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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평론집 [☆지금 이곳에서의 문학☆☆☆☆☆]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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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서의 문학]
김영호 평론집 / 봉구네책방(2013.12.13) / 값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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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시의 가능성
김영호
자생적인 민족 경제의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행해진 관제형 근대화의 여러 모순점이 비교적 뚜렷해지는 70년대에 이르러, 농민 문학은 우리 민족 문학의 가장 핵심적인 현실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이것은 농촌 인구의 계속적인 감소에도 불구하고 농촌이 우리 시대의 구조적인 모순을 가장 본질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적 공간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70년 대의 농민 문학 논의는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변화하는 현실에 올바로 대응하려는 문학 자체 내의 철저한 자기 인식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은 피상적인 현실 파악이나 주정적인 자기 탐닉을 지탱해 주던 문학의 제도화를 거부할 만큼 사회 구조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개편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 사회로의 급격한 전이 과정에서 문학이 그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문학 자체 내의 순수성이라는 초역사적인 허구성을 고집하기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역사적 현실에 동참함으로써 주체적인 문화 형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자각과 그에 따른 결단이 요구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70년대의 농민 문학은 필연적으로 민중 문학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사실 60년대 이후에 본격화된 산업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산업화 및 도시화가 농촌의 상대적인 희생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불균형은 저농산물 정책으로 대변되는 자립 영농의 기반 박탈로 인한 농민의 삶의 뿌리를 위협하게 되어 이농 현상과 그에 따른 유랑 노동자의 출현이라는 새로운 사회 현상을 발생케 했다. 물론 이런 현상을 좀 더 크게 본다면, 외국 자본에 대한 국내 산업 자본의 대응력을 확보하려는 데서 농촌을 그 전초 기지화한 것이므로 농촌은 결국 이중의 부담을 담당한 셈이 된다. 그러므로 농촌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올바른 방향 정립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두지 않은 음풍농월식의 농촌 연가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농촌 계몽식의 문화 인식은 결국 변화하는 현실을 외면한 몰역사적인 문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시선을 제공함으로 해서 그 현실의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고양시키는 데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련되지 않는 문학 행위란 개인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촌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지식인의 머릿속에서 미화된 허구적인 공간으로서의 농촌 집착과는 엄격히 다른 것이다. 농촌은 농민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이고 그 속에서 영위되는 농민의 삶 또한 역사적인 여러 장력들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농민 문학은 농민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확보를 지향하는 실천적인 관심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실천적 관심의 문학적 표현은 농민을 역사적 주체로 확인시킴은 물론, 나아가선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확인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의 탄력 있는 만남을 통해 주체적인 자기 동일성의 다양화를 꾀하도록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70년대의 농민 문학 논의는 농촌 사회의 해체와 재편성이 불가피한 급변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문학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그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 할 수 있다. 소설에 있어서의 김정한․ 천승세․ 송기숙․이문구․ 김춘복 등의 작업이라든가 시에 있어서의 신경림․ 문병란 등의 작업은 농민 문학의 한 분기점을 이루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들이 보여준 일련의 성과 중에서 가장 소박하고도 직접적인 것은 소재주의와 지방주의오서의 농민 문학의 극복일 것이다. 물론 그런 극복의 정도는 개별적이고도 섬세한 검토가 선행된 뒤에야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진보적인 중산층의 지식인이 농민 운동의 지도자로 등장하여 농민을 계몽하고 농촌을 개발해 나가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농촌 문제로 대두된다거나 또는 패배한 도시인의 귀향으로 미화되는 그런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농촌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인에서 그들의 작업이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농촌 현실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인 확인은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농민의 사회․ 경제․ 문화적 자립이 확보되어야 하는 공간으로서의 농촌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각에선 70년대의 농민 문학의 이런 성숙이 결국은 70년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었다고 보는 듯하다. 