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요 불교국가의 불교음악
-수행 의식의 노래: 범패(梵唄)-
최 로덴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음악(音樂, music)이라 하면, 노래나 악기로 이루어진 일정한 양식(樣式, pattern)의 정형화된 소리를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원론적인 음악의 정의(定義, definition)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람들은 음악의 다양성을 논하고 싶어 한다. 아마 말과 소리의 정형화된 반복이라는 논리적인 결과를 넘어 음악이 주는 무언지 모를 느낌 때문일 것이다. 세속적 감각에 익숙한 음악이든 왠지 모르게 엄숙해지는 탈세속적인 종교음악이든 논리만으로 정의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음악에는 다양한 장르(genre, 類型)가 있다. 말과 소리의 정형성을 넘어 역사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그리고 의식의 혼이 담기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 뒷골목의 우울함을 담으면 블루스(Blues)가 되고 재즈(Jazz)가 되며, 라틴(Latin) 가톨릭(Catholic)의 웅장하고 감동적인 기도를 담아내면 그레고리오 성가(Cantus Gregorianus)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음악은 단순히 말과 소리의 정형화된 반복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불교음악이라고 말하는가? 불교음악은 음악의 한 장르인가? 아니면 불교의 한 부분인가? 이러한 구분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세계 주요 불교국가의 정통적인 불교음악 즉 불교 의식음악을 중심으로 불교음악의 의미와 그 근저에 흐르는 불교음악만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무엇을 불교 음악이라 하는가?
음악의 장르를 심도 있게 다루는 음악 전문가들은 큰 단위의 음악계(音樂界혹은 음악의 흐름)를 구분하기 위해 유럽 음악계와 더불어 동양권의 음악계를 중국 음악계(중국 한국 일본 티벳 몽골 베트남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등), 인도 음악계(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아라비아 음악계(아랍 이란 터키 아프가니스탄 북아프리카 이슬람국 발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3대 계통으로 나눈다. 물론 각 음악계에는 그 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 이미 섞여 있는 서로의 영향 때문에 양쪽 음악계에 동시에 속해 있는 국가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리상으로나 역사적으로 이들 나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아 왔기 때문에 이미 신화나 예술의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충분한 교류가 이루어진 상태다. 이렇게 큰 흐름으로 음악계를 분류하는 방식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라비아 음악계를 제외하고는 중국 음악계와 인도 음악계 대부분의 나라가 전통적인 불교국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나라의 음악이 모두 불교에 바탕을 둔 음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큰 흐름에서 본 것처럼, 이들 전통적인 불교 국가들도 민간에서는 오히려 중국의 음악이나 인도의 세속적인 음악에 더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전통이 각국의 민속적인 음악의 특성으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서 불교음악이란 차라리 인도음악과 중국음악의 테크닉(techniqes, 선율, 악기, 음계, 선법 등)에 불교적 색깔이 더해졌다는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민간이나 궁중에서 정형화된 이들 나라의 음악을 불교음악이라고 단정 지어 부르기에는 너무 비약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 불교국가에서 말하는 의식음악 즉 불교음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제 그 틀을 좀 더 좁혀보자. 불교음악은 일반적인 민간의 대중적인 음악의 흐름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음악은 말 그대로 불교의 말과 소리로 불교의 역사와 감각과 의식을 담아낸 정형화된 노래와 소리이다. 이러한 노래와 소리는 불교 특히 불교의 의식 속에 그 모든 것이 담겨있다. 불교에서는 흔히 이러한 소리의 전통을 ‘범패(梵唄)’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다양한 정의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범패는 불교의 의례의식(儀禮儀式)을 진행하는 음악으로, 범음(梵音) 인도(印度 또는 引導) 소리 또는 어산(魚山)이라고 하는데 주로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로써, 장단과 화성이 없는 단성시율(單聲施律)이다.”(「불교음악 영산재연구」법현, 서울:운주사, 1997, p. 11) 물론 한국불교에서 주로 공감하고 있는 범패에 대한 대표적인 정의이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불교 국가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범패의 의미와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주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라는 부분에서는 왠지 너무 한국적인 의미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의 범패가 주로 재를 지내는데 사용하는 보조적인 수단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불교에서 사용하고 ‘재(齋)’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단식(斷食)이나 부정(不淨)을 피한다는 의미로, 고대 인도에서 매월 6번의 성스러운 날 (六齋日: 음력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대중들이 그 전날 밤부터 종교 의식의 장소에 모여 (정오이후부터) 단식을 하며 하루를 경건히 보냈던 관습에서 유래한 행사를 말한다. 이것이 발달하여 현재 일반에서는 ‘부정한 일을 멀리하거나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드리는 불공(佛供)’ 등의 의미를 재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제종 불교 재의례의 실행절차와 방법」정각, 서울: 앰애드, 1999, p. 140 각주5.) 이런 식의 정의에 맞춰 재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범패를 전부로 보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또 불교권 전체에서 인정할 만한 범패에 대한 정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불교를 제외한 다른 여러 나라의 범패는 주로 ‘재’를 올릴 때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방불교나 티벳불교에서는 경전을 암송하고 가르침을 구전 전승하는 의례의식의 구체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면에서 범패는 보편적인 의미의 “석가여래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나 “불경(佛經)을 염송(念誦, chanting)할 때 곡조에 맞게 읊는 소리”라는 뜻이 더 적합해 보인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존 전승하기 위한 수단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따라서 불교음악인 범패는 ‘의례의식의 음악’이라는 포괄적인 의미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불교음악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할 때, 미흡하나마 ‘불교의 말과 소리로 불교의 역사와 감각과 의식을 담아낸 정형화된 노래 소리로서 의례의식에 주로 사용되는 음악’이라고 정의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 불교 국가들에서 전해지는 의례의식의 음악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몇 가지 예를 통해 알아보자.
