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별 수업으로 `명문고` 도약 : 부산 금곡고등학교
교육과학기술부가 4월 15일 학교자율화 계획안을 발표 하자, 두 가지 사항이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정규수업 이전에 이뤄지는 `0교시 수업'과 전 과목 평균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을 가르는 `우열반'의 부활이었다.
이 중 `우열반'은 `나는 우반, 너는 열반'이라는 식으로 자칫 성적으로 어린 학생들에게 `나는 패배자'라는 열패감을 심어줄 수 있다. 자연스럽게 학교는 전인교육은 사라진, 성적 경쟁만 남은 `전장(戰場)'으로 변한다.
시?도교육청도 이를 우려해, 우열반을 금지했다. 대신, 수준 별 교육의 대상 확대와 수준 세분화 확대를 일선 학교에 권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수준 별 교육 확대가 학교현장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우열반'의 편법적인 형태로 운영되진 않을까?
부산 금곡고등학교는 이러한 고민을 끝낸 대안을 제시해 준다.
1. 수준별 수업으로 `명문고' 도약
부산의 고등학교 배정 체계는 두 가지 방식이 섞여 있다. `40% 선지망, 60% 무작위 배정'. 고교 진학 대상자는 자신이 희망하는 고교를 지망한다. 이 중 40%는 자신이 원하는 학교로 진학한다. 그러나 희망하는 학교로 가지 못한 나머지 60%의 학생은 무작위로 배정된다. 40%지만, 선지망 방식 하에서 경쟁률은 학교마다 차이를 보인다. 경쟁률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가 가고 싶은 학교와 기피 학교가 공개된다. 좋은 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가 학생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다.
부산 북구에 위치한 금곡고는 2003년 개교했다. 당시 이 `신생' 학교를 가고자 하는 학생은 적었다. 첫 신입생 모집 결과, 금곡고는 선지망 경쟁률이 남학생은 0.90대 1, 여학생은 0.40대 1. 모두 미달이었다. 2008년 지금 금곡고의 선지망 경쟁률은 최상위권이다. 2006년에 여학생의 경우, 경쟁률이 5.61대 1로 부산에서 가장 높았다. 3년만에 경쟁률이 무려 14배 수준으로 뛴 것이다.
비결은 `선택형 보충수업'이었다. 대학마다 다양한 전형안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종전처럼 모든 과목에 치중하기 보다는 자신의 진로 및 수준에 따라 대입을 전략적으로 준비하는 게 낫다는 취지에서 지난 2005년 마련됐다.
금곡고 학생들은 다른 학교와 달리, 보충수업 때 자신이 부족한 과목을 스스로 선택해서 듣는다. 언어, 외국어, 수리, 탐구 영역에 걸쳐 학교는 총 53개 과목을 개설하면, 학생들은 ‘단과학원’처럼 희망대로 수강한다. 강좌는 영역 별로 다양하다. 지난 해 언어영역에서는 크게 문학기본, 비문학, 문학 심화, 수능 언어 등으로 네 부분으로 나눠, 총 6개 과목이 개설됐다. 실력 차이를 고려해서 기본과 심화반도 따로 마련돼 있다. 특히, 1~2학년은 `무학년제'를 도입, 학년 구별 없이 수준에 맞는 보충 수업을 듣는다.
결과는 대만족. 일단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다. 우리나라 공교육이 목표로 삼고 있는 `학원 뛰어넘기'가 현실화된 것이다. 3학년 서정훈 군은 "학교에서도 배우고 싶은 걸 찾아서 들을 수 있는데, 학원 갈 필요 없죠. 학원이 오히려 비효율적이에요"라며 "일일이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단과반을 들으면 비용이 만만치 않고, 싼 값에 들으려 종합반을 수강하면 필요 없는 다른 과목도 들어야 하잖아요."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마다하고 금곡고로 향하고 있었다. 금곡고 2학년 이하진 학생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보충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에서 5분 거리인 학교 대신 15분 걸리는 이곳을 택했다"고 말했다.