즉 70년대는 도시와 농촌의 구분이 없이 보편적으로 만연돼 있는 생활ㅇ릐 어려움 때문에 농촌 문제에 대한 논의가 불분명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일견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70년대의 농촌 문제는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으며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 그것의 치유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마저 일고 있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의 전반적인 삶의 어려움도 사실은 농촌의 재생산 기능이 극한에 다다른 데서 오는 파급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시와 농촌의 이분법적 논리도 다시금 후퇴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70년대의 농민 문학 논의가 반드시 이런 양분법적 구 분에서만 비롯됐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70년대에 도시에 대한 농촌의 상대적 위치가 선명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선명한 대비가 기본적으로는 농촌 자체 내의 모순에서 파생된 것이라기보다는 농촌의 재편성을 불가피하게 하는 전반적인 사회 구조의 모순에서 기인한다는 인식 위에서 70년대의 농민 문학 논의가 시작되었음을 다시금 상기해 본다면, 80년대에 농민 문학 논의가 불투명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문학 자체 내의 방법론적 한계성이 그 주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 더 크게는 문화의 자율적 성장이 억제되는 여러 여건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시대에 있어서 농민 문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삼스럽겠지만 농민 문학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첫째는 농민들이 노동 체험으로 써낸 문예 작품이요, 둘째는 농촌의 풍경이나 특수한 지방색을 나타내어 농촌 생활의 실태 및 풍속․ 습관․ 감정 같은 것을 주제로 한 문학으로 되어 있다.(이희승,『국어대사전』). 이런 사전적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농민에 의한 농민 문학과 문학가에 의한 농민 문학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구분을 통해 지난 70년대의 농민 문학 논의를 돌이켜 본다면, 그런 논의가 농촌 현실을 보는 지식인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간의 농촌출신 도시 노동자의 체험수기(도시 근로자로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으나 그 생활 의식의 뿌리는 농촌이며 결국은 농촌의 재편성에 의한 삶의 변화라는 측면에서)라든가 자생적인 농민요(노동요)의 출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70년대의 농민 문학 논의는 생산 담당자의 이런 자생적인 문학 표현을 간과하는 한계점을 보였다. 70년대의 농민 문학이 일단一團의 훌륭한 작가들에 의해 괄목할 만한 성숙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제의 상투성이나 구조의 경직성에 매몰되어 모두가 한결같은 목소리라는 비난마저 듣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한계점을 입증해 준다. 사실 농촌 현실에 대한 지식인적 반응은 그것이 아무리 철저하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현장성보다는 역사적 당위성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농촌 현실에 대응하는 지식인의 입장이 당대의 양심에 그 기반을 둔다 할지라도 항상 열려진 관심 속에서 농촌 현장의 실상에 탄력 있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자칫 농민지상주의라는 관념적 구호에 빠져 삶에 대한 총체적인 안목을 잃게 됨은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의 농민 문학 논의는 농민에 의한 농민 문학과 문학인(지식인)에 의한 농민 문학의 통합에 그 중점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농민 문학-그 중에서도 농민 시에 있어서, 그 원래적인 모습은 민요에서 찾아질 수 있다. 민요는 기본적으로 노동하는 민중의 실제적 삶에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민요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그것의 생산자와 수용자가 일체화된다는 데 있다. 이것은 결국 민요의 생산자가 속해 있는 집단의 성격에 의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졌음을 입증해 준다. 그러므로 민요의 생산자는 곧 그 집단의 공동체 의식의 자생적인 분출,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요의 생산자가 익명성을 그 특성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익명성이 곧바로 막연한 집단성을 의미하지는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민요의 가장 관습적인 표현에서도 결국은 개인적인 재능이 작용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요가 공통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서 공동체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공통의 경험에 대한 개별적 반응의 차이를 의식할 수 없게 하는 힘은 단순히 집단적 무의식으로 가능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요의 시대엔 민중 모두가 시인이었다든가 또는 개인적인 재능은 표현되지 않았다는 식의 발상은 다분히 낭만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공동체 의식이란 것도 감상적인 유토피아의 환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공동체의 보다 나은 상태를 지향하는 현실적인 응집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요는 옛 노래의 정태적인 한 형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 생산층의 삶을 고양시키려는 동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민요를 이렇게 동태적으로 파악할 때에야 비로소 민요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난다. 즉 민요란 민중의 자생적인 표현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 공동체 의식이란 의도성이 내포된, 자생성과 의도성이 통합체인 것이다.
민요에 대한 동태적 인식은 그것의 현대적 수용에 대한 논의의 중요한 입지점을 마련해 준다. 왜냐하면 민요의 자생성과 의도성은 현대시에 있어서 민요적 바탕의 회복이 시인과 민중의 일체감 회복과 직결됨을 극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실 민요의 현대적 수용이란 단순히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감상적인 존중이나 모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민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한 현재화 작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민요가 인간의 구체적 삶의 가장 직접적인 양태이니 일상의 노동에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음을 재인식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노동 양태에 대한 깊은 천착을 통해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천착은 시인과 민중의 일체감 상실이 시인과 일하는 민중의 계층적 분화를 의미한다는 인식까지를 동반해야 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일이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까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의 일노래로서 민요엔 어떤 식으로든 일하는 민중의 노동 구조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인이 일하는 민중과 일체감을 상실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 구조적 대립 속에서 시인이 반민중적 억압에 암묵적으로 유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유착은 불가피하게 시인의 전문적 장인화匠人化를 가져오고, 일과 노래의 결합으로서의 열린 구조를 지향하던 민요의 연행성演行性을 시적 구조 속에서 상실하게 한다. 따라서 민요의 현대 시적 수용은 시인과 일하는 민중과의 연대감 회복은 물론 민요의 개방적 구조를 내면화할 수 있는 시적 공간의 확보를 통해서 가능해질 것이다.
