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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20)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가요
달력에서 찾아본 성모 축일과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성모 마리아를 제자에게 맡기시면서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인류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특별한 은총을 받은 마리아의 대도(다른 사람을 대신해 하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 은총을 전구하는 ‘마리아 신심’을 장려합니다. 마리아 축일의 의미를 배우며 성모님께 한 발짝 다가가 보겠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천주의 어머니’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선포한 말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1970년 이후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정했습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2월 11일)
1858년 2월 11일 프랑스 피레네 작은 마을 루르드 근처 마사비엘이란 동굴에 발현하신 성모님은 7월 16일까지 18차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비오 9세 교황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반포한 지 3년 2개월 되던 때입니다. 교회는 성모 발현을 확인하고 첫 발현일을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께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라고 인사할 때였습니다. 성모님이 놀라시자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0-31)라고 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5월 31일)
성모님이 고령에도 잉태한 친척 엘리사벳을 축하하러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에 아기도 복되십니다. (⋯)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2-44)
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7월 16일)
1251년 7월 16일 성모님이 가르멜수도회 총장 성 시몬 스톡 앞에 발현해 성의(聖衣, 스카풀라)를 주시며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성의를 받아 네 수도회에 봉사하는 옷이 되게 하라. 이것을 너와 모든 가르멜 수도자들에게 베푸는 특전의 표로 주노니. 죽으면 영원한 불에 탐을 면하리라.” 이날은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에 의해 보편 교회 기념일로 제정됐습니다.
성모 대성전 봉헌 기념일(8월 5일)
4세기 중반 성모님은 8월 5일 로마 귀족 요한과 아내의 꿈에 각각 나타나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 한 성당을 세워라. 그곳에는 흰 눈이 덮여 있으니 곧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보니 한여름인데도 흰 눈이 쌓여있었습니다. 교황은 그 자리에 성당을 건축해 성모님께 바쳤습니다. 영적인 눈이 온 것을 기념하고자 ‘눈의 성모 성당’이라고도 합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평생 동정이셨던 마리아는 현세 생활을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성모 승천은 초대 교회 신자들부터 믿었는데, 1950년 8월 15일 비오 12세 교황이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모 승천 교리를 믿을 교리로 반포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8월 22일)
교회는 성모를 최대 영광의 자리에 올려놓고 ‘여왕’과 ‘천상의 모후’라는 칭호를 드립니다. 과거엔 ‘성모 신심 축일’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9월 8일)
요아킴과 안나는 하느님께 자녀를 주시길 기도했고, 마침내 성모님을 낳았습니다. 마리아께서 정확히 언제 탄생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교회는 9월 8일을 인류 구원의 협조자이신 마리아 탄신 축일로 지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27)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 총괄 실현(Recapitulatio)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함께 있어 주는 것일 겁니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정답을 없겠습니다만 부모가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갖는 것만큼 좋은 것은 별로 없을 겁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데 있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사도 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고백에 이어 강생(잉태와 탄생)과 파스카(수난, 십자가에 달리심, 돌아가심, 묻히심, 저승에 가심, 부활, 승천)의 신비에 대한 고백이 이어집니다. 강생과 파스카 사이, 그러니까 3년간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활동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고백하지 않으며, 공생활 3년의 10배에 달하는 나자렛에서의 긴 시간들은 복음서조차도 우리에게 그 내용을 거의 전해주지 않습니다. 복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에서 생략하는 예수님의 시간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전체는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으로 인간의 모든 삶에 함께하셨던 시간들입니다. 부모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어린 아기의 시간, 부모에게 순종하는 평범한 한 아이의 시간, 마을의 평범한 청년으로 사람들과 어울린 시간, 목수라는 노동자의 시간부터 시작하여 가난한 이들, 병자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함께하셨던 시간, 반대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했던 논쟁의 시간,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우리의 모든 고통에 함께하시고 죽음까지도 함께 경험하신 모든 시간들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시간을 함께하고자 하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 곧 그분의 말씀과 행동, 침묵과 고통, 존재와 표현 방식 전부는 성부 하느님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그분이 지상에서 우리가 함께하였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들이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16항). 또한 그분의 전 생애는 바로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구속”의 신비입니다. 마구간 구유에 누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의 강생은 스스로 가난해지시어 그 가난으로 우리를 오히려 부요하게 하시는 것이었고, 그분의 숨겨진 유년기와 청년기는 순종으로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말씀은 듣는 이를 깨끗하게 정화하고 치유와 구마로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17항).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우리는 ‘총괄 실현’(recapitulatio)의 신비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심으로써 자신 안에서 인간 역사 전체를 총괄적으로 실현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로 인하여 그분의 강생 이전을 포함하여 세상 끝날까지의 모든 인류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인생의 온갖 단계를 거치셨습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혼인 장애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혼인이 하느님께서 정하신 제도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 말씀대로(마르 10,2-12; 마태 19,3-12; 루카 16,18 참조) 하느님에 의해 축복된 남녀의 결합에 대해 ‘단일성’(單一性)과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을 천명합니다. 단일성이란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의 결합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불가해소성이란 혼인의 유대가 배우자의 사망 이외에는 결코 나뉠 수 없다는 특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혼한 사실 자체로 영성체를 못하는 등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또한 이런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당사자 본인은 자신을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처럼 스스로 생각해 성당에 발길을 끊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입니다.
