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혈육이라고는 이제 언니의 아들과 딸, 두 조카가 전부다.
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조카들은 우리를 부모처럼 의지하고 또 살뜰히 챙긴다.
내게는 참 고마운 마지막 혈육이다.
막내 조카는 전기와 관련된 일을 하며 지금도 전기 소장으로 현직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 집 거실 등도 20년을 사용하다 보니 떼어내기도 쉽지 않았고,
새것으로 바꾸자니 비용도 만만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조카가 마음먹고 우리 집 거실과 손님방, 바비큐장,
야외 등까지 최신 LED 조명으로 모두 교체해주었다.
오래 묵은 숙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말없이 자신의 일을 다 해주는 조카가 우리에게는 참 고맙고 든든하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살아가는 방식도 참 다르다.
말이 많지 않고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해내는 조카를 보며 아내인 질부는
한때 자상하지 못한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갱년기의 불면증과 다리 통증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질부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여러 자격증을 취득했다.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까지 받아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힘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찰을 찾아 명상도 하고, 국내외 여행도 많이 다녔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친구의 집을 찾아가 한 달을 머물다 오기도 했다.
세계 3대 폭포 가운데 하나인 이과수폭포까지 다녀왔다니,
세계여행을 꿈꾸는 나로서는 한없이 부러운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힘든 시간을 공부와 취미, 여행으로 견뎌냈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젊었을 때 질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은 사치스러운 푸념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그녀가 쓴 책 『내 안에 화해와 길』을 읽고 생각이 달라졌다.
책 속에는 자신의 고통을 그냥 견디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하나씩 들여다보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논리정연하게 담겨 있었다.
철학적인 사유도 깊었다.
그 책을 읽으며 문득 내 글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온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놓는 사람인데,
그녀의 글에는 고통을 견디며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해 온 사람의 깊이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니 참 재미있는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무심하고 자상하지 못한 남편이라고 불평하던 조카가
이제는 아내를 위해 사는 사람처럼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 조카 내외가 우리 집에 왔는데 멋진 대형차를 타고 왔다.
“이렇게 좋은 차를 언제 샀어?”
물었더니 남편이 생일 선물로 사주었다고 했다.
아내가 대학에 강의를 나갈 때 편하게 다니라고 선물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뭉클했다.
말 한마디 살갑게 건네지 못하던 사람이 아내를 위해 차를 사고,
함께 여행을 다니고, 도서관에 가자면 같이 가서 시간을 보내고, 맛집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막국수를 좋아해 전국의 막국수 맛집을 찾아다니며 한 그릇을 먹기 위한
막국수 맛집 투어도 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충주에 중앙탑 막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막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충주까지 간다니, 우리는 제천에서 먹는 막국수만으로도 충분하다.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서울에서 삼척까지 꽈배기를 사러 몇 번이나 갔는데,
두 번이나 다 팔려서 못 먹었다고 한다.
결국 어느 날은 새벽 4시에 출발해 겨우 먹어봤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이 났다.
하지만 어릴 적 먹었던 꽈배기에 대한 추억이 있어
그 먼 길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람마다 삶의 방식은 이렇게 다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맛있는 음식 하나가 추억이고, 여행이고, 삶의 즐거움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질부가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동안 조카도 나름대로 아내를 많이 외조했던 것 같다.
아내가 하는 일이라면 묵묵히 지지해주었고, 말 대신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다만 아내는 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쉬웠을 것이다.
세상 남편들은 참 이상하다.
할 것은 다 해주면서도 정작 가장 돈 들지 않는 ‘말’에는 인색하다.
“당신 참 고생했어.”
“당신이 있어서 참 좋아.”
“당신이 자랑스러워.”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면 될 것을, 사랑하면서도 표현하지 않는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사랑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알 수 없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담아두는 것보다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때 비로소 상대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은 조금씩 달라진다.
평생 고쳐지지 않을 것 같던 고집도 어느 순간 조금씩 내려놓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인내하다 보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가는 법도 배운다.
이번에 조카 부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뚝뚝한 남편과 따뜻한 말을 갈망하던 아내.
서로 다른 성격 때문에 한때는 마음이 비어 있던 부부였지만,
긴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 이제는 서로에게 맞춰가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우리 집에 와서도 요리를 해서 남편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조카는 여전히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준다.
아내를 위해 좋은 차를 사고, 함께 여행하고, 도서관에도 가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닌다.
어쩌면 사랑이란 처음부터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였던 조카의 사랑이 이제는 세월을 지나 따뜻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모의 마음이 참 흐뭇하다.
부부란 결국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긴 세월을 살아가며 조금씩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조카 내외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지금보다 더 따뜻하고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하고, 사랑은 그 변화 속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출처 : 제천단양뉴스(http://www.jd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