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몽과 최승로
최지몽은 18세인 924년(태조 7) 천하통일을 예언하여
태조 왕건에게 발탁된 뒤
81세인 987년(성종6)에 사망할 때까지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까지
63년 간 6명의 국왕을 보좌한다.
국왕의 혈육으로 따진다면
혜종, 정종, 광종은 태조의 아들이며
경종과 성종은 태조의 손자이다.
최지몽은 요즘말로 하면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3대에 걸쳐
6명의 국왕을 모신 왕실의 원로였다.
최지몽의 역할은 국왕을 단순히 보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왕규의 모반을 막아 혜종과 그의 형제인 정종, 광종의 목숨은 물론,
광종의 아들인 경종의 목숨도 구했다.
그는 왕실의 참모이자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왕조 창업과 전쟁, 반란 등 험난한 시기일수록
온전히 관료로서의 삶을 마치는 일은 쉽지 않다.
더욱이 왕실과 국왕을 위태롭게 하는 모반의 조짐을 예견하고
조언하는 천문 점성술사들은 주변의 시기와 견제로
일반 관료와 같이 평탄한 삶을 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최지몽이 귀법사 행차에 광종을 수행했다가 무례한 행동으로
11년간 유배를 당한 것도 그러한 예이다.
중국의 선진 문물인 과거제와 관료제를 도입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중국의 문사들을 적극 유치했던 광종에게
점성술과 같은 고려의 토속과 전통을 중시한 최지몽의 존재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최지몽의 유배는 그러한 사상과 이념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유배까지 당했던 최지몽이
다시 복권되어 관료로서 장수한 사실은
천문 점성술이 당시 사상은 물론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도선의 존재도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중세에서 고대로 시기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천문 점성술은 왕실의 운명을 예언하고 보호하며,
제왕의 통치와 교화 능력을 향상시키는 제왕학(帝王學)의 지위를 갖는다.
도선과 최지몽의 활약은
천문 점성술이 고려 초기 사상문화의 측면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최지몽과 같이 태조 때 발탁되어 성종 때까지 6명의 국왕을 보좌한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최승로(崔承老, 927~989)다.
유학에 능통한 그는 유교이념을
고려 왕조의 통치이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최지몽과 대조적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의 출생과 성장은 매우 극적이다.
자식이 없던 최은함(崔殷諴)이
중생사(衆生寺) 관음보살에 기도해 얻은 아들이 최승로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오자
최은함은 생후 3개월이 되지 않은 아들을
이 절의 관음보살 아래 감추고 몸을 피했는데,
보름이 지나 견훤의 군사들이 물러난 뒤 절에 갔더니
아이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3 탑상조).
최은함은 경순왕을 따라 태조 왕건에게 귀순했고,
개경에 정착한 지 3년 만에 최승로는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는다.
최승로는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다.
12세 때(938년)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았다.
태조는 최승로에게 《논어》를 읽게 하였는데,
매우 기뻐하며 소금밭[鹽盆]을 하사했다.
왕의 교서와 외교문서 등을 짓는 원봉성(元鳳省) 학생으로 소속시키고,
말안장[鞍馬]과 녹봉 20석을 주었다.
-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최승로는
최지몽과 달리 경전과 유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발탁되었다.
이후 성종 때까지
그는 고려의 학술과 문장을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의 지위를 누린다.
983년(성종 2)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는
그의 사상과 당시 고려사회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성종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
고려의 정치제도를 완비했는데,
최승로는 성종을 보좌해 유교 정치이념을 뿌리내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최승로는 유학과 문장의 재능으로,
최지몽은 천문 점성술로
각각 태조 왕건에게 발탁되어 천수를 누리면서 관료로서 성공의 길을 걸었다. 현실주의 경향이 강한 유학이나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관장한 천문 점성술은
근본적으로 다른 성향의 사상과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이후 성종 때까지 약 60년 간 고위직으로
조정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후삼국 전쟁이 한창일 무렵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와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자,
문신 최응(崔凝)은 왕건에게
왕이 된 자는 전쟁 때 반드시 유교 이념을 닦아야 합니다.
불교나 풍수지리 사상으로 천하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건의했다.
이에 태조 왕건은
‘지금 전쟁이 그치지 않아
한 치 앞의 편안함과 위태로움도 알 수 없다.
백성들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라,
부처님을 비롯해 산수의 신령한 도움을 청하려 하는 것이다.
어찌 이런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전쟁이 그쳐 편안해지면
유교 이념으로 풍속을 고치고 백성을 교화할 것이다’라고 했다.
- 최자(崔滋), 《보한집(補閑集)》 권상
왕건이 전쟁 후 유교이념으로 백성을 교화할 것이라고 한 말은
유교 관료 최응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다.
사실 그는 유교이념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전쟁의 참화로 인한 하층민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불교와 풍수지리 사상도 수용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에게 유교, 불교, 풍수지리 사상은
서로 달라 충돌하는 배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한 점은 그가 남긴 〈훈요십조〉에서
불교, 유교, 풍수지리,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의 수용과 공존을 강조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상이 공존할 수 있는 터전은
고려 초기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천문 점성술에 밝은 최지몽이
역사 속 인물로서 오늘까지 전해진 것은
통합과 공존, 다원성을 추구한
고려시대 사상과 이념의 특성 때문이다.
- 박종기, 고려인물열전
박종기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 부곡인과 부곡 집단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및 한국중세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고려사의 재발견》, 《동사강목의 탄생》,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고려사 지리지 역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