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甫吉島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 속하는 섬.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 해남군 땅끝에서 12km 떨어져 있고, 노화도 남서쪽 3.8㎞ 지점에 있다. 동경 126。37′, 북위 34。06′에 위치하며, 면적 32.99㎢, 인구는 약 3,700명(1996 12월 기준)이다.
남쪽에 적자봉(赤紫峰, 425m), 동쪽에 광대봉(廣大峰, 311m), 서쪽에 망월봉(望月峰, 364m) 등 전역에 산지가 발달하고 있으며 섬 중앙 부용동쪽에 협소한 저지가 있어 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난류의 영향으로 온화한 해양성 기후이며, 1월평균기온 0.1 。C, 8월평균기온 25.3。C, 연강수량 1,398mm, 연강설량 11mm이다.
식생은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팽나무 등의 상록활엽수 250여종이 자라며 감귤도 재배된다. 경지면적은 논 0.795㎢, 밭 3.312㎢로 경지율이 12.4%에 불과하다. 농작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마늘·무·채소 등이 생산된다.
연안에서는 도미·농어 삼치·멸치가 어획되며, 전복·소라의 채취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완도와 땅끝에서 훼리호가 수차례 운항하고 있다.
공공기관으로 면사무소·경찰서·우체국이 1개소씩 있으며, 교육기관으로는 중학교 1개교, 초등학교 본교 2개교 분교 2개교가 있다.
명칭의 유래를 보면, 옛날 영암(靈巖)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이 섬을 두루 살핀 뒤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이 글의 뜻을 풀기 위해 월출산 선암사의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가 있는데 10구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구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풀어 보길도라 불렀다. 1694년 이후 영암군 관할에 속하여 매년 조세를 징수하여 오다가 1870년(고종7)에 면민들의 진원으로 방진(防鎭)을 설치하여 삼도진(三道鎭)이라 칭하였다.
1897년 완도군으로 부속되면서 노화면·보길면·임도면으로 분리되었다.
광복 후 3개면이 노화면으로 다시 통합되었고 1982년 읍으로 승격,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라남도기념물 제37호인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은 윤선도의 유적지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심취되어 부용동에 연못을 파고 세연정(洗然亭)을 세워 선유를 즐기며 불후의 명작인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남겼다.
현재 쓰이는 섬 내의 지명도 거의 그가 붙인 것이다. 동쪽 선백도 바위에는 송시열비(宋時烈碑)가 새겨져 있으며, 보길나루에서 발견된 조개더미와 예송리에서 표면채집된 유경역자식석촉(有莖逆刺式石촉)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록수림이 장관을 이루는 예송리 해수욕장은 작은 자갈이 깔려 있고 중리 해수욕장도 경치가 빼어나다.
풍어와 도서민의 무사를 기원하는 당제를 매년 섣달 그믐날 모시며 지신밟기와 농악놀이가 행하여진다. 또한 큰 나무나 바위에 고사를 지내는 안녕과 무사고를 비는 풍습이 있다. 북쪽 노화도와 마주한 청별 앞바다에 매립사업이 이루어져 행정관서나 상가가 청별리 선착장에 집중되어 중심지가 되고 있다.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게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병진소 (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견회요 (遣懷謠)〉5수와〈우후요(雨後謠)〉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여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 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하여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생활을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것을 임으로 선택하기도 한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된 가첩(歌帖)으로〈산중신곡〉,〈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참고문헌》孤山硏究(李在秀, 學文社,1955), 松江과 孤山의 詩境(崔珍源, 成均館大學校論文集3, 1958), 高麗末·李朝初의 漁父歌(李佑成, 成均館大學校論文集9, 1964), 尹孤山論(鄭炳昱, 月刊文學9. 1969), 尹善道의 自然觀(尹星根, 文學批評7·8, 1970).〈金學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