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교의 폭력이 심각하다. 지난 5년 동안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학생수만 750명이 넘는다. 학교당국과 교사들도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도 폭력 사태가 자주 일어난다.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언어폭력뿐 아니라 신체폭력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이런 지경이라면 교사들의 체벌금지만으로는 결코 학교 폭력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폭력을 당한 학생은 너무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폭력을 행한 학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가해학생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흔히 하는 일을 자기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폭력이 몸과 맘에 밴 것이다. 새싹 같은 10대의 어린 학생들이 어쩌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했나? 진리를 가르치고 인격을 길러줄 학교가 폭력이 지배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나? 옛날 중국 역사책에는 우리 민족이 생명을 사랑하는 평화 민족이고, 서로 양보하고 싸우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우리 현대사는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조선왕조 말기의 불의한 폭정, 동학혁명군에 대한 정부군과 일본군의 무자비한 살육, 일본의 군국주의적 식민통치와 전쟁, 남북분단과 전쟁, 군사독재와 개발독재로 폭력이 우리 사회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며 폭력에 앞장 선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처럼 폭력적인 역사를 살았으면서도 우리나라, 우리 사회는 폭력에 대한 반성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다.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삶과 의식이 폭력에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오늘의 학교폭력을 역사 탓으로만 돌릴 것도 아닌 것 같다. 1950~60년대만 해도 시내에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면, 여러 달 동안 큰 화제가 됐다. 지금은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그런 사건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격투기와 영화, 드라마, 게임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너무 많이 보니까 푹력이 젊은 학생들의 생각과 삶에 배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 어린 학생들이 이처럼 폭력의 늪에 깊이 빠진 진정한 까닭은 우리 사회 자체가 폭력을 숭배하고 폭력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무언가? 물리적 힘을 부당하게 쓰는 것이다. 물리적 힘은 물질의 힘, 돈과 권력의 힘이다. 부당하다는 것은 옳은 목적이 아니라 잘못된 목적에 잘못 쓰인다는 것이다. 정신은 물질의 주인이고 목적이다. 물질은 마땅히 정신을 위해 쓰여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돈과 권력에 대한 거의 맹목적 숭배에 빠졌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 이처럼 돈에 집착하고 숭배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학대고 폭력이다. 돈과 권력은 생명과 정신의 가치와 보람, 진리와 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오늘 누가 진리와 선에 관심을 갖는가? 돈과 권력과 겉모습의 매력에 끌리는 사람은 많고 많지만 정신의 가치, 진리와 도덕에 끌리는 사람은 드물다. 참된 목적을 잃은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숭배는 우상숭배고 폭력숭배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부당하고 불의하게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폭력이다. 그러나 부당하게 남을 괴롭히고 남을 갈취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돈과 권력을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엉뚱한 곳에 쓰는 것도 폭력이다. 돈과 권력을 꼭 필요한 곳에 쓰지 않아서, 사람이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는다면 돈과 권력을 쓰지 않은 것도 폭력이다. 생명과 정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을 위해 돈과 권력을 바르게 쓰지 않는 것 자체가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생명과 정신의 고양을 위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쓰이지 않는 돈과 권력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학생들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이미 폭력적인 삶에 깊이 빠져 있다. 우리사회는 폭력숭배에 빠져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다. 오늘날 교육이란 학생들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주입하고 폭력적인 삶에로 몰아넣으면서 폭력을 향한 무한경쟁을 학생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이 폭력사회 폭력 학교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이미 기축시대의 스승들, 예수, 석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가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쳤다. 기축시대 정신의 핵심은 자연만물이나 국가권력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 신적 생명과 영원한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한 마디로 물질이나 권력이 아니라 정신이 고귀하고 영원하다는 것이다. 기축시대의 정신이 내놓은 윤리는 단순하다.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를 평화의 지름길로 이끄는 황금율이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가르침과 윤리는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쉬운 것이다. 이들에게서 태동된 고등종교들과 철학은 모두 폭력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이치에 따라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와 철학은 너무 복잡하고 오염되어서 기축시대의 정신을 잃고 있다.