민중 문학이 민중적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면, 민중 문학의 한 양태인 농민 시 또한 민중적 보편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농민시에 있어서의 민중성 회복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농민 시의 원래적 모습인 민요의 현대적 수용을 통해 가능해진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요의 현대적 수용이란 시인과 민중의 일체감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민 시에 있어서 시인과 농민의 일체감 회복이 전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중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시인과 농민의 계층적 분화가 이미 이루어진 현대 사회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농민에 의한 농민 시와 시인에 의한 농민 시의 탄력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즉 시인은 변화하는 농촌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농민의 삶의 양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시적 진실을 창조해야 할 것이고 농민의 자생적 문화 표현은 이런 시적 진실을 통해 그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대응 관계 속에서 시인과 농민의 거리감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70년대의 농민 문학은 농민의 자생적 표현에 탄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시인에 의한 농민 시의 경우에 가장 먼저 드러나는 시인 자신의 자의식적 갈들이 바로 이를 입증해 준다. 문병란의 장시 「벼들의 속삭임」을 그 예로 살펴보자. 이 시는 시인이 들판에서 벼들의 속삭임을 엿듣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장시이다. 전체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유신벼와 통일벼의 대화이고, 2부는 유신벼와 통일벼가 아국벼 ․ 은방주 등의 선배 벼들과 나누는 대화이고, 3부는 시인과 벼들의 대화이다. 이것은 70년대의 농촌 현실에 대한 시인의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의 역사적 성격을 밝힌 뒤 다시 당대의 현실로 돌아와 시인 자신의 자각으로 맺어지는 그런 구조임을 말해 준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시적 현실이 전체적으로 시인 자신의 자의식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1부와 2부는 벼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시적 대상으로서의 ‘벼’에는 이미 시인의 감정 이입이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이것 또한 시인 자신의 농촌 인식에 귀결된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표면적으론 농촌의 객관적 현실과 시인의 자의식이 교차되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농촌 현실이 시인의 의식 속에 내면화됨으로 해서 단일한 구조 속에 하나로 수렴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적 현실속에 직접 개입된 시인의 반응을 살펴보면 분명해 진다. ①내 어느 날 황금의 들판 위에서/오지게 익은 수많은 벼들이/저희들끼리 은밀히 주고받는/비밀한 속삭임을 엿들었노라. ② 사방에서 일제히 일어나는/착한 벼들의 속삭임 들으며/나는 씁쓰름한 한숨을 쉬었다. ③ 서러운 벼들의 속삭임 들으며/나는 벼들에게 부끄러워/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④ 나는 벼들의 속삭임을 듣는다/으시시 깔리는 어둠속에서/벼들의 흐느기는 소리를 듣는다/만경벌 나주벌 김해벌/오지게 익어가는 들판에서/詩人의 귀에만 들려오는/벼들의 슬픈 合唱을 듣는다(밑줄, 필자)> 결국 이 시의 시적 현실은 시인의 귀에만 들려오는 비밀한 속삭임인 것이다. 따라서 시적 현실로 드러나는 농촌 현실은 시인의 의식 속에 내면화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런 내면화는 시인에게 ③에서처럼 부끄러움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이런 일깨움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시에서 드러나는 농촌 현실은 농민의 주체적 삶의 현장으로 응집되지 않고 오히려 시인의 의식으로 수렴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역사적 당위성 속에서 농촌 현실을 직시하면 할수록 시인의 부끄러움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이런 자의식적 갈등은 시인과 농민의 일체감이 획득되지 못했음을 반영해 준다. 그러므로 「벼들의 속삭임」이 민중적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시인의 자의식마저도 시적 현실의 일부로 용해되어 버려 농민 스스로가 자기의 현실로 받아들이게끔 되어야 했을 것이다.
70년대의 농민 시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농민의 농삿말에 대한 천착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농촌 현실의 사회 구조적 변화는 농민의 말의 변화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문학이 농삿말에 민감하지 못했다는 것은 농민 시의 한계성을 처음부터 노정해 주는 것이다. 더구나 농삿말이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아주 사실적인 말임을 감안해 본다면, 농민 시의 민요적 바탕의 회복은 공동체 의식을 지닌 농삿말의 회복과 일치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한 농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런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농고 출신의 농촌 정착, 공고 출신의 공장 취업, 사대생은 교사로, 이것이 정상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도 해 보는데 현실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농촌에 몇 사람이나 농고 출신이 있습니까? (중략)
농가방송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농가방송은 확실히 문제점이 있습니다. 당국에서 애용하는 아래와 같은 말을 이해할 농민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래
중간낙수 ․ 고랭지 ․ 노지재배 ․ 연작 ․ 윤작 ․ 난지형 ․ 한지형 ․ 최아토심 ․ 지력 ․ 균형시비 ․ 전층시비 ․ 도복성 ․ 둥열율 ․ 소주밀식 ․ 생력 ․ 피복 ․ 조사료 ․ 농후사료출하 ․ 수분․ 선견 ․ 정신 이외에도 부지기수입니다
-「농가방송」, 김장순,『삶의 문학』제5호
위의 농부가 예로 든 농삿말은 일하는 농민의 말은 아지다. 일부는 봉건적 농업 형태의 잔재들이고, 대개는 일제시대에 일제에 의해 추진된 농업 진흥 정책의 잔재인 일본식 술어들이다. 봉건적 잔재이든 일제의 잔재이든 모두 농민이 역사적 객체일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과거의 유산들이다. 그런데도 농삿말에 봉건적, 식민지적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고, 오히려 지켜야 할 농민의 말이 상실되었음은 농민의 자율적 삶이 보장받는 터전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농삿말의 회복은 농민과 시인이 다 같이 농민의 역사적 주체화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70년대 농민 시가 민요의 연행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70년대의 농민 시가 노동의 현장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민의 존재 방식이 직접적으로 노동에 긴박되어 있는데도 이런 현장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것은 농민 시의 성격을 지식인적 입장에 한정시켰음을 의미한다. 다음의 시들을 그 예로 살펴보자.