사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이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혼인의 불가해소적 특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법으로 이혼했더라도, 교회법으로는 혼인 유대가 그대로 남아 일종의 ‘장기 별거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기에 국가법으로 이혼한 신자라 하더라도 ‘재혼을 하지 않았다면’ 교회법적으로 신앙생활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신자가 혼인 성사를 한 후에 국가법으로 이혼하고 재혼하고자 할 경우에는 교회법원에 의뢰하여 이전 혼인에 대한 ‘혼인무효선언소송’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당 신부님에게 용기를 내어 직접 면담하시길 권고드립니다. 신부님은 신자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것입니다.
반대로, 신자가 혼인 성사를 하지 않고 (일반 예식장에서만) 혼인할 경우에는 혼인 장애가 생깁니다. 신앙생활에 제약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고해, 성체 등 성사의 제한). 교회법에 따르면, 모든 신자는 교회법적 혼인 형식을 준수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엔 본당 신부님에게 문의하여 교회법적 혼인 형식에 따라 하느님 앞에서 혼인 합의를 서약하시면 됩니다. 만일 이 신자가 이혼을 했고 재혼하지 않은 상태라면, 교회법적 혼인 장애에 더 이상 머물지 않기에 신앙생활에도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이후 재혼을 혼인 성사로 할 경우, 혼인 면담 과정에서 이전 혼인에 대해 ‘형식의 결여’로 신부님으로부터 혼인무효선언을 받고(교회법원을 통한 소송이 아님), 교회 안에서 새로운 혼인을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혼을 혼인 성사로 하지 않을 경우엔 다시 혼인 장애에 머물게 됩니다.
한편, 세례를 받지 않은 남녀가 사회혼(초혼)을 하고, 나중에 한 편이라도 세례를 받을 경우에는 세례 후 혼인 성사를 따로 거행하지 않습니다. 비신자 간의 혼인을 ‘자연혼인’이라고 하는데, 가톨릭교회는 이를 유효한 혼인이라고 인정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마음 안에 하느님 법(양심)을 품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자연혼인은 (두 당사자 모두) 세례를 받음으로써 혼인성사의 지위를 갖습니다.
[가톨릭 신학] 사랑과 자비라는 이름에 숨어
종종 사랑과 자비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우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감싸주고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식별이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랑과 자비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잘못이든 허용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하느님의 계명과 질서는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악을 저질러도 하느님이 알아서 용서해 주실 테니까요. 이것은 정말 커다란 악의 유혹입니다. 구체적인 판단을 그르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번식하고 더 강력해지는 경향이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65항)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이 사랑 가득한 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미움받는 세리 출신의 마태오를 제자로 받아들이셨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으며,(마태 9,9-13 참조) 간음한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 8,1-11 참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만은 아닙니다. 불의에는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셨는데, 성전 정화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요한 2,13-22 참조) 또한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자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진실을 왜곡하는 태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의 기준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는 이들은 스스럼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한편, 윤리적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한지요? 사랑과 자비라는 이름에 숨어 나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낙태, 동성애 행위, 부정부패와 같은 세상의 잘못을 용인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혹은 선악의 기준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요.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진리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들은 사라지고, … ‘편한 마음’이라는 기준에 그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일부 진리는 윤리적 판단의 주관적 사고에 적응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진리의 광채> 32항)
누군가는,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교회는 왜 여전히 보수적인 윤리를 고수하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 맞춰 변화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진리는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혹은 누군가가 잘못을 했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분명히 인지하고 성사를 통해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이 그를 따뜻한 사랑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의 삶은 반짝이는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9) 성모님을 알고 사랑해요
슬픔과 고통만큼 기쁨도 누리신 성모님
성모님을 알면 알수록 ‘인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합니다. 성모님은 화가 났을 때에도, 기가 막힌 일 앞에서도 바로 행동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성모님은 그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즉 인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기도 안에서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노력했다는 말입니다. 육체적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자 하셨으며,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심으로써 기쁨과 행복도 컸겠지만 고통과 슬픔도 크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이 겪으신 고통, 우리는 그것을 ‘성모칠고’라고 합니다.