3. 주요 불교 국가의 의식음악
일반적으로 서양에는 불교음악을 지칭하는 범패에 해당하는 특별한 용어가 없다. 그래서 언제 누가 먼저 사용했는가 하는 증거는 없지만, 대부분의 불교 영문 서적이나 종교 의례 관계 서적에서는 ‘챈팅(chanting, 念誦 혹은 暗誦)’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바로 불교의 의례의식에서 사용하는 염불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이 ‘챈팅’이라는 용어는 불교 용어가 아니라 기독교 용어이다.
영어 ‘Chant (詩唱)’의 어원인 ‘깐뚜스(Cantus)’에서 기원한 ‘챈팅’이라는 말은 성경(聖經)의 시적(詩的) 구절을 단조로운 리듬을 타고 기억하기 쉬우며 그 뜻을 잘 음미할 수 있도록 영창(詠唱)하는 소리와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서구의 학자들은 남방불교 국가나 티벳불교의 승려들이 불교 의식이나 일상에서 경문(經文)을 암송(暗誦)하는 것을 보고 ‘챈팅’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어원상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챈팅’이라는 말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설명하는데도 아주 적합한 면이 있다. 마치 그레고리오 성가가 단순한 음율의 ‘깐뚜스(Cantus)’가 복잡한 선율과 엄격한 박자를 지키는 정규 음악으로 발달한 것처럼, 그래서 그레고리오 성가가 현대의 다른 복음 성가들 보다 단조롭지만 웅장하고 감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또 전문가들이 말하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성이 전례 성가로서 단선율·무반주·전음계(全音階, diatonic)적 음악으로 인공적인 반음요소(chromatic semitone) 없이 자연적인 반음만으로 구성된 단순하고 고전적인 정감을 주는 음악이라는 예에서, 이 챈팅의 역사는 불교 범패의 발달사와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범패에 관한 티벳불교의 기원에 따르면, 범패는 부처님께서 열반(涅槃)에 드셨을 때 500명의 아라한(阿羅漢)들이 그곳에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염송(念誦, chanting)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범패의 시초이며 여기서 발전한 범패의 양식을 티벳불교에서는 ‘사라스와띠(sarasvati, 妙音)’ 전통이라고 부른다.(티뱃불교에는 티벳 내에서 기원한 ‘양(dByangs: 曲調)’의 범패 전통이 더 있다. 이 전통은 다양한 승가 범패로 전승되고 있다.) 사라스와띠는 본래 힌두(Hindus) 신격(神格) 중에 한 분으로 창조의 신인 브라흐마(Brahma)의 배후자이다. 원래 힌두의 성전인「베다(Vedas)」에서는 강의 여신으로 정화와 풍요의 상징이었지만, 그녀의 속성이 바뀌어 언어를 창조했다는 전설에 따라 말과 학문, 문예의 여신이 되었다. 사라스와띠는 지금도 인도에서 지혜와 학문, 음악과 예술의 신으로 그 기능을 다 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모습을 보면, 지혜와 학문의 상징인 「베다(Vedas)」와 염주를 들고 음악과 예술의 상징인 현악기 비나(vina)를 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불교의 범패는 바로 이 전설이 현실에 구현된 경우이다.