① 하느님은
우리들의 편이 아니다
작년을 보아도
하느님은 틀림없이
그대들의 편이다
그대들을 위하여
허리굽은 우리들의 뒷걸음은 계속되느니
탁배기 한 사발에 신명난 우리들의
어두운 발 밑
이 흙은 누구의 것인가
그대들은 하늘에 살고
남쪽 하늘에는 비구름이 솟아오르는데
나라의 바람은 서울에서 불어온다
오늘 밤 우리들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눈부신
하늘의 별들을 보자
못줄잡이의 목쉰 노래소리도 끊긴 지 오래
우리들을 위하여
이제는 아무도 꽹가리를 두들기지 않는다
하느님이 정녕 우리들의 편이 아니어도
오늘 밤 우리들은
장 속 깊이 녹슨 꽹가리에 기름칠해서
번쩍번쩍 빛나는
올 가을의 춤을 연습하자
-「모내가91」전문, 지은이 알 수 없음,『실천문학』제4권
②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킥킥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질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農舞」전문, 신경림
시①은 지은이를 알 수 없는 농민 시이다.「모내기81」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시의 시적 대상은 모내기라는, 농민의 노동 현장이다. 노동의 현장인 만큼 노동 구조적 갈등 관계가 설정돼 있다. 즉 그대들과 우리들의 대립적 구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어디에서 모내기하는 농민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허리굽은 우리들의 뒷걸음은 계속되느니”, “탁배기 한 잔에 신명난 우리들”, “못줄잡이의 목쉰 노래” 등의 구절에서 어렴풋이 모내기가 벌어지는 정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노동의 현장이 표현되지 않으므로 농삿말 또한 사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앞서 살펴본 농민 시에 있어서 농삿말의 상실 또한 노동의 현장성 상실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 ①의 노동의 현장성 상실은 결국이 시가 농민의 자생적 표현이 아닌 지식인적 농민 시임을 말해 준다. 물론 농민의 자생적 표현이 가능하기 위해선 농민 시의 구전적 전통의 회복과, 문학에 대한 농민의 적응력 향상이 동시에 전제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 중 그 어느 하나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농민의 자생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충분한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가령 시 ①의 경우에 농민의 문자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시인과 농민의 일체감 회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자 문화에 대한 적응력은 단순히 문자 해독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자를 중심으로 한 모든 문화적 표현에 대한 미학적 감수성의 계발까지를 의미한다. 그래서 시 ①은 작자의 익명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고전적 민요와 같은 공동체시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시 ①은 일정한 시적 수련을 쌓은 한 개인의 재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적 수련이 반증해 주는 지식인적 입장은 시적 현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시 ①에서 ‘우리들’이란 주체가 곧바로 농민들과 일체화되지는 않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결국 나의 인식이 농민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그들이 ‘우리’로서 자각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시 ②는 시적 대상이 노동의 현장이 아니라 놀이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노동 구조적 대립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또한 노동의 현장이 표현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농민의 삶의 어려움이 시 ①에서처럼 대립적 구조의 노출로 직접적으로 주장되지 않고 농민들의 자폭적인 행동들이 묘사됨으로 해서 역설적으로 부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농민의 이런 자폭적인 힘의 응집이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더구나 이 시의 시적 현실이 놀이의 현장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시 ①②의 이런 한계성은 결국 민요의 연행성-일과 노래의 동시적 결합-을 상실한 데서 온다고 볼 수 있다. 즉 일과 놀이의 역동성이 개방된 구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원래 민요의 연행 방식은 메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메기는 소리는 다분히 유동적이고 개별적인 데 반해 받는 소리는 집단적인 보편성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민요는 민중의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으며 동시에 즉흥성을 가지고 변화, 발전해 간다. 그러나 시가 기본적으로 문자에만 의존하게 될 때 이런 개방성은 발휘되기 어렵다. 따라서 농민 시는 탈춤이나 판소리, 놀이굿 등의 개방적인 전통 문화와의 결합을 꾀하려는 자체 내의 방법론적 모색을 불가피하게 한다. 가령 농민 시가 노래화되고 또 그 노래가 농민들의 자생적 놀이판에서 개방성을 가지고 불린다면 시인과 농민의 공통적 열망과 경험이 일체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80년대의 농민 시의 과제는 민중적 보편성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민중적 보편성의 획득은 시인과 농민에 공통의 열망과 경험을 나누어 가지던 민요적 바탕의 현대적 수용에 의해 가능해질 것이다. 따라서 농민에 의한 농민 시와 시인에 의한 농민 시의 탄력성 있는 대응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런 탄력성은 역사 속애서 농촌을 농민의 자생적인 삶이 보장되는 공간으로 확보하려는 모든 노력과의 긴밀한 결속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농민 시는 불가피하게 현실적 대응 속에서 자체 내의 변혁을 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삶의 문학』6집에서 시도된 농민의 공동 창작시는 이런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다음의 시를 그 예로 보자.
