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 (비문 읽는 자부리) -
- 유신(1972년) 이듬해 세운 이 탑. 뒷편에 있는 감사문 가운데 의 일부가 훼손된 부분이 있다.
아마도 이 유신 반대파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해보지만,,
-관군과 일본군 -
-민화로 보는 동학농민군 -
-구한말의 조선 민중들 모습 -
-동학혁명군위령탑-
- 위령탑 건립에 따른 감사문이 위령탑 뒷면에 있다. 천도교 교령 최덕신 포덕 114년 11월 11일로 되어있다.
(최덕신은 나중에 월북해버렸고, ' 포덕(布德)'이란 천도교 연호 표시가 눈에 띈다. 짓져버린 부분은 "박정희"으로 보이고
동학은 '동기(東紀)' 연호를 쓰는데. 수운 최제우가 득도한 1860년을 원년으로 한단다.
-우금치 전전지 안내문 -
- 2018년 6월 19일 답사 시 사진 -
황새바위 지나서 무령왕릉 가는 길, 고만나루로 가는 길 중간에,
공주의료원과 공주경찰서로 가는 길 사이 삼거리에 있는 <송장배미> 비석 ' 동학농민전쟁전적지 송장배미 '
<송장배미>에 얽힌 슬픈 이야기 : 비문 뒷글을 대강 읽어 본다..
" 낮에는 일본군과 관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밤에는 우리 동학군의 횃불이 타오르던 두리봉 스무 차례 이상 싸워 피가 곰내골을 따라 가득 흘렀다 금강을 바라보는 이곳 응달의 논배미에 열여덟구의 시신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죽창과 맨손으로 싸우다가 누구하나 거두는 이 없이 흙이 되고 물이 되었다. 스무 한 해 전까지 논 임자였던 이상집옹이 - - - - 일년에 두 번 봄 가을로 제사를 올려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였으나 이웃한 백제사마왕 무덤과는 달리 -----
동학농민전쟁.- - -
동학농민전쟁우금치기념사업회 "
- 2018년 6월 19일 답사 시 사진 -
< 1 : 3만5천의 비극>
거사 전에 점을 보니 ' 최기경천 (最忌敬天 :가장 꺼릴 것은 경천이라)' 하여 경천 (당시 면소재지 급 중심지역 )을 피해서 주둔.
지명 경천(敬天)이 아닌 인명 김경천(金敬天)인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다는 뒷이야기
- 전봉준 장군 최후의 피체지 마을 모습 -
(돈과 명예의 유혹에 넘어간 배신자 김경천의 밀고로 잡히게 된 곳) ... 천냥의 거금과 군수 자리가 무엇이길래....
- 순창군내 쌍치면 피노리 앞을 지나가면서 찍은 스냅 사진 -
전국 각지에 동학의 씨가 아직도 면면하게 자라고 있다.
특히 대전은 더욱 그렇다. 증산교 본부가 중촌동에 있고, 천진교가 연산에 있고,
수운교는 자운대 옛숯골터에 건재하고 있고,
대순진리회며,, 정감록과 관련된... 원불교까지도 동학의 한 부류에 속한다고도 하고...
<믿어야 할 지 웃어야 할 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에 나오는 파랑새는 전봉준 장군의 성을 파자해서 해석하고 있다.
파랑새 < 팔왕새 (八王새 : 八+王 =>全 (봉준) 장군 암시)
머뭇거리다 보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암시한 민요.
1894년 갑오년, 다음 해(1895년) 을미년에 일본에 의해 민비 시해가 일어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청일전쟁의 결과 받은 무지막지한 청나라 배상금으로 일본은 군사력을 더윽 증강시키고.. 그래서 겁없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게 되고, 결국은 패망으로 결론이 나지만... 아직도 계속되는 역사의 물줄기....
슬픈 우리의 근대사..
- '동도(東徒)' 대장기 라는 깃발이 보인다.-
(흰옷을 입은 농민군의 무서운 기개가 보이는 그림이다). 죽창과 낫, 몽둥이가 무기의 전부...
무엇이 , 맨손으로 관군, 특히 일본군과 대항하다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파리 목숨처럼 스러져 가게 했는가?
시산혈해, 3만5천여명의 동학농민군의 시체와 그에 반해서 일본군은 단 1명의 사망이 있었다는 믿기지 않는 이것은 전투가 아닌 학살, 대학살이다. 무엇이 이렇게 목숨을 초개같이 바칠 수 밖에 없었을까?
그들의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구호가 그렇게 했는가.
개벽을 통한 새세상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하늘을 찌를 정도여서 그랬던가?
서학에 대해 우리것을 갖자는 동학, 그들의 정신은 기미독립만세 운동으로 이어지고....
(당시 민심의 동향을 엿볼 수 있어 참고로 싣는다)
- 동기(東紀)가 표시된 책. 단기, 서기, 불기, ..등은 자주 접하지만, 동기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연호 방식이다.
하긴 공자 탄생도 551년을 기점으로 하지만....
---풋개에 가서 동학농민군의 주둔지 실태며, 군량미 조달이며, 궁금한 게 많았는데... 별로 얻은 바가 없이 한탄만 하고 돌아서는 길
송산1리 모정에 들려 마침 우물에 가서 찬 물 한바가지 퍼서 타오르는 속을 달랜다.
(4만 명에 가까운 대 군단이 머물렀다면 엄청 넓은 면적과 먹거리 등이 필요했을 텐데, 이웃 노성 윤증고택에도 군량미 내달라는 요구를 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고 하고, 어음을 써주고 양식을 구했을까? 아니면 가난한 민초들의 곡식으로 그 많은 동학농민군의 호구지책을 해결했을까? 하긴 12월이니 가을 추수가 끝났을 터이니 .조금은 여유가 있었을 테지만..)
왕버들 두 그루가 서낭나무처럼, 서 있고 그 옆에는 현대식으로 변신한 모정이 있다.
옛날에는 초가지붕의 모정(茅亭)이 있었겠지만...
모정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 귀로에 오르는 길, 수많은 영령들에게 무엇으로 위로를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조상님들에게..
(2023.10.04. 자부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