씨알사상은 나라가 망해갈 때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워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려 했던 안창호 이승훈의 교육입국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안창호는 어린 학생에게 절하면서 가르쳤고 몸소 길거리를 청소하고 집안 청소를 해주면서 가르쳤다. 이승훈은 몸소 변기통을 닦고 변소청소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극히 겸허하게 정성을 다해서 섬김으로써 가르쳤던 안창호와 이승훈을 따라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사상과 철학을 씨알철학으로 닦아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학교가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사람의 본능이 폭력적이고 공격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한 때 사람의 본성이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라고 말하는 생물학자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람이 본능적으로 이타적이고 선하다는 주장을 하는 생물학자들도 있다. 사람의 본능이 선한지, 악한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람 생명의 본성 속에는 선한 성향과 악한 성향이 뒤섞여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생명진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평화의 길로 진화해온 것을 알 수 있다. 포유류인 고양이들도 이빨과 발톱이 날카롭지만 고양이들끼리 모아놓으면 매우 평화롭고 착하게 지낸다. 먹이만 있으면 나름대로 질서를 지키면서 서로 장난치고 뒹굴고 껴안고 핥아주면서 즐겁고 기쁘게 지낸다. 고양이 네 마리를 기르면서 고양이가 얼마나 착하고 평화로운지 감탄한다. 사람은 이빨도 뭉툭해지고 손톱발톱도 부드러워지고 눈도 맑아졌다. 신체의 변화 자체가 평화의 길로 들어선 것을 말해 준다. 이성과 감정이 발달하고 말을 하게 된 것도 사람이 평화롭게 사는 길로 진화한 것을 나타낸다. 다만 사람의 정신과 생각이 한없이 깊어지고 무한대로 확장되어서 제멋대로 전체를 휘두르고 싶은 충동도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다른 길은 없다. 사람이 살 길은 오직 하나 평화의 길뿐이다. 마음, 생각, 삶, 행동으로 평화의 길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다. 사람은 평화를 위해 준비된 동물이다. 사람에게는 한없이 깊고 높은 신령한 생명과 고귀한 가치가 있다. 이 고귀한 가치와 신령한 생명은 평화로운 삶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다.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 것 같다. 첫째 사납고 거친 맘을 삭힐 철학과 사상을 익히는 것이다. 교사부터 학생까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철학, 맘을 닦고 씻으며 깊이 파서 서로 돌보고 보살피는 철학과 사상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일찍이 유영모는 “큰 나라 아메리카가 벌이를 잘 하고 작은 나라 덴마크가 실속을 차려도 맘 삭힐 철학(맘 삭힐 줄)이 없으면 제대로 된 나라를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경제가 발달하고 아무리 훌륭한 복지제도를 만들어도 사납고 거친 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자기를 학대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폭력에 빠지고 만다. 거칠고 사나운 맘을 삭혀서 맑고 깊은 맘에 이르러야 한다. 맘이 맑고 깊지 못하면 바른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건전한 문명사회를 이룰 수 없다.
둘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평화를 위해 준비된 존재요 평화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고 조금만 서로 이해하면 폭력에서 벗어나 평화로 갈 수 있다. 교육방법을 바꾸고 새 교육방법을 찾으면 평화의 길은 있다.
최근에 청주 동주 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 김미자 선생님은 학교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공부모임을 하면서 노르웨이 교육에서 ‘멈춰’ 교육방법을 배우고 이 방법을 자신의 학급에 적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폭력을 행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말이나 행동이 있을 때 학생이 ‘멈춰!’라고 소리치게 했다. 처음에는 소리를 치지 못했으나 자꾸 격려하고 노력하여 피해 학생이 큰 소리로 ‘멈춰!’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소리가 나면 당장 전체 학급회의를 열고 토론하게 했다. 그리고 연극을 통해서 상황을 재현하게 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할을 바꾸어서 상황을 재연하게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이 학급은 폭력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10개의 다른 학급들도 이 방법을 받아들여서 학교폭력을 극복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많은 문제가 풀린다. 이것이 기축시대의 성현들이 깨닫고 가르쳐준 길이 아닌가? 나를 벗어나서 남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길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교육철학을 정립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교육방법들을 개발하면 폭력학교가 평화학교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