지력증진은 신작로 갓이만 허는 겨
높은 눔덜 지나가는 디만 짚은 피니께 말여
와따, 봄철 휘오리 바람이라두 휙 한번 불믄
짐서방네 논에 편 짚이 증서방네 논으루다가
증서방네 논에 편 짚이 스서방네 논으루다가
이리떼굴 저리떼굴 뭉쳐 댕기네
그런디두 군수영감은 짚 안펴서 피농혔다는 겨
엠한 딴소리라구 혔더니, 뺨맞더라두 혀야 헌댜
-고속도로, 골프장 근처는 주인덜이 그냥 내박쳐 놔둔댜
그라몬 면허구 지도소서 나와서
농약치구 짐매주고, 다헌다는 겨
-신작로 갓이가 아니면 농약 값 보조금두 옶어
딴소리 말라니께, 지력증진은 도로가만 허는 겨
-거시기 내가 따지니께 면서기 답변이 걸작이더구먼
도로가는 손발이구, 들판은 몸띵이랴
-당연허잖여, 손발을 먼저 씻어야 몸띵이 씻는 거 아녀
-「신작로 옆댕이는 저절루」전문
이 시는 농민들의 사랑방 이야기를 그들의 어투를 그대로 살려 행만 나누어 시적 배열을 해 놓은 농민 자신들의 시다. 그러므로 우선 현장감이 있다. 농업 행정의 부재를 그 시적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이 시의 현실은 그 어떤 자의식적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 속에서 다양한 변용이 가능한 동태적 모습이다. 따라서 민요의 운문성이 주는 응집력을 이루어 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민요의 운문성이 가지는 한계-급변하는 현실의 여러 조건에 긴밀하개 대응하지 못하는 폐쇄적성격-를 생각한다면, 80년대의 농민 시는 산문적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민요의 전형적 운문성의 획득이 단순히 시에서의 기술적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80년대의 농민 시는 농민에 의한 문화 표현에 겸허하게 열려 있음은 물론, 농촌의 변화하는 현실에 적절하게 대응하려는 방법론적 모색-문자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노래․ 만화․ 대농놀이 등과 병행하는 방법-을 통해 자기 변혁을 망설이지 않을 때, 새로운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1984,『삶의 문학』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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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내며
지금까지 문학판 소위 글판의 언저리에 어쭙잖은 이름이나마 올리고 어정거리다 보니, 문학적 열정으로 밤새워 글을 쓰던 80년대 그리고 ‘민중교육’ 사건 이후로 오랫동안 당최 글을 쓰지 못하고 지내다가 다시 띄엄띄엄 글을 쓰게 되기까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여기 모인 글들에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새삼 문학이란 무엇인가인지 다시 물어봅니다. 여러 다변이 있겠지만, 결국은 글 아는 자가 글로 세상을 향해 말하는, 자못 엄정한 학문이 바로 문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엄정함이란 매창 황현이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동학을 요술로 매도하면서도 망국의 한을 글 아는 자의 무능으로 통감하고 절명시絶命詩로 그 책임을 다하는, 바로 그런 것이 문학의 근본 자세인 엄정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중교육’사건 이전에『삶의 문학』동인으로 나름 당시의 지역문화운동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으로 열정을 다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민중교육’ 사건으로,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후배들이 정치적 공안사건으로 어이없이 해직의 아픔을 겪는 걸 지켜보면서, 이를 기획했던 선배로서의 책임과 가책으로 오랜 기간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후배들이 나름의 자생력으로 다시 스스로의 입지를 굳혀 가면서 조금씩 힘을 내어 어쭙잖은 글이나마 띄엄띄엄 써 온 게 지금의 이런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내세울 거라곤 없지만, 삶의 굽이마다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이 바로 제 글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그간의 글들을 모았습니다. 결국 문학이란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이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란 물음에 대한 그때그때의 진지한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끊임없이 대면하고 그 의미를 묻고 나름의 바람직한 답변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비로 문학이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하여 문학이란, 늘 지금 이곳에서의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간 써온 글들을 다시 정리하며 굳이 그 글이 쓰인 연도를 마지막에 적은 까닭 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그 글을 쓸 당시의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 이 바람직한 모습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이기 때문입니다.