당연히 보충수업에 대한 열의도 높아졌다. 자신이 원하는 수업을 듣기 위한 학생의 `경쟁'은 불꽃 튈 정도다. 보충수업 수강신청은 대학처럼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이뤄진다. 학생들은 수강신청 당일 날에는 인터넷 접속 상태가 좋은 곳을 찾아 대기한다. PC방, 친구 집 등 명당자리로 속속 학생이 모인다. 인기가 있는 과목은 수강신청이 시작되자마자 마감된다. 예약 개시 1초 만에 마감되는 가수 이승환 씨 콘서트와 비견될 만하다고 학생들은 입을 모은다. 학생은 `광클'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강신청 개시 시간에 `금곡고'가 대형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금곡고의 인터넷 서버(server)는 다운되기 십상이었다.
학생 스스로 본인에 맞는 학습은 `맞춤 진학'의 토대가 됐다. 다양한 전형 요소를 갖춘 수시모집을 통과하는 데 금곡고의 `선택형 보충 수업'은 효과를 발휘했다. 2008학년도 입시에서 수시 모집으로 재적생의 89%가 합격했다.
금곡고의 성공사례는 부산 시내 곳곳으로 파급됐다. 주변 학교에서는 속속 선택형 보충 수업을 도입했고, 부산시교육청은 선택형 보충 수업 설명과 수강신청 프로그램 등을 담은 CD를 전 부산 시내 고교에 하달했다. 이 뿐만 아니라, 금곡고는 성적 상위 5%는 심화 학습 동아리로 따로 묶어 심층 면접에 대비한 교육을 시킨다.
심화학습은 학생부 성적이 높은 이들에게는 `수시'전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객관식을 한 문제 더 맞히기 위한 교육 보다는 심층면접 대비용 수업을 한다. 예를 들면, 하나의 과제를 제시하고 일주일의 시간을 준 뒤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한다.
`수시' 모집을 겨냥한 이 학교는 2008학년도 입시에서 수시모집으로 포항공대 5명, 카이스트 2명, 서울대 1명, 고려대 3명, 연세대 2명을 합격시켰다. `포항공대 5명'이란 진학 결과는 전국 5위권에 속한다. 부산대 수시모집에는 26명이 최종 합격, 부산대 수시모집 전국 최다 합격생을 배출한 학교가 됐다.
2. 공립교사 마인드깨기가 장애물
금곡고의 `선택형 보충수업' 시스템은 2005년 이 학교에 부임한 박찬규 교감(52)이 고안한 것이다. 박 교감은 부임 이후 노량진의 학원가와 민족사관고등학교 등 유명 사립고를 1년 가까이 찾아다닌 끝에 `선택형 보충 수업'의 틀을 만들었다. 부산에서 서울, 경기, 논산 등 경쟁력 있는 학습방법을 만들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것이다. 이러한 수많은 출장과 교육 프로그램 제작 상의 어려움은 넘기 어려운 산임에 분명했지만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과제였다.
더 큰 어려움은 학교 내부에 있었다. 공립교사 마인드깨기, 바로 그것이다. 선택형 보충 수업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교사들의 열정과 노력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일부 교사들 사이에서는 `적당주의'가 팽배해 있다. 공립은 사립보다 심하다. 일반적으로 5년만 있으면 다른 학교로 가기 때문에 굳이 이 학교에 `충성'을 다할 필요가 없다는 `공립교사 마인드'때문이다.
박찬규 교감은 "교사들이 힘든 프로그램을 따라 오게 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강제로 끌고 가자니, 교사들의 정성이 빠진 교육이 빈틈이 보일 것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전 교사 64명이 모여 난상 토론을 했다. 학교 구성원 모두의 `공립교사 마인드깨기'는 선택형 보충수업이 성공을 거두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금곡고가 올해 부산시교육청에 제출한 `금곡고 맞춤식 교육의 성과'라는 보고서의 한 부분이다. "교사의 열정과 헌신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학교 교육과정의 성패를 좌우한다. 업무 추진에 있어 교사의 동기 유발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소수 엘리트 교사들만의 정책 수립 및 추진으로는 학교 교육과정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