그러면 실제 불교 국가들에서는 이러한 범패의 전설이 어떻게 현실에 구현되고 있을까? 세계 주요 불교국가들의 의식음악을 잠깐 살펴보자. 먼저 태국이나 미얀마를 위시한 남방불교 전통의 일상적인 승가 교육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 승가에서는 불교 언어(팔리어나 산스끄리트어 등)와 경전 암송(暗誦, chanting) 등이 매일 이루어지고 있으며, ‘위빠샤나(Vipasyana)’ 수행법과 설법 그리고 독경(讀經)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소리를 내어 하는 불교 의식이라는 것은 경전 암송을 위주로 하는 독경을 말한다. 또 일반 재가자들과 함께 하는 대중 의식 역시 침묵을 요구하는 좌선 수행 이외에 소리를 내어 하는 의식은 매달 보름에 열리는 참회의 포살(布薩, pohoya)에서 그 구체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참회의 날인 포살일이 되면, 재가자와 스님들은 아침의 침묵과 좌선 수행을 마치고 나서 오후 2시쯤부터 부처님의「본생담(本生譚, Jataka)」을 억양에 맞추어 암송하고 오후 6시쯤부터는 보호의 주문인 파릿타(paritta) 진언구(眞言句)를 외우거나「사념처경(四念處經)」을 암송한다. 이 외에도 연간에 주기적으로 행하는 보리수(菩提樹) 공양의식인 보디뿌자(bodhipuja)나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하는 의식인 페라헤라(perahera), 스님들의 가사를 보시하는 행사인 가치나(kat.hina), 부처님의 탄신일 성도일 열반일이 함께 있는 웨사크(vesak, 5월 보름) 그리고 스리랑카의 경우, 불교 전래일인 6월 보름의 포선(poson) 등에 스님들이 경전을 염송(念誦, chanting)하는 방식으로 불공을 드리는 의식을 진행한다. 따라서 남방불교에서는 경전을 독송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불교 의식음악 혹은 범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방 불교권은 상대적으로 의례의식의 범패가 그렇게 다양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불공을 드릴 때, 악단과 춤추는 무희가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조금은 더 동적(動的)이고 대중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춤과 악기 연주는 세속적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불교의 정토를 지상에 구현하는 찬탄의 소리이며, 헌공의 몸짓이다. 즉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가르침의 고마움을 기리기 위한 헌공의 의미로서 향 공양, 등 공양, 꽃이나 과일 공양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국 중국 일본 등의 불교 의식음악을 살펴보면, 서기 847년경 신라와 당나라의 범패를 듣고 목격한 일본 스님 엔닌(圓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신라의 범패는 그 음운(音韻)이 당나라 소리와 같았다는 보고가 있는 것처럼,(홍윤식의 소논문「한국 정토교의 불교의식과 불교음악」p. 60 참조.) 이미 오래 전부터 한중일(韓中日) 삼국은 범패의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온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국불교의 ‘화청(和請)과 평염불은 음률이 민속적이기 때문에 순순한 한국범패로 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박범훈의 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불교음악의 전래와 한국적 전개에 관한 연구」참조.) 하지만 인도의 로께쉬 짠드라(Lokesh Candra)라는 학자가 채록한 한중일 삼국의 「천수경(千手經)」에 있는「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長句大多羅尼)」의 실제 구음(口音) 소리를 들어 보면, 발음과 억양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큰 정서상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특히 이「신묘장구대다라니」는 한중일 삼국의 불교 의식에 자주 사용되는 다라니(dharani) 경문(經文)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아마 같은 한자권(漢字圈)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서로의 영향이 깊다는 것을 안다면, 중국과 일본의 범패 역시 앞에서 말한 한국 불교의 범패에 대한 정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이들 나라 범패의 주요한 특징은, 홍윤식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ibid, p. 60-61 참조), ‘미묘한 천부(天賦)의 묘음으로 경전의 의미를 기리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 교화적 기능에 있다. 더불어 범패 소리 안에 담긴 뜻과 내용을 긴 시간 동안 배우고 음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불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르고, 그 내용 하나하나를 수행자 개인의 것으로 소화하는 수행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 한중일 삼국의 범패라고 할 수 있다. 또 범패 분야의 인간문화재를 지낸 박 송암 스님이 “옛날 범패 시현자들은 강당(講堂)을 마쳐야 하는 것은 물론 우기(雨期) 5 안거(安居)의 수행을 마쳐야 그 소리를 대중 앞에 선보일 자격이 있다”고 말한 데서도 그 수행적인 중요성을 살펴 볼 수 있다. 실제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망자에게 전함으로서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천도의식의 일종인 시식(施食)이나 장엄염불(莊嚴念佛) 등과 같은 한국 범패의 각종 염불의식을 보면, 앞에서 살펴본 남방불교의 의식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한 것은 물론 염불자 자신의 내면적 수행을 더하기 위한 수행방법 중에 하나가 범패라는 사실이 그 내용과 구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좀 더 정교한 범패의 구성과 내용은「석분의범(釋門儀範)」안진호, 서울: 법륜사, 1983년 참조.)