나름 그런 면에서 일관성을 지녔다고 위안하면서도, 늘 아쉬운 건 항상 정색을 하고 정답을 말하려 하는 저의 경직성입니다. 일찍이 염무웅 선생께서도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기둥을 살짝 쳐도 들보가 울리는데 애써 들보를 치려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제 정말 정감이 넘치면서도 예민한 감수성이 살아 있는 그런 평론을 써야 그게 문학이란 걸 어렴풋이 알만도 합니다. 앞으로 그런 평론을 쓰는 문학인을 꿈꾸어 봅니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대전민예총의 고마운 벗 조성철, 이정섭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문학의 길로 이끌어 준 김종철 선생님과『삶의 문학』동인들, 그리고 기꺼이 애정 어린 발문을 써 준 김성동 형님, 진지하게 읽고 토론해 준 이은봉, 이황직 교수, 무엇보다도 이렇게 멋진 책으로 묶어 준 작은숲출판사의 강봉구 사장님과 직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5년 초하
김영호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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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評論集 [※지금 이곳에서의 문학※]
[ 목차 ] -
책을 내며
Ⅰ. 역사와 문학의 진화
∙ 문학과 역사
∙ 설화의 역사성
∙ 민중의지의 역사적 확인
∙ 분단 극복과 문학
∙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
∙ 진보문학의 진화를 위하여
Ⅱ. 농민 문학과 농업적 세계관
∙ 나날의 일과 문학의 민주화
∙ 농민 문학론의 새로운 전망
∙ 농민시의 가능성
∙ 농업적 세계관의 소생을 위하여
Ⅲ. 작가의 내면을 여는 키워드
∙ 풍자와 자조의 세계
∙ 경계에 선 디아스포라
∙ 상처의 기억과 그리움의 진언
∙ 강물과 바람의 노래
∙ 비움과 느림의 미학
∙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간 시인 윤중호
Ⅳ. 문학, 그 언저리
∙ 역설과 사회
∙ 죽음의 느낌과 번짐의 열망
∙ 성장의 의미
∙ 자기 긍정의 미학
∙ 전통에 대한 기억과 화해
∙ 사회적 고통과의 화해와 자기 변혁
∙ 유자이며 운명적 불자, 김성동
∙ 시인이여, 우리 시대의 희망이 되자
∙ 귀울이와 코골이
∙ 아빠, 그 애잔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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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評論集 [※지금 이곳에서의 문학※]
[ 발문 ] -
삶의 문학, 문학의 삶
김 성 동(소설가)
“집이덜마냥 앞서가넌 먹물덜헌티야 언필칭요순(言必稱堯舜)이것지먼…….”
이 중생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어뿜었다. “오늘 이 땅에는 부패타락허구 부화방탕헌 북미합중국식 양키문화와 양키예술이 늠처나구 있지유. 눈 위에 서리치기루 북미합중국 마름나라이서 밀려오넌 왜색문화와 왜색예술 또한 무서운 서슬루 덮쳐 오넌지 오래구. 문학 또한 마찬가지지유. 오늘 이땅 문화예술에서넌 깡패, 도적눔, 강도, 살인자, 배신자, 살인자, 파괴분자, 색정주의자, 븬태성욕자, 윤락 인간, 자살자 같은 인간탑새기덜을 자랑허넌 븜죄낙서쪼가리덜이 이른바 작품이라넌 이름 아래 쏟아져 나옴우로써 사람덜 의식을 몹시 구렁텡이루 빠뜨리구 제국주의 북미합중국의 신식민지 세계즌략을 올바른 것으로 여긔게 허며, 조국의분렬과 동족상잔의 즌쟁 위기럴 부추기구 있잖유. 자본주의의 실팍헌 즌도사가 된 것이지유. 그것두 깡패자본주의, 양아치자본주의…….”
1983년이었던가. 그 다음해였던가. 유치 무쌍하게도 문학론 또는 작가정신 한 자락을 펼쳐 놓은 것이었으니, 산도첨삼도천에 한 발을 적셨다가 돌아와 하릴없이 염불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적이었다. 한 무리 사람들이 찾아왔으니 김영호, 이은봉, 류도혁, 이은식, 강병철, 전인순, 이재무, 전무용……같은 문학청년으로, 『삶의 문학』을 함께하는 동무들이었다. 하나같이 문학에 순순하고자 하는 끼끗한 젊은 그들이었는데, 김영호가 그 도꼭지였다.『삶의 문학』이라는 문학 결사에서 무슨 대표를 맡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 천천히 말하는 것이 그렇고 쓴 글이 그러하였다. 한마디로 댕돌같은 사람이었다.
문학을 한다고 할진대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를 알아야 된다는 말을 했던가. 이 반쪼가리 한때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피비린내 나는 우리 근현대사를 잘 알아야 하고, 어떠한 역사가 올바른 것이었는가 하는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된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문학은 그 다음이니, 스스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는 고독한 가시밭길이라는 앍아빠진 말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8천여 분위 체백體魄이 묻혀 있는 뼈잿골이 건너다보이는 산자락에 스무 평짜리 집을 지어 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였다. 그때 셈평이 끼어들어간 것을 써보았던 것이 많이 모자라는 단편소설 명색「민들레꽃반지」이다.