성모 칠고(七苦) - 성모 마리아께서 겪으신 7가지 슬픔과 고통
1. 시메온의 예언으로 인한 고통.(아들 예수님은 반대받는 표적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성모님 마음은 칼에 찔리는 아픔을 느낄 것이란 예언)(루카 2,34-36)
2. 이집트 피난의 고통.(마태 2,13-21)
3.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음.(예루살렘 순례길에 소년 예수를 잃어버림으로 인한 고통)(루카 2,41-50)
4.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만남.(예수님께서 매 맞으시고 가시관 쓰심으로 인한 고통)(요한 19,17)
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한 고통.(요한 19,18-30)
6. 예수님 시신을 품에 안으심.(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심으로 인한 고통)(요한 19,39-40)
7. 예수님 시신을 장사 지내심.(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으로 인한 고통)(요한 19,40-42)
파스카 축제 기간을 맞아 성모님과 요셉은 예수님과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축제 기간 후 예루살렘 순례길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셨을 때 불안함으로 가슴은 요동치고 심장은 떨리며 머릿속은 하얗게 되고, 어디서 예수님을 찾아야 할지 불안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생각을 가다듬고 예루살렘 곳곳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3일 만에 예수님을 찾은 성모님은 치솟는 화를 인내하며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황당한 대답을 하십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성모님은 정말 당황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성모님의 고통은 또 얼마나 크셨을까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육체적 고통을 당하시는 동안 십자가 밑에서 이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볼 때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나갔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모님은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에 영적 죽음으로 동참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똑같이 못 박히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하셨습니다. 당신의 고통을 예수님 부활과 승리에 참여시키셨습니다. 성모님이 예수님과 함께하실 때엔 고통도 있었지만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성모 칠락(七樂)’이라고 합니다.
성모 칠락(七樂) - 성모 마리아의 일생에서 7가지 기쁨
1. 성모 영보(주님 탄생 예고 : 성모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으셨다)
2. 엘리사벳을 방문하심(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에 아드님 또한 복되시다)
3. 예수님 탄생하심
4. 예수님의 공현(공적으로 드러나심 : 예수 그리스도 탄생이 세상에 드러남)
5.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으심
6. 예수님께서 부활하심
7. 성모님 승천하심
우리가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위로받고 힘과 용기를 얻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을 희망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26)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사도신경을 바칠 때 우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앙 고백이기도 한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른 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음을 고백합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께서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로부터 참 인간으로 태어나셨음을 고백하는 이 신앙에서 마리아께 대한 교회의 믿음이 나옵니다. 마리아에 대한 4대 교리로 요약하기도 하는, 하느님의 어머니, 원죄 없으신 잉태(무염시태), 평생 동정, 승천(몽소승천) 교리와 같이 마리아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가 믿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87항).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우연히 어느 순간 갑자기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천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던 것이었으며 이 파견에서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인간의 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을 바라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88항).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고 세상에 태어나도록 준비하셨으며 이를 위해 한 인간 어머니를 미리 선택하셨습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마리아는 자유로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자신의 소명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도되어야 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이 마리아의 잉태 순간부터 이미 주어져 그분께서는 여느 인간들과는 달리 원죄에 물들지 않게 보호되셨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고백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91항).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는 우리가 늘 고백하는 대로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는 다른, 오직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잉태이며 남자를 알지 못한 동정녀의 몸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마리아가 동정으로 어머니가 되었다는 신앙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잉태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순간은 물론 평생토록 동정이었음을 고백하기에 이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99항).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한 언급을 들어 평생 동정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는 동정 마리아의 다른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마리아의 아들들(야고보와 요셉, 마태 13,55; 28,1)이거나, 구약성경의 표현 방식대로 가까운 친척을 일컫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성부께서는 다른 모든 창조된 인간들보다 더 온갖 영적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동방 교부들은 그래서 그분을 “온전히 거룩한 이”라고 불렀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떠한 죄도 범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죽음 이후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육신은 지상에 남아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게 되는 여느 인간과 달리 하늘로 불러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의 승천에 대한 믿음 또한 앞서 살펴본 마리아께 대한 교회의 믿음이 지닌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진 신앙 고백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을 낳으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에 하느님께서 잉태의 첫 순간부터 죽음 이후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리아께 대한 우리의 모든 믿음은 그분이 낳은 참 인간 예수께서 동시에 참 하느님이시라는 우리의 신앙에서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