여기서 금강승의 전통으로 인해 불교 국가들 중에서도 실제로 가장 정교한 의례의식을 가지고 있는 티벳불교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티벳불교의 범패는 5∼6세기에 꽃을 피우고 11세기까지 번성한 불교 역사상 최고의 승원대학이었던 인도 나란다 대학으로부터 이어지는 오랜 전통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티벳불교 의례서에는 범패의 가락이 채보(採譜)되어 있는 문헌이 있어서 승원 교육 기간에 범패를 일정한 음률에 맞추어 염송(念誦)하는 교과서로 쓰인다. 장기간에 걸쳐 구전 전승되는 티벳불교의 범패는 출가한 사미 사미니들에게 단순히 곡조의 음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 염송함으로서 그 뜻을 터득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주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경구(經句)의 의미를 정확히 하고 강조하기 위해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의식이나 수행 중에 그 뜻이나 절차에 보다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티벳불교의 범패에는 진언 염송과 기도문(請師, 由致, 獻供, 懺悔, 請法, 讚嘆, 勸請, 所請, 回向 등)을 합창할 수 있는 일정한 음률이 있으며 이를 장엄하기 위해 법라(法螺) 바라 요령 북 등의 여러 가지 악기가 사용된다. 범패의 목적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의 내용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고 기억하기 쉽게 하는데 있으므로 승려들이 육성(肉聲)으로 하는 염불(念佛) 구음(口音) 소리가 중심을 이룬다. 이에 따른 악기와 장식(裝飾)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더하기 위한 보조적인 기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불교 범패의 악기들도,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목탁(木鐸) 금강령(金剛鈴) 바라(鉢鑼) 태징 법라(法螺) 경쇠 호적(胡笛) 나팔(喇叭) 등이 있다. 보통 사물(四物)이라고 불리는 범종 법고 목탁 운판 등은 대사물이라고 하며, 바라 태징 법라 경쇠 등은 소사물이라고 불린다. 이 대사물과 소사물은 어장 스님의 법음성에 맞추거나 다음 진행의 순서를 알리는 한편, 불자들로 하여금 흥을 돋아주고 분위기를 고조시켜 신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여기에 법구(法具) 불경(불경) 등을 이동하는 의식에서 선도(先導)하는 음악을 위해 박자나 리듬을 만드는 취타악에 북 법라 호적 나팔 등과 선율을 만드는 삼현육각인 거문고 가야금 당비파 북 장구 해금 피리 태평소 등이 있지만,”(「불교 의례의 법의 법구와 그 용법」, 김흥우, 서울:앰애드, 1999, p. 525) 이와 같은 악기들 역시 실제 의식의 내용이나 의미를 더 강조하기 위해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것이 불교음악인 범패에서 악기가 가지는 기능과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음악인 범패는 다른 음악과는 달리 악기가 장식을 위한 보조 수단인 경우가 많고, 오히려 말로 읊조리는 구음(口音)으로 만드는 음률의 내용 즉 경전의 가르침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범패가 단순히 흥얼거리는 무의미한 소리가 아닌 이상, 서양 음계처럼 기계적이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정교하게 정형화된 형식이 있다. 티벳 불교를 예로 들어 보면, 범패 시현자가 구음 소리를 내는 방식만 해도 복성(腹聲, khog pa'i skad) 후성(喉聲, mgrin skad) 비성(鼻聲, sna skad) 여성음(女性音, mo skad) 남성음(男性音, pho skad) 자성(自聲, rang skad) 밀성(密聲, rgyud skad) 야크의 교배종인 조의 소리(mdzo skad) 염라왕의 소리(gshin rje'i ngar skad) 등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경을 읽는 소리인 된(‘don),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따(rta), 소리를 길게 끌거나 돌려서 내는 양(dbyangs) 등의 형식이 있고, 악기에 맞추어 함께 하는 소리나 득음(得音)을 한 전문가가 중간 중간에 끌고 가는 소리 등이 따로 있다. 또 의례의식의 내용에 따라 그 진행 방식이 조금씩 다르며, 수행의 방법에 따라 다양한 구분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미 서양음악의 이론에 해당하는 분량의 공부가 필요할 정도이다.
