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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같은 주의 청년
시편 110:1~7
이 시편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시입니다. 마태복음 22장 4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봅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 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묻는 자도 없더라”
여기 다윗은 그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주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했는데 ‘내 주’라는 말은 다윗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신 바요, 문법적으로 보아도 분명히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자적인 직능과 제사장의 직분과 왕의 직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네 원수로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완전히 정복하기까지를 말씀하는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를 의미합니다. 그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야 하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철저하게 복종시키고, 그의 은총과 통치에 복종하고, 우리의 예언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신 그를 높이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지배를 받고 배우며 영원토록 구원받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교회의 예언자요, 제사장이요, 왕 되신 그가 모든 대적하는 나라와 권세를 꺾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때까지 지배하게 되실 것입니다.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앉는 것은 휴식하는 자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수고하시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앉는 것은 다스리는 자세입니다. 그는 앉아서 법을 주시며 심판을 하십니다. 따라서 앉는 것은 체재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영원히 왕으로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은 그의 위엄과 지배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주어진 존귀이며 그에게 위임된 신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모든 은총과,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 드린 후 맨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고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훌륭한 사람의 이름으로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감사할 것밖에는 없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구할 수 있으니,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대적들은 그의 발등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귀의 세력을 꺾으시고 승리하십니다.
말라기 4장 3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는 “악인을 밟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당장,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원수들이 그의 사슬에 묶여 있지만 아직 그의 발등상이 된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2장 8절에 “지금 우리는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승리와 영광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원수들의 모든 세력과 사악함이 그의 나라에 아무런 방해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마침내 그의 모든 적들을 짓밟은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2절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여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하였습니다. 이것은 통치권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의 영과 진리의 통치가 온 천하에 퍼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고 유지되고 통치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땅 위에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평강의 주님께서 일마다 때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거룩한 산 시온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었을 뿐더러 그의 선조 다윗의 보좌를 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힘이 권능의 홀에 의해 나타나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지휘관의 지휘봉은 지휘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의 손의 지팡이, 홀은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로 있을 때 그녀의 민족 유대인 모두가 모함에 빠져 죽게 되자 하만의 모략을 왕에게 알려야 하나 왕이 부르지 않아(요사이 같으면 말도 안되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왕을 뵙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대민족을 몰살시킬 날짜가 다가오고 있을 때 모르드개의 격려로 에스더가 결단을 하였습니다. “내가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나갔습니다.
이때 왕이 보좌에서 홀을 들면 살지만 홀을 들지 아니하면 왕의 암살자로 간주되어 처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규례였습니다. 왕의 손에 들려 있는 홀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홀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주의 권능의 홀’이란 말은 주님의 영원한 복음을 의미하며, 거기에 수반되는 생명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말씀과 성령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시온으로부터 보내진 것입니다. 시온에서 성령을 주셨고, 복음의 전파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 만방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권능의 홀’ 어떤 사람은 이 주님의 권능의 홀이란 복음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암시하는 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돌보시는 자비를 암시하는 목자의 지팡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주님은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도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권능의 홀로 그의 양무리인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편 23편에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 아니함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들 중에서 하늘에 앉아 계십니다. 요한 계시록 5장 11절에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좌는 그를 신실하게 예배하는 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통치의 보좌는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원수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교회도 가시밭 가운데 핀 백합과도 같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습니다.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이 땅에 악의 세력과 죄악이 차 있다고 하여도 모든 악한 정책과 권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의 근거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 지위를 얻게 되는 영광에 이르게 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악의 세력에 의해서 어려움을 당하며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석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절대로 흔들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위대하며 진리는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신약 시대의 복음 운동의 전파를 예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주의 권능의 날’은 성령의 권능이 특별히 역사하시는 신약 시대를 통칭한 말씀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이란 ‘주가 오시는 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병사를 모으실 때 자원해서 참가한 수많은 지원자를 발견하실 것입니다. 주가 그들을 싸움에 이끌어 내었을 때 그들은 “어린 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계 14:4)입니다.
그리고 ‘주의 권능의 날’에 우리는 기쁨을 누립니다. 즐거이 헌신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기쁨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입을 옷은 거룩한 옷입니다. 성별된 옷입니다. 로마서 11장에는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고 다른 데서는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이나 생각이나 생활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14장 20절에는 “그 날에는 말 방울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다시 말해서 주의 권능의 날에는 만물이 다 거룩하게 하실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 중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22장 14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믿으려 함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절에 보면 “개들과(개처럼 산 사람을 가리킨 것일 것입니다)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거룩하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집니다. 거룩한 것은 하늘나라의 특성이고, 하나님 백성의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D. L. 무디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귀는 성결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결 위의 관을 씌워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68편 13절에 “거룩한 백성은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길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고 했습니다.
요한 일서 3장 2-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시편 24편에도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로다”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3절에도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군대의 제복입니다. 하늘의 군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주님을 따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주의 백성된 사람의 특성은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합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 봉사입니다. 말없이 기쁨으로 하는 헌신입니다. 왜 프란시스를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를 부인한 봉사, 즐거운 헌신을 하였습니다. 병자를 도와 주고, 밭에 김을 못 매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김을 매주고, 미처 추수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추수해 주고, 그저 자기를 부인하고 봉사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봉사입니다.
