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롬8:5-6“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몇 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동서 형님은 교회에 십자가가 있느냐고 저에게 반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자리는 서로 경쟁하면서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고독한 자리는 외면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에서마저 십자가의 정신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서 우린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자아에 있다면 영의 생각은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육신의 본능에 따라서 움직여왔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부터 산 영은 주님께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자아는 썩어 없어질 육체의 자랑에 관심이 있지만 영은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습니다.
로마의 심한 박해를 피해 지방으로 피신하던 베드로 사도는 도중에 로마를 향해 가시는 주님을 만난 후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돌아가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자아가 우선이지만 영의 생각은 주님이 우선입니다. 자아는 처음에는 영의 생각을 따라 사는 데 서툴지만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가운데 차츰 영의 생각을 따라 사는 데 익숙해집니다.
자아가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따라 사는 결정적인 전환점은 십자가입니다.
눅9: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영을 따라 살기 위해 육신의 욕망과 자아 중심적인 사고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 영이 거듭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방언을 하고 여러가지 은사를 체험하지만, 그 배후에는 자아가 여전히 살아서 왕노릇합니다. 심지어 목회조차도 자아 사랑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찾아보기 힘든 교회는 쇠락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희생만이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요12: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날 교회에 열매가 없는 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랑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열심있는 사람은 많아도 사도처럼 성령에 매여 십자가 희생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키엘케골은 지상에서는 불량품이 반품되지만 천국으로 보낸 불량품은 반품되어 오는 일이 없기에 목사들이 안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었는지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는지 심판받는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고전4:5“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칭찬을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처음에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계속 영을 따르는 일에 힘쓰노라면 심령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자아는 육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영을 따라 살고자 하던 자아의 능동성이 어느 순간부터 영에 이끌려 사는 수동성으로 바뀝니다. 육신이 아니라 영이 이끄는 삶으로 승화됩니다.
육신의 생각이 영의 생각으로 대체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한번 죽는 것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날마다 죽는 것이 수월하게 이루어집니다. 난 육신의 생각에 이끌려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영의 생각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가? 사도가 가르친 신령한 자가 되었는가? 마지막 날 우리는 육의 몸 대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24. 9. 28 장기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