사회에 널리 일반화 돼 있어서
다른 언어적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가 사용한 ‘업(業)’은 바라문들이 사성제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악용했던 업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결과로 인간의 힘으로는 역전시킬 수 없는 당연히 수용해야 되는 것을
‘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윤회 또한 성(成)⋅주(住)⋅괴(壞)⋅공(空)으로서의 우주적 윤회라고 해석하면,
업과 더불어 미래에도 유용한 불교용어가 될 수 있다고 여기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윤회와 사후세계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주로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를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 책은 작자조차도 확실치 않은, 확실하게 작성 연대도
알 수 없는, 신뢰성이 빈약한, 믿을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환상적이라서 과학적 근거가 희박하다.
그러니 그런 주장은 붓다 가르침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과학에 의해 종교적 영역이 좁아지고는 있지만,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존엄성이 버려지지 않는 한,
인간의 정신적 진화의 끝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한, 붓다의 가르침은 더욱 간절해 질 것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붓다의 법을 능가하는 가르침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인 연기법(緣起法)은 현재의 현상(果)에 대한 원인(因)을 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와 같다.
사실과 현상을 망상과 집착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보자는, 불교 수행의 과정도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공을 연구하는 마음자세와 유사하다.
그래서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교육을 통해 지적 능력이 진화해나갈수록,
불교는 인간에게 더없이 소중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이 업과 윤회를 악용해 승단의 배를 채우고,
신도들에게 신앙으로서의 의무감만 더해주고 있다면,
그리하여 사찰들이나 승단이 이익단체로서 불교를 이용하려고 하는 한,
불교의 미래는 결코 보장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