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加德島) 가덕진(加德鎭營) 1.> 총3편 中
가덕진(加德鎭)과 천성만호진(天城萬戶鎭)은 현재 부산시 강서구 가덕도에 위치한 수군진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중종 30년 1535년 가덕도에 처음으로, 가덕진(加德鎭)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두었고, 그 후 조선중종 39년(1544년) 천성만호진(天城萬戶鎭)을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時 이순신 장군이 하루를 묵고 갔다고 전한다.
◯ 가덕도(加德島) 가덕진(加德鎭)
가덕진(加德鎭)은 조선 시대 가덕도에 왜구 방어를 위해 설치한 수군첨절제사영이다. 1535년 2월 1509년 웅천현감을 지낸 특진관 조윤손(曺閏孫)이 아뢰기를 "가덕도는 험하고도 가파른 매우 높은 산으로 암석이 깎아 세운 듯 우뚝 솟았으므로 배를 댈 수 없어 왜인들도 양장곶(羊場串)에 정박한 다음 들어와 웅거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이곳에 진을 설치하면 왜인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要衝)을 점거하는 것이니, 병력(兵力)이 부족하더라도 왜인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은 물론이고, 제포(薺浦) 등에는 진을 설치하여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하여 가덕진을 설치하게 된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제20권 중종조 30년 1535년 기사에는 “2월에 웅천에 가덕진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중종실록(中宗實錄)』 39년 1544년 갑진조에는 “가덕진을 설치하기 위해 좌찬성 이기(李芑)를 순변사(巡邊使)로 보내 진을 설치하는 형편 및 군량·군기(軍器) 등의 일을 감사 및 병사·수사와 함께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진관 체제(鎭管體制)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천성보(天城堡)와 가배량성(加背梁城)을 시설하고, 옥포의 지세포·조라포·안골포를 가덕 진관에 속하게 하였다. 『중종실록』 39년 1544년 갑진조에는 “가덕도는 진보(鎭堡)의 성터를 살펴 감독하여 쌓되, 전폐(全廢)한 진의 군사와 방어가 수월한 곳의 군사를 뽑아 옮겨 채워 주며, 가덕진에는 노비를 정하여 주도록 조처하였다”라고 하였다. 가덕 진관에는 종3품 무관인 첨사가 지휘관이며, 이곳에는 병선 2척, 사후선(伺候船) 4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함락되고 난 후 불타 폐허가 되니 안골포진성으로 옮겨가 있었다. 1656년(효종 7) 삼도 수군통제사 유혁연(柳爀然)의 요청으로 정비하여 다시 가덕도로 복귀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으로 가덕 진관을 혁파되었다.
1) 가덕 차운하여[次加德韻] ‘先’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경상도관찰사 순행.
一城能扼海東邊 한 성(城)이 우리나라 변방에서 굳게 지키고 있는데
金鼓無聲四十年 군대의 징과 북소리 없었는지 사십년이네.
鯨浪盡恬春日暖 큰 파도가 사라진 고요하고 따뜻한 봄날에
風煙還許白鷗眠 풍연(風煙)이 혹시 갈매기를 졸게 만드나.
[주] 풍연(風煙) : 멀리 보이는 공중에 서린 흐릿한 기운. 바람과 안개의 합칭이다.
2) 가덕운[加德韻] ‘先’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경상도관찰사 순행.
輕橈棹罷海雲邊 천천히 노를 저어 바다 구름 가에서 쉬는데
陳跡依然十一年 지난 십일 년 전이나 별반 다름없구나.
爲問白鷗能記我 갈매기에게 물어봐도 능히 나를 기억하니
春波須保舊時眠 봄 물결 속에 지난날 잠자던 때처럼 지켜주겠네.
3) 가덕도 바다에서 군미에 차운하여[加德海中 次君美韻] / 유경심(柳景深 1516~1571).
聽計從前笑刻舟 다른 사람의 계책을 따라 한 각주구검(刻舟求劍)에 웃으며
一年湖海作重遊 일 년 동안 호수와 바다를 거듭 떠돌아 다녔구나.
謀生却恨虗長筭 살 길을 찾으려다 도리어 한스럽고 앞날이 공허한데
報國其如闕近籌 나라를 위한다면 대궐에 가까이 가도록 꾀해야지.
孰把黃金求馬骨 누가 황금을 잡으려다 죽은 말의 뼈(買死馬骨)를 구하려 하리오.
空搔白首戀狐丘 부질없이 흰머리를 긁으며 호구지계(狐丘之誡)를 그리워하랴.
