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추억
내가 다닌 고등학교 교복은 특징이 있습니다. 검은색 동복에는 양쪽 소매 끝으로부터 10cm 위에 한 줄 백선이 처져 있습니다. 여름 교복 명찰에도 중간에 백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 백선을 흘낏 보기만 해도 저 학생은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입학 후 오리엔테이션 때 백선이 있는 까닭을 설명했겠지만 산만한 주의력 탓인지, 기억력 탓인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선처럼 희고, 순수하며, 정의롭게 살라는 뜻일 테고 내탕금으로 설립한 세 학교(숙명, 진명여고) 중 큰 오라비라는 상징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대부분의 학창 생활을 할머니와 함께 서울서 보냈습니다. 어쩌다 집안의 큰일이 있거나 명절 끝에 등교할 때는 새벽 기차를 타고는 했습니다. 스스로 명문 학교라고 자부하던 터여서 내 소매 끝 백선은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열흘이 멀다고 백선을 새것으로 갈아 나의 자긍심을 높여주셨습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일이나 방학 때 집에 내려오면 사십 전의 젊은 어머니는-스무 살에 나를 낳았습니다-나를 데리고 읍내로 나갑니다. 훌쩍 자란 나는 어머니와 나란히 걷고는 했는데 우리 집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머니께 동생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팔월의 복숭아 같은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큰애’라고 자랑하셨습니다. 어느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으면 눈으로 백선을 가리키며 아무개 학교라고 은근히 으쓱하는 눈치였습니다.
쉰다섯이 되던 해 동창들이 의기투합해 고등학교 때 가지 못했던 수학여행을 계획했습니다. 1969년 즈음해 무슨 사고가 발생해 잠정적으로 수학여행이 전면 금지가 되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출중한 어떤 친구가 교복을 맞춰 입자고 했고, 뜻있는 친구의 희사로 교복과 모자를 맞췄습니다. 약속된 날짜에 모교 교정에 모여 팔십여 명이 우리를 가르쳤던 세 분의 선생님을 모시고 때늦은 수학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계획을 어머니께 알리자 어머니는 소풍 갈 때는 밤을 삶고, 고구마도 찌고, 달걀도 싸고, 사이다도 한 병쯤 가져가는 것이라며 다 늙은 아들을 위해 그것을 장만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우정 학교까지 오셨고 손수 마련한 팔십여 개의 간식을 여행을 떠나는 차에 실어주셨습니다. 마침 양주에서 나와 함께 하는 문학 도반이 바늘과 실을 가져와 잘 맞지 않는 교복을 일일이 손봐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수학여행은 2박 3일로 끝났고 이를 기삿거리로 생각한 KBS에서 동행 취재해 방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방송이 나가자 다른 학교에서도 따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교복을 동창회에 남겨 다른 동문이 이용하게 했습니다. 스무 해가 가까워지는 지난 옛일이 되었습니다.
당시 교복을 입고 어머니와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남았습니다. 백발이 성성해 서른 끝의 복숭아 같은 여인은 아니어도 여전히 아들이 그 학교 학생임을 자랑하는 모습이 얼굴에 잔뜩 배어있습니다. 칠십 중반의 할머니가 되었지만, 이 아이가 내 아들이야, 하며 자랑하는 듯한 표정입니다. 만일 네가 효자였는지를 증명하라고 한다면 이 글과 함께 그 사진을 내놓겠습니다. 어느 부모에게나 애물단지일 수밖에 없는 자식이지만 때로는 잘한 일도 있게 마련인데 이 학교에 다닌 일을 첫째로 삼습니다.
방학 때면 장정들이 들이닥쳐 보릿고개를 더더욱 힘들게 했어도 그때가 제일 좋았노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 말씀을 떠올리고는 울컥했습니다. 내 자식이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떠나 터키에 왔을 때 어머니를 떠올리며 어머니로부터 배운 대로 했습니다. 업무차 묵던 호텔로 불러 숙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몇몇 친구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면 어깨가 올라가고는 합니다.
나는 자주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곧 많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사교적이라거나 달리 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맺어 준 인연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덕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거의 확실해서 누구든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친구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와야 한다’며 친구들이 오는 것을 반겼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나에게 미안함을 덜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철학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인품 탓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카페에서는 나를 만나러 온 이들에게는 찻값을 받지 않습니다. 차를 마시러 온 사람들에게만 찻값을 받습니다. 누구는 나의 이런 원칙을 듣고는 그래도 그렇지, 장사하는 사람이! 라고 합니다만 내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가르친 대로, 배운 대로 할 뿐입니다. 차를 팔아 내 집에 오는 친구를 늘릴 수 있다면 찻값을 받겠지만 확신컨대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학교에 다닌 일도, 수학여행을 다녀온 일도 먼 옛날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십여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아 나를 격려해 주고 응원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추억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어서 때때로 꺼내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추억을 들여다볼 때마다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내 앞에 서 계십니다. 어머니를 뵐 날이 함께 했던 날보다 가까워집니다. 그 또한 기다림이며 즐거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