성 다미엔 신부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나병환자만을 수용하고 있는 하와이 섬에서 그는 자신이 나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즐거이 헌신했습니다. 슈바이처의 헌신봉사가 그렇습니다. 그는 모든 명예와 지위를 다 버리고서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봉사했습니다.
한번은 슈바이처 박사가 손수 나무를 자르고 벽돌을 날라가며 병원을 짓는데 어떤 아프리카의 청년 하나가 옆에 서서 구경을 하더랍니다. 하는 일이 없으니까 심심하면 와서 구경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슈바이처 박사는 그 청년에게 “특별히 하는 일 없으면 나를 도와서 이 일을 좀 할 수 없겠어요?” 했더니 그 청년 대답이 “나같이 공부를 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궂은 일을 합니까?” 하고 돌아서 가더랍니다.
세계적인 의사요, 학자요, 음악가인 슈바이처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는데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이 아프리카 청년은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요?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네 십자가를 지고 네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자신을 부인한 사람만이 따를 수 있는 길입니다. 헌신(獻身)이란 ‘바친 몸’이란 뜻입니다. 즐거운 마음 없이 ‘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헌신이나 봉사의 가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처럼 향기로운 기름에 파리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없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인색한 마음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 이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나 하는 것이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십일조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십일조가 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헌금은 사랑과 헌신의 척도라고 해도 될 줄 생각합니다. 따님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 따님이 시집을 갈 때 따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사주고 싶어서 평소에 남편에게 거짓말 한 번 못해보고 산 착한 부인도 제법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이것저것 살림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장만합니다. 사랑해서 그럽니다.
시편 116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이것은 “헌신하리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즐겨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여기 보면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아온다”고 했는데 주의 청년이란 말은 주의 군병이란 말과도 같습니다. 3절에 ‘주의 권능의 날’이란 말은 말하자면 주의 병사를 소집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군대에 응소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구령 운동은 영적인 전쟁이고, 우리 성도들은 그런 의미에서 이 전쟁에 응소된 군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원하는 군인을 원하십니다. 강제로 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강제로 할 때는 쉬운 일에도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 원하는 마음으로 하면 힘이 들어도 즐겁습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소명에 관한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청년들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의 소유된 청년들, 다시 말하면 주님에게 이미 바쳐진 청년들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 삼일기도회에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주님의 소유로 주님에게 바쳐진다고 할 것이면 이 사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4절에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군사가 된 사람은 주의 군사로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으려는 마음의 자세,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강하게 합니다.
세상에 가장 무섭고 힘이 있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가 어떻게 그처럼 힘이 있었습니까? 비록 적은 무리였지만 어떻게 저희들이 세상을 뒤집어 엎을 정도의 영향력을 끼쳤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따랐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 하나하나가 주님께서 원하시면 목숨까지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들어서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할 때 이 젊은이들이 새벽 이슬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도 뜻이 있습니다. 이슬은 사람이 모르는 동안 밤새 조용히 맺힙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를 통해서 모든 일을 조용히 행합니다. 이슬 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조용히 행해집니다.
성도를 세상의 빛이라고 했지요? 빛은 조용히 어두운 세상을 비칩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지요? 소리없이 아름다운 향기를 발해서 수십 리 밖의 봉첩을 끌어옵니다. 이렇게 성도는 말이 없으나 매력이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리없이 조용히 녹아질 때 맛을 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에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이슬이 조용히 내림같이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조용해야 합니다.
조용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받는 중에 힘을 얻습니다. 마음이 들 뜬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흥분한 사람 치고 성공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조용해야 무엇을 바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조용해야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내 의무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아야 그것을 똑바로 시행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벽 이슬은 메마른 초목을 적셔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메마른 땅과 같은 이 세상 사람들의 메마른 심령에 새로운 활력소가 됩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넘어졌다가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힘에 영향을 입어 새 힘을 얻게 되고,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새벽 이슬에 햇빛이 비칠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실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서 반사할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니엘 12장 3절 말씀을 보세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하시는 모든 일에 주님의 밝은 빛이 비쳐서 별과 같이, 새벽 이슬같이 빛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14장 5절 이하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이 되리라”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메시야의 비밀
(시 110:1-7)
찬송 390장
시편 110편은 시편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시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시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용하기까지 했던 유명한 메시야 예언시입니다.
메시야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왕을 가리키는데, 그 내용을 보면 1-3절은 왕으로 오실 메시야, 4절은 멜기세덱의 반치를 따라오신 제사장이시고 왕이신 메시야, 그리고 5절부터는 삼손을 비유로 하여 심판주로서의 메시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왔다 해서 멜기세덱을 신격화하는데 그는 어디까지나 예표일 뿐, 예수님만이 온전한 왕이시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통치가 바로 구원이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깨닫고 이 시간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과 환경과 우주까지도 다스려 주시도록 순종하고 간구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