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큰 영애 박근혜씨는 서강대학교 이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우수했으며 사려가 깊고 성실해 비서실에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청와대 직원들도 큰 영애를 대하는 일이 매우 조심스러울 정도로 처신이 신중했다. 차녀인 근영씨는 성격이 매우 쾌활했으며 누구보다 바른 말을 잘했다. 서울 음대 작곡과 출신인 근영씨는 박 대통령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을 옆에서 도운 당사자다. 근영씨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청와대에서 사는 동안에도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73년 경 큰 영애 박근혜씨가 당시 서울시장 아들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파다했었다. 어디서 흘러나왔는지도 모를 소문에 대해 육 여사는 아무 말 없이 그 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소문이 호사가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옮겨 점점 퍼져 나가자 영부인도 나중에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서울시장 부인을 전화로 불러서 나무랐다.
“남자야 그런 소문이 나도 괜찮지만 여자 쪽은 곤란하지 않느냐. 누가 시장 부인에게 그런 소문을 물어왔을 때 그냥 ‘아니다’라고 웃으면서 대답을 하면 그것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겸양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되기 쉬우니 정색을 하고 부인해야 된다”고까지 일러주었다. 육 여사는 측근들에게 “근혜는 좀 늦더라도 공부를 다 마친 후에 좋은 배필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3년 경 큰 영애 박근혜씨가 당시 서울시장 아들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파다했었다. 어디서 흘러나왔는지도 모를 소문에 대해 육 여사는 아무 말 없이 그 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소문이 호사가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옮겨 점점 퍼져 나가자 영부인도 나중에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서울시장 부인을 전화로 불러서 나무랐다.
“남자야 그런 소문이 나도 괜찮지만 여자 쪽은 곤란하지 않느냐. 누가 시장 부인에게 그런 소문을 물어왔을 때 그냥 ‘아니다’라고 웃으면서 대답을 하면 그것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겸양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되기 쉬우니 정색을 하고 부인해야 된다”고까지 일러주었다. 육 여사는 측근들에게 “근혜는 좀 늦더라도 공부를 다 마친 후에 좋은 배필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 1974년 2월 21일 서강대 이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근혜.
“아까 지만이에게 왜 맞았느냐고 물었다면서요?”
“예.”
“그런 건 왜 물어요. 모르면 어때요? 내가 가슴이 얼마나 아픈데….”
얼굴이 부어오른 지만군을 본 영부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부모 마음은 다 같은데… 아무도 몰랐으면 혼자서 삭이고 말 것을 공연히….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기에는 대통령의 아들이 구타를 당했으니 응분의 조치를 할 수 있으려니 하겠지만 육영수 여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이며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학교에서는 뒤늦게 대통령 아들이 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발칵 뒤집혔다. 학교 측이 때린 학생을 처벌하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육 여사는 “제발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얼굴이 부어오를 정도로 맞았지만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던 육영수 여사, 이것이 진정한 공인의 길이 아닐까.
- 청와대 본관 후정에서 어느날의 육영수 여사와 박지만.
박 대통령은 강화도를 다녀와서 “요즈음 젊은이들은 어째서 예절을 그렇게 모를까. 대통령이라고 부르기 어려우면 근영이 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다녀와서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니…” 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대학생들과 가까웠던 육영수 여사
육 여사는 순수하고 발랄한 젊은이들을 무척 좋아했으며 대학생들의 과외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육 여사를 좋아했던 대학생들은 육 여사를 캠퍼스로 초청, 좌담회 등을 가졌는데 육 여사가 방문했던 대학은 고대·외대·숙대·영남대·계명대·경희대 등이었다.
서울의 H대학에서 좌담회가 있었는데 한 학생이 박 대통령의 매력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육영수 여사는 그분의 강한 의지력이라고 답변한 뒤 웃을 때의 모습이 어린애같아 더 좋다고 해 강당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을 점수로 매기면 몇 점쯤 되느냐는 질문에는 ‘남편인데 B학점은 주어야 하니 이해해 달라’고 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대통령 부인이 대학 캠퍼스를 찾아가 학생들과 대화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육영수 여사는 대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아서 그들을 도와주었다. 각 대학의 각종 서클이 육영수 여사에게 서신을 보내와 지원을 요청해 오면 반드시 봉사활동에 필요한 경비의 일부를 지원했다.
1973년 여름 서울 K대학의 동아리 대표 조(趙)모군을 청와대에 오라고 해 영부인이 주시는 경비를 전하면서 내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반정부 데모하느라 학생들은 수업을 못하고 시내 교통이 막혀 시민들은 짜증스럽고…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나. 내가 좋은 방법을 알려주겠다. 이번 여름 농촌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틈틈이 농민들에게 대학생 자격으로 이야기하라. 이 정부는 도저히 안 되겠으니 다음 선거 때는 반드시 야당을 뽑아야 한다고….”
- 1972년 5월 12일 학생회 초청으로 경희대를 방문한 육영수 여사.
1974년 8월 14일 각 대학 유네스코 학생회원들이 10여 일간의 조국순례 대행진을 마치고 최종 목적지인 부여 백마강을 향해 도보로 행진을 하고 있었다. 정오 무렵 도보행군으로 땀에 흠뻑 젖은 그들에게 서울서 내려온 해태제과 냉동차에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배급되었다. 육 여사께서 그곳까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15일, 대학생들이 백마강에서 8·15광복절 기념행사를 가진 그 시각, 영부인은 총탄에 맞아 서울대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