平生齟齬經綸學 경륜(經綸)을 배웠는데도 평생이 어긋났고
化作孫吳亦未孚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을 따랐는데도 또한 믿을 수 없구나.
[주] 언청계종(言聽計從) : 남의 인격(人格)이나 계책(計策)을 깊이 믿어서 그를 따라 하자는 대로 함
4) 김덕하 가덕도 감봉이 청어를 선물을 보내왔다.[贈金德河加德浦監封進靑魚] / 이학규(李學逵) 1805년[乙丑], 김해 유배 中.
海門十月有輕雷 10월 해문(海門)에 가벼운 천둥이 있어
魚信初隨汐信來 물고기를 믿고 처음 따라 왔다가 조수로 돌아오니
三石矴頭千幅罝 거듭 닻돌 머리에 천 폭의 그물을 치고
內洋齊下網船廻 내양에서 어망선이 동시에 선회한다.
飛鴈低鳴雲腳屯 기러기 날다 구름에 무리 이루어 약하게 우는데
蘆花風蕩水生鱗 갈대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물결에 비늘이 생기네.
瓜皮艇子輕如許 외 껍질 같은 거룻배가 저렇게 가벼우니
愁殺洋中守網人 해상에서 그물 치는 어부가 근심스럽구나.
海天霜曉亂鴐鵝 서리 내린 새벽, 바다 하늘에 들거위가 어지러이 날고
浦裏嘈嘈簇艑艖 크고 작은 거룻배가 모인 포구에선 떠들썩 떠들썩.
朝日半竿齊擧網 아침 해가 뜨니 장대로 그물을 한꺼번에 들어 올리는데
不知誰較得魚多 고기를 많이 잡았는지 누가 알 수 있으랴.
常時督責困肌膚 상시적으로 몹시 독촉하니 살가죽이 성치 않으니
此歲供新不待呼 올해 새로운 공출을 언급하지도 마시라.
至日正當光玉食 정당한 지일(至日)날 맛있는 음식을
紫笭箵進錦廜㢝 자줏빛 종다래끼에 담아 아름다운 암자에 오르네.
供了長魚便不憂 장어 공출이 끝나니 근심이 사라져 편한데
飛觴正對蟹鰲秋 가을철 게 조게를 바로 마주하니 잔이 날아든다.
熊州兒女顔如蕣 웅천 고을의 여아는 무궁화 같은 얼굴로
若個當壚破客愁 술청에서 약간의 술을 팔아 나그네 근심을 풀어주네.
5) 가덕도 최두극이 병을 치료하는 의사를 찾기에 기증하다.[寄贈崔斗極加德浦尋醫治疾] / 이학규(李學逵) [丁卯] 1807년, 김해 유배 中.
四月熊神浦 4월 웅천 포구에서
三朝往復勞 여러 번 왕복하는 수고를 했다.
神方上池水 신통한 처방 상지수(上池水),
壯觀廣陵濤 큰 파도(廣陵濤)가 장관이로세.
天雨道泥溼 내린 비에 길이 진창이 되어도
雉鳴田麥高 꿩이 우는 보리밭이 고상하네.
飜思行藥日 다시 생각해 단오 날에 가려다가
白幘步江皋 민머리로 강변을 산보한다.
[주] 상지수(上池水) : 상지수는 대(竹)잎의 이슬을 말하는데, 장상군(長桑君)이 편작에게 약을 주면서 상지수로 먹게 하자 편작이 그 약을 30일 동안 먹자 의술이 통했다한다.
<가덕도(加德島) 천성만호진(天城萬戶鎭) 2.> 총3편 中
◯ 가덕도(加德島) 천성진(天城鎭)
예로부터 가덕도 부근은 대마도에서 부산·진해 쪽으로 진입하는 바다의 요충지였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이후 이곳에 진영(鎭營)을 설치하고 군사를 두어 지키자는 논의가 있다가, 1544년(중종 39)에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방어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때 바다 쪽으로 돌덩이를 채워 병선(兵船)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진보(鎭堡)를 세우고 수군(水軍)을 주둔시켰다. 처음에는 가덕진 소속이었으나 천성진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중기 이황(李滉)이 말하길, “천성은 끊어진 바다 섬에 쌓았는데 중종 갑진년 1544년 웅천 고을 바다, 가덕도에 설치했다. 천성 등 진영은 김해와 웅천 땅과 접해 있다.(天城截海築 案中宗甲辰 於熊川海中 設加德 天城等鎭 金海與熊接壤)”고 했다. 또한 1605년경 최립(崔岦 1539∼1612)의 <천성진(天城鎭) 정원루(定遠樓) 기문[天城鎭定遠樓記]>에 따르면, “1546년(명종1) 연간에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의 사문(斯文) 권연[權(王燕)]이 당시 만호(萬戶)였던 장군(將軍) 최수인(崔守仁)을 위해 써 준 기문(記文)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하였고, 또한 “1546년 만호(萬戶)였던 장군(將軍) 최수인(崔守仁)이 처음으로 이 요새지를 개척하였고, 천성진의 누각 정원루(定遠樓) 역시 그의 손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1714년 홍세태(洪世泰 1653~1725)가 지은 <천성 정원관 기문[天城定遠舘記]>에 의하면,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정원루를 재건하면서 객관과 누각을 함께 정원관(定遠舘)으로 중수한 이는 1605년경 만호(萬戶)였던 박경신(朴慶新)이라 적고 있다.