그때에 이 중생이 본채 위에 두어 평쯤 되는 옴팡칸을 들려 사랑채 명색으로 쓰고 있었는데, 방이 뜨겁다는 것이었다. 그때도 이 글을 쓰는 이제처럼 칼바람 몰아치는 한겨울이었는데 방이 뜨거워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죽다 산 뒤끝이라 옹송망송한 정신에 온도를 최대치로 올려놓았다 싶어 본채 보일러실로 달음질쳐 가보았는데,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렇다면 보일러가 꺼져 있다는 것인데도 자꾸만 방이 뜨거워 못살겠다는 것이었고, 숫제 여닫개를 내려 버렸다. 아니, 내리려고 하는데 여닫개는 이미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도 그대로 방이 뜨겁다는 것이었다. 별꼴이다 싶어 들어가 보아봤더니 정말로 방이 뜨거웠다. 뜨거운 만큼이 아니라 펄펄 끓고 있었다. 밤새도록 불땀 좋은 참나무장작 지펴 쇠죽을 끓여내던 예전 옛 살라비 부잣집 상머슴방처럼 펄펄 끓는 것이었다. 전기세를 아낀다고 놓은 심야전기 보일러를 아무리 돗수 높여 쳐땐다고 하더라고 그처럼 펄펄 끓는 방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망팔을 앞둔 어머니가 주무시는 안방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펄펄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조홧속이라는 말인가? 겁이 난 이 중생은 알고 지내던 사이인 그 고장 무슨 공업전문학교 교수한테 말하였고, 보일러에 빠삭한 도사들이라는 전문가 두 사람이 출장을 나왔다. 기계공학전공이라는 그 전문대학 교수들은 한 시간이 넘게 보일러를 짯짯이 살펴보며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해 보았는데, 마찬가지였다. 손잡이를 올려도 방은 뜨거웠고 손잡이를 내려도 방은 뜨거웠다. 이마에 깊은 골을 파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들은 숫제 두꺼비집 전원을 꺼버렸는데,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시 또 보일러를 짯짯이 살펴보고 방으로 가보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던 그들은 말없이 이 중생을 바라보았는데, 공포를 먹은 낯빛이었다. 공구가방을 챙겨들고 보일러실을 나서며 그들은 말하였다.
“이건…… 우리가 아는 기계공학으로 해명될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도 방이 뜨거우니 전기삯이 안 들어 좋기는 했으나 이게 무슨 조홧속인가 싶어 어쩔 줄 몰라하던 이 중생은 턱끝을 주억있으니, 아버지! 그렇다. 아버지인 것이었다. 피 같은 전기삯이 아까워 동동거리는 당신 각시가 안쓰러워 전기를 돌리지 않아도 방이 뜨거워지게 한 것t이었다. 더구나 당신이 34살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곳이 건너다보이는 곳에다 집을 짓고 살며 아침저녁으로 정화수 떠놓고 비손하는 당신 새각시를 추위에 떨게 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렇게 풀쳐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 중생이었는데, 그해 삼동이 끝날 때까지 어머니 방은 식지 않았던 것이다,
“영호.”
“예.”
“이런 경우 뭐라고 허지?”
“무슨……?”
“그러니께 말여. 안개비버덤 쬐끔 굵구 거시기 그러니께 부슬비버덤 쬐끔 가는 비 말여.”
“아, 는개지요.”
“아니, 는개 말구유.”
“예에?”
“는개버덤 쬐끔 더 가는 거.”
“글쎄요오.”
“아니, 국어슨생이 그것두 물른단 말여, 시방.”
“에이, 성님두우. 국어선생이라구 우리 토박이말을 다 알 수 있나요. 아름다운 조선말이라면 성님이 전문가면서.”
김영호와 주고받은 말이었다. 절 뒷방 객실에서였다. 천태산 영국사라는 옛절이었다. 다시 가출을 했을 때였다. 신어산 백룡암을 나와 두 번째로 자리잡은 곳이었다. 이 중생이 쓴 많이 모자라는 처녀소설『만다라』를 읽고 입산하였다는 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이었다. 영동 출신 양문규 시인이 놓아준 다리 건너 바랑 대신 비닐가방을 푼 곳이었다. 그때에 이 중생은『국수國手』라는 대하소설 5권째 쓰고 있었다. 아름다히 지켜져 내려온 우리 본딧말과 거기에 딱맞는 우리 본딧말을 찾아 가리산지리산 하던 참이었다. 책상으로 쓰는 쪽소반 위에는 반으로 자른 파지난 원고지 뒷장에 적인 글초가 쌓여 있었는데,
“이 대목인디 말여.”
하며 손끝으로 뽑아냈던 것이다.
1. 매화 옛등걸
◦◦라도 몇 날 깔리려는가.