이상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주요 불교국가들의 불교 의식음악에서 그 기능과 역할을 보면, 범패의 본질적 의미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읇고(念誦 혹은 暗誦, chanting), 그 내용을 기억하여 수행함으로서 깨달음을 얻으며, 그 깨우침을 중생에게 회향하는 수행의 노래이자 교화(敎化)의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수행의 노래 교화의 노래: 범패
“붇담 샤르남〜 가차〜아미, 담맘 샤르남〜 가차〜아미.......”(팔리어 삼귀의(三歸依) 중에서), “팍빠 꾄촉 쑴라 착챌로, 디 께 닥기〜〜......”(티벳어 반야심경 도입부 중에서), “바냐 바라밋다 시무교우〜〜......”(일본어 반야심경 처음부분),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한국어 반야심경 독경 중에서).......
독경(讀經, chanting)하는 염불(念佛) 소리들이다. 가끔 티벳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께서 베푸는 외국의 법회에 참석하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특히 <반야심경>은 거의 모든 불교 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경전으로 일반적인 법회 의식에서 항상 염송(念誦, chanting)하는 의례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 법회에 참석해 보면, 단순히 경전을 독경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각국의 독경 소리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독특한 그 나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도 하다. 다양하면서도 같은, 무언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이면서도 그 감동이 다르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불교 음악인 범패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발음이 다르고 발달한 정서가 달라서 같은 경전을 읊조림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표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에 엄숙함에 대한 동일한 공감대, 바로 이것이 불교의 의례의식 속에 녹아 있는 불교음악 범패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나아가 요즘에 와서 유행하는 불교의 명상음악이라는 것도 이러한 독경이나 염불소리에 대중적인 취향의 음악적 재료(악기, 서양음계 식의 편곡 등)가 가미된 경우가 많다. 결국 큰 틀에서 불교적 의미 전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들 명상음악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각성(覺性)과 안정(安定)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의례의식에 사용하는 범패를 수행의 차원에서 본다면, 범패의 주 기능은 수행의 본존에게 올리는 헌공(獻供)의 한 부분이다. 헌공을 위한 음악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법을 청(請)하거나 법계의 가르침을 칭송하고 그 덕을 기리는 찬탄(讚嘆)으로 진지한 명상의 수행이며, 엄숙한 기도문이다. 따라서 한 구절 한 구절 온 정성을 다해 그 의미를 담고 가능한 한 아름답고 진지하게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소리는 일반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면서 듣기만 해도 무언지 모를 진지한 엄숙함이 전해져 오는 것이며, 정화의 기운을 풍기는 것이다. 조용한 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수도사들의 엄숙하고 고요한 기도 소리가 마치 히말라야 고원에 있는 승원의 엄숙한 새벽 염불 소리처럼 들리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다.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하는 기도 소리는 미사 때 사용하는 음악처럼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대중의 음악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참 뜻을 깨우치기 위한 수행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4. 맺는 말
음악이 단순한 말과 소리의 정형화된 반복일 수만은 없듯이, 불교음악인 범패 역시 단순한 불교의 말과 소리의 정형화된 반복일 수 없다. 범패는 그 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기억하고 따라하기 위해 반복 염송하던 일정한 운율의 독경이다. 아니 원래 그렇게 일정한 운율이 있었다기 보다는 세월 속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정한 의미의 범패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담아내는 것이다. 또 그것이 내면의 수행으로 전환되어 나오는 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범패소리일 것이다. 거기에 가능한 모든 장식(악기나 성스러운 춤 그리고 명상적인 집중의 힘 등)을 더해 헌공할 때 성스러운 종교음악으로서의 가치까지 듬뿍 담아내는 것이다. 이미 각각의 형식을 가지고 발달한 세계 주요 불교 국가들의 불교의식 음악인 범패는 그 다양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공통의 공감대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범패로 대변되는 불교음악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수행자에게는 명상의 음악이요, 간절히 법을 구하는 자에게는 법을 담은 법음(法音)이며, 법을 전하는 자에게는 가르침을 전하는 교화의 노래(敎化音)이다. 범패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마다 각각의 음률과 형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승가에서 들려오는 범패 소리(僧音)는 출가한 수행자들이 들려주는 부처님의 맑은 지혜요(慧), 고요히 가라앉은 선정의 소리이며(定), 청정한 계행(戒)의 소리이다. 나아가 그 세 가지(三學)를 아우르는 부처님의 음성(佛音)이며, 그 깨달음의 향기를 전하는 해탈향(解脫香)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