천성진성(天城鎭城) 서·북쪽에는 옹성이 설치된 문이 있고, 동쪽에는 문이 없이 성벽을 이중으로 쌓았다. 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인 지점에 성벽 바깥으로 네모꼴의 치성(雉城)을 두어 방어력을 높였고 성벽 외곽으로 해자(垓字)를 둘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규모는 적은 편이나 조선 중기 성의 축성양식을 알 수 있다. 1989년 3월 10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성벽 둘레 약 960m, 폭 4.5m, 높이 3.5m로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1613번지에 있다.
1) 천성의 시에 차운하다 3수[次天城韻 三首] / 기대승(奇大升 1527∼1572)
名山踏遍路高低 높고 낮은 길을 따라 명산을 유람하며 更向危橋俯碧溪 아슬한 다리에서 또 푸른 물 굽어보네. 仙客不淹雲鎖壑 구름 덮인 골짝에 선객은 간 곳 없고 丹崖唯見鶴來棲 붉은 벼랑에는 학이 날아와 깃드누나. 壑蟠崖矗拱奇峯 서린 골짝 첩첩 벼랑 기이한 봉우리 끼었고 怒瀑中豗爽吐風 성낸 폭포 소리 서늘한 바람 일으킨다. 惆悵羽人難邂逅 섭섭하여라 신선은 만나지 못하고 只憑孤鶴望層空 외로운 학을 따라 층공만 바라보네. 攀石穿林路屈盤 돌 잡고 숲 뚫으며 구불구불 올라가니 忽逢危構碧雲間 우뚝한 집 구름 속에 홀연 나타나네. 天風吹散銀河水 하늘 바람 은하수에 불어오니 神想飄然出九寰 정신과 생각 훌훌 진세를 벗어나네.
2) 천성 ‘정원루’ 차운하여[次天城定遠樓] / 황준량(黃俊良 1517∼1563)
一朶蓮峯揷半空 한 줄기 연봉(蓮峯)이 반공에 솟아있고
倚山開堞鎭威風 산에 의지한 성가퀴가 위풍 있게 둘러있네.
斑衣小醜何勞問 얼룩한 옷의 미천한 무리에게 어떤 노고를 물으랴
已入朝家妙算中 조정에 들어가기 위한 교묘한 타산일 뿐.
가덕진영을 설치하는 것은 백성에게 이롭고 심히 중요하다.(加德設鎭 民利甚重)
鯨波不動皷無聲 고래 물결은 동하지 아니하고 북소리는 들리질 않는데
玉塞樓高倚月明 관문의 누각은 드높아 밝은 달빛에 의지하네.
唯有客愁春永洗 오직 봄날의 나그네 수심을 영원히 씻으려고
擬將北斗酌東溟 북두국자로 동쪽 바닷물을 술잔에 따르리라.
怪雨腥風撼海寒 괴상한 비와 비린 바람이 차가운 바다를 뒤흔드니
孤颿出沒怒濤間 외로운 돛단배가 성난 파도 사이에서 출몰하누나.
人間踏地皆生險 인간이 다니는 곳은 모두 험난한 일이 생기지만
半日危途鬢欲斑 한나절 위험한 여정에 귀밑털이 희끗희끗하네.
바다를 건너는 것은 극히 험하다.(海渡極險)
3) 천성 차운하여[次天城韻] ‘庚’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경상도관찰사 순행.
萬里層波一片城 만 리 층층 물결 속에 한 조각 성(城)에
悠然海月照幽情 유연히 바다 위에 뜬 달이 그윽한 정(情)을 비추네.
邊聲四起仍無寐 사면에서 나는 변방의 소리에 잠 못 이루는데
接響村鷄殺五更 시골 닭이 이른 새벽에 메아리를 알고 울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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