매화 옛 등걸 위로 물기 없는 바람이 지나간다. 고르지 않게 들려오던 솔바람 소리 시나브로 잦아지면서 선녀仙女쏠 밑으로 떨어지는 찬물소리 뒤란 대밭을 흔들고, 기우는 여름별은 토방 아래 버히어진 매화 옛 등걸 위에 와 앉으니, 참취 뜯으러 함께 마늘쪽봉우리 오르던 임선仁善 아가씨가 옮기어다 심어놓은 것이다. 줄먹줄먹한 마늘쪽봉우리 너덜겅 바위 이에짬에 웃는 듯 찡기는 듯 피어난 매화꽃 한송이 불꽃같이 붉길래 이른 봄날 옮기어다 심어 놓았던 것이다.
김영호가 등단 30년만에 첫 평론집을 낸다. 평론가 가운데 이런 경우는 없을 것이니, 서쪽에 서정춘 시인이 떠오를 뿐이다. 캐내는 버럭마다 죄 금은 아니듯이 오랫만에 하는 얼레질이라고 해서 또 금이 걸러지는 것도 물론 아닐 것이다. 등단만 했다 하면 시집이든 소설집이든 비평집이든 한 해에도 몇 차례 펴내는 오늘 문학동네에서 참으로 드문 경우이기에 해 보는 말이다.
김영호 평론집『지금 이곳에서의 문학』을 꼲아매겨 볼 재주가 이 중생한테는 없다. 다만 한 가지, 갓맑게 순정한 마음으로 문학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겠다. 다른 나라 사람 눈과 입을 빌려 이 땅에서 만들어진 문학을 어떤 치우쳐진 마음으로 보며 멋대로 찢어발기는 ‘소리개비평’이 아닌 것이다. 제 눈으로 보고 제 입으로 말하고 있다. 바람을 일으키는 어떤 세상흐름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 비평기준에 맞춰 무슨 말인지 쓰는 저도 모를 말을 ‘학술적’으로 악착스레 이어감으로써 읽는 이를 힘들게 하는 ‘암호비평’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에 찬 말만 조심스럽게 하고 있으니, 김영호리얼리즘을 얻은 것이다. 이 기절초풍하고 혼비백산하는 정신의 대공황시대에 삶의 문학과 문학의 삶을 일매지게 이루고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김영호문학에 영광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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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김영호 평론집『지금 이곳에서의 문학』을 꼲아매겨 볼 재주가 이 중생한테는 없다. 다만 한 가지, 갓맑게 순정한 마음으로 문학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겠다. 다른 나라 사람 눈과 입을 빌려 이 땅에서 만들어진 문학을 어떤 치우쳐진 마음으로 보며 멋대로 찢어발기는 ‘소리개비평’이 아닌 것이다.
제 눈으로 보고 제 입으로 말하고 있다. 바람을 일으키는 어떤 세상흐름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 비평기준에 맞춰 무슨 말인지 쓰는 저도 모를 말을 ‘학술적’으로 악착스레 이어감으로써 읽는 이를 힘들게 하는 ‘암호비평’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에 찬 말만 조심스럽게 하고 있으니, 김영호리얼리즘을 얻은 것이다. 이 기절초풍하고 혼비백산하는 정신의 대공황시대에 삶의 문학과 문학의 삶을 일매지게 이루고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김영호문학에 영광 있기를.
김성동(『만다라』의 작가)
최근에 들어서는 재미와 즐거움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물이 문학물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듯싶다. 인간이 살아온 과정 자체인 만큼 역사물이 끊임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중적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훨씬 더 본격적인 대중형식인 문학물보다 역사물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낯설고 어색하다. 어떻게 이를 극복할 것인가. 김영호에게 듣고 싶다.
이은봉(시인, 광주대학교 교수)
그의 성숙한 평론이 만개했던 1980년대 초반은 루카치의 비판적 리얼리즘론이 원경으로 민중문학론이 근경으로 배치되었던 시대였으므로, 그의 논리도 그런 성격에서 동떨어져 존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영호가 문학과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엄격했고 그의 평론 스타일에는 위의威儀가 있었다. 섣부른 정치적 낙관도 비관도 없고, 자기과시나 빈정댐의 유혹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역사적 소통에 대한 열정은 차가우리만치 엄격한 이성에 의해 규제되었다. 그가 존경했던 작가들 가운데 일부는 이제 그 길에서 일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엄격한 스타일을 견지한 그의 평론은 세대를 뛰어넘어 마지막 리얼리스트로서의 지적 영향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
이황직(시인,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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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호 평론가∥
∙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한남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전교조 대전지부 대변인과 대전교육연구 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대전교육연구소 이사, 대전작가회의 회장, 대전충남민예총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편으로 보문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아이들과 만나고 있다.
1980년대 초에『삶의 문학』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84년에『한국문학의 현단계 Ⅲ』(창비)에 평론「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함께 엮은 책으로는 『선생님, 시 